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모든 일의 시작엔 한 통의 편지가 있었다. 적어도 마르탱 게르 혹은 엑스라고 자신을 불러달라는 노인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편지를 쓴 사람은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은 수년 전 기밀 해제된 미 국방성 기록보관소의 문서를 통하여 이미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기도 하지”라며, 노인은 목소릴 잔뜩 낮춘 채 속삭였다.) 여하튼 아인슈타인은 1939년 5월 어느 화창한 오후, 벚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내다보이는 서재에서 그 편지를 썼다. 온통 오크목 책장으로 빼곡한 서재가 가뜩이나 더 어두워 보인 건, 편지를 쓰고 있는 노老과학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침울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을 켜지 않은 서재와 달리 창밖은 밝고 환했다. 그 빛과 어둠의 대조가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든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아인슈타인의 얼굴에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문장을 다듬은 과학자는 잉크병에 펜을 담갔다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는 쓰던 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봤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이름 모를 새가 노래하고 있었다. 아름답군. 평소에도 물리학 전공자답게 간결하고 명료한 언어만을 구사해왔던 그 노과학자는, 새가 날아간 뒤에도 한동안 부드럽게 떨리는 가지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다워. 

어쩌면 인류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는 중요한 편지였다. 굳은 결심을 하고 펜을 잡기 전, 아인슈타인은 며칠 동안 불면에 시달렸고, 잠깐 잠이 들었을 땐 악몽에 사로잡혀 깨어나곤 했다. 꿈은 언제나 비슷한 상황에서 시작하여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끔찍한 장면으로 끝났다. 꿈속에서 그는,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에 나타날 ‘우주선’이라는 기구에 탄 채 지구 밖에 있었다. 멀리 보이는 지구는 어려서부터 상상해왔던 것처럼 푸른 에메랄드색이었고,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차가운 광물질의 별들 사이에서 생명의 온기를 띠고 아름답게 빛났다. 꿈에서도 그는 지금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름답군. 정말 아름다워. 

그러다가 문득 꿈속의 아인슈타인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것이 매일 밤 꿈에서 반복되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렸고, 그 기묘한 기시감에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소리쳤다. 안 돼! 하지만 이미 멀리 보이는 지구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마치 태양의 중심에서 엄청나게 높은 온도로 핵융합반응이 일어나듯, 지구 내부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듯했다. 안으로 녹아드는 지구의 갈라진 틈으로 붉은 용암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게 꿈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현실이라는 걸 알았고, 먼 지구로부터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눈물 흘렸다. 결국 세상은 파멸되고 말 거야. 꿈을 꾸면서 아인슈타인은 한 음절씩 천천히 발음했고,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늙어 주름진 피부와 베개 위에 흩어진 하얀 머리칼이 눈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어쩌지? 만약 히틀러의 제3제국이 연합국보다 먼저 그 가공할 무기를―이탈리아인 물리학자로서 미국에 망명해 있던 그의 동료 엔리코 페르미는 그것을 핵무기라고 불렀다―손에 넣는다면 지구 전체가 어떤 위험에 봉착할지를, 아인슈타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두 남자를 떠올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모습이 죽음의 사자를 연상케 했던 그들은, 사실은 연합군 정보국에서 파견된 과학자와 정치인이었다. 그중 한쪽은 아인슈타인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때 스위스의 이론물리학 연구센터에서 몇 달간 동료로 지내기도 했던 그 물리학자의 이름은 레오 실라르드였는데, 현재 그가 미합중국 정부를 위하여 어떤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기도 했다. 실라르드 옆에 서 있던 음울한 표정의 남자가 누구인지도 역시 잘 알았다. 방문 전에 실라르드가 자신과 동행할 사람에 대하여 미리 언질을 주고 양해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미합중국 정부의 경제학자이자 대통령의 친구였던 알렉산더 작스였다. 그들이 가져온 정보가 얼마나 위급한 것인지는, 그게 적힌 종이를 손에 꼭 쥐고 있는 작스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도대체 어머니 얘긴 언제 나오는 거죠?”

나는 이야기를 듣다 말고 물었다. 우리 둘이 마주앉아 있는 테이블 위엔 휘갈겨 쓴 메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노인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쪽지들이었다. 결국 난 마르탱 게르 혹은 엑스, 그러나 사실은 이완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의 회고록을 집필해주는 일을 떠맡은 상태였다. 

“수고비는 충분히 주겠네. 약속하지.” 처음에 노인은 그렇게 말했고, 선수금이라며 약간의 돈을 건네기까지 했다(물론 너무 적은 돈이라, 사실 원고지를 사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형식이나 문체는 상관하지 않겠네. 어느 정도의 각색이나 상상을 곁들여도 좋아. 다만 원하는 건, 내 얘길 진실되고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해달라는 것뿐이야. 그 누가 읽어도 나의 생애, 나의 삶 속으로 푹 빠져들 수 있게끔 말이지.”

이렇게 말하며 엑스, 아니 마르탱 게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은 예의 그 듬성듬성한 앞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래도 내가 머뭇대자, 그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오래되어 빛이 바랜 신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난 이 사람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정말 궁금했다네.”

그러면서 노인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 여길 보라고. 이 경쾌하면서도 진지한 문체와 기이하고 독특한 내용 말일세. 비록 현재는 침묵하고 있지만, 난 이자야말로 진정한 작가라고, 언젠가 다시 세상에 나타나 우리가 잃어버리고 만 이야기를 되찾아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지.”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내 표정이 궁금하다. 그 신문지 위엔, ‘단편소설 당선작, 김희석 「균형의 진실」’이라는 글자가 선명했으니까. 저게 대체 몇 년 전 일이지?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데 노인이 말했다.

