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필결산

문촌장은 해안절벽을 향해 걸었다. , 수레, 열이 문촌장의 뒤를 따랐다. 편마암으로 이뤄진 절벽길은 날카롭고 가팔랐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길은 어두웠다. 문촌장은 아까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절벽길을 내려갈 때 전혀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없었다. 술이 센 사람이었다. 수레가 만난 뱃사람들은 대부분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술을 잘 마셨다. 하지만 수레는 눈을 뜨자마자 물개여관에서 마신 위스키와 문촌장이 권했을 때 호기로 마신 소주 탓에 균형감이 조금 떨어진 느낌이었다. 이따금 바위 위로 굴러다니는 자갈을 밟다가 발이 미끄러졌다. 황이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 바닥을 확인하고 또 수레의 얼굴을 확인했다. 왠지 열이 뒤에서 수레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 바다에는 밀수선들이 아직도 여러 채 떠 있었다. 하지만 밀수선과 아치섬 해안 사이를 돌아다니는 전마선傳馬船들의 움직임이 둔해진 걸로 보아 이제 해상 적재는 거의 끝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곧 해가 뜰 것이다.

 

절벽 아래에 도착하자 검은색 고무보트가 대기하고 있었다. 보트 옆에서 등 뒤에 UDT라고 쓰인 점퍼를 입은 사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문촌장을 보자 즉시 발로 비벼 껐다. 사내는 짧은 머리에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움직이는 폼을 보니 얼마 전까지 군인이었던 것 같았다.

“제가 데리고 다니는 놈입니다. 잠수 타는 일을 하는 놈인데 집안사람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문촌장이 황에게 말했다.

황이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예전에 밀수꾼들은 단속반이 보이면 아치섬 근처의 얕은 바다로 와서 물건들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다음날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나 머구리를 데리고 바다로 잠수를 해서 물건을 건져냈다. 지금도 금괴나 귀금속 같은 비싼 물건들은 단속의 냄새만 나도 바다로 집어던진다. 던진 위치가 정확하고 바다가 깊지 않으면 해녀나 머구리는 대부분 물건들은 건져올렸다. 하지만 조류가 세서 조금 깊은 바다로 떨어지거나 시야가 안 좋아지면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밀수꾼들도 진화해서 해녀나 머구리 같은 사람들 대신 UDT 출신 같은 전문 잠수사를 쓰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훨씬 더 깊은 바다 속으로 훨씬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UDT 사내가 고무보트를 바다 쪽으로 밀었다. 새벽 조류가 거세 고무보트는 바위 옆에서 삐걱대며 격하게 요동을 쳤다. 파도를 따라 보트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높이가 만만치가 않았다. UDT 사내가 한손으로 밧줄을 단단히 붙잡고 다른 손으로 어서 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열이 먼저 보트로 건너고, 황이 다음, 수레가 그다음에 보트로 뛰었다. 그리고 문촌장이 마지막으로 보트로 뛰었다. 문촌장이 노걸이가 있는 튜브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보트 머리에 털썩 앉았다. 뱃사람 출신이라 그런지 요동치는 보트 위에서도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우리 간다고 무전 넣었나?” 문촌장이 UDT 사내에게 물었다.

“네. 아까 넣었습니다.”

고성능 야마하 엔진을 단 고무보트였다. 군대에서 쓰는 침투용 고무보트에다 새로 엔진만 장착한 것이었다. 단속반을 따돌리거나 큰 배에 붙이기에 편할 것 같았다. UDT 사내가 엔진에 시동을 걸고 키를 잡았다. 적막한 새벽 바다에서 보트의 고속엔진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렸다. 마치 밀수꾼들이 여기 있다고, 대형 마이크로 온 바다에 광고라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새벽 파도는 거칠었다. 고무보트가 해수면에 바짝 붙어 있어서 파도는 훨씬 높아 보였다. 파도의 율동을 따라 아치섬 꼭대기에 있는 감시탑 불빛이 보였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문촌장이 손가락 끝으로 마루야마가 있는 배를 가리켰다. 배는 일 킬로미터 밖에 있었다.

