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내가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은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중학교 때의 일이다. 그때는 우리집이 부도가 나서 손바닥만한 단칸 지하 셋방에 네 가족이 다닥다닥 이불을 깔고 다 같이 잠들곤 했다. 하루는 가스가 끊기고 하루는 전기가 나갔으며 그런 일상 속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가스버너에 라면을 끓여먹고 국물을 모았다가 밥을 말아 먹고 신발 밑창이 닳아 빗물이 스미고 어떤 때는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며 견뎠다. 나 때 막 EBS 인터넷 강의가 활성화되었고 집에 컴퓨터가 없는 사람은 손을 들라는 학교 조사, 유료 야자의 의무화 등은 나에게 큰 시련을 주었다. 엄마는 롯데리아에서 일하게 되었고 곧이어 나도 그곳에서 언니 이름으로 함께 일했다. 엄마가 그랬다. 먹는 거 파는 데서 일하면 배는 주리지 않을 거라고(어휴 너무 짠내 난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점점 집밖으로 도는 아이가 되었다. 집밖이라고 해도 딱히 갈 곳이 있는 게 아니어서 나는 자주 고척도서관에 가곤 했다. 거기는 고척 근린공원 내부에 위치한 도서관이었는데, 녹음이 짙은 오래된 공원이었다. 책을 읽다가 공원 벤치에 나와 앉아 있다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사람들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고 가족들은 웃으며 무리 지어 지나가고 연인들은 손깍지를 끼고 벤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무늬를 바라보는 한가로운 공원 풍경 속에서, 나는 어쩐지 한 뼘짜리 평화에 동화되기도 하고 이방인이 되기도 하면서 그 공원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폐관 시간 후의 가로등이 켜진 저녁 공원도 좋아했다. 아직 빛의 기운이 남아 파랗게 물든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어딘가 아끼는 무언가를 멀리 두고 혼자 돌아가는 느낌에 사로잡혀 괜히 우울해지기도 했던 나는 감정적이며 쉽게 두근거리는 그늘진 인간이었다. 그 시절의 나를 누군가는 ‘문학소녀’라 칭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말은 멸칭처럼 느껴져서 사용하고 싶지 않다. 세상모르고 문학에만 빠져 꿈을 꾸는 그런 이미지는 기득권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기득권 남성들에 의해 소비 당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어린 여성은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냉소적이며 회의에 가득차 있다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회가 원하지 않는 여성이니까. ‘문학소녀’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낙인 같다.

어쨌든 나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딱히 갈 곳도 없어서 알바가 없는 날은 도서관과 공원에 머물기를 즐겼다. 돈이 조금 있을 때는 도서관 내 식당에서 파는 우동을 먹었다. 지금 떠올려보아도 그다지 근사한 음식이 아니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그 우동을 좋아했을까? 얼마나 맛있었는지. 언젠가 다시 가서 먹어보고 싶다. 그냥 그리운 느낌이 든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사업에 실패해 낙오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보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며 헐뜯는 아빠가 티브이 앞에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반쯤 송장처럼 누워 있는 아빠와 한방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 혼자 있고 싶었다. 미치도록 나만의 공간이 갖고 싶었다. 집에 가면 별 이유도 없이 얻어맞기 일쑤였다. 어떨 때는 저녁 여섯시에 집에 갔더니 귀가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때렸고 중간고사 한문 시험을 98점을 받았다고 때렸고 한국 축구가 져서 화가 난다는 이유로 때리기도 했다. 그런 어이없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잠이 든 것 같아서 티브이를 끄면 보고 있는데 왜 껐냐고 갑자기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곤 했다. 보호받고 안전함을 느껴야 할 집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책으로 도피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늦게 잔다는 이유로 자주 맞곤 했는데 매일 밤 네 식구가 함께 잠자리에 드는 일은 곤욕스러웠다. 가족이 자는 동안에도 티브이는 늘 켜져 있었고 도무지 잠들지 못한 나는 아빠가 틀어놓은 바둑 채널이나 스포츠 채널을 보곤 했다.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천장에 어른거리는 빛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천장은 다른 색으로 물들었고 그걸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런 밤들 중 하루였다. 별다른 특별한 계기도 깨달음도 영감도 없었다. 그저 고요히 누워 나중에 크면 작가가 되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고은이나 하루키처럼 멋진 계시의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의지할 것 없이 부유하던 그 시절의 나에게 그것은 아주 소중한 목표가 되어주었다. 그후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롯데리아 대신 KFC에서 일하게 되었고 엄마는 농협의 수산 코너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빠 엄마 나 언니 순으로 누워 잠을 청하곤 했는데 엄마에게서는 늘 아무리 닦아도 지워낼 수 없는 짙은 비린내가 풍겼다. 그게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몰라.

