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능력주의와 노오력주의

연재 제목으로 맨 처음 고려했던 건 ‘우리가 바라는 공정한 지옥’ ‘공정하기라도 했으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등이었다. 그만큼 ‘공정함’이 우리 사회의 중심 화두이기 때문이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수저론’은 처음 나왔을 때는 비유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21세기의 계급론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대학입시 제도를 둘러싼 수시/정시 논쟁, 법조인 양성 제도를 둘러싼 로스쿨/사시 논쟁, 취업 경쟁에서의 공정성 논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관련 논쟁… 


여기서 말하는 공정성이란 한 사회에서 좋은 대학, 번듯한 일자리같이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헌법상의 평등 원칙과 결부된다. 반칙과 특혜가 난무하는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분노는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동력이다.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원칙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되기까지 숱한 혁명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다. 세습되는 권력과 특혜에 대한 저항은 현대 민주국가의 탄생 이유와도 같은 것이다. 입시, 취업, 부의 상속 등의 영역에서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기득권층의 반칙과 특혜는 결국 헌법이 금지하고 있는 ‘사회적 신분’을 세습하려는 시도이기에 반헌법적이다. 이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문제는, 그 분노의 대상이 광범위해지고 정도가 심해지다보니 시험 점수에 의한 자원 배분 외에는 모두 불공정한 특혜이고 반칙이라고 공격하는 일종의 ‘공정 근본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험 점수야말로 조작과 특혜가 개입될 여지없이 오로지 잠을 줄여가며 책상 앞에 앉아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로 측정되는 것이기에 공정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력 근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수능 점수 이외에는 불신하면서 수시로 합격한 학우들에게 ‘수시충*’ ‘지균충*’이라는 혐오의 레테르를 붙이는 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주장에 대해 취업 시험에 힘들게 합격해 정규직이 된 사람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반발하는 입장에서 특히 이러한 사고방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배려하기 위한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에 대한 반발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사회적 배려는 ‘감성팔이’ 또는 ‘떼법’에 불과하고 철저한 자유경쟁과 결과에 대한 승복만이 공정하다는 것이다. 경제 영역에서의 시장 근본주의와 통하는 사고방식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는 충분히 납득이 된다. 구조적으로 기회가 줄어드는 저성장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노력뿐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공정성’에 대해서는 되짚어볼 점들이 많다. 


이들이 치를 떨며 비판하는 ‘감성팔이’가 아니라 이들이 지지하는 원칙과 시장 논리를 철저히 관철하는 사고실험을 해보자. 내가 기업주라면, 우선 ‘왜 시험 점수에 따라 사람을 채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부터 던질 것 같다. 기업주 입장에서는 기업의 이윤 극대화가 최대의 관심사다. 회사에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이 최고의 인재다.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든 공채 시험 수석이든 회사에 돈을 벌어다주지 못하면 잉여인력이고 무임승차자다. 만일 아무런 법적․사회적 제약이 없다면 기업주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금수저’부터 채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금수저 주변에는 금수저가 있다. 인맥, 네트워크는 강력한 자산이다. 마케팅을 하든 자금 조달을 하든 사업에 필요한 인허가를 받아오든 강력한 인맥이 있는 금수저는 기업의 큰 자산이다. ‘엄빠 찬스’를 쓸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인질을 데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녀가 다니는 기업을 위해 팔이 안으로 굽을 고위 관료나 은행 간부들은 많다.  


금수저가 동이 나면 명문대 간판을 가진 사람부터 채용할 것이다. 명문대생이라고 더 일을 잘 하느냐고? 그거야 알 수 없지. 다만 확실한 것은 금수저 주변에 금수저가 있듯, 명문대생 주변에는 명문대 선후배들이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학벌주의 연고주의가 옳은가 그른가 백분토론을 하고 앉아 있는 직원보다 “형, 저 ○○학번 누군데요, 저번 동문회 때 뵀죠?”라며 인허가 부서 공무원 또는 대기업 구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직원이 필요하다. 


재능이 뛰어난 창의적 인재도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물론이다. 기업에 떼돈을 벌어줄 인재를 마다할 기업주는 없다. 웃돈을 주고라도 모셔온다. 다만, 그런 인재는 애초에 그리 많지 않고, 이미 알아서 어딘가에서 모셔갔거나 스스로 창업했다. 특채가 아닌 공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그런 인재는 아닐 확률이 높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 중 대부분은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성실히 잘해낼 사람들이다. 그런데, 뽑자마자 당장 주어진 일을 잘해낼 가능성이 높은 직원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미 그 일을 잘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찾는 것이다. 경력직 채용이 늘어나는 이유다. 


이런 식으로 죽 따져보면 공채 시험은 기업주 입장에서 로또 긁기나 다름없다. 게다가 요즘은 출신 대학도 집안 환경도 가린 채 ‘공정하게’ 뽑으라고 사회가 난리다. 블라인드 채용이 강요되는 것이다. 그래서 심층면접도 도입하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 자가 정말 뽑아놓으면 기업에 돈을 벌어다줄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실제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은 시험을 보는 능력하고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이런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뚫기 위해 다년간 노력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성실성은 담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입장이 다른 것이 또 인간, 정규직이 된 후에 월급 루팡으로 돌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 기업주 입장에 서보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그런데 시험을 통한 경쟁만이 공정하고 시장경제에 맞는 거라고? 내가 왜 당신의 ‘노오력’에 대해 보상해야 되는데? 그거 ‘감성팔이’ 아냐? ‘떼법’ 아닌가?