 

마루야마의 배는 다른 밀수선들에 비해 훨씬 컸다. 100톤급 연근해 어선을 개조한 배 같았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난 다음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사이에서 그동안 늘 흐지부지되었던 대마도 밀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 되었다. 그후부터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입항하는 배 중 30톤 미만의 배들은 모두 밀수선으로 간주한다고 발표했다. 대마도 밀수꾼들의 배가 대부분 5톤이나 10톤짜리 작은 고속보트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밀수꾼들이 모든 배를 30톤 이상으로 바꾸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보트가 마루야마의 배 근처에 가자 UDT 사내가 속도를 조금 줄이고 배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갑판 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선박 후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늙은 사내가 고무보트 위에 있는 수레 일행을 물끄러미 보다가 관심 없다는 듯 담배꽁초를 집어던지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UDT 사내가 조끼 주머니에 있는 무전기를 꺼내 배를 호출했다. 그러자 갑판 위에 선원 둘이 급하게 나타났다. UDT 사내가 플래시를 흔들자 갑판에 있는 선원도 플래시를 흔들었다. UDT 사내가 마루야마의 배 옆에 보트를 붙였다. 갑판 위에 있는 사내가 보트 안쪽으로 밧줄 두 개를 집어던졌다. UDT 사내가 보트 뒤쪽 고리에 밧줄을 묶고 문촌장은 보트 앞쪽 고리에 밧줄을 묶었다. 잠시 후 고무보트와 배 사이의 밧줄이 팽팽해졌다. 갑판 위의 선원이 끝에 고리가 달려 있는 사다리를 배 옆에 달았다. 문촌장이 사다리가 잘 걸렸는지 한번 당겨보더니 마치 담이라도 넘듯 가볍게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올라가자마자 선원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쾅 하고 때렸다.

 

“술 처마시고 있었나?” 문촌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선원이 대답했다.

“그럼 뭘 하고 자빠져 있었길래,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노. 밀수쟁이들의 생명은 항시 긴장해서 경계, 보안 태세를 유지하는 거 아니가?”

선원이 대답은 하지 않고 손으로 머리만 긁적거렸다.

“박선장이랑 마루야마상은?”

“브릿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갑판으로 다 올라오자 문촌장은 브릿지를 힐끗 쳐다보고는 배 뒤쪽으로 몇 발짝 걸어갔다. 주방에서 아까 보트에서 본 늙은 사내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방 옆 기관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육중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사내가 문촌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만 까닥거렸다. 늙은 사내는 이 배의 기관장처럼 보였다. 선원들과 달리 문촌장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기술자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실력 있는 기관장이건, 실력이 형편없는 기관장이건 모두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살았다. 드라이버로 엔진 덮개를 뜯을 줄만 알아도 대접받았던 시절이랄까. 그러니 저 헐렁한 사내가 문촌장을 보고 고개만 까닥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문촌장은 늙은 사내의 하는 짓이 무척 맘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문촌장이 몸을 돌리더니 배 앞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브릿지로 올라가는 철계단을 앞에 두고 문촌장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일행을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상황을 정리할 심산인 것 같았다.

“크게 긴장할 건 없습니다. 내가 미리 귀항 일정을 조정해서 마루야마 애들은 대부분 다른 배로 돌아갔습니다.”

“그럼 위에는 몇이나 있습니까?” 황이 물었다.

“이 배 굴리는 박선장이랑, 마루야마, 경호원 하나, 심부름 하는 애 하나 뭐 이렇게 있을 겁니다.”

황이 한시름 덜었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촌장이 황의 눈치를 보더니 아까보다 낮은 톤으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셋 다 죽일 것까지야 있습니까? 경호원 칼잡이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루야마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애가 우리 마을 놈인데 덩치만 컸지 아직 앱니다.”

“다 끝난 이야기를, 이제 와서 꺼내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황이 말을 자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제가 그놈 아버지하고도 좀 알고, 철이 없어서 야쿠자 이런 게 멋있는 줄 알고 얼쩡거리고 있는 거지 본시 애는 착합니다. 사실 이 바닥에 어울릴 만한 놈도 아닌데.”

“나중에 뭐라도 터지면 뒷감당이 되겠습니까?” 황이 물었다.

“내가 타이르면 말 들을 겁니다. 터지면 설마 황두목만 죽겠습니까? 나도 같이 죽는 거지요.”

황이 입술을 두툼하게 만들고 잠시 무슨 생각을 했다.

“그럽시다.”

“고맙수다.”

