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마음이라는 거 요상한 거 그거

금요일이다. 강의가 없는 날이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와서 두 시간 정도 책을 읽고 점심을 먹으며 독일 드라마 <다크> 시즌3를 보았다. 잠깐 침대에 누웠다가 알람 다 끄고 계속 자서 지금 일어났다. 오후 다섯시.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원래 점심 먹고 원고 쓰려고 했는데 하나도 못 쓰고 잠만 자서 지금이라도 조금 쓴다. 시작이라도 해놓으면 약간은 마음이 편하고 그래도 조금은 썼어! 같은 마음이 될 것 같아서. 엉엉.


<다크>를 보다가 잠들어서인지 아포칼립스가 도래하는 꿈을 꿨고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매장에서 미친 듯 물건을 쓸어담아 훔쳤다. 그러다가 사람들에 밀려 일행(가족 아니고 일행인데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을 전부 잃었다. 그들을 다 놓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상하게 불안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는데 왜일까? 훔친 물건 약간을 겨우 챙겨 엄청나게 도시를 헤매고 사람들하고 자리를 두고 싸우고 다시 헤매기를 반복하다가 어떤 고층 빌딩의 사무실 책상 한 칸에서 살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꿈의 공간은 일본이었다. 책상에서 자고 훔쳐온 걸 먹고 그런 와중에 옆 책상의 남자와 친해지게 되었는데. 처음에 어쩐지 너무 양아치 같아서 싫었는데(일본 까불이 아이돌같이 생겼음) 알고 보니 굉장히 개구지고 순수한 면도 많았고 또 갤러리의 매니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꿈이라 정확하지 않음). 우리는 그 갤러리에 걸려 있던 한 그림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게 되었고 어느 날은 책상을 두고 건물 밖으로 나가 종말의 거리를 한참 걸어 갤러리에 갔다. “그곳이 아직 남아 있을까?” “지하라 아마 괜찮을 거야.” 같은 대화를 하며. 무사하게도 갤러리는 크게 손상되지 않았고 나는 그 그림을 보게 된다. 


보게 되었던 순간의 벅찬 마음과 두근거림은 기억나는데 무슨 그림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계의 빛과 어둠을 모두 끌어와 한곳에 응축시켜놓은 섬세하면서도 거친 모든 색으로 그려진 그림 같았던 것 같다. 모두가 집을 잃고 거리로 쏟아져나온 와중에도 나는 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의아했을 뿐 슬프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어쩌면 지금이 더 좋아,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상 위에 누워 건물의 천장을 보며 지도처럼 펼쳐진 금을 세어보며 천천히 잠으로 빠져들던 순간의 떠오를 것 같은 느낌. 더 꾸고 싶은 꿈이었다. 아쉽다. 이렇게 선명히 기억나는 꿈은 내게 많지 않은데. 


그리고 꿈의 전체적인 톤이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 효과로 가득해서 종말 동화 같았다. 라노벨이었다면 『두근두근! 종말 후 만난 세계가 어쩐지 더 재미있어?!』 같은 제목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겠다. 금요일은 함께 우리만의 밤 파티를 하는 날이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밤 파티는 해가 진 후에 함께 차를 타고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보통 햄버거 세트 하나 맥너겟 열 조각 맥플러리 애플파이 등의 음식을 잔뜩 포장해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 영화를 본다. 사온 음식들을 모두 깔아놓은 채. 영화를 본 후에는 거품 목욕을 하며 ‘바다와 꿀집’이라 명명된 역할놀이를 하며 씻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다. 요즘은 아이의 최애 책인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를 자주 읽는다. 그다음 그림자놀이―불 끄고 플래시를 천장에 비추어 여러 동물들을 흉내내며 노는데 나는 주로 뱀을 하고 아이는 주로 토끼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며 현실에 없는 우정을 만들어간다―를 하고 마지막으로 매미와 나무 놀이를 한다. 매미는 팔 년 동안 땅에 있어서 나무가 오래오래 매미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만나고, 짧은 동안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매미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슬프고 재미있는(?) 놀이로 우리의 금요일 밤 파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는 내가 평소에 읽는 책을 자장가 삼아 읽어준다. 그러면 아이는 금세 잠이 든다. 다음날은 주말이니까 실컷 늦잠을 잔다. 


