12회

온천장

마라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새벽 다섯시였다. 수레는 침대에 누운 채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을 쳐다봤다. 잠은 이미 두 시간 전에 깼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큰 배가 떠나가는지 항구에서 기적이 울렸다. 어제는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밀수단속반을 찾아갔지만 물개아줌마의 면회조차 할 수 없었다. 예전에 알던 고위 관계자들 몇 명과 접촉을 하려고 했는데 그들은 수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단속반 반장이라는 놈은 떡값을 이십만원이나 처먹고도 검경 합동조사반이 따로 조사를 하고 있어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만 늘어놨다. 미꾸라지처럼 먹이를 먹을 때만 쏙 들어오고 일을 해야 할 땐 손에서 잘도 빠져나가는 얄미운 놈이었다.

하루종일 발을 동동 굴리며 수레가 알게 된 싸늘하고 명징한 진실은 자신이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아무것도 아닌 풋내기라는 것이었다. 예전에 할머니 혹은 구들 영감 대신 고위공무원을 만나러 갈 때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호의적이었다. 그저 말 몇 마디 하고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고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모든 일은 거짓말처럼 간단히 해결되었다. 함경도 시절, 금의 가문의 상속자로서 대접받던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귀한 대접들은 수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호의는 좋은 가문이나 힘있는 권력의 옆자리에서, 혹은 잠시 지갑에 들어 있는 두둑한 현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현금이 사라지고, 자리가 사라지면 대접도 사라진다. 실제 수레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몸뚱이뿐이었다. 반짝거린다고 해서 개똥벌레가 불꽃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공짜 대접을 받아와서 자기가 개똥벌레였다는 걸 잊고 있었다.

 

최성국의 시신이 떠오르자 문촌장은 어딘가로 몸을 숨겼다. 동키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동굴 같은 데 처박혀서 상황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양동과 칭따오는 최성국 사장의 죽음에 깜짝 놀라 얌전히 늙은 사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역시 아직은 사방에 하이에나들이 돌아다니는 이 살벌한 사바나에서 독립할 때가 아니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만리장의 손영감이나 중앙동 화교 주왈승 같은 늙은 사자들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다. 수레에게 도움을 줘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때맞춰 이런 사고가 터져 자기들 아래 젊은 사자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그것도 공짜로 줄 수 있었으니 참 근사한 일이라고 천달호에게 고마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제시장에는 보초라는 직업이 있다. 사방이 다 보이는 네거리에서 동그란 플라스틱 의자를 깔고앉아 하릴없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보초다. 보초는 미어캣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다가 미군 헌병이나 단속반, 사복경찰이 출현하면 시장 사람들에게 즉시 경고하는 일을 한다. 보초가 신호를 보내면 상인들은 물건을 숨기고, 셔터를 내리고, 창고를 잠그고 그마저 안 된다면 옷 속에 보석이나 시계 같은 것들을 마구 쑤셔넣고 도망을 쳤다. 보초가 딴짓을 하다가, 혹은 꾸벅꾸벅 졸다가 단속반이나 사복경찰을 놓치면 그 거리의 모든 물건들이 압수를 당했다. 국제시장의 상인들에게 그 물건들은 전 재산이며 목숨과 같다. 게다가 그런 경우 벌금도 물어야 했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적진 한복판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과 비슷했다. 보초병이 졸면 부대는 적에게 몰살당한다. 그래서 국제시장의 보초는 건달을 쓰지 않는다. 건달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보초로는 예민하고, 눈치 빠르고, 총명하고,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인물을 세웠다.