 

문촌장이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브릿지로 오르는 계단은 철로 되어 있어 밟을 때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하지만 문촌장은 아무런 조심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 몇이 죽고 사는 일인데 어쩐지 일이 너무 싱겁게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계단을 다 오르자 황이 뒤를 돌아봤다.

“도련님은 여기 계시다가 상황 정리되면 들어오시죠.”

수레가 황의 얼굴을 쳐다봤다. 황의 표정에서 할머니의 당부, 걱정, 불안 따위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냥 같이 들어가지요.” 수레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문촌장이 수레와 황을 잠시 쳐다보고는 브릿지의 문을 힘껏 열었다. 브릿지에는 네 명의 사내가 선장 의자 근처에 모여 땅콩 부스러기 같은 안주를 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래위로 초록색 추리닝을 입은 예순 살 언저리의 사내만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서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사십대 사내는 방향타 위에 오른쪽 팔꿈치를 얹은 채 왼손으로는 맥주컵을 들고 있었고, 생뚱맞게 혼자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삼십대 사내는 선장 의자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마루야마의 칼잡이인 것 같았다. 사실 누가 봐도 경호원이나 칼잡이 같은 인상이었다. 문촌장이 말한,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지 애는 착하다는 청년은 기껏 해봐야 열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는 해도실 앞에서 경직된 얼굴로 차렷 자세를 하고 서 있었다.

 

“아이고, 마루야마상 늦어서 죄송합니다. 비즈니스가 길어져서.” 문촌장이 선장 자리에 앉은 마루야마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비즈니스는 무슨, 술냄새가 여기까지 풀풀 나는데.” 마루야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여기도 술판 벌어졌네.”

“우리는 문촌장 기다리다 지쳐서 입가심 조금 하는 거고. 박선장이랑 이거 한 병 가지고 둘이 나눠 마시고 있다.” 마루야마가 느리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레는 마루야마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냥 평범한 동네 아저씨였다. 어느 시골 동네 슈퍼 평상에 앉아 오후의 햇살 속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수업을 마친 아이들에게 별사탕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팔고 있을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동네 슈퍼 아저씨. 작은 체구에 바싹 마른 몸뚱이, 게다가 자상하고 선량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마루야마의 얼굴에서 날카롭거나 위협적인 야쿠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래위로 한 벌인 초록색 추리닝은 체구에 비해 너무 커서 몸은 더욱 왜소해 보였고 게다가 입으라고 던져주면 초등학생도 울어버릴 것 같은 촌스러운 색상 때문에 사람이 모자라 보일 지경이었다. 저런 사내 하나를 잡겠다고 구들, 천달호, 밧또, 손영감에 문촌장까지 끌어들여 이 난리법석을 떨었다는 게 민망할 정도였다. 마루야마 옆에 서 있는 키 큰 야쿠자 칼잡이 사내만 브릿지 왼쪽 창에 등을 기댄 채 날카로운 눈으로 수레 일행의 동작 하나하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자리는 선장만 앉는 자리요. 대통령이 와도 함부로 못 앉는 자린데, 어찌 겁도 없이 거기 앉아 있소.” 문촌장이 놀리듯 물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요새 내가 무릎이 영 신통찮아서. 박선장 이 자리에 좀 앉아도 괜찮겠지요?”

마루야마가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박선장을 쳐다봤다.

“아, 그럼요. 이 배 선주신데.”

 무뚝뚝한 표정을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살짝 경직된 느낌이었다. 아마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문촌장에게 귀띔을 받았을 것이다. 마루야마는 담배를 하나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야쿠자 칼잡이가 라이터를 꺼내 마루야마 담배에 불을 붙여줬다. 마루야마가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더니 연기를 입에 머금은 채 질문을 던졌다.

“이분들이 일전에 말씀하신 물건 구하려는 분들?”

“네. 이분들입니다. 여기 황사장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큰 장사 하는 분이고 저기 젊은 분은 서울 동대문에서 또 크게 사업하는 분입니다.”

문촌장이 그냥 되는대로 황을 먼저 소개하고 다음에 수레를 소개했다. 마루야마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더니 황과 수레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구하시려는 물건이 좀 짜릿한 형태인 모양입니다? 이 게으른 문촌장님이 직접 손님들까지 모시고 행차를 하는 걸 보니.”

“암, 짜릿한 물건이지.”

