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헌법은 다양한 자유의 카탈로그를 제시하며 이를 보장하고 있다.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듯한 풍성한 메뉴판이지만 감동할 필요는 없다. 자유는 국가나 헌법이 우리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고유하게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동하고, 직업을 갖고, 학문을 추구하고, 뭔가를 표현하고 등등 멋진 무엇을 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자유. 그것은 그저 홀로 있는 내 공간 안의 자유,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일 것이다. 뭘 거창하게 하기 이전에, 태어난 내 모습대로 그저 있을 자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슬프게 되뇌던 독백 같은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있습니다, 애기씨.”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이렇게 헌법 조문으로 적어놓고 보면 뭔가 멋져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지식인에게나 걸맞은 권리 같다. 착각이다. 자유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생활만 보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신독愼獨을 강조하셨다.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말고 더욱 삼가고 경계하라는 말이다. 선생은 “도에 들어서기 위한 가장 긴요한 수련이 신독”이라며 “홀로란 말은 왕래가 없는 고요한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싹트는 자신의 마음속 자리를 가리킨다”고도 했다. 인격 수양을 위한 마음가짐으로서는 훌륭한 말씀이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자기억제를 요구하는 잔인한 말씀이다. 매 순간 순간, 마음속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불경스럽지만 율곡 선생조차도 홀로 있을 때에는 온갖 찌질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데 오천 원 지폐를 건다.


더구나 ‘도리’도 ‘죄’도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홀로 있을 때에도 어그러지지 않도록 생각조차 삼가야 할 ‘옳음’이 ‘마땅히 아녀자는 지아비를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라면 어떨까. 또는 ‘동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죄악이다’라면? 이러한 ‘옳음’에 위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는지 타인들이 엿보고 폭로하려 든다면, 신상털이를 해대며 낙인찍는다면, 너의 생각을 밝히라며 질문을 해댄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라거나 십자가를 밟아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일까.


예시를 바꾸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요되는 ‘옳음’이 지금 시대에 한창 인기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보호이든, 동물권이든, 환경보호이든, 일본 상품 불매이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위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내심內心의 자유라고 한다. 양심, 사상, 학문, 종교, 그 어떤 생각이든 개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국가나 사회가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를 내면적 무한계설內面的無限界說이라고 한다. 


내심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이를 강제로 알아내려는 시도를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보장되고, 간접적인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내심을 알아내려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를 양심 추지推知(미루어 생각하여 앎)의 금지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 개새끼, 해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사생활의 성채 안에서 개인은 유별날 자유가 있다. 털 숭숭 난 아저씨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앉아 있든 말든, 하루 종일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든 말든 남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불편한 속옷을 입든 말든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노브라’를 선언한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졌던 모욕과 공격을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그건 유별날 자유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적 자유다. 그걸 ‘지적질’하는 행태들이야말로 유별날 뿐이다. 나는 가끔 서울 밤하늘 가득히 ‘남이사’라는 세 글자를 띄워두고 싶어진다.


사생활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것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다. 그런데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나오고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가 ‘반대합니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은 찬성, 반대 대상이 아니고, 공적 자리에서 개인적 선호를 밝힐 대상 역시 아니다. 문명국가라면.


자신에게 어떠한 실질적 해도 끼치지 않는데 단지 자기 선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남들과 다른 이를 공격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생태계의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제각기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욕망도, 선호도, 고통도 제각기 다르다. 한때 유행했던 ‘파검 VS 흰금 드레스’ 사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뇌가 색을 인지하는 패턴의 차이에 따라 같은 드레스를 누군가는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으로 인식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자기 방식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자율성은 행복추구권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이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한 것이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다. 


상관없어, 네가 게이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

레즈비언이건, 트렌스젠더의 인생을 살던.

넌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내 자신의 방식대로 아름다워.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니까.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사람에게는 불온할 자유도 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국가의 반역자로 처벌한 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자유다. 어떤 불온한 생각도 처벌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반역의 계획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면, 혼자 쓰는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다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생각에는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변화의 씨앗이다. ‘불온하다’는 온당하지 않다는 뜻이고, ‘온당하다’는 판단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알맞다는 뜻이다. 무엇이 온당한지 불온한지는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결정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그 기준도 달라지는 것이다. 다양한 생각의 공존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유별날 자유나 불온할 자유는 비교적 쉽게 그 필요성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비루할 자유’일 것 같다. 추잡하고, 너절하고, 더럽고, 비겁하고… 그럴 자유라니 본능적으로 그런 것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행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인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생각과 취향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그것을 강제로 끄집어내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내면이, 사생활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쉽게 외부로 드러날 위험에 놓인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것이 기업의 주 수입원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무료로 제공되는 소셜미디어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어떤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영상을 클릭하는지, 어떤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 그들은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거래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툭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현상으로서 도덕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결합된다. 진영 논리가 강화되고 논쟁 대신 전쟁이 공론의 장을 지배할수록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치밀한 논리나 실질적인 정책으로 싸우는 것은 힘들고 대중의 성마른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신 주기가 훨씬 빠르다. 그래서 ‘사생활’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공직자의 자녀가 음주운전을 한다든가, 공직자의 남편이 요트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일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 권력형 비리가 개입되었는지는 공적 영역의 일이지만 그 외에는 개인이 각자 책임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의 근원은 대부분 부메랑이다. 예전에 상대를 공격할 쉬운 무기라고 환호하며 찔러댄 결과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 살 깎아먹는 경쟁이다. 도덕이 무기가 되는 사회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인류는 그런 사회를 여러 번 시험해보았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을 겪었고, 크롬웰과 칼뱅의 엄격한 종교 윤리에 기반한 공포정치도 보았으며, 이기심을 버리고 노동을 신성시하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겠다는 문화혁명과 캄보디아 폴 포트의 대학살도 목도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율법과 도덕, 가문의 명예를 명분으로 한 폭력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모순 덩어리고 위선적인 것이 현실의 인간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높은 기준을 충족할 것을 강요하면, 하물며 개인의 사생활과 생각까지도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흐린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발가벗은 치부까지 낱낱이 보아야 할까. 굳이?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들에 대한 무차별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는다. 중요한 것은 타인들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는 것,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며 타협하는 것,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아닐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의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