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우리의 해피 엔딩―1

지난 연말과 새해에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장군이가 크게 아팠다. 오전,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울어서 퉁퉁 부은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밤사이 장군이가 발작과 경련을 해서 동네 병원에 왔는데 의사가 안락사를 의논하라고 했다고. 의사는 뇌종양 증세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봤고 더 확실한 판정을 위해서는 MRI를 찍어야 하지만 이 상태로는 촬영을 하다가 오히려 위험한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해야 하니까. 장군이는 사지를 떨고 머리를 계속해서 뒤로 젖히며 고통스러워하는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내게는 충격이 오면 강하게 방어한 채 오히려 무감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날도 그랬다. 나는 원고를 보고 있다가 아주 나지막하게 “안락사로 떠나보내는 것, 나 그거 두 번은 못해”라고 말했고 일단 전화를 끊자고 했다. 그리고 다시 원고를 읽어내려가는데 얼마 가지 않아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내렸다. 이상하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게 떨어지지 하며 닦았지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처음으로 키웠던 반려견도 지금의 장군이와 이름이 같았다. 병치레가 잦았던 장군이는 삼 년밖에 살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났다.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사인(sign)이 왔다는 의사 말에 따라 우리는 안락사라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후로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그것을 후회한다. 그때 첫 장군이는 몸이 안 좋아지자 엄마가 긁어서 먹여주는 배로 하루하루를 버텼는데, 엄마는 차라리 입원시키지 않고 우리가 데리고 있을걸, 데리고 있으면서 배도 긁어주고 그럴걸, 걔가 우리가 병원에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니, 하면서 후회했다. 가장 정성을 들인 사람도 엄마, 그만큼 미안해해야 하는 사람도 엄마였다.

그렇게 슬픈 이별을 하고 만난 두번째 장군이는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이후로 우리 가족이 여러 번 생활의 부침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장군이가 우리와 사는 동안 아버지가 운영했던 작은 회사가 문을 닫아 살던 동네를 떠나야 했고, 언니와 내가 다른 가족을 만들고 조카들이 등장하고 엄마가 암 투병을 하기도 했다. 장군이로서도 큰 고난을 겪어야 했는데, 여섯 살이던 해에 유전적 망막박리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약하고 나니 장군이와 보낸 열일곱 해가 우리 가족에게 정말 비장한 클라이맥스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족이 새로운 동네로 이사하고 엄마가 한동안 쉬던 일을 다시 시작했던 때에, 장군이는 아주 긴 시간을 혼자 보내야 했는데, 파주에서 인천까지 직장을 다니던 나는 그런 장군이가 마음에 걸려 퇴근 후에는 어떻게든 고속도로를 달려 서둘러 집으로 오곤 했다. 그러면 장군이는 식구들이 출근하고 난 뒤부터 밥도 물도 먹지 않고 식구들 옷이 있는 행어 위에서 냄새를 맡으며 자다가 걸어나오곤 했다. 얼마나 잤는지 털이 다 눌려서 못생기고 귀여워진 모습으로. 

나는 그래도 내내 깨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현관의 철문이 다 긁혀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장군이는 우리가 나가고 처음부터 그렇게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긴장되어서 현관으로 나가 문을 긁어보며 뭔가 상황이 바뀌지 않을까 노력하다가 별수없이 체념한 채 식구들의 체취가 남은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지금처럼 혼자 남은 반려견을 위한 캠이 있었다면 일찍 알았겠지만 나는 그 흔적을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발견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어쩔 수 있었을까, 모두가 나가서 직장을 다녀야 하는 시절이었으니까. 장군이가 시력을 잃고 이번에는 우리 가족이 장군이의 그런 곤란에 적응해야 하는 때에 다행히 부모님은 가게를 열었다. 우리는 장군이가 앞을 못 보게 된 불행 속에서도, 그런 장군이를 혼자 두지 않아도 되는 삶의 조건이 만들어진 데 대해 안도했다. 

처음에는 가엾고 애틋해서 전보다 과한 보호, 과한 간식의 제공, 과한 응석의 받아줌, 과한 관심과 관찰을 보였지만, 한해 한해 지나자 우리는 시력을 잃은 장군이의 조건을 삶에서 겪을 수 있는 변화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간식과 사료를 섞어두면 사료를 퉤, 뱉어버리는 장군이를 나무라기도 하고, 손님 가방을 자꾸 뒤지는 장군이를 혼내기도 하면서 살았다. 장군이는 그때그때 따라주는 물이 아니면 먹지를 않아서 자다가도 물을―우리 가족들 말로는 “쌔 물”을―따라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피곤해진 엄마는 종종 장군이에게 “다른 집에 갖다준다!”라고 겁을 주기도 했다. 물론 받아줄 집은 없고 보낼 생각도 절대 없다. 하지만 엄마 말로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면 장군이가 자기는 다른 집에 가지 않겠다고, 엄마 말을 잘 듣겠다고 금세 반성하고 어리광을 부린다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만 가끔 우리 장군이가 정말 그렇게 천재견인가 싶기도 하다. 


엄마에게 그 전화가 온 날은 종강 수업이 있었다. 나는 한 학기 마지막 수업시간이 되면 학생들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하는데―물론 책이 그렇게 인기 있는 선물은 아닐 수도 있지만―그래서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아홉 권을 집에서 가져온 참이었다. 돌려줘야 할 리포트들도 있었고 서점에 들러 학생 수에 맞게 한 권 더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가기 전에 점심도 먹어야 하고. 물론 그런 일들은 그리 복잡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장군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그 모든 것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일어나서 걷지도 못할 듯했다. 

정신을 차려 2차 병원에 알아보았더니 일찍 와야 MRI 촬영이 가능하다고 했다. 동네 병원에서 처방한 진정제는 듣지 않는다고 했고 전화로는 장군이 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점심을 먹기 위해 라이프 파트너인 경북상회를 만났을 때 나는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 경북상회는 “나는 장군이가 마취를 못 이길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디가 아픈지, 상황이 어렵다면 대체 왜 그런지 우리는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 해”라고도. 촬영중에 위급한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더라도 검사를 받기로 했다. 

강의를 갔다가 전철을 한 시간 타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사이 언니와 엄마는 장군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있었고 상태가 나쁘다며 바로 촬영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현장에는 있지 못한 채 전화만 하고 하소연하고 울다가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뒤늦게 거기 당도하는 셈이었다. 길은 막혔고 나는 자꾸 내비게이션의 지시를 못 알아들어서 헤맸다. 이십 년 가까운 무사고 운전 경력이지만 흥분하거나 당황하면 멀쩡히 잘하던 운전도 실수를 거듭했다. 겨우 주차를 하고 올라가자 엄마와 언니가 의사와 상담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다행인 게 뇌종양은 아니래” 하고 언니가 말하는데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