이것은 우리만의 불금을 즐기는 방식이다.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은 금요일이다. 아이는 오늘 유치원을 하원하면서도 선생님께 밤 파티 날이라고 자랑을 했는데 선생님은 “엄마 힘드시겠네”했고 아이는 “엄마도 즐겨요”라고 했다.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아이의 높은 자존감에 가끔 나는 기이함을 느낀다. 내 자식이 이렇게 자기긍정으로 가득할 수 있다니. 엄마도 즐긴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단다 얘야. 물론 엄마도 무척 즐거워!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아이 얘기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다음 육아책이 계약되어 있어서…… 그런데 지금의 생각으로는 그때는 또 그 시점의 아이에 대해 할 이야기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인 백은선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자꾸 다른 얘기만 해서 질리게 만들면 어쩌나 걱정도 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솔직하게 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라고 믿는다. 현재의 나는 너무 깊게 아이와 연결되어 있어 그것에서 떠나 사고할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그게 너무 좋고 가끔은 절망적이다.


인간에게 인간을 믿고 사랑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걸까. 마음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마음을 어떻게 얻고 쓰고 채우는 걸까. 나는 가끔 이 모든 작용을 믿을 수 없다. 기분과 마음은 어떻게 다를까. 나는 내 삶이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을 그저 구경할 뿐인데. 그 안에서 계속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끔찍하다.


예전에는 마음은 무한한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든지 얼마든지 누구에게 주어도 다시 생겨나는 거라고. 내가 잘 모르는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마음을 많이 썼다. 잘 보이고 싶었고 그 마음이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왜 마음을 ‘쓴다’고 할까. 그건 마음이 쓰면 없어지는 거라고 마음의 양에는 한계가 있어 그런 거라고 나는 이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마음을 잘 쓰지 않는다. 내 마음은 귀한 거고 친구들에게 아이에게 그리고 나에게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상담을 시작했을 때(지금은 돈 없어서 종료했다) 선생님은 내게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겨야만 해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웃으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먹는 건가요?”라고 농담을 했다. 나는 정말로 그게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에 익숙하고, 나를 돌보기보다 타인을 돌보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를 분석하게 될 수 있었던 것도 상담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후다. 그때는 그냥 정말로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항상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지적도 많이 받았다. 물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상담실에 들어가기만 해도 눈물부터 난다고 하는데 나는 약 24회기 정도의 상담 시간 동안 운 적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소리 없이 본다면 우리가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힘들고 죽고 싶었던 얘기를 하면서도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새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런 식으로 나를 방어하려고 했던 것만 같다. 나는 늘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했고 어딜 가든 웃긴 애로 보이고 싶어했다. 이런 일들이 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세상은 원래 그런 거고 난 그게 우습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수업을 하며 학생들을 웃기고 싶어한다. 학생들이 웃으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고 학생들이 무표정하면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 두렵다. 나는 늘 광대 짓을 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내가 많이 나아졌다고 느낀다. 누군가 웃어주지 않아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 사람에게 내가 그렇게 큰 영향을 줄 거라는 전제 자체가 착각이며 잘못된 거라는 거, 이젠 아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많고,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 그게 사람들의 이상하고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날은 상담중에 그런 일이 있었다. 내가 안 좋았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면 선생님은 늘 내게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하고 묻곤 하셨는데 나는 거기에 잘 대답을 못했다. “답답했던 것 같아요. 무거웠던 것 같아요”같이 나는 나의 기분을 헤아릴 줄을 몰랐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의 질문이 늘 바깥을 향해 있었던 탓인 것 같다. 내 기분조차 모르는 내가 어떻게 글을 써왔는지 스스로도 대견할 따름이다. 나는 내 상태를 늘 현상적으로 보려고 했던 것 같다. ‘마음’은 지워버린 상태에서 나를 하나의 분석 대상으로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란 뭘까. 마음이 정말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마음과 기분에 일정한 교집합이 있다면, 영혼은 무엇일까?