문촌장이 황을 쳐다봤다.

“한국말을 아주 잘하십니다.” 황이 말했다.

“아. 사실 나 재일조선인이요.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못하니까 남의 나라에서 할 짓이 깡패짓 말고 없더이다.”

그러냐는 듯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촌장이 이번에는 박선장을 슬쩍 쳐다봤다.

“윤활유 샌다며? 유디티가 부탁한 부품 갖고 왔을 거다. 갈아끼우려면 얼마나 걸리겠노?”

“한 삼십 분이면 안 되겠습니까?”

“기관장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일이 되겠나?”

“술은 좀 마셔도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합니다.”

“똑 부러지게 하기는. 나는 그 인간 보면 기관장이 엔진을 굴리는 건지, 천만다행으로 엔진이 굴러가서 지가 기관장을 하고 있는 건지 당최 구분이 안 간다.”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문촌장이 박선장의 질문에 대답을 안 하고 황과 수레의 얼굴을 쳐다봤다. 문촌장이 뭘 묻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황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문촌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수리 끝날 쯤이면 얼추 여기 이야기도 다 끝날 거다. 그리고 저놈도 일하는 데 데려가라.”

 

문촌장이 손가락으로 해도실 앞에 서 있는 아직 철이 안 든 마을 청년을 가리켰다. 난데없이 자기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청년은 더더욱 몸을 곧추세워 차렷 자세를 취했다. 겁을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님 원래는 안 그런데 잔뜩 주눅이 들어서 그런 건지 그 어딜 살펴봐도 야쿠자 계통이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손이 모자라서 그런데 저놈 좀 빌려가도 되겠지요?” 문촌장이 마루야마에게 물었다.

“아이 그럼요. 얼마든지 빌려가십시오. 일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지. 빌려라도 가주면 우린 아주 땡큐지.”

무엇이 좋은지 마루야마가 인심 좋은 할아버지처럼 연신 웃어댔다. 박선장이 마을 청년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자기 몫은 다 끝났다는 듯 한결 편안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갔다. 마을 청년이 덩달아 따라나갔다.

 

*

 

브릿지에는 이제 마루야마, 야쿠자 칼잡이, 문촌장, , , 수레 이렇게 여섯 사람만 남았다. 시종일관 대화를 끌어오던 문촌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브릿지에 어색함이 흘렀다. 아니 그 어색함은 수레만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야쿠자 칼잡이 사내의 허리 쪽 양복 상의가 살짝 부풀어 있었다. 허리띠에 짧은 일본도를 꽂았을 것이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오른쪽 겨드랑이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왼손잡이일까? 아니라면 칼과 총을 동시에 쓰는데 그저 칼을 오른손으로 쓰고 총을 왼손으로 쓰는 건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왼손잡이 칼잡이를 상대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일이라고 수레는 생각했다. 야쿠자 칼잡이는 면도날처럼 날이 잘 서 있었다. 반면에 열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비눗방울처럼 온몸이 이완된 채 살짝 부풀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쿠자 칼잡이의 날이 너무 잘 서 있어서 열을 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수레는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 면도날보다 비눗방울이 더 빠르게 날아오르고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어쩌면 면도날로는 애당초 비눗방울이 베어지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루야마가 담배를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자 그럼 다들 바쁘실 텐데 슬슬 물건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마루야마가 물었다.

“무슨 물건이든 다 됩니까? 밧또가 자기는 못 구한다고 엄살떨던데.”

문촌장이 아무 쓸모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긴장한 탓일 것이다.

“사실 밧또는 대마도에서나 왕 노릇 하는 거지 본토에서는 미약합니다. 고베, 야마구치, 시모노세키, 요코하마 이런 데가 진짜지요. 본토 거치면 못 구할 물건은 없지요. 문제는 가격인데.”

황이 가방에서 금괴 하나를 꺼냈다.

“필요하면 더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마루야마가 흥미롭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리며 금괴를 집었다.

“진짜로 보통 물건이 아닌가보네.”

“물건이 아니라 정보입니다.” 황이 말했다.

“정보?”

“김석산이라는 사람을 아시죠?”

“김석산? 글쎄요. 이름만 들어서는 모르겠는데요?”

마루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김석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는지 얼굴에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황이 주머니에서 낡은 흑백사진 하나를 꺼내 마루야마에게 보여줬다. 마루야마가 흑백사진을 유심히 쳐다봤다.

