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답변이라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구매했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책 제목이다, 정도? (나는 끝까지 읽었다는 점을 굳이 밝혀둔다) 어렵지만 중요한 질문이다. 평등이란, 공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 하고 섹시한 질문만 던져놓고는 요리조리 다양한 입장만 제시하고 시청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열린 결말(?)에 가깝게 책을 썼다. 나는 그러지 않겠다. 내게 대단한 식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범답안이 있기 때문이다. 출간된 1971년 이후 50년째 세계적으로 ‘정의’에 관한 가장 표준적인 해석을 제공하고 있는, 말하자면 ‘수학의 정석’에 해당하는 명저가 있다. 샌델보다 훨씬 먼저 하버드 로스쿨 교수로 재직했던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正義論』이다. 


물론 수학이 아니기에 롤스의 정의론만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비판과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이 대치동 일타 강사식으로 이게 정의다! 라고 책을 쓰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사실 샌델은 롤스의 제자인데 스승이 정립한 정의론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며 자신 나름의 입장을 위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덧붙이기로 하고, 우선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 가능한 한 쉽게 내 나름대로의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롤스의 정의론이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근대적, 민주적 헌법체제를 갖춘 국가들이 추구하는 평등 개념(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치동 일타 강사식으로 롤스 정의론의 핵심, 요즘 말로 ‘킬링 포인트’만을 추려낸다면 두 가지다. ‘무지의 베일’, 그리고 ‘최소 수혜자 배려’. 문장으로 풀면 “사람들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라면 최소 수혜자에게도 이득이 되는 사회계약에 합의할 것이다.”가 되겠다. 어려워 보이지만 절대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동네에서 발야구를 하는 애들도 알 법한 얘기다. 코찔찔 다섯 살부터 덩치 큰 열 살까지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 동전 던지기로 팀원을 나눠 발야구를 하기로 했다고 치자. 어느 팀에 덩치 큰 열 살들이 많이 배정될지 동전을 던지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동전을 던진 결과가 편중되면 게임은 해보나 마나다. 코찔찔 팀에 걸리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20 대 0으로 지는 재미없는 게임만 반복하게 되니 의욕 없고 화만 나서 발야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집에 가게 된다. 판이 깨지는 것이다. 


똑똑한 아이들이라면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룰을 정할 것이다. 동전 던지기 결과 코찔찔 다섯 살들이 많이 배정된 팀에게는 5점을 먼저 주기로 하는 등의 적절한 어드밴티지를 주기로. 자기가 운 나쁘게 어느 팀에 걸릴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이런 합의가 가능하다. 자기가 이기는 팀이 될 걸 미리 안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그 팀에 속하게 될 것을 안다면 그 운 좋은 아이는 손해 보기 싫어서 악착같이 우길 것이다. 그런 게 어딨어! 스포츠는 공정해야지. 정정당당하게 실력대로 붙어서 졌으면 20 대 0이든 100 대 0이든 승복하는 게 정의야! 


롤스 정의론의 탁월한 점은 ‘무지의 베일’이라는 가정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리기 어려운 이유도, 세상 온갖 이슈에 대해 공정하다 불공정하다 죽자고 싸우지만 입장이 좁혀지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각자에게 이미 정해진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는 말은 모두가 합의할 수 없는 정의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기는 게 정의고 내가 유리한 게 정의니까. 


이래서는 영원히 입씨름을 해도 공통의 원칙을 세울 방법이 없다. 그래서 롤스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한 것이다. 만약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능력, 사회경제적 지위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하는 원칙을 정한다면 어떤 룰을 선택할 것인가. 내가 곧 태어날 태아인데 내가 빌 게이츠 손녀로 태어날지(정말 좋겠네) 아프리카 난민 캠프에서 태어날지 알 수 없다면, 내가 축구선수로 뛸 운명인데 손흥민 몸으로 태어날지 문유석 몸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인생 뭐 있어, 묻고 더블로 가! 외치며 100 대 0의 분배 원칙을 택하는 이도 있긴 할 것이지만 다수는 그런 ‘올인’은 겁낼 것이다. 그렇다고 0 대 100의 ‘역차별’을 선택할 리도 없다. 내가 이기는 팀으로 태어날 수도 있거든. 50 대 50 공산주의를 택할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기는 팀으로 태어났는데 그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면 그건 억울하니까. 


