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사이다’ ‘팩폭’으로 인기 있는 일부 유튜버들의 방송을 보다보면 이런 식의 논리가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 노조가 떼쓰고 파업을 해서 해마다 임금이 올라간다. 이거 계약자유의 원칙을 침해하는 거다. 노동도 상품인데 수요 공급에 따라 시장이 결정해야지 이게 뭐냐,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국가 맞냐?

- 자꾸 이상한 법을 만들어서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놈들이 외려 힘들게 노력해서 재산 형성한 집 주인한테 ‘을질’하도록 만드는 거, 이거 신성한 소유권을 침해하는 거다. 이 나라 공산주의냐?

- 적법하게 재개발사업 승인받아서 나가라는데 안 나가고 농성하고 버티는 놈들, 불도저로 밀어버려야 법치주의 국가다. 이 나라는 ‘떼법’이 우선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꾸 ‘법’ ‘법질서’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곤 하는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 및 이를 구체화하는 법률들을 공부하고 적용하며 살아온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저런 얘기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맥락은 다르지만 어느 뉴스 기사에서 봤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니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이 새끼야. 한 글자도 안 맞아. 이 X새끼야.”


전체를 보지 못한 채 코끼리 몸의 부분 부분만을 만져보고는,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어느 부분만을 떼어서는 ‘이것만이 코끼리다!’라고 단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위험하다. 그리고 진짜 나쁜 건 알 만큼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은 민사법의 대원칙이지만,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아니다. 보다 상위법인 헌법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고, 이에 따라 계약자유의 원칙은 노동자의 임금 결정에 있어서는 일부 수정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합의했다 하더라도,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면 고용계약은 무효가 된다. 헌법 제32조 제3항이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라고 못박아놓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연재의 ‘사회권적 기본권’ 부분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여기에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발전의 오랜 역사가 있고,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이러한 수정을 당연한 법질서로 수용한 수정 자본주의 국가들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이 신성불가침인 나라에 살고 싶은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8세 어린이가 탄광에서 15시간씩 ‘적법하게’ 근로계약에 따라 노동하던 찰스 디킨스 시대의 영국으로 갈 일이다. 그런 이들 중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어본 이는 드물겠지만.


소유권 역시 신성불가침의 것도 무제한의 것도 아니다. 소유자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그 소유물을 사용·수익·처분할 권리가 있다(민법 제211조). 소유권의 범위와 한계는 법률로서 정해지는 것이며, 제한 가능하다.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집 주인의 민법상 소유권은 공공복리를 위하여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의하여 제한되고 있다. 임차인 보호를 위한 규제는 ‘을질’ 또는 ‘떼법’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법질서’ 중 일부분인 것이다.


도시재개발법 등에 의한 사업 승인을 받았다고 하여 ‘불도저로 밀어버릴’ 권리가 발생하는 것 역시 아니다. 법은 구역 내 거주자에 대한 협의 및 보상을 위한 상세한 절차 역시 규정하고 있을뿐더러, 설령 법에 따라 나갈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말 그대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지 직접 사람을 끌어낼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법원에 명도소송明渡訴訟을 내어 상대방에게도 자기 입장을 주장할 기회를 보장한 후 판결을 받아내야 하고, 판결을 가지고 적법한 집행절차를 밟아야 한다. 상대방이 무허가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이나 임차권이 없는 사람이라도 현실적으로 그 땅에 몸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면 최소한 민법상 ‘점유권’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소유권과 별도로 ‘점유권’을 인정하고 소유자라 하더라도 적법 절차를 거쳐야 자기 소유물을 점유자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점유제도 역시 무려 로마법 이래의 오랜 역사가 있고, 그 주된 근거에 관한 학설은 ‘평화설’이다.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얘기다.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코만, 또는 뒷다리나 꼬리만 보지 말고 코끼리 전체를 체계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법은 평등하지 않다.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할지 모르지만, 법 자체는 평등하지 않다.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 같은데, 이런 얘기다. 법은 그 제정 주체와 절차에 따라 다양하고(헌법, 법률, 명령, 조례),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각 분야를 규율하는 개별법들도 무수히 늘어나고 있으며, 이 많은 법들이 또 법 개정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다보면 필연적으로 법과 법이 충돌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이를 해결하려면 법도 위아래가 있어야 한다. 각자 자기 입장에 따라 유리한 법조문 하나씩을 들고 와서 아우성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판사가 나 모르겠다고 도망가지 않으려면 우선순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법체계는 엄격한 위계질서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다. 오래된 법보다는 개정된 새로운 법이 우선하고(신법 우선의 원칙), 주택임대차보호법같이 특수한 사항을 규율하기 위해 만든 법이 일반법인 민법에 우선하며(특별법 우선의 원칙), 법의 체계상 상위법이 하위법에 우선한다(상위법 우선의 원칙). 그리고 이 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최상위법이 헌법이다.