“얼굴이 낯익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마 1944년 겨울 혹은 1945년 봄에 만난 적이 있을 겁니다.”

1944년 겨울이면 내가 긴자에서 시답잖은 술집 몇 개 관리하고 있을 땐데.”

마루야마가 미간을 좁히며 사진 속의 사내를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글쎄요. 그때만 해도 자리를 못 잡아서 워낙 정신없이 살던 때라. 그런데 김석산씨가 저와 무슨 사업을 같이 했다고 합니까? 얼굴도 가물가물한 사람과 무슨 특별한 일을 했을 리도 없고.”

“일본 경시청에 조선인 남자 한 명을 밀고하는 일.”

“경시청에 밀고요? 조선인?”

마루야마가 눈동자를 굴리며 이십오 년 전 일을 회상했다. 표정 그 어디에도 당황하거나 긴장한 모습이 없어서 순간 사람을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밀고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그때 형사 몇 명이랑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였죠. 내가 좀도둑이나 밀입국자, 아편쟁이, 밀수꾼들처럼 뒷골목에서 흘러다니는 정보를 형사들에게 좀 찔러주고 형사들은 또 제가 관리하는 구역에 이것저것 편의도 좀 봐주고. 그런데 그런 일은 하도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지요. 그때는 돈만 주면 가리지 않고 뭐든 다 하던 시절이니까. 그나저나 그 조선인은 무슨 죄목으로 경시청에 잡혀갔답니까?”

“천황 암살 미수.”

“천황 암살? 푸아. 대단도 하시네. 이건 확실히 번지수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그 정도 스케일이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지요. 그리고 그 무렵에 저는 그런 큰일에 낄 만한 깜냥도 못 되었고.”

마루야마가 금덩이를 만지작거리며 아쉽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 웬 횡재수로 돈 좀 버나 했더니.”

 

황이 마루야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촌장은 황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레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채 이 한편의 코미디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루야마는 정말로 기억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라면 황이 정말로 헛다리를 짚어서 사람을 잘못 찾아왔거나. 문득 허탈함보다 오늘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 다행한 느낌이었다. 황이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마루야마에게 건넸다. 마루야마가 글자가 아니라 무슨 그림이라도 보듯 서류를 쳐다봤다.

“공식 자료에 누락되어 있어서 아주 어렵게 찾은 문서입니다. 거기 맨 밑에 서명 당신 것 맞지요? 마루야마 준죠.”

마루야마가 서류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것은 놀랐다기보다 숨은그림찾기 그림에서 왕관이나 종이비행기를 찾아냈을 때의 표정에 더 가까웠다.

“확실히 이건 내 서명이 맞네요. 그런데 이게 무슨 서류입니까? 어려운 한자가 너무 많아서 저는 뜻을 잘 모르겠는데.”

“동경대 유학생 구광일을 고발하는 사건에 당신이 참고인 자격으로 진술했음을 증명하는 문서입니다. 구광일이 일본 정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비밀 독립운동 결사의 일원이라는 것과 천황 암살 음모를 계획중이라는 고발을 담은 내용이지요.” 황이 말했다.

“아, 이게 그런 문서구나.”

마루야마가 마치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읽을 수도 없는 문서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아니라면 그 시절 일어난 일이 뭔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 있자, 1944년 겨울이면 모리, 야마자끼 뭐 그런 형사들이랑 어울릴 때인데, ! 이제 기억나네요. 그 시절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공부하러 온 유학생 중에 아무나 독립운동으로 몰아 고발하는 일이 한동안 유행하는 사업이었지요. 형사 몇이랑 합을 맞춘 다음에 일단 조선인 유학생이고 돈 좀 있다 싶으면 아무나 신고해서 철창에 집어넣어요. 그리고 전보를 넣어요. 당신 아들이 지금 독립운동으로 경시청 어디에 잡혀 있다. 그럼 조선에 있는 유학생 집안에서 얼마나 놀라겠어요. 불과 며칠도 안 되어서 득달같이 사람이랑 돈이 날아오는 거예요. 그 당시 조선에서 일본까지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면 다들 웬만하면 부잣집 도령들이니까. 또 그럼 우리가 뭐 브로커 비슷하게 중간에 개입해서 독립운동이 어디 보통 일이냐, 이거 한 발만 삐끗하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뭐 이렇게 겁을 주고, 또 방법이 영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돈 가지고는 성의가 부족하다, 이 판국에 사람 목숨이 중하지 돈이 뭐시 중하냐, 뭐 또 이렇게 달래서 돈을 잔뜩 받아가지고 형사들과 나눠먹었지요. 그리고 며칠 뒤에 이래저래 혐의 없음으로 해서 유학생은 풀려나는 거고.”