70 대 30 정도면 어떨까. 내가 이기는 팀에 걸릴 경우 100은 아니지만 70 정도 갖고 있으면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운 나쁘게 지는 팀에 걸리더라도 30이면 그래도 인간다운 삶은 보장될 것 같다. 여기서 70 대 30이란 내가 임의로 예시한 것에 불과하다. 차등은 있되 최소 수혜자도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분배 원칙을 정할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롤스는 ‘무지의 베일’ 외에도 한 가지 가정을 더 덧붙였다. 각각의 개인이 합리적이며 상호 무관심하다는 가정이다. 무슨 뜻이냐면, 남이 더 잘 되는 것에 대한 고통이 내 이익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만족을 상쇄해버리는 사람, 30을 받더라도 70 받은 자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워서 0 대 100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편익이 전혀 증진되지 않는다)는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가정에서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 무조건 50 대 50으로 하든지, 아니면 운에 맡기고 차라리 100 대 0에 걸든지(역시 극좌와 극우는 통하는 것인가). 


롤스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다. 그의 정의에 관한 제1 원칙은 먼저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런데 자유는 불평등을 낳는다. 사람마다 처한 처지와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사회려면 무엇이 필요한지가 정의에 관한 제2 원칙이다. 제2 원칙은 기회균등 원칙과 차등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회균등 원칙은 먼저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보장된 상태에서의 경쟁이어야 그 결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차등 원칙은 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무지의 베일’하에서라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위와 같은 원칙들에 합의할 것이고,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정의’라는 것이다. 


익숙한 구조 아닌가? 지금까지 설명한 헌법의 기본 구조와 일치한다. 정의 제1 원칙은 국민의 기본권 및 자유의 보장에 해당하고, 제2 원칙 중 기회균등 원칙은 형식적 평등, 차등 원칙은 실질적 평등에 해당한다.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현대 민주주의 헌법의 토대인 존 로크, 루소의 고전적 사회계약론을 더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이다. 


‘무지의 베일’과 함께 또 하나의 킬링 포인트인 ‘차등 원칙’은 곱씹어볼수록 깊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하다. 이 원칙은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먼저 최소 수혜자를 배려하기 위한 조치들이 차등 원칙에서 나온다. 누진세가 대표적이다. 소득에 따라 세율이 높아지는 것은 불평등하지만 빈부 격차를 줄이고 복지 재원을 마련하여 최소 수혜자에게 이득이 되므로 정당화된다. 복지 제도나 지원금 제도, 할당제나 가산점 제도 등 다양한 생존권 보장 장치,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의 근거가 된다. 


반대로, 최대 수혜자들이 받는 높은 보상 역시 최소 수혜자에게도 이득을 가져와야 정의로운 것이다. 회사 CEO가 연봉 100억을 받는다고 해도 그가 경영을 잘해서 회사 직원들 모두의  월급도 오르고 스톡옵션 받은 주식 주가도 올랐다면 그의 연봉은 사회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경영을 엉망으로 해서 회사가 어려워졌다면 당연히 그의 높은 연봉은 부당하다. 경영을 잘해서 회사 이익이 늘었다고 해도 그 늘어난 전부를 자기가 가져가고 회사 직원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면 그의 연봉은 정당화하기 어려워진다. 