수레가 최성국 사장을 만난 곳은 천달호가 관리하는 케네디 골목이었다. 그곳의 보초는 천달호의 조직원이 아닌 깡이라는 상이용사였다. 깡이는 전쟁중에 박격포 포탄에 맞아서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케네디 골목 네거리에서 외다리로 선 채 보초를 섰다. 목발도 없이 깡충깡충 잘도 방향을 바꾸는 사람이었다. 깡이가 천달호에게 정보를 팔았을 것이다. 보초 가까이에는 신속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공중전화가 있거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점포가 있었다. 케네디 골목 보초의 전화기는 심가의 도장집이었다. 그러니 생기기로는 영원히 입을 굳건히 다물 것처럼 과묵한 심가도 천달호에게 비밀을 팔았을 것이다. 최소한 깡이가 보고하는 것을 옆에서 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것을 배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잘 모르겠다. 깡이는 그게 누군가를 죽게 만들 정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벼운 용돈벌이 정도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가 사람을 살리고 또 정보가 사람을 죽인다. 어젯밤에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깡이는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는 않았다. 다만 목발도 없이 잘도 방향을 바꾸던 하나밖에 없는 다리가 마저 부러졌고, 갈비뼈가 몇 개 나갔고, 이가 몇 개 빠졌고, 광대뼈가 내려앉았을 뿐이다. 누가 그랬을까? 명동 사채에서 보낸 사람들일 수도 있고, 문촌장이 그랬을 수도 있고, 칭따오가 했을 수도 있고, 양동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이제 천달호에겐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

 

보초는 항상 네거리에 있다. 보초가 네거리의 중앙에 있는 것은 사방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세계에서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고 사방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늘 쥐고 있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고 사업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보를 놓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들어온 정보를 제대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흘려보낼 수 없다면 그저 입을 꾹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보초의 월급은 시장 상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에서 나왔다. 하지만 월급은 뻔하고 생활은 답답하다. 그래서 보초들은 다방이나 술집을 살피며 누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이들이 모여서 작당을 하는지 따위의 정보들을 천달호, 백상사, 주왈승, 손영감 같은 배후 실력자들에게 팔았다. 이따금은 밀수단속반에게도, 형사들에게도 정보를 팔았다. 어젯밤에 수레가 병원을 찾았을 때 깡이는 온몸에 붕대를 두른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수레가 누구에게 정보를 팔았는지 물었다. 광대뼈가 내려앉아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깡이의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했다. 수레가 주머니에서 제법 많은 돈을 꺼내 흔들었다. 아마 깡이의 일 년치 봉급은 되었을 것이다. 수레는 그저 천달호에게 전화를 넣었는지 눈만 한번 깜빡거리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겁 많은 미어캣은 이제야 뼈아픈 교훈을 얻었는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깡이로선 잘한 일이다. 입을 열었다면 이번에 푼돈을 쥐고 다음엔 천달호에게 죽었을 것이다. 천달호는 해야 하는 일을 결코 빠트리는 법이 없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최성국이 죽은 것이다.

 

*

 

수레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물개여관 앞 보도블록에서 이층까지 올라와 고개를 숙인 가로등 불빛이 더러운 천장 벽지를 비추고 있었다. 벽지는 연꽃 안에 다시 연꽃이 들어 있고 그 안에 다시 수없이 작은 연꽃이 어지럽게 들어 있는 문양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연꽃 수백 개가 모여 하나의 중간 연꽃이 되고 중간 연꽃 수백 개가 모여 다시 하나의 큰 연꽃이 되었다. 멀리서 보면 점처럼 작은 연꽃들이 모여 선이 되고, 선들이 모여서 꽃잎이 되고, 또 꽃잎들이 모여 천장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연꽃이 된다. 마치 수레의 어리석음이 무한히 반복되듯이 이 아름다운 꽃들도 무한히 반복된다. 가장 큰 연꽃에서 가장 작은 연꽃으로 내려오건 가장 작은 연꽃에서 가장 큰 연꽃으로 올라가건 이 단순한 반복은 동일하다. 단순하고 고요한 것들의 무한한 반복. 이 우주를 이루는 것들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엔 어떠한 신비도, 지름길도, 한방에 삶을 뒤집는 비밀도 없다.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성실한 무한 반복과 그것을 지켜보는 고요하고 정직한 눈이 있을 뿐이다. 이 프랙털이, 단순하고 고요한 것들의 무한 반복이, 이토록 복잡하고 신비로운 우주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무릇 위로 올라가려는 자는 먼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려는 자는 먼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개똥벌레인지 불꽃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수레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더플백을 꺼내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들을 쓸어담았다. 화장대와 욕실에 있는 물건들도 집어넣었다. 벽에 걸려 있는 옷가지 몇 개도 쑤셔넣었다. 수레는 더 넣을 것이 있는지 바닥, 테이블, 화장대를 살폈다. 이제 더 챙겨넣을 것은 없는 듯했다. 천달호에게 받은 이천만원은 동키의 금고에 넣어뒀다. 그러니 이 여관에 처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짐은 더플백 하나가 전부였다. 들고 들어왔던 양주 몇 병은 다 마셨고, 담배도 다 피웠다. 마라와 물개아줌마에게 선물도 줬다. 더플백은 더 가벼워졌을 것이다. 수레는 벽에 걸린 외투를 입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봄이 왔는데 새벽바람은 여전히 겨울 같았다.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할 때 침대에서 마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배 피우지 마. 연기 안으로 들어와.”