마루야마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뒤에 있던 야쿠자 칼잡이가 라이터를 꺼내 불울 붙였다. 마루야마는 담배를 한 모금 깊숙하게 빨고는 천천히 뱉어냈다. 새삼 예전에 벌인 일들을 떠올려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습기도 또 한편으론 재밌기도 한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참 철이 없고 젊었지요. 그래도 내가 했던 구질구질한 사업들 중에선 나름 깔끔하고 재미있는 사업이었어요. 좀 놀래키기는 하지만 누구하나 죽거나 다치는 사람도 없고, 고생에 비해 수입도 짭짤하고, 형사들도 재미 삼아 용돈벌이 해서 좋고 또 철창에서 풀려날 때면 조선인 유학생 집안에서 사람들이 나와 선물까지 안겨주며 울고불고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나중에는 내가 그 유학생을 정말 구해준 기분마저 듭니다. 하하.”

마루먀아가 손에 든 문서를 다시 별 뜻 없이 쳐다봤다.

“그러니 이 문서에 뭐라 적혀 있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이 사업이란 게 원체 장난 같은 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여기 적힌 구광일이라는 분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석 달 뒤에 죽었습니다. 헌병대에서 고문받다가.” 황이 말했다.

처음으로 마루야마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건 경찰서 철창에 잠시 넣어서 겁만 주고, 조선에서 돈이 오면 형사랑 우리랑 반반씩 나눠먹고 털어내는 비즈니스인데. 기껏 일 다 만들어놓고 뭐하러 헌병대에 보내서 고문씩이나 하겠소.”

마루야마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황을 쳐다봤다.

“혹시 돈을 안 보냈소?”

“그분이 금의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였습니다. 한 시절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금을 생산하던 금광의 유일한 상속자. 당신 같은 하빠리 인생은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을 만큼 지체 높으신 분이지요. 설마 돈이 없었겠소?”

마루야마가 책상에 놓인 사진을 집어들고 또 읽지도 못하는 서류를 쳐다봤다. 사진을 꼼꼼히 쳐다보는 마루야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루야마 뒤에 있던 칼잡이 사내가 미묘한 공기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벽에 기대어 있던 등을 떼고 바로 섰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난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전혀 안 되는데요. 이건 돈을 적게 주든 많이 주든 그냥 풀어주고 흐지부지 끝나는 사업인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

“그 사진 속의 사내를 만난 기억이 없습니까?”

마루야마가 다시 사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여전히 사진 속의 사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날 것 같지가 않은데. 기억이 날 것 같았으면 벌써 났겠지요.”

“기억이 안 나면 여기서 죽을 거요.”

황이 사진을 쳐다보고 있는 마루야마의 정수리에 대고 담담하게 말했다. 마루야마가 사진에서 눈을 떼고 황을 쳐다봤다.

“기억이 나면?”

“기억이 나면 여기서 죽을 거요.”

 

마루야마가 사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이제 동네 슈퍼 아저씨 같은 헐렁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그 혼란스럽고 험난한 시절 일본 뒷골목에서 야쿠자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설마 그저 동네 슈퍼 아저씨일 리가 있겠는가. 등뒤에 서 있던 칼잡이가 팽팽해진 공기를 느끼고는 몸의 중심을 약간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슬며시 양복 웃옷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흰 와이셔츠 사이로 권총 홀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시면 제가 도움 드리기가 무척 힘든데.” 마루야마가 말했다.

