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아름다운 판결, 그리고 냉정한 판결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판결문이다. 그런데, 그 후일담을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일명 ‘아름다운 판결’로 알려진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파기되었다. 대법원은 ‘아름다운 판결’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원심은 이 사건에서의 특별한 사정에 대한 구체적 타당성 때문에 위와 같은 법적 안정성의 요청이 후퇴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는 예외적 사안을 구체적 타당성 있게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위와 같은 법률 해석의 본질과 원칙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무엇이 구체적 타당성 있는 해결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법률 해석의 본질과 원칙에서 벗어나 당해 사건에서의 구체적 타당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1회적이고 예외적인 해석이 허용된다면, 법원이 언제 그와 같은 해석의 잣대를 들이댈지 알 수 없는 국민은 법관이 법률에 의한 재판이 아닌 자의적인 재판을 한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할 것이며, 이는 법원의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해칠 뿐만 아니라 모든 분쟁을 법원에 가져가 보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게 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심히 훼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느낌인가? 왠지 성격도 말투도 외모도 다른 두 사람의 대화 같지 않은가? 나름 드라마 작가이기도 해서 그런지 나는 이 두 판결을 읽으며 두 캐릭터의 설전을 떠올렸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아름다운 판결’을 ‘온판’, 대법원 판결을 ‘냉판’이라고 불러보자. 온판과 냉판은 위에서 인용한 부분 외에도 판결 곳곳에서 팽팽하게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물론 사법체계 안에서 대법원은 최종심이므로 법조인들은 두 판결을 대등한 두 사람의 대화로 비유하는 것에 본능적으로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법도 판결도 결국은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이야기다. 어느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체계나 권위 이상으로 중요할 수 있다.
다만, 그 판단을 위해서는 먼저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아야 한다.


온판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75세의 노인이 있다. 그의 아내는 10년 전에 뇌경색이 발병한 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심한 후유증이 남았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 그는 처 곁에 붙어 병수발을 하느라 다른 일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사는 동네에 주택공사가 지은 서민형 임대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평소 그의 돈을 관리하며 일을 대신 봐주던 따로 사는 딸에게 이 임대주택 계약을 부탁했다. 딸은 담당자를 찾아갔는데, 노인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려면 다시 돌아가서 여러 가지 서류를 떼 와야 한다는 말에 그냥 딸 본인 이름으로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했다. 노인의 아내는 임대주택 입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노인은 그 집에 홀로 살게 되었다. 딸은 이미 결혼해서 다른 도시에 살고 있었다.


문제는 임대기간인 5년이 끝날 무렵 불거졌다. 임대주택법에 따르면 임대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은 집을 비워주거나, 아니면 돈을 어느 정도 더 내고 분양 전환을 받을 수 있다. 노인은 분양 전환을 받아 살던 집에서 계속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주택공사는 노인에게 권리가 없다며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임대주택법상 우선적으로 분양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입주일 이후부터 분양전환 당시까지 당해 임대주택에 거주한 무주택자인 임차인’에게 있는데, 노인은 임대차계약서에 나오는 ‘임차인’이 아니고, 계약서에 나오는 임차인인 딸은 ‘무주택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사는 결국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찬바람이 이는 소장”을 노인에게 보내고 말았다.


온판은 고민했다. 임대주택법의 목적을 먼저 생각해보자. 이 법은 집 없는 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저렴한 살 집을 이 나라 곳곳에 만들자는 법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평생 셋집에 살기보다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사이에 모은 돈으로 내 집 마련을 할 기회를 주자는 법이다. 이 법이 “입주일 이후부터 분양전환 당시까지 당해 임대주택에 거주한 무주택자인 임차인”이라는 요건을 정한 이유는 실제 이 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집 없는 이에게 우선권을 주기 위함이다. 법을 해석할 때에는 법 문구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 법의 목적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노인이 자기 이름으로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딸 이름으로 작성한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고 노인이 이 집의 실제 임차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판은 결국, 노인은 비록 임대차계약서 임차인 난에 나오는 임차인은 아니지만, 임대주택법의 취지상 우선 분양을 받을 수 있는 권리자인 ‘임차인’에는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살던 집에 계속 살 권리가 있으니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논증의 끝에 온판은 이렇게 덧붙였다.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법은 장래 발생 가능한 다양한 사안을 예상하고 미리 만들어두는 일종의 기성복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두어도 예상을 넘어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미리 만들어둔 옷 치수에 맞지 않다고 하여 당신의 팔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 수선해줄 것인가? 우리는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하는 법원이 어느 정도 수선의 의무와 권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의회가 만든 법률을 법원이 제멋대로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률이 의도된 본래의 의미를 갖도록 보완하는 것이고 대한민국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 체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냉판은 다르게 생각했다.