마라는 베개에 얼굴을 옆으로 벤 채 수레를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깬 얼굴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수레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수레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담뱃갑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잠이 안 와?” 마라가 물었다.

그냥 일찍 깬 거야.”

섹스할래? 그럼 좀더 잘 수 있을 건데.”

나가려고 옷 다 입었잖아.”

옷이야 벗으면 되지.”

너는 무슨 섹스를 수면제 대용으로 하냐. 섹스는 진실한 사랑의 힘으로 하는 거지.”

섹스에 그런 좋은 부가기능도 있으니 참고하라는 거지. 섹스를 해, 그리고 샤워를 해. 그러면 저절로 잠이 와.”

그러면 저절로 잠이 와?”

더이상 할 게 없으니까.”

마라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짐은 왜 챙겨. 어디 멀리 도망이라도 가는 거야?”

온천장 가는 거야. 한동안 못 들어올 거야.”

이번에도 한 오 년 도망갔다가 돌아오는 거야?”

온천장 며칠 다녀오겠다는데 뭔 뚱딴지같이 도망 타령이냐.”

전에도 서울에 잠시 갔다온다고 해놓곤 월남에 갔잖아.”

그건 남산에 잡혀가서 그렇게 된 거고. 그때 나 죽도록 두들겨 맞았어. 그러니까 월남에 자원해서 간 게 아니라 끌려간 거지.”

월남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배 타고 나갔잖아. 무슨 담배 한 갑 사러 나가는 것처럼 휙 나가더니 삼 년 만에 돌아왔잖아.”

담배 한 갑 사러 나갔는데 인생에 폭풍이 칠 때도 있더라.”

이번에도 나갔다가 일 년 만에 돌아오거나 삼 년 만에 돌아오면 그땐 여기에 마라는 없을 거야.”

마라는 짐짓 비장한 얼굴이었다. 수레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참 이상한 시비를 거네. 내가 왜 안 돌아올 것 같은데?”

오빠는 압박이 밀려오면 다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타입의 인간이잖아. 그리고 그걸 스스로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비겁한 사람이고.”

마라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수레는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화가 난다기보다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내가 비겁을 낭만으로 착각해서 이렇게 편하게 살았구나.” 수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다른 사람은 오빠처럼 비겁할 수가 없어. 다들 삶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비겁할 시간이 없거든.”

그런데 너는 쫄보에다 비겁한 내가 뭐가 좋다고 여기 이러고 앉아 있냐?”

나는 팍팍하게 정직한 인간들보다 비겁하게 낭만적인 사람들이 좋아. 이상하게 나는 정직한 사람들과는 연애 감정이 안 생겨. 흥분도 안 되고. 너무 열심히 살다보니 섹스 할 힘이 떨어져서 그런가? 그러니까 오빠는 딱 내 취향이지. 쫄보에, 비겁하고, 낭만적이니까.”

하여간에, 취향 참 부도덕하네.”

창밖에서 부는 바람이 추운지 마라가 이불을 더 끌어당겨 어깨를 싸맸다.

우리 엄마 빼내는 일이 생각보다 심각해? 오빠가 온천장에 안 기어들어가면 우리를 엄마 못 빼낼 만큼?”

수레가 마라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상한 여자다. 이 여자는 똑똑한 머리로 아주 맹한 얼굴을 하고 산다.

나라는 인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없더라. 훨씬 더 멍청하고.”

그래서 실망했어?”

실망이라기보다 반성을 좀 했지.”