그리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권리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기구에 관한 수많은 조항들 중에도 제일 꼭대기에 있는 규정이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조항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최고의 헌법적 가치이자 헌법과 국가의 존재 이유다.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권리나 법 원칙과 충돌할 때 우선순위를 비교해서 제한하거나 후순위로 돌릴 수 없다. 앞서 본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제한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적인 목적이며, 헌법을 정점으로 한 법질서는 모두 이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자유도 평등도 시장경제도 계약자유의 원칙도 소유권도 국회도 대통령도, 대한민국 자체도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내가 대단한 휴머니스트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문명국가의 법체계 자체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으면 서점에 가서 아무 헌법 교과서나 한번 펼쳐보기 바란다.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인간을 위한 도구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존엄한 것은 대한민국도 아니고, 한민족도 아니다. 인간이다. 여기서의 인간이란 무슨 거창한 집단으로 묶여져 추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다. 국가는 굶주리지도, 피 흘리지도 않는다. 굶주리고 피 흘리는 것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이 당연한 이치를 거꾸로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역사를 들먹이며 민족이나 국가같이 개개 인간을 초월한 위대한 존재가 있고 개인은 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전체주의고 파시즘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이들이 내세우는 거창한 집단이 아니라 그로 인해 실질적인 이득을 얻는 개인을 봐야 한다. 재판을 할 때도 각종 단체가 당사자인 경우들이 있다. 종중도 많고 무슨무슨 기념사업회, 무슨무슨 동지회, 전우회도 많다. 소속 회원이 수천 명, 수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재판을 해보면 재판에 관여하는 사람들, 아니 그 재판이 열리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 자체가 열 명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단체 직함으로 월급을 받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그 단체 소유 땅이나 건물을 임대해서 수익을 올리면서 주기적으로 회원들에게 회비나 기부금을 내라고 연락하는 사람들이다. 소송이 벌어지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 사람들끼리의 재산 분쟁이다. 이런 단체들의 상당수는 사람들의 도덕적 부채감, 연고주의, 소속감 등을 자극하여 단체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개인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비즈니스일 때가 많다.


이런 점에서 영화 <변호인>에서 곽도원이 연기한 고문 경찰이 국가보안법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송강호가 연기한 변호사에게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냐고 고함치는 질문은, 그리고 내가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한 자도 빠짐없이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인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틀렸다.


“니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이 새끼야. 한 글자도 안 맞아. 이 X새끼야.”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인간의 존엄성 역시 다르지 않다. 계몽주의, 인본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한 근대 시민혁명 이래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어왔지만 헌법에 직접 인간의 존엄성 조항이 규정된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1949년 제정된 독일의 헌법인 독일기본법 제1조 제1항이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끔찍한 국가 범죄를 떠나서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각국의 최고법원 중 인간의 존엄성을 직접적인 판단의 근거로 가장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난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자유’를 유달리 강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우리 헌법에 ‘인간의 존엄성’ 조항이 처음 규정된 것은 1962년 제5차 개정헌법이다. 4·19로 수립된 민주정부를 군사 쿠데타로 전복시킨 세력이 초헌법적인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추진한 개헌이다. 이때 ‘인간의 존엄성’ 조항 신설과 함께 헌법 전문에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가 추가되었다는 것, 그리고 같은 정권에 의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극도로 억압하는 유신헌법이 추진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짓궂은 농담 같기도 하다.


헌법학자들은 민주화 이전 시대의 우리나라 헌법을 ‘장식적 헌법’으로 평가한다. 대외적으로 과시용으로 번드르르하게 되어 있을 뿐 규범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헌법 규범과 현실이 일치하는 헌법을 규범적 헌법normative constitution이라고 한다. 독일의 법학자 뢰벤슈타인Karl Löwenstein의 분류다. 


헌법이란 외국에서 그럴듯한 명품을 장식용으로 수입한다고 끝나는 무엇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정점으로 한 헌법적 가치의 피라미드가 현실에서도 구현되도록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과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여러 순간에, 가치관이 대립되는 여러 장면에, 진짜로 ‘인간’을 그 중심에 놓고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값싼 감상주의도 아니고 ‘떼법’도 아니다. 그것이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문명국가 법질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엄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이야기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