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법치주의라는 사고방식

자유에 관하여 이야기하려면 먼저 법치주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둘이 무슨 상관이냐고? 법치주의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는 자유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널 지켜줄게! 하는 애틋한 사이인 것이다. 


이 둘이 이렇게 애틋하고 달달한 사이라는 게 영 믿기지 않고 어색한가? 그럴 만도 하다. 둘 사이에 관한 서양과 동양의 스토리텔링이 완전히 다르고, 우리는 동양 문화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법치주의 하면 법가法家 사상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중국 전국시대, 특히 그 무시무시한 진시황 시대를 지배했던, 도덕보다 법을 중하게 여겨 형벌을 엄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주장한 사상이다. 법치주의라니 법에, 다스릴 치治에 뭔가 꼰대스럽고 억압적인 스멜이 물씬하니 법가 사상을 연상할 법도 하다. 


하지만 오해다. 법치주의는 서양에서 법가 사상과 완전히 반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발전한 개념이다. 영국의 전제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오랜 투쟁 과정에서, 왕의 변덕과 횡포로부터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왕의 지배가 아닌 국민의 대표가 제정한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여 관철해낸 데서 유래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헌법질서는 진시황을 따르고 있지 않다. 


아래에서 살필 법치주의의 여러 가지 특징 역시 그 역사적 맥락하에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법치주의는 전제 왕권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즉 제멋대로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박탈하는 것에 제약을 가하기 위해 발전했다. 그런데, 21세기인 지금 중세적인 전제 왕권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형식적으로라도 민주주의를 도입한 나라가 대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정도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제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법치주의는 어떤 의미일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수결에 기반한 민주주의 역시 자칫하면 폭군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변덕과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도 법치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이 뿌리 내려 있어야 한다. 이제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여서는 안 된다. 사고방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법치주의라는 사고방식’의 주요 특징들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법학적 사고방식’이기도 하고, 판사들이 재판할 때 명심해야 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미리 경고하자면, 그다지 화끈하지 않고, 사이다 같지도 않고, 좀 답답하고, 짜증나고, 가끔 불편하다. 인기 있을 리 없는 특징들이다. ‘핵인싸’ 스타일이 아니다. 인기 있었다면 굳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다.


첫번째는 신중함이다. 상대방 입장도 들어보아야 한다. 증거 없이 함부로 믿지 말아야 한다. 판사들이 배우자에게 인기 없는 이유다. 배우자가 어떤 일 때문에 한참 흥분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본능적으로 직업병이 발동하곤 한다. 그건 이쪽 얘기고, 반대쪽 얘기는 들어봤어? 증거는 있대? ……물론 이러다 경을 치곤 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필요한 사고방식이다. 특히 사람들의 주의력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끝도 없이 많은 매체가 경쟁을 벌이는 미디어 환경에서는 더더욱 중요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극적이고 선명한 주장에 주의력을 빼앗기기 쉽다. 의식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주장보다는 증거, 신념보다는 과학, 감정보다는 이성에 무게를 두고 유보적이되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논쟁적인 이슈에 접근해야 한다. 답답하고 어렵지만 보다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본 기사 몇 줄만 보면 뻔해 보이는 일을 갖고 경찰, 검찰을 거쳐 1심, 2심, 3심까지 재판을 하도록 시스템을 만든 데는 이유가 있다. 신속하고 손쉬운 정의를 위해 사람을 물에 던져 가라앉는지 뜨는지로 마녀인지 여부를 판단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참 미개했었다고 비웃지만, 마녀사냥은 지금 이 순간도 인터넷 여기저기서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법치주의 안에서 신중함이라는 가치는 먼저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표현된다. 증거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단정하지 말고 주의 깊게 지켜보기. 쉽지 않지만 필요하다. 지금 돌을 던지고 있는 나 또한 언젠가 억울하게 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적 안정성으로 표현된다. 법적 결론이 변덕스럽게 휙휙 바뀌면 시민들은 자신의 행동이 적법한지 법에 위반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자유는 금지되지 않은 모든 것이고 법은 최소한의 금지여야 한다. 그런데 금지의 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면 시민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 법은 정의로워야 하지만, 동시에 예측 가능해야 한다. 신중하지 않은 선의는 왕의 변덕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두번째는 상대주의다. 절대를 고집하지 않는다. 법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법은 인간사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들만 햄릿처럼 반복하고 있을 수 없다. 인간 세상에 백 퍼센트 명확한 일은 드물지만 법정에서는 언제나 승패를 가려야 한다. 판사는 모르겠다는 이유로 재판을 거부할 수 없다.


