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천 개의 손이 필요하다



밤은 계속된다. 아름다운 밤. 희미한 빛으로 부풀어오르는 밤. 터질 것 같은 밤. 눈물도 간절도 없이 지속되는 밤. 세계의 밤.


꾸지 않은 꿈들의 목록: 無


인간이 원죄를 갖고 있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죄를 짓도록 설정되어 태어난다는 뜻이야. 거기서 자유로운 인간은 하나도 없어. 밤은 죄짓기 좋은 시간이고 꿈을 꾸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릇이지. 


너의 말

너의 말


세상에 네 목숨으로 갚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너의 생명은 네 주변의 아주 몇몇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치를 지닌다.

그러니 죽음으로 무엇을 갚는다는 둥 하는 헛소리는 제발 그만두기를 바란다.

죽음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구에서 네가 만들어내는 이산화탄소가 줄어든다는 것만 빼면.


꾸고 싶은 꿈들의 목록: (약 일 년 전 폐기)


밤은 지속된다. 밤은 끝나지 않는다. 밤은 밤을 아낀다. 너는 너의 얼굴을 만진다. 벌레를 만지는 것처럼 만진다. 더러운 것을 처음 본 아이처럼 만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은 발을 만지는 것처럼 만진다. 폭풍을 바라보는 늙은 어부의 시선처럼 만진다. 나는 네가 조심하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기뻐서 그렇게 떠는 건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어 그냥 뒤에 서서 가만히 있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서 있는다. 침묵. 침묵. 이 시간은 미쳐버릴 것처럼 길고 지루하다. 네가 연극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어째서 그렇게 시간을 들여 밤을 골몰하며 만지고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 세심한 몸짓이 답답해서 발로 차버리고 싶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소리지르고 싶다.


뼈가 부서질 때까지 얼굴을 짓밟아 뭉개버리고 싶다.


내가 이렇게 못됐어. 이제 알겠어?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밤이 지나가기를 바란다. 이 밤이 영원하기를 빈다. 이 밤을 부수고 싶다. 밤뿐인 세상이 도래하길 빈다. 악수하고 뺨 때리고 싶다. 뺨 맞고 울고 싶다. 지금 복도로 나가 뛰어내리면 죽겠지?


좋겠다.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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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죽어. 죽어.


(이틀이 지난 뒤 파일을 열어봄)


내가 너무 화가 많다. 정말 미칠 것 같았나보다. 감정을 그대로 뭉쳐서 종이 위에 패대기쳐놓은 걸 보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걱정스럽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게 너무 많고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정신 차려. 잘 좀 하자. 


집 앞에 ‘SM복싱클럽’이 있는데(진짜 상호임) 거길 좀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라도 때리고 오면 좀 낫지 않을까요? 아 저번 화의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이라고 쓴 ‘시녀들’은 ‘시녀 이야기’가 맞는 제목입니다. 저도 올라온 거 보고 읽다가 생각이 났어요. 요즘에는 단어들이 자꾸 생각이 안 나요. 며칠 전에는 단순한 동사가 생각이 안 나서 말로 풀어 설명했는데 이제는 그 동사가 뭐였는지 어떻게 설명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꾸만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이 든다. 


뒤집힌 풍뎅이처럼.


*


우리 옆집에는 일곱 살 그리고 아홉 살 남매가 살아요. 우리 아이하고도 친해져서 같이 놀이터도 다니고 그래요. 그게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몰라요. 그런데 사정이 안 되어 옆집 아이들이 아이와 놀아주지 못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아이는 그게 그렇게 속상했대요. 


한밤중에 벨이 울려 나가보니 옆집 아주머니께서 찾아오셨더라고요. 잠시만 둘이 이야기 좀 나눌 수 없냐고 하셔서 따라가니 복도에 내놓은 화분을 보여주시더라고요. 그 집 아이들이 키우는 모종이 전부 쏟아져 있고 고추가 전부 짓이겨져 바닥에 뭉개져 있었어요. 매운 냄새가 훅 끼쳤어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래요. 자기가 직접 보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혹시 아이에게 물어봐줄 수 있느냐고 죄송하다며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광경이 믿기지 않았어요. 내 아이가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저는 죄송하다 사과드리고 아이와 이야기해본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했어요. 옆집 아주머니께서는 혹시 아이가 했다고 이야기하거든 남매에게 사과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집에 돌아와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단정한 어둠 속에 마주앉아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어요. 옆집 화분에 대해. 아이는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안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너무나 순수하고 순진한 얼굴로 절대 자기는 아니라고. 그 순간 정말 안 그랬는데 내가 괜히 의심했구나 싶었지요. 역시 내 아이가 그럴 리 없다고. 엄마도 너를 믿는다고 하니, 그치, 나는 안 그랬어, 하고 답하더라고요. 그런데 혹시 정말 네가 안 그랬니. 정말이니. 솔직하게 말해줘. 엄마는 혼내지 않아, 하고 말했지요. 안 그랬대요. 그렇게 이십 분 동안 물으니 아주 작게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내가 그랬어. 화분.” 


어떻게 그렇게 투명한 눈동자로 거짓을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착한 아이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거짓을 끝없이 주장하던 맑은 얼굴이 저는 더 큰 충격이었어요. 저는 최대한 차분하게 그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설명하고 같이 사과하러 가자고 했어요. 


아이는 겁을 먹어 제 뒤로 숨었어요. 그래도 용기를 내서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 작은 어깨가 저는 고맙고 또 미웠어요. 이럴 때 엄마는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어떻게 화분을 그 지경을 만들고 집에 앉아 같이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만화를 보고 장난을 쳤니.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니. 정말 그러니.


물으니 아이는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대요. 제가 몰랐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거래요. 이 예쁜 아이가 문득 두려워지면서도 정말 많이 컸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아이에게 말했지만 사실 저는 진실을 숨기는 데서 지혜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지혜가 나쁜 방향으로 뻗어나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것에 보답받지 못하는 경험을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서툴게 마음을 표현하는 거라고 일단은 그렇게 믿기로 해요. 그날은 누나가 먼저 아이를 찾았고 아이는 누나와 형아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이건 누나 거, 이건 형아 거, 하며 아이스크림을 사서 손을 잡고 돌아왔는데,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아이의 계획과 기대가 전부 어긋나버린 날이었으니까. 


초등학교 2학년 때 지은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어느 날 지은이가 오늘부터 같이 밥을 먹지 않을 것이며 같이 등하교를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아서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이유가 뭔지 물었다. 집에 와서는 잘 때까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었다. 정말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아이를 보며 그때 나를 떠올린다. 마음을 주고 그 마음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은 너무 아픈 거지. 그치만 너도 언젠가 돌려주지 못하는 입장이 되기도 할 거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도 자라는 거겠지. 그걸 지켜보는 나는 불안하고 아프기도 하다. 네가 살아가며 겪을 기쁨과 슬픔을 어쩐지 알 것 같아서. 대신 상처받을 수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묵묵히 옆에 있어주고 싶을 뿐이다.


*


밤중에 침대에 누우면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집은 이십 층이야. 언제든지 뛰어내리면 반드시 죽을 수 있어. 그럼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러다 아이를 본다. 아이의 잠든 얼굴은 천사 같다. 이상한 충만함과 슬픔이 마음 안에 가득 차오른다. 


네가 겪을 여러 처음들로 인해 상처받고 아무 손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내가 옆에 있으려면 나는 더 오래 살아야겠다. 더 오래 살아야만 한다.


법원에서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했고 그는 석방됐다. 세상에는 목숨으로 갚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천 개의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난간에 기대 아래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밤 풍경이 발밑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