일단 마음이 ‘쓰는’ 것이라면 기분은 ‘생기는’ 것 같다. 그럼 영혼은? 쓰지도 생기지도 않는 범주에 있는 것 같고 애초에 있었던 것 같다. 어쩐지 그렇게 느껴진다. 영혼이 집이라면 마음과 기분은 가구 같다. 아닌가? 좀더 고민해봐야겠다.


<다크> 시즌3에서 요나스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맞닥뜨린다. 더이상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르타와 만난다. 그때 요나스가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세계를 목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달랐을 거야. 근데 태어나서 관계 맺고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람은 멀쩡히 살고 있고 나는 태어나지 않은 세계를 ‘존재’하면서 지켜보는 건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일 것 같아. 나는 요나스와 마르타가 바로잡으려고 전 생애를 바쳐 애를 쓰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라면 아마 될 대로 되라고 그냥 내버려둔 채 잠적해버리고 말았을 것 같은데. 왜 그 모든 일을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며 바로잡으려 무수한 시간들을 돌아다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 그 정도로 간절할 수 있을까? 평생 동안? 나는 그런 거대한 운명에 잘 접속되지 않는다. 


커튼이 바람에 나부낀다. 나는 자주 데자뷰를 느끼는데 그럴 때마다 천 번쯤 살았던 삶을 다시 사는 느낌이 든다. 문학실에 앉아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아이들을 아주 오래전에도 알았던 것 같고 내가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누군가는 보았을까. 나의 전생을 영화처럼 관람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을 시시티브이 앞에 앉은 경비원처럼 무심한 눈으로 흘끗 보고 있지는 않을까.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평소 먹는 영양제가 있냐고 물었다. “비타민C하고 콜라겐하고 음…… 뭐더라…… 싹…… 싹 보리요?” 내가 말하자 그가 말했다 “새싹보리요.” “아 네 그거요!” 나는 또 단어를 까먹고 있었다. 머릿속이 점점 하얘지면 다 까먹으면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해요. 


나는 부신기능저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 없이 피곤하고 잠에서 깨기 힘들고 짜증이 자주 나고 아침에 입맛이 없다면 피검사를 해보세요. 당신은 부신기능저하일 수 있습니다. 비타민 먹고 밀크시슬 먹고 유산균 먹고 그런 거 다 소용없다면 병원에 갑시다. 피는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왜 살고 있나. 무엇이 인간을 살게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무엇이 검은 구멍으로부터 사람을 끌어올릴까. 무엇이. 희망은 가짜 약속 같고 쥘 수 없다. 나는 내가 싫다. 나는 내가 정말정말 싫다. 다시 존귀함에서 멀어지고 있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점점 없어진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창밖으로 검은 새가 지나간 자리를 한참을 보고 있다가 신발을 신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창밖으로 보이던 그 산에 가봐야지 생각했는데, 나는 집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사 집으로 돌아왔다. 산은 보는 거야. 오르는 게 아니야. 침대에 누워 옆으로 돌아누워 비스듬히 전자책을 기대놓고 책을 읽었다. 나는 책을 좋아해. 책을 읽는 거 책 속의 세계 속에 빨려들어 진공 같은 보호막이 생기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인물에 이입해서 살아가는 시간을. 나는 어쩌면 이렇게 나 자신보다 책 속의 인물에게 더 많이 몰입하는 걸까? 존귀함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한다. 어떨 때는 지난 내 모든 선택이 후회스러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 극한의 피로 속에서 정신이 초롱초롱해지며 눈이 맑아지는 시간이 있다. 


어쨌든 한 가지 면만 가진 사람도 없고 한 가지 성격만 가진 인간도 없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슬프고 기쁘고 이상하고 안도하고 그런 반복을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는 게 내게 남은 삶을 탕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것은 나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