우리 엄마 못 빼내도 이번에는 도망 같은 거 가지 마. 내가 보기에 오빠는 좀 더럽게 사는 걸 배워야 할 것 같아. 치사 떨고, 욕 처먹고, 배신하고, 얻어맞으면서도 잘 사는 법을 배워봐. 사람 성격은 안 변하니까 되지도 않게 용감해질 생각하지 말라고. 도망갈 생각도 하지 말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도 못 가면,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치사하게, 비겁하게 버티는 법을 배우라고.”

너한테 인생 사는 법을 좀 배워야겠구나. 너는 맨날 치사 떨고, 혼자서 욕 다 처먹어도 나날이 예뻐지기만 하잖아.”

기분이 좋은지 마라가 크게 웃었다. 마라는 입이 컸다. 아귀처럼 입이 커서 밥도 많이 먹었고 술도 많이 마셨다. 웃음도 많이 먹었고 슬픔도 많이 먹었다. 입이 커서 남들보다 더 크게 울었고 또 크게 웃었다. 하지만 마라의 입은 구멍만 컸지 거기에 욕심은 없었다. 아무 욕심 없이 텅 빈 마라의 큰 입이 수레는 좋았다.

 “물개아줌마는 곧 나올 거야. 정말 별일 아냐, 괜히 오버하지 마. 할머니한테 인사드리고 귀여움도 좀 떨고, 뭐 그러면 돼.”

온천장에 큰 요정이 있다며?”

, 목욕탕인데 그 안에 요정도 있고, 큰 식당도 있고, 심지어 공연하고 영화도 보는 극장도 있어. 웃기지?”

거기 예쁜 여자들이 아주 많다면서?”

혹시 너 그거 걱정하고 있는 거야? 내가 예쁜 여자들한테 마음 빼앗길까봐?”

솔직히 조금 신경이 쓰이네. 거긴 한국에서 제일 예쁜 언니들만 모인 곳이라던데.”

하이고, 거기에 니가 언니라고 부를 만한 늙은 여자는 하나도 없네요.”

좋겠네. 젊고 예쁜 여자들이 잔뜩 있는 곳으로 가서.”

내가 배를 탔잖아. 지구의 저 북쪽이랑 저 남쪽에 가봤거든? 태평양의 동쪽과 서쪽도 가봤거든?”

그런데?”

그런데 지구를 한 바퀴 돌아봐도 이 세상에 너처럼 예쁜 여자는 없더라. 있을 줄 알았는데 없더라.”

진짜로?”

그럼 진짜지.”

마라가 수레의 말에 입을 크게 벌리고 환하게 웃었다. 하여간에 이 여자는, 그걸 말이라고 믿고 앉아 있다. 분위기를 탄 김에 수레가 화장대 서랍을 열어 침대 위에 팬티를 툭 던졌다. 마라가 눈이 동그래져서 팬티를 집어 들었다.

그깟 팬티 하나가 니 은행 월급 두 달치나 하더라. 동키가 홍콩을 통해서 정말 아주아주 어렵게 구한 거다. 이태리제도 괜찮은데 역시 란제리는 프랑스제라나 뭐라나.”

마라의 큰 입이 더 크게 찢어졌다. 마라가 팬티 이곳저곳을 만져보고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이리저리 끼워봤다. “서양 애들은 엉덩이도 크던데 이렇게 작은 팬티를 입네민망한지 혼자 중얼거리며 형광등에 비춰보기도 했다.

오빠야, 그럼 이거를 내가, 오빠가 나에게 보내는 절실한 화해와 간절한 사랑의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나?”

? 절실한 화해와 간절한 사랑은 다음에 하면 안 되겠나?”

왜 다음인데?”

그거 남양 19호 선장 거다. 동키가 목요일까지 입고 돌려달라고 하더라. 사례비는 나중에 따로 꼭 챙겨준다고.”

농담이제?”

농담 아니다.”

내 성질 뻔히 알면서 오빠가 일부러 이럴 리는 없고. 나한테 사랑 고백을 하려니까 민망해서 농담하는 거제?”

진짜 농담 아니다. 남양19호 금요일 오전 열한시 출발이다.”

마라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수레는 마라의 분노가 배꼽 아래서부터 서서히 끓어올라 얼굴까지 붉게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가 나서 얼굴이 슬슬 붉어지는 마라의 모습은 언제 봐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마라가 베개를 집어 수레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끄지라. 이 시궁창 같은 새끼야.”