황이 아무 말 없이 마루야마를 노려봤다. 마루야마도 황을 쳐다봤다. 황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단단했고 마루야마의 얼굴은 잔잔한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둘 다 이런 순간에 많이 서봤을 것이다. 황은 마적들이 들끓는 저 북방 만주 쪽에서, 마루야마는 사시미 칼을 들고 싸우는 저 열도의 습기 찬 뒷골목에서. 야쿠자 칼잡이의 검정구두가 옆으로 조금 미끄러졌다가 다시 앞으로 조금 나왔다. 열이 왼쪽 다리를 살짝 비틀어 자기 어깨보다 조금 넓게 보폭을 맞췄다. 그리고 왼쪽 다리로 무게 중심을 아주 조금만 옮겼다. 열의 시선이 정확히 야쿠자 칼잡이의 넥타이 앞, 그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야쿠자 칼잡이가 열의 미세한 동작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레는 열보다 반 보 뒤에 있었다. 하지만 야쿠자 칼잡이가 반 걸음만 내딛어도 충분히 칼끝이 닿을 거리였다. 문득 허리 뒤에 꽂힌 칼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수레가 칼을 잡으면 칼을 빼내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자신의 칼이 야쿠자 사내의 칼보다 느릴 거라는 사실을 너무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야쿠자 칼잡이의 근육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바로 튀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수레는 지난 일 년 내내 열대의 섬에서 술만 처마셨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술에 취해 있다. 지금 수레가 칼을 빼면 그것은 겁에 질린 멍청이가 어둠을 향해 방아쇠를 마구 당기는 바보 짓거리가 될 것이다.

“오늘 가져가려고 했던 물건이 혹시 내 목숨이었소?”

“빚이오.”

“빚?”

“당신이 금의 가문에 진 빚. 당신과 당신 가족이 가지고 있는 목숨과 재산을 모두 다 팔아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빚.”

황의 말에 마루야먀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결정하는 눈빛이었다.

“이거 참 곤란하네요. 죽은 분 목숨을 내가 어떻게 해드릴 수도 없고. 머리가 나빠서 사진 속의 사람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그리고 보다시피 난생처음 들어보는 그 어마어마한 빚을 갚을 능력도 안 되고.”

 

마루야마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다시 담뱃갑 속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이번에는 야쿠자 칼잡이가 불을 붙여주지 않았다. 마루야마가 직접 성냥을 꺼내 천천히 불을 붙이고는 테이블 위로 성냥을 툭 던졌다. 그때 야쿠자 칼잡이가 양복 오른쪽 홀더에서 권총을 빼내고 동시에 오른손으로 허리 뒤에 있는 칼을 뺐다. 그 순간 열이 야쿠자 칼잡이가 벌린 양팔 사이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연기처럼 스며들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왼쪽으로 틀면서 권총을 잡은 야쿠자 칼잡이의 손목 힘줄을 베고 다시 허리를 오른쪽으로 틀면서 야쿠자 칼잡이의 턱을 깊숙이 베고, 떨어지는 칼로 팔꿈치를 베었다. 어릴 때 박홍 영감에게 검술을 배울 때 들었던 말 그대로였다. 상대의 원 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어가라. 그러면 상대는 입안에 회전하는 면도날을 머금은 상태가 될 것이다. 야쿠자 칼잡이가 손에 힘이 없는지 권총을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방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려는 듯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때 야쿠자 칼잡이의 턱에서 벌컥 하고 피가 쏟아져내렸다. 열이 턱이 아니라 목을 그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을 것이다. 열이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다시 허리 뒤에 꽂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열이 야쿠자 칼잡이의 양쪽 어깨를 잡은 채 왼쪽 무릎 안쪽을 발로 차서 분질렀다. 야쿠자 사내의 무릎에서 툭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마치 폴대가 빠진 텐트처럼 야쿠자 칼잡이가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푹 꺼졌다.

마루야마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황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마루야마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던 웃음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루야마의 입에서 빨지도 않고 있는 담배만 저 혼자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황이 마루야마가 대충 던져놓았던 사진을 손가락 끝으로 다시 마루야마에게 밀었다. 마루야마가 고개를 떨어트리고 김석산의 오래된 흑백사진을 멍하니 쳐다봤다. 바닥에 꼬꾸라진 야쿠자 칼잡이가 숨쉬기가 힘든지 잔기침을 두 번 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내가 이 사진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소?” 마루야마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모노세키에 있는 네 가족과 가족들의 재산은 건드리지 않겠다.” 황이 말했다.