법률의 문언 자체가 비교적 명확한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원칙적으로 더이상 다른 해석방법은 활용할 필요가 없거나 제한될 수밖에 없고, 어떠한 법률의 규정에서 사용된 용어에 관하여 그 법률 및 규정의 입법 취지와 목적을 중시하여 문언의 통상적 의미와 다르게 해석하려 하더라도 당해 법률 내의 다른 규정들 및 다른 법률과의 체계적 관련성 내지 전체 법체계와의 조화를 무시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친구는 역시 말을 어렵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한번 풀어서 얘기해보겠다.


온판이 좋은 뜻으로 고민한 것은 알겠다. 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 문구뿐만 아니라 그 법의 목적도 고려해야 되는 것도 맞다. 문제는, 법에 나오는 문구가 애매한 경우와 딱 떨어지는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다. ‘공공복리’ ‘위험한 물건’ 같은 문구는 그 말 자체만으로는 부족하고 입법 목적을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함께 고민해서 해석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법에 ‘기린’ ‘코끼리’ ‘강아지’ 같은 문구가 있다면 어떨까? 코끼리는 코끼리고 기린은 기린이다. 이런 경우는 딱 떨어지는 의미가 있으니 말 그대로 해석해야 된다. 만약 법을 만든 사람들이 코끼리에 대한 다른 계획이 있었다면 ‘이 법에서 코끼리라 함은 ~을 말한다’는 정의 규정을 두어야 한다.


‘임차인’은 어떤 경우일까? 임차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민사 문제의 기본 법률인 민법이 이미 정하고 있다. 대가를 주고 임대인으로부터 무엇을 빌려 쓰는 계약을 한 사람이다. 계약이란 두 사람의 뜻이 일치해야 하는 것이니까 임대인이 내 물건을 누구에게 빌려준다고 생각했는지도 중요하다. 인상 좋은 할머니를 만나 안심이 되어 계약서를 쓰고 내 집을 빌려드렸는데, 몇 년이 지난 후 갑자기 처음 보는 네오나치풍의 청년이 나타나 실은 전세금도 내 돈이었고 실제 그 집에 산 것도 나와 내 친구들이니까 내가 임차인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할 것인가? 그건 댁들 사정이고, 내가 집을 빌려준 임차인은 할머님이다,라고 하지 않을까?


임대주택법이 민법과 달리 보다 넓은 의미로 ‘임차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려 했다면 그에 관한 정의 규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 규정은 없다. 그런데도 임대주택법의 코끼리와 민법의 코끼리는 서로 다르다고 해석하는 것은 판사 마음대로라는 불신을 낳지 않을까?


그래서 냉판은 “당해 사건에서의 구체적 타당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1회적이고 예외적인 해석이 허용된다면, 법원이 언제 그와 같은 해석의 잣대를 들이댈지 알 수 없는 국민은 법관이 법률에 의한 재판이 아닌 자의적인 재판을 한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아름다운 판결’을 파기했다. 노인은 살던 집에서 떠나야 했다. 그것도 10월 말 ‘엄동설한’의 목전에 말이다.


…역시 가슴 아픈 결말이다. 냉판의 말이 머리로는 이해될지 몰라도 가슴은 다른 말을 한다. 그놈의 ‘법리’가 뭐고 ‘법적 안정성’이라는 게 뭐기에 한 사람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곰곰이 더 생각해보면 다른 측면도 있다.


‘구체적 타당성’이 사람을 위한 것이듯, ‘법적 안정성’ 역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다만 후자의 ‘사람’은 익명의 다수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싼 임대주택에 입주하고 싶은 이들은 많다. 이 사건의 노인 못지않게 힘든 처지의 사람들도 많다. 임대기간이 끝난 후 분양 전환을 받아 평생 꿈꾸던 내 집 마련을 하고 싶은 마음은 다들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임대주택법은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고 선정절차를 거쳐야 집을 빌릴 수 있도록 하고, 일단 빌린 집을 함부로 남에게 빌려주지 못하게 하고 있다. 형사 처벌까지 할 정도다. 그만큼 집 없는 이들의 처지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발 빠른 이들 몇몇이 여러 사람 이름으로 임대주택 수십 채를 확보한 후 절박한 사람들에게 웃돈을 붙여 빌려준다면 어떨까. 집이 이미 있는 임차인이 분양 전환 시기에 갑자기 무주택 요건을 맞추기 위해 실제 임차인은 우리 가족이었다고 말을 맞추어 주장한다면 어떨까. 그로 인해 누군가 절실하게 집이 필요한 이가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 또한 한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이 아닐까. 더 무서운 것은 신뢰의 상실이다. 번호표를 뽑고 묵묵히 몇 시간이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순서대로 정확하게 번호가 불리고 있다는 신뢰다.