 

*

 

수레가 온천장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시가 다 되어 있었다. 이 익숙한 도시를 마치 낯선 여행지에 온 것처럼 헤매고 헤매서 도착한 셈이었다. 원래는 전차를 타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에 갔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전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전차역 귀퉁이에는 1968년을 마지막으로 운행을 중지한다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수레는 영도 전차 종점에서 운동장으로, 운동장에서 다시 온천장으로 가는 그 느린 전차들을 좋아했다. 어릴 적엔 혼자 온천장에서 전차를 타고 영도로 와 동키와 마라와 놀았다. 저녁이 되면 전차를 타고 다시 온천장으로 돌아갔다. 영도에는 종점이 있어서 언제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부산은 말투도, 사람들도, 심지어 리어카나 자전거도 미친듯이 바쁘게 움직여대는 성질 급한 도시였다. 수레는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늘 백 도씨의 냄비 속 같은 이 뜨겁고 복잡한 도시를 구경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오 년 만에 돌아오니 전차는 사라져버렸다. 좋아하는 것들은 늘 느닷없이 사라진다.

버스를 잘못 타서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래서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꽤나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부산 시내에는 수레가 떠나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차들이 있었다. 물동량이 늘어났는지 항구 쪽으로 들어가는 화물차들이 꽉 막힌 도로 위를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었다. 저 엄청난 차들 때문에 수레가 사랑한 전차를 없애야 했을 것이다. 낡고, 둔하고, 느리고, 덩치만 큰 것들의 운명은 늘 그렇다.

 

*

 

할머니는 온천 매표소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수레가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온천 입구에 서서 할머니를 바라봤다. 손님이 들어오면 할머니는 옷장 열쇠와 타월 두 개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자주 찾아주세요.” 할머니가 상냥하게 말했다. 수레가 떠나기 전에도 할머니는 매표소에 앉아 직접 손님을 받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시장 상인들처럼 목욕탕에 들어가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돈을 받고 잔돈을 건네주는 모습은 늘 어색했다. 할머니는 임금의 스승을 세 명이나 배출한 명문가의 딸이었다. 그런 대단한 가문의 딸이 어쩌다가 함경도 골짜기에 있는 고리대금업자 집안으로, 할머니 말에 따르면 돈밖에 모르는 도둑놈들과 내시와 천한 백정과 상것들만 가득한 이 집안으로 시집을 왔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 금의 가문에 큰 빚을 졌을 것이다.

서울에서 함경도 산골짜기로 이사를 온 양반 가문은 대부분 유배를 온 사람들이었다. 역적으로 몰리거나, 천주교를 믿다가 벌을 받거나, 임금에게 충언을 하겠다고 쓴소리를 하다가 미움을 받거나, 하여간에 기분좋게 함경도 산골까지 오는 양반 집안은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양반들은 평민들보다 훨씬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다. 공자와 맹자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그 거친 함경도 산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거친 북방은 짐승을 사냥하고 도축하고 가죽을 벗기고 말리는 일이 주를 이루는 백정들의 땅이었다. 하지만 양반들은 굶어죽어도 짐승의 피는 만지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수레의 외가도 그런 집안이었으나 빚에는 장사가 없다. 그래서 외증조 할아버지는 짐승의 목을 따고 가죽을 벗기는 대신 딸을 함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고리대금업자에게 팔았다. 금광 광부들과 마적과 내시와 역관과 깡패와 칼잡이만 가득한 이 집안에 말이다. 어쩌면 인자한 얼굴 뒤에 가려져 있는 할머니의 싸늘하고 집요한 복수심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고 수레는 종종 생각했다.

할머니는 바느질을 하다가 습관적으로 바늘귀를 정수리에 문질렀다. 저것은 대체 뭘 하는 동작인지 어릴 때도 궁금했고 지금도 궁금했다. 하지만 어릴 때도 묻지 않았고 지금도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마당에는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큰 바위들이 있었고 그 주위로 할머니가 이미 있던 벚나무를 굳이 뽑아내고 다시 심어놓은 매화나무들이 있었다. 매화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다. 매화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함경도 금광에 있을 때도 할머니의 안채에는 매화나무가 많았다. “할머니는 왜 매화가 좋아요?” 어린 날의 수레는 물었다. “매화는 자존심이 있는 꽃이거든. 매화는 선비들의 꽃이지. 퇴계 선생의 꿈은 매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단다.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도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지 않니.” 할머니는 말했다.