 

마루야마가 사진을 들어 한참 동안 쳐다봤다. 담배연기가 눈을 찌르는지 마루야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루야마가 담배를 옆에 있는 재떨이에 넣었다. 담뱃불을 비벼서 끌 의지도 없는 듯 그냥 툭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마루야마는 미간을 오므리며 사진 속의 사내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브릿지에 서 있는 사내들 중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 아래쪽에서 새로 고친 엔진을 시험하는지 이따금 부웅 하는 기관음과 진동이 선체 벽을 타고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바닥에 쭈그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야쿠자 칼잡이가 이따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한참 후 마루야마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사진을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죄송하네요. 기억이 안 납니다. 거참, 나쁜 짓을 하도 많이 하고 살다보니까 자기가 지은 죄를 후회는커녕 기억도 못하네요.”

마루야마가 진실로 허탈한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황이 수레를 쳐다봤다. 마루야마에게서 더 나올 게 없다는 듯 황이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수레가 보기에도 마루야마에게서 더 나올 정보는 없어 보였다. 문촌장이 시계를 쳐다봤다. 이제 기관실에서 엔진 점검도 끝났을 것이다. 동쪽 바다에서 태양이 올라오고 있었다.

“정리합시다.” 문촌장이 말했다.

“이거 밧또가 벌인 일입니까? 아님 시모노세키 본가도 아는 일입니까?”

마루야마는 뭔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얼굴이었다. 문촌장이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마루야마의 얼굴을 쳐다봤다.

“밧또도 알고, 본가도 알고.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밧또 얍삽한 잡종 새끼. 이래서 재일 야쿠자들은 만날 선봉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나중에 일차로 폐기된다니까.”

“죄송하게 됐수다. 먹고 사는 게 참 힘든 일이네요. 밧또도 미안하다고 전해달랍디다.”

황이 가방에서 서류들을 꺼내 마루야마에게 내밀었다.

“당신 소유의 배 다섯 척만 가져가겠소. 계산상 조금 모자라는 것 같지만 시모노세키에 있는 가족들 재산은 건들지 않겠소. 여기 서명하시오.”

마루야마가 무덤덤한 얼굴로 황이 손가락으로 지정하는 곳마다 서명을 했다. 서명이 끝나자 황이 서류들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사진과 금괴도 가방에 같이 집어넣었다. 이제 대충 일은 다 끝난 것 같았다.

“부탁이 있소. 가는 건 내 손으로 가게 해주시오.” 마루야마가 말했다.

황이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주인님은 석 달이나 고문을 받다가 돌아가셨는데 당신이 그렇게 편하게 가면 계산이 안 맞지.” 황이 말했다.

“어렵겠소?” 마루야마가 다시 물었다. 표정이 간절했다.

“어렵소.” 황이 대답했다.

수레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합시다.”

황이 수레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으면 다 똑같은 거지. , 고문이라도 하실 겁니까?” 수레가 황을 향해 쏘아붙였다.

“칼로? 아님 총으로?” 수레가 마루야마를 향해 물었다.

마루야마가 자기가 생각해도 웃기고 어이없는 선택이라는 듯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총으로 합시다. 내 손으로 배까지 가르는 건 영 자신 없고.”

수레가 열의 주머니에서 야쿠자 칼잡이의 권총을 꺼냈다. 38구경 리볼버였다. 수레가 바닥에 총알을 다 쏟아내고 탄창에 한 알만 집어넣었다. 마루야마가 수건을 꺼내 이마에 묶었다. 수레가 마루야마에게 총을 건넸다. 마루야마가 총을 받고 잠시 살펴보더니 얌전히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팔, , . 야쿠자가 원래 망통이라는 뜻이지. 도무지 쓸모가 없는 인생이거든. 여기 왜 왔는지, 또 왜 가는지, 하나도 모르잖아. 보시다시피 자기 인생인데 기억도 못하고.”

마루야마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마루야마가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향해 총을 들어올렸다. 수레가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이 아들로서 이 죽음을 똑똑히 지켜봐야 한다는 뜻인지 수레의 팔을 움켜잡았다. 갑자기 온갖 어리석음들이 뒤엉켜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하고 더러운 드럼통 속으로 한없이 깊게 자맥질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레가 황의 팔을 세차게 뿌리쳤다.

“이런 미친 짓은 월남에서 정말 지겹도록 봤어요.”

황의 가죽처럼 단단한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은 실망하고 분노한 얼굴이었다. 그때 귀 옆에서 탕 하고 총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