명확한 정답이 없는 인간 세상에서 언제나 결론을 내려야 한다면? 방법은 하나다. 주어진 조건하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 최대한까지는 힘들면 최소한은 무엇인지 포기하지 말고 논증하고, 논증한 끝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분쟁을 방치하는 것 자체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더라도 결론이 나고 나면 여하튼 일단 그 일은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세월만 간다면 영원히 거기에만 매달려 있어야 한다. 불확실성은 패배 이상의 고통이다. 인생을 좀먹는다. 기업의 경우에는 더 심각하다. 자연과학 수준의 정밀한 결론을 위해 재판을 십 년간 하고 있으면 그사이에 기업은 망한다. 차라리 현재 수준에서의 결론을 빨리 내주어야 손절할 기회라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병이 생긴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정말 뭐라도 하고 싶다. 개 구충제를 먹어서라도, 기 치료를 받아서라도, 굿을 해서라도, 안수기도를 받아서라도 기적을 만들고 싶다. 속시원한 완치를 약속하지 못하는 현대 의학은 미덥지 않다. 온통 오진, 의약품 오용, 의료 사고만 눈에 들어오고 현대 의학이라는 게 아직도 해명하지 못한 것 투성이 아니냐며 불가지론에 빠지게도 된다. 그 의심이 다 맞을 수 있다. 완전한 치료법은 없다. 부작용 없는 치료법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최선인가? 그나마 현재 수준에서 상대적으로 확률이 높은 방법이라도 시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법정에서 내리는 결론 역시 다르지 않다. 오류 가능성을 전제로 한 상대적인 결론인 것이다. 절대적 진실을 추구하다가 영원히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법은 ‘입증책임’이라는 장치를 고안해두었다. 기본적으로 분쟁의 양 당사자에게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증거로서 입증할 책임을 부여한 후, 재판에서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여 배제하고 입증된 사실들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입증 과정 역시 끊임없는 비교의 연속이다. 어느 쪽이 제시한 증거가 더 신빙성이 있느냐에 대한 상대 비교 끝에 더 우월한 증거를 제시한 쪽이 이기게 된다. 그렇기에 겸허해야 한다. 100 대 0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51 대 49로 이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절차적 정당성이다. 이는 분쟁 당사자 모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옳고 그름, 선악, 피아의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전쟁의 논리이거나 종교의 논리지 법의 논리가 아니다. 법치주의는 어느 한쪽을 악으로 몰아 청산하려는 태도와는 맞지 않는다. 법은 기본적으로 혁명이 아닌 점진적 개선, 전쟁이 아닌 평화, 굴복이 아닌 타협을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양쪽 모두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절차’가 중요해진다. 법치주의의 핵심은 권선징악이 아니다. ‘적법절차’다. 앞에서 언급한 가치상대주의, 법적 안정성, 중립성 등을 보장하기 위해 법은 절차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가치를 중심으로 하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을 도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각자의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승복시킬 수 있겠는가. 사실 인간사회 분쟁의 본질은 총만 안 들었지 전쟁이나 다름없다. 법은 그 전쟁에 최소한의 교전 수칙을 제공한다. 아무리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로 죽이고 있어도 포로는 어떻게 처리할지, 부상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도적 조치는 어떻게 할지 등에 관해서는 서로 약속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결론을 위해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반칙이다. 반칙에는 대가가 따른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열정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내로남불’이라는 비난과 함께. 교전수칙을 어긴 이상 상대방이 이를 준수해줄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개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던 가치조차 쓰레기통에 던져지게 된다.


그래서 법은 때로는 진실보다 절차적 정당성을 우선시한다.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이 그 한 예다. 위법하게 얻은 증거는 아무리 진실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원칙이다. ‘실기失機한 공격방어방법의 각하’라는 제도도 있다.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나 증거라 하더라도 상대가 대응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숨기고 있다가 재판 종결 직전에 기습적으로 제기하면 재판장이 이를 채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승복시킬 수 있는 승리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싸움은 반복될 뿐이고, 지금 이겼다고 해도 영원히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에 관한 이 이야기들이 뻔하고 고루하게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이 모두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이 큰 힘을 얻은 사회의 모습을. 


과학적 객관적 증거보다 내 편의 정파적 이익을 우선시하고, 보편적 이성보다 분노 감정과 혐오 감정을 우선시하고, 내 편이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니까 선이 승리하는 것이 중요할 뿐 수단, 방법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은 위선이고 나약함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 정치세력이 이런 사고방식을 공공연히 유포하고, 대중이 이에 동조하는 모습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유감스럽게도 지구 곳곳에서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라고 다르다고, 다를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답답하고 지루한 법치주의가 사망한 곳에는 속시원하고 화끈한 파시즘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기 마련이다.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 승리 연설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자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희망, 통합, 품위, 과학, 그리고 진실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You chose hope, unity, decency, science, and, yes, truth.)


남의 일로만 보지 말고 이 선택의 의미를, 그리고 이 선택에 의해 쫓겨나는 자가 행한 일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