 

해방 전 이 온천엔 주로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나 조선에서 방귀 좀 뀐다는 고관대작들만 드나들었다. 초량, 대신동, 충무동 같은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그들은 전차를 타고 온천장에 왔었다. 전찻삯은 식민지 시절을 사는 조선인이 타기에 터무니없이 비쌌다. 온천 요금은 전찻삯보다 수십 갑절은 더 비쌌다. 이 온천 안에 요정이 있었고 고급 식당이 있었고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광대가 공연을 하는 극장도 있었다. 경찰 간부들이, 총독부 사람들이, 온갖 친일파들이 온천에 들끓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일본 황실 사람들이 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여관에 머물렀다. 해방 전 할아버지는 총독부 사람들이나 일본 은행가들을 만나러 종종 온천에 왔었다. 원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오는 뱃길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래도 말과 기차를 번갈아 타며 육지로 오는 것보단 편하고 빨랐다. 그때 온천의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1944년 가을에 할아버지는 이 온천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시세의 두 배를 주고 인수했다. 사람들은 하다 하다 이제 별 돈지랄을 다 한다고 수군거렸다. 일 년도 채 지나기 전에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했고 느닷없이 광복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본토로 돌아가자 온천은 똥값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할아버지가 생전에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이 온천이 없었다면 할머니가 금광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을 때 기댈 곳 하나 없이 막막했을 것이다.

 

*

 

수레가 매화나무들을 지나쳐 매표소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가 바늘에 시선을 박고 있다가 얼굴을 들어올렸다. 할머니는 오 년 만에 만난 손자의 얼굴이 어색한지 눈을 두 번 끔뻑거렸다. 그러고는 웃었다.

우리 수레 왔구나.”

수레가 가서 말없이 할머니를 안았다.

들어온 지가 보름은 되었다면서 왜 이제사 왔는고. 할매가 속 타게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

기다리다 만나면 더 반갑잖아요. 오래 기다리면 더 반갑고.”

기다리다 만나면 반가운데 기다리고 기다리면 미워지지.”

그러면 곤란한데. 작전 미스인데.”

수레가 웃었다. 할머니도 웃었다.

밥은 먹었어? 밥 차리라고 할까?”

오다가 국수 한 그릇 먹었어요.”

밥 줄까?’가 아니라밥 차리라고 할까?’였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런 말투였다. 할머니는 요리를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 가문의 어른들이 며느리의 솜씨를 보겠다고 밥상을 차리라고 했다. 그리고 가문의 어른들은 할머니가 차린 그 초라하고 엉성한 밥상을 보고 모두 웃었다고 했다. “젓가락을 들었는데 딱히 갈 곳이 없더라니깐.” 어른들은 농담을 해댔다. 그 이야기가 아주 오랫동안 술자리마다 단골 우스개로 떠돌았다. 할머니는 몰락한 양반 집안의 딸이었고 너무 가난해서 금의 가문에서 먹는 값비싼 요리 재료들을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요리 따윈 하지 않았다. 다행히 할머니가 부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 주방에는 요리사가 많았다.

이제 완전히 들어온 거야?”

.”

장돌뱅이처럼 떠돌아다니는 것도 그만할 거고?”

.”

그럼 됐다. 일단 뜨거운 물에 몸부터 씻어라. 옷도 좀 갈아입고.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는구나.”

수레가 자기 외투 가슴팍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봤다.

제 몸에서 냄새가 나요?”

무슨 행려병자 같은 냄새가 난다. 그래도 명색이 온천업을 하는 사람인데 몸에서 그런 냄새가 나면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대겠니.”

수레가 다시 한번 외투 안쪽과 바깥쪽의 냄새를 맡아봤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걸까? 마라도, 동키도, 물개아줌마도 그 누구도 수레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냄새가 좀 나기로서니 할머니는 기껏 돌아온 손주에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이 고작 냄새난다는 말이었을까.