우리집의 형편이 아주 개미만큼 나아져서 반지하에 화장실 없는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던 것은 내가 고3 때였다. 대학생이었던 언니에게는 방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고3의 특권으로 두 개 중 하나의 방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침대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방이었지만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은 그때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사방이 곰팡이로 둘러싸인 오백에 삼십짜리 그 집에서 나는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 거기서 대학에 가고 등단을 하고 첫 시집 원고를 썼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은 은밀했다. 주변 모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내가 여공이나 작은 회사의 경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빨리 커서 부모님 빚 네가 대신 갚아야지. 우리 부모님은 주변 모두에게 빚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지켜봤다. 언니는 괜찮은 대학의 회계학과를 다녔으니까 약간의 유예기간이 남은 셈이었고 나에겐 그마저도 없었다. 말이 느리고 멍해 보이는 나를 다들 좀 모자란 애라고 생각했다. 내 목표는 그때쯤 좀 구체적이었는데 일본에 가서 일본어로 글을 쓰겠다. 유미리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2외국어도 일본어로 택했고 일기도 일본어로 썼다(누가 읽을까봐). 나의 그런 목표를 처음 언니와 엄마에게 밝힌 밤이 지금도 생생하다. 둘의 반응은 몹시 흡사했는데 글은 아무나 쓰는 건 줄 아냐? 게다가 무슨 일본어냐, 한국어로도 제대로 못 쓰는 게 무슨. 이런 반응이었다(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때 왜 그렇게 쉽게 수긍했는지 모르겠다. 너한테는 일본은 무리야 절대 못해. 그 말을 그냥 받아들였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솔직히 나도 그런 일이 내 분수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큰 포부와 야망을 갖기에 어울리는 나이였는데, 포기하는 법을 먼저 내면화하면서 자란 게 서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누군가 그때 내게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남 탓을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지지와 응원을 받고 꿈의 크기에 먼저 한계를 설정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면, 하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때부터 일본어 공부를 게을리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참 후회스럽다. 그때부터 열심히 했으면 지금 번역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아깝다. 

학교에서도 반응은 비슷했다. 진로상담을 하며 서울예대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돌아왔던 얘기는, 거기는 아무나 가는 덴 줄 알아?였고 나는 내가 아무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포기해도 작가까지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래 무언가를 원해본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진로상담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안양예고 문예창작과에서 전학 온 짝에게 내 글을 보여주곤 했다. 사실 나는 걔가 전학 오기 전까지 작가는 다 국문과에 가는 줄 알고 경희대 국문과를 늘 1지망으로 늘 생각하고 있었다(캠퍼스가 예뻐서). 걔는 고2 때 전학 왔는데 같은 반이 되면서 절친이 되었다. 국문과 가면 글 하나도 안 쓴다고 문예창작과에 가야 한다며 얘기해줬고 그래서 내 지망도 바뀌게 되었다. 내 눈에는 중학교 때 이미 각성해서 준비하고 예고를 갔다는 사실이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나보다 훨씬 멀리 가 있는 것 같아서 질투가 나기도 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지망을 바꾼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지 않았어도 작가는 됐겠지만, 내 글이 지금과는 달랐을 것 같다.

나는 좀 못나긴 했지만 지금 내가 쓰는 내 글이 좋으니까. 

근데 걔는 내 시를 볼 때마다 너무 외국 시 같다고, 너는 입시에서 떨어질 거라고 그랬다. “우리 선생님이 네 글을 보면~”으로 시작하는 악평을 늘어놓곤 했다. 나는 백일장에도 나가본 적 없고 합평 경험도 전무했고 문예창작과의 존재도 이제 막 알게 되었기 때문에 걔의 말은 내게 좀 절대적이었다. 걔는 나한테 시 대신 소설을 쓰라고 했다. 그래야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입시를 준비하면서 콩트를 많이 썼던 기억이 난다. 근데 난 시를 쓰고 싶었다. 왜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인이 더 멋있어 보였나? 잘은 몰라도 그때 나는 내 성질을 알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나는 내가 소설은 절대 못 쓸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1억원 고료의 장편소설 공모가 있었을 때(지금도 있나?) 나는 등단 후에도 거기 응모해보려고 생각을 많이 하고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상금이 탐났기 때문이다. 물론 A4 세 장까지밖에 못 쓰고 전부 때려치웠다. 상금을 받고 싶어서 그랬던 불순한 의도 때문인지 뭔지 소설은 써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단념을 했다. 상금을 먹튀하는 것을. 내 인생 소설로 쓰면 한 권으로는 부족하지, 그렇고말고. 그거랑 찐소설 쓰는 거랑은 또 다르더라. 

결국 나는 시로 입시를 치렀고 서울예대에 갔다. 나 잘했다.

(사실 재수해서 갔다.)


누군가 조언해주거나 누군가가 앞날을 지도하려고 할 때 꼭 그 말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청개구리 심보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사람이 나 대신 인생을 살아주지는 않으니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 선택도 내 몫이고 그 책임도 고스란히 내 몫이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나 때는 말이야~ 하는 식으로는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런 사람도 있구나, 이게 내가 원하는 반응이다.


나는 과거를 자주 생각하는 편인데 늘 어른들이 했던 말, 교복 입고 다닐 때가 제일 좋을 때다, 나중에 어른 되면 그때가 그리울 거다, 그런 말 나는 다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백억 줄 테니 그때부터 다시 살라고 하면 나는 바로 자살할 거다. 진심이다. 나는 늘 십대보다 이십대가 이십대보다 삼십대가 더 좋았다. 친구가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했다. 야 사십대는 더 좋대, 우리 그때까지는 꼭 살자. 

그때까지는 살아야지. 


올해는 제발 창작지원금 받고 싶다. 천만원이 통장에 있으면 숨이 더 잘 쉬어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