월드컵 4강을 이끈 박지성,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이끈 손흥민이 군 면제를 받는 특혜는 이들이 군 복무 대신 멋진 축구를 계속 보여주는 것이 힘들게 일하는 많은 국민들에게도 기쁨을 주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아파트를 재건축하고 도심을 재개발하는 것은 조합원들만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원과 도로를 기부채납하고 도시를 보다 안전하고 쾌적하게 만들 때 정당화된다. 차등 원칙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윈-윈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롤스의 정의론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그로 인한 폐해를 반성하고 사회국가 원리를 도입한 현대 복지국가의 이상을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롤스의 정의론 역시 비판받는다. 좌파가 보기에는 우파적이어서 비판받고, 우파가 보기에는 좌파적이어서 비판받는다.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최초에 합법적으로 취득한 정당한 소유권이라면 배타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정의롭다고 보며, 그로 인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롤스를 비판한다. 내 처지가 유리한 쪽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인간은 자기 이득을 위해 이러이러한 선택을 할 것이다, 라는 롤스의 논리 전개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가치판단을 회피한 것이라는 문제제기다. 샌델은 인간에게는 추구해야 할 옳은 행동, 즉 미덕이 있고, 정의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공동선이라는 미덕을 중심에 두지 않는 것은 공허하다고 본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공동체주의’라고 부른다. 글쎄. 샌델의 비판도 이해는 가지만, 과연 롤스가 공동선이라는 미덕을 부정해서 이러한 이론을 정립한 것일까? 롤스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경제학 모델을 설명하듯 무색투명하고 냉정하게 논지를 펴고 있지만 결국 이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아주 오래된 지혜, ‘더불어 살자’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나누고 배려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벌떼같이 논리 없는 감성팔이다, 공동체의 미덕이라니 꼰대질이다라며 악을 쓰니까 그런 이들도 납득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논리를 치밀하게 구축한 것이 아닐까 씁쓸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롤스의 정의론이 공정과 정의 문제를 뚝딱 해결해주는 요술 방망이는 아니다. 롤스는 그저 기본적인 생각의 틀을 제공해줄 뿐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최소 수혜자에게 과연 어느 정도 이득을 주어야 정의로운 것인지, 그것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나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는다. 롤스는 차등 원칙보다 기회균등 원칙 및 정의의 제1 원칙인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최소 수혜자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경우들인 것이다.


예를 들면 ‘타다’와 택시 기사들 사이의 분쟁 같은 경우다. 시민들 중에는 쾌적하고 편리한 타다를 선호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차량 공유 플랫폼 사업은 세계적인 추세이므로 우리도 혁신을 위해 이 추세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도 많았다. 제러미 벤담식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따르면 ‘타다’ 영업을 허용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이고 사회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택시 기사들의 생존권을 침해하게 된다. 시청 앞에서 분신자살하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롤스의 정의론은 공리주의만으로는 소수를 보호할 수 없다고 보기에 최소 수혜자 배려를 요구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누가 어디까지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타협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정치다. 정치는 사람들의 삶을 건 투쟁에서 타협점을 찾는 지난한 과정이다. 다양한 타협안이 논의되었지만 결국 결렬되고 타다는 더이상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마사 사건도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2006년에는 시각장애인들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부여하는 복지부령이 다른 사람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결정을 했다. 그러자 절망한 시각장애인들의 반발이 이어졌고 3명이 마포대교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잃었다. 국회는 위헌결정에도 불구하고 상위법인 의료법에 동일한 내용의 규정을 넣는 법개정을 하여 극단적인 상황을 저지했고, 개정법에 대하여 제기된 헌법소원에 대해 헌재는 2년 만에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복지정책이 미흡한 현실에서 안마사가 시각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며 실질적인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소수자인 시각장애인들을 우대하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으므로 시각장애인들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합헌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정의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헌법이, 그리고 롤스의 정의론이 제시하는 방향은 분명히 있다. 더 많은 자유와 창의, 혁신을 보장하고 장려하는 것이 우리 헌법질서의 근본이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일자리와 산업 구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다만 자유와 혁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한 대안이 없는 최소 수혜자들을 그냥 희생시킬 수는 없다. 혁신가들은 뒤처진 이들도 함께 살 수 있는 윈-윈 방안을 고민해야 하고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소 수혜자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면, 안타깝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직 충분히 창조적인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혁신이 사회 전체적으로 낳는 편익이 충분히 크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율주행 기술이 더 발전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차량 공유 플랫폼 사업이 낳는 혁신과 이익이 충분히 커진다면 기존 택시업계 종사자들을 흡수하거나 다른 직종으로 전환하기까지의 단절을 책임져줄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개별 기업에게도 사회 전체에도 생긴다. 시각장애인이 안마 외에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일자리들이 충분히 생긴다면 누구든 안마사를 할 수 있도록 법은 쉽게 개정될 것이다. 이것이 발전이다. 자유가 사회를 견인하되, 그 속도가 누군가를 낙오시켜 쓰러지게 만들지 않도록 평등이 제어하는 것. 무조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도 아는 것. 어쩌면 그 망설임의 순간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