, 어서 씻고,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한숨 푹 자.”

할머니가 재촉을 했다. 수레가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가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손수건에 수를 놓고 있는 것이다. 공작이나 봉황이나 개구리나 국화 같은 무의미한 문양들, 그런 것들을 하염없이 새기는 것이다. 수레가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자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뭐 할매에게 더 할말이 있니?”

어제 새벽에 물개아줌마가 잡혀갔어요. 빨리 손을 써야 할 것 같아서요. 검찰에 넘어가면 상황이 좀 복잡해져서, 그러니까―”

들었다.” 할머니가 다시 바늘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들었어요?”

이번엔 제대로 걸렸다더구나.”

마치 신문 사회면에 나온 기사 얘기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뭐?”

그래서 물개아줌마 안 빼내냐고요.”

글쎄, 뭐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빼내려면 구워삶아야 할 사람도 많고 돈도 많이 들고 이번엔 무척 힘들 거라고 하더라.”

물개아줌마는 할머니 사람이잖아요.”

내 사람이었지. 지금은 오다가다 인사나 하는 사이고. 이제 명절이 와도 그 흔한 멸치 한 박스 보내지 않더구나.”

가슴이 답답해서인지 갈비뼈가 크게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거 내 물건이에요.”

무엇이?”

물개아줌마 창고에 있던 물건. 그 물건 때문에 잡혀간 거에요.”

너한테 그런 물건이 왜 있는 건데.”

마루야마 처리하고 받은 물건입니다. 좀 비싸게 팔려고 물개아줌마 창고에 넣어둔 거죠.”

마루야마 이야기가 나오자 할머니 미간이 꿈틀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것저것 재빨리 셈을 해야 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동작을 멈추고 허공의 한 점을 가만히 응시했다.

걱정할 것 없다. 그깟 물건에 손 좀 탔다고 너한테 불똥 튈 일은 없을 거다.”

물개아줌마한테는 불똥 튀었잖아요.”

물개가 그 일을 공짜로 했을 리는 없고, 욕심을 부려 일을 했는데 일이 틀어지면 감수를 해야 하는 거지.”

같이 틀어졌는데 나는 멀쩡하잖아요.”

너는 이렇게 할매를 찾아왔잖니. 물개도 살고 싶으면 찾아왔어야지. 하다못해 명절마다 멸치라도 성심성의를 다해 보내든가.”

 

돌이켜보면 수레의 기억 속에 함경도 금광 풍경은 늘 황량했다. 그곳에도 분명 사계절이 있었을 텐데 어쩐지 기억 속의 금광은 늦가을이나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항상 싸늘하고 춥고 배고픈 풍경이다. 무너진 금광에서 나온 폐목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더러운 물이 흘러가는 개울이 있다. 수은과 청산가리에 오염된 물을 마시고 구덩이에 처박힌 죽은 새들과 닭들의 사체, 그 더러운 물에서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하는 아낙들, 이따금 길에서 만나는 퀭하고 앞니가 빠진 노인들이 있다. 왜 그렇게 기억 속에선 모든 것들이 춥고 쓸쓸한 풍경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따뜻해 보이는 공간은 할머니가 머무는 안채였다. 할머니의 안뜰에는 햇살이 잘 들었다. 늘 꽃이 피어 있고, 좋은 냄새가 나고, 동네 아낙들이 할머니를 찾아와 부탁을 하고 아부를 하느라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마치 유년의 모든 기억이 흑백 영화 속의 풍경 같은데 오직 할머니의 안채만이 컬러로 촬영된 것 같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할머니를 좋아했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곁에 살면 굶어죽을 일이 없다고 떠들어댔다. 그것이 부산으로 피난을 왔을 때 온천장 근처로 고향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할머니는 사람들을 자기 가족처럼 보살피고 도와줬다.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먹고살 길을 열어주고, 국제시장의 온갖 깡패들이 위협하면 황을 보내 지켜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걸 좋아했다.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주고, 사람들이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우는 걸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자기한테만 돈을 쓰는 깍쟁이였는데 할머니는 손이 컸다. 그리고 괜찮다, 어차피 죽으면 보따리에 싸서 가져가지도 못할 건데, 하고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함경도 금광 시절에서부터 영도 피난 시절까지 삼십 년도 넘게 할머니 일을 도와준 물개아줌마가 유치장에 처박혀 있는데도 할머니는 저토록 싸늘하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연민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허영에 기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베푸는 연민이 자신에게 충분한 허영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그것은 순식간에 냉정함이나 잔인함으로 바뀌었다.