…대답이 어렵다면 시장 논리만으로 답을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답하자면, ‘공공성’ 때문이다. 


그렇다. 겉은 자유경쟁 및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포장되어 마치 냉정한 시장 논리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시험을 통한 자원 배분 역시 효율성의 요구보다는 공공성의 요구가 더 큰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훨씬 효율적인 수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채용, 그것도 ‘블라인드’ 공개 채용을 기업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다만 그것이 ‘공공복리’에 부합하기에 정당화된다.* 시험 만능을 주장하는 당신 역시 ‘사회적 배려’ 대상자인 것이다. 


당신이 죽어라 외우고 있는 평생 한번 쓸지 안 쓸지 모르는 영어 단어나 시사 상식이 실제 업무능력을 보여주는 지표여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가 우연히 타고난 금수저만이 기회를 독식하는 사회보다 다수에게 행복할 기회를 줄 수 있기에, 그리고 노력에 사회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에 사회는 시험을 통한 취업이라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노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공공성에 기반을 두고 있듯이, 능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 역시 공공성과 관계없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능력에 따른 차별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쉽지 않은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우선 왜 타고난 ‘금수저’는 사회적으로 평가받으면 안 되고 타고난 능력은 평가받아야 되는가? 타고난 재산이나 신분에 따른 사회적 자원 배분을 정의롭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타고난 능력에 따른 배분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연성’에 대한 보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양자가 다를 것이 없는데 왜 어떤 종류의 우연성은 배척되고 어떤 종류의 우연성은 보상받는가?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가 대를 이어 타격 천재로 맹활약하는 데는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왜 재벌 2세가 회사를 물려받는 것에는 비판을 할까?


‘공공복리’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일을 잘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면 성과를 낸다. 스포츠 선수가 잘해서 팀이 이기면 팬들이 행복하고 팀과 관련된 사람들이 돈을 번다. 경영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경영자 자리에 오르면 주주도 직원도 거래처도 소비자도 득을 본다. 반대로 그 일을 할 능력은 없는데 ‘금수저’라는 이유로 주전 선수 자리를 꿰차거나 회사 경영자 자리에 오르면 팀이 지고 회사가 망한다. 물려받은 재산을 펑펑 쓰며 사는 것은 개인 자유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회를 함부로 줘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손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능력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 역시 그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능력이 필요한 능력인지부터 사회를 떠나서는 규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혼자 사냥하는 치타라면 사회와 무관한 개인의 고유한 능력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나만 해도 문자 발명 이전 시대에 태어났으면 밥만 축내는 식충이였을 것이 확실하다. 반대로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발명은 예전 같으면 ‘밥만 축내는 식충이’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먹방 스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대학입시에 필요한 ‘수학능력’도 마찬가지다. 시험 점수를 잘 받은 개인으로서는 수학능력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단순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좋은 대학에서 좋은 교수에게 배울 기회는 한정된 자원이다. 이 자원을 가장 능력 있는 사람에게 배분해야 사회적으로도 최선의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다. 대치동에서 부유한 부모의 전폭적 지원 하에 최고의 사교육을 받으며 공부에만 전념한 학생이 받은 점수와 지방에서 부모 지원 없이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공교육만으로 공부한 학생이 받은 점수를 똑같이 평가할 수 있을까? 장애까지 있는 학생이라면?


어차피 시험 점수라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지표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성과는 아니다. 학업에서 더 큰 성과를 낼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잠재능력’을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양 다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맨발로 뛰는 육상 선수와 최신 공법으로 만든 운동화를 신고 뛰는 선수가 달린 기록을 똑같이 평가하는 스카우트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핸디캡에 대한 가중치를 줘야 비로소 진짜로 능력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다. 학업이든 직업이든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과제를 끊임없이 해결해나가는 것이 진짜 능력이고, 그걸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핸디캡을 가진 소수자들에게 우대조치를 취하는 것은 단순히 시혜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잠재능력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한 노력이다. 꽃은 어디에서든 피어난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이지.


노력도 능력도 그 자체로 당연히 보상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기에 보상받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발 더 나아가 볼 수 있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중 특정 계층, 특정 인종, 특정 성별에게 기회가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는 소외되어 있다고 하자. 지금 현재로서는 그 특정 사람들의 능력이 더 뛰어난 것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기회를 독점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길일까? 앞에서 노력에 대해 사회가 보상하는 이유는 단지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보상받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린애들조차 소꿉놀이를 계속하고 싶으면 친구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인형을 양보한다. 친구들이 삐져서 가버리면 혼자 인형을 들고 있어봤자 놀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은 공존을 위한 것이다. 

평등은 평등만으로 이룰 수 없다.

그것이 평등을 향한 출발점이다.



7회부터는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