세상의 갈등 모두가 선과 악의 대결, 또는 정의와 적폐의 대결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의외로 그중 많은 경우는 선의와 선의의 부딪힘이기도 하다. 임대주택법이야말로 공동체의 아름다운 선의에 터 잡은 법률이다. 임대주택법 제1조는 이 법의 목적은 국민의 주거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법의 근거는 헌법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5조 제3항은 “국가는 주택개발정책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그 명령의 근거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34조 제1항). 그 권리의 기초에는 결국 우리 헌법 질서의 출발점인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10조).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내 벗은 몸을 가리고 차가운 비바람을 피할  지상의 방 한 칸. 슬프게도 그 당연한 권리가 아직까지는 한정된 자원이기에 국가가 ‘노력하여야’ 한다. 그런 현실이기에 임대주택법은 까다로운 요건과 절차들을 정하고, 대법원은 그 요건을 함부로 넓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판은, ‘아름다운 판결’은 실패한 것일까? 의미 없는 짓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법적 안정성’도 ‘법리’도 결국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자칫 그것을 잊기 쉽다. 수학적인 공리公理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미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면 예외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된다. 온판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달리 해석할 수는 없을까? 예외를 인정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닐까? 그 바탕에는 지극한 마음이 있다. 하급심은 대법원과 달리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마주 대하는 재판이다. 거기서 판사는 노인과 그 딸의 표정을 살피고, 목소리의 떨림을 듣는다. 고민하고, 의심하고, 되물어보는 과정 속에서 판사는 서류화할 수는 없는 정보들을 얻는다. 그것을 소송법에서는 ‘변론 전체의 취지’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온판은 이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 그리고 이 노인을 길바닥에 나앉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확신을 얻었기에 예외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공지능 판사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대법원도 고민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판례가 나오기도 한다. 기존의 법 규정상 어쩔 수 없어 판례가 바뀌지 않더라도 법이 바뀌기도 한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온판의 시도는 노인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상상에 불과하지만, 온판이 이렇게 이례적인 판결을 한 데는 숨은 바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판결은 대법원을 설득하기 위한 판결이 아니라 이 사회를 설득하고, 주택공사를 설득하기 위한 판결이 아니었을까. 주택공사 측이 이 판결과 이 판결이 불러일으킨 사회의 반응을 읽고 고민한 끝에 판결을 수용하기로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주택공사도 나름의 입장이 있기에 대법원에 상고하는 쪽을 선택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온판이 이 정도로 지극히 노력했기에 대법원도 쉽게 내치지 못하고 3년이나 고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보통은 몇 달 되지 않아서 이런 자세한 이유까지 쓰지 않은 채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로 끝났을 사건이다. 그 고민의 기간에 노인은 조금이나마 더 삶의 터전을 지키며 숨을 고를 수 있었고 말이다.


이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순간이 있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들처럼 엄숙하고 딱딱한 논리가 계속되다가, 말미에 이렇게 시작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원심에는, 피고 1이 피고 2를 위하여* 이 사건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단지 수고와 번잡함을 피할 생각으로 자신 명의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피고 2가 이 사건 임대차계약의 당사자 본인으로서의 임차인에 해당된다는 판단이 포함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임대주택법상의 ‘임차인’ 개념을 민법과 달리 더 넓게 잡는 해석은 불가능하지만, 혹시 노인을 민법상의 임차인 그 자체로 볼 여지는 없을까? 하는 자문자답이 있는 것이다. 계약 당시 주택공사 측이 계약서 명의와 상관없이 노인을 실제 임차인으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양해했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있다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그런 증거가 있었다면 저렇게 고민 많이 한 온판이 복잡한 법 해석론을 펼칠 필요 없이 이것을 이유로 판단하지 않았을까? 온판은 그러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일이라 계약 당시 주택공사 측 담당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저렇게 볼 만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굳이 ‘이러이러한 판단이 포함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고 선언하고는 꼼꼼히 이리저리 온갖 증거들을 되짚어보더니, 역시 증거가 없어서 그렇게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난 왠지 사람 냄새를 느꼈다. 아쉬움, 미안함, 안타까움 같은.


…혹시 냉판 씨, ‘츤데레’였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