할머니가 기계적으로 수를 놓고 있었다. 수레가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었다. 하지만 답답함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아는 분들께 전화 몇 통만 넣어주세요. 값은 제가 치르겠습니다.”

마라라는 물개 딸년 때문이냐?”

수레가 다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숨을 쉬는데 갈비뼈가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물개아줌마 때문이죠. 내 일을 해주다가 그렇게 된 건데. ”

할머니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해주세요, 할머니. 부탁드릴게요. 게다가 물개아줌마는 할머니 일을 삼십 년이나 해준 사람인데 저렇게 가만히 놔두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수레가 마치 아이라도 달래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씻고 눈 좀 붙여. 여기 물이 좋아. 이곳에 잡스러운 온천들이 많이 생겼지만 사람들이 우리집만큼 깨끗하고 몸에 좋은 온천물이 없다고들 하더라.” 할머니가 뭐가 신이 났는지 갑자기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할머니만 믿고 이 손주는 갑니다.”

수레가 할머니를 껴안았다. 할머니가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내실로 들어오는 복도에서 갑자기 아침에 마라가 한 말이 떠올랐다.

되지도 않게 용감해질 생각을 하지 말고, 비겁하게 버티는 법을 배워.’         

 

*

 

온천장에 있는 수레의 방은 함경도에 있던 그 방과 똑같았다. 남향으로 큰 창문이 있었고 그가 어릴 때 썼던 오동나무 책상과 책장도 그대로 있었다. 조선 최고의 소목장이 만든 책상이었다. 수레는 오동나무 책상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 책상에서 할머니 등쌀에 못 이겨 공자와 맹자를 읽었다. 그리고 몰래 귀곡자와 한비자를 읽었다. 그 난리통에 피란민들은 쌀 한 가마니조차 못 들고 내려왔는데 이까짓 책상이 뭐라고 삼천 리나 되는 길을 싸매고 왔을까. 그때 여급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등 밀어줄 사람을 대기시킬까요?” 소녀가 물었다.

아뇨. 지금은 좀 힘들어서 목욕은 나중에 할게요. 할머니한테는 목욕했다고 하세요.”

그러자 소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께 거짓말하면 여기서 쫓겨납니다.”

수레가 피식 웃었다.

그럼 피곤한지 들어가자마자 곯아떨어졌다고 하세요.”

.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법자라는 여자에게 전화가 올 거예요. 아주 중요한 전화니까 자고 있어도 바로 깨워주세요.”

.”

수레는 창문을 열었다. 정원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녹음이 올 것이다. 푸근함을 가장하는 것, 푸르름을 가장하는 것, 정직함을 가장하는 것, 지조를 가장하는 것, 빛남과 아름다움과 박애와 선함을 가장하는 것. 그 모든 가화들이 정원에 가득했다. 어쩌면 그것은 할머니 잘못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할머니도 짐승들만 우글거리는 이 가문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너희들이 뭐라고 비웃건 나는 임금의 스승을 세 분이나 배출한 명문가의 딸이라는 자존심을 잃어버렸다면 할머니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수레는 바닥에 깔려 있는 두터운 이불과 요를 만졌다. 잘 마른 아기 기저귀처럼 뽀송뽀송했다. 수레가 물속으로 들어가듯 이불 속으로 깊게 미끄러졌다. 이제 할머니는 전화를 돌릴 것이다. 물개아줌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에 손자가 애매하게 걸려 있으니까. 아니, 자기 사람을 내팽개쳤다는 수군거림이 신경쓰일 테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구덩이에 빠진 물개아줌마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것이 신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는 그동안 받은 은혜도 모르고 건방을 떨었지만 나를 봐라, 너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고 있잖니. 하지만 그게 뭐건 무슨 상관인가. 물개아줌마는 풀려날 것이고 다시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러자 긴장이 풀렸다. 수레는 푹신한 요 위에 엎드린 채 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