“어떤가?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지, 이제 이해하겠나? 난 우연히 자네의 소설이 실린 이 신문을 봤다네. 그리고…… 거기서 자네 역시 프사이를 가졌음을 느꼈고 말이야. 그런데 뭐랄까. 내가 상대방의 눈을 보며 프사이를 발휘한다면, 자넨 좀 다른 방식으로 그 힘을 쓰는 사람이더군.” 

“프사이라고요? 내가요? 웃기지 마세요. 그리고 난 이제 글 같은 거 쓰지 않아요. 대체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따위 것을 끼적거리고 있나요? 역시 생각해보니 안 되겠어요. 회고록은 없던 얘기로 하죠.” 

그러나 엑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의 손을 잡았다. 그 앙상한 몸에서 나온 힘이 엄청나게 강해서 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프사이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자네가 모든 걸 완성하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정말이야. 그러니 부탁함세. 내 회고록을 집필해주게나.” 

나뭇가지처럼 마른 그의 손가락을 통해 따뜻한 온기 같은 게 흘러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자리에 다시 앉고 싶어졌다. 

“……좋아요.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쓰겠어요. 대신, 제가 쓰고 싶을 때까지만 쓰기로 해요. 어느 날 갑자기 더는 쓰기 싫어진다면, 그땐 저를 놔주세요. 아셨죠?” 

그제야 노인은 손아귀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떨어져 있던 빛바랜 신문지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린, 매일 오후 두시 도서관 매점에서 만나는 사이가 됐다. 엑스의 얘길 듣고 기록한 뒤 정리하여 한 권의 회고록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첫번째 날, 노인은 내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 날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주게나. 그냥, 미스터 엑스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그게 내겐 가장 익숙한 이름이니까 말이야. 정 어색하면 마르탱이라고 불러도 좋아. 그것도 싫으면 그저 이완이라는 본명을 불러도 상관없지. 어쨌든, 할아버지라고는 부르지 않았으면 하네.”

미스터 엑스(그래서 지금 나는 그를 이렇게 기이한 호칭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는 독특한 의고체 문장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보였는데, 마치 사극의 어설픈 조연 하나가 브라운관을 벗어나 현실세계로 툭 떨어진 듯 기묘했다. 

“아마 자네는 깜짝 놀랄 거야. 내가 겪어온 모든 것들을 듣는다면 말이야. 나는 세상 그 누구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신기한 일들을 직접 겪고 봤으니 말일세.”

이렇게 말할 때 엑스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양미간을 가리켰다.

“여하튼, 고마워. 만약 누군가가 기록해주지 않는다면 나의 과거는 무無가 되고 말 텐데, 자네 덕분에 내 이야기들은 영원히 사라질 운명을 면하게 되었지. 그러니 자네는 어떻게 보면 내 삶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말할 때 엑스의 얼굴은 왠지 무척이나 간절해 보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지 않는다 해도, 일어났던 일들은 일어난 것 아닌가요? 그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온전한 현실일 테니까요.”

내 대답에 노인은 피식 웃었다.

“자넨 아직 순수하군. 하지만 난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그 누구도 기록해두지 않은 일들이, 마지막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현실을. 그러니 부탁하네, 내 말을 최대한 정확히 기록해주게. 보다시피 난 늙었고, 게다가 손도 온전치 못해.”

그러면서 엑스는 의수로 내 오른손 끝을 살짝 건드렸다. 여전히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었다. 


두번째 날 노인은, 아니 미스터 엑스는 신문지로 포장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열어보게나.”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이게 뭐죠?”

내가 망설이자, 엑스는 직접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선물일세. 앞으로 내 말을 기록하려면 이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거기서 나온 건 그야말로 엄청나게 오래되어 보이는 소형 녹음기였다.  

“집에 있는 걸 가져왔지. 이래 봬도 꽤 성능이 좋은 걸세. 한때는 최고급이었거든.”

그는 녹음기 한쪽 구석에 박힌 상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의 닳아 흐릿해진 SONY라는 로고가 보였다. 

“사실 소니와 나 사이에도 잊지 못할 일들이 정말 많았지. 이것만 해도 당시, 그러니까 내가 소니에서 중책을 맡고 있을 때 사장인 마사루 씨가 내게 직접 선사한 기념품이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노인은 주름진 오른손으로 녹음기에 새겨진 SONY라는 네 글자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 얘기도 앞으로 차차 들려주게 될 걸세. 그러니 이제 시작해볼까?”

노인은 등에 지고 온 커다란 갈색 가방에서 마이크를 꺼내 연결하더니 녹음 버튼을 눌렀고, 느린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휴대폰에 녹음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이렇게 해야 제맛이라며 하도 애절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결국 난 그 낡아빠진 녹음기를 떠안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가장 먼저 하겠다고 했고, 나 역시 그게 좋겠다고 동의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룬 회고록을 적어나가는 데 있어서, 그를 세상에 보내준 여성의 사연이 가장 앞쪽에 등장하는 것은 순리에 가까운 일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한 엑스는 어머니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이틀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대해서만 한없이 긴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할아버지, 도대체 어머니 얘긴 언제 나오는 거죠?”

그리하여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을 때, 노인은 정색을 했다. “이봐, 희석군. 날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아, 죄송해요.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엑스가 빙긋 웃었다. “좋아, 이번엔 넘어가주지. 앞으론 조심해달라고.” 그러나 밝혀두건대, 난 우리 이야기의 기나긴 여정이 끝나던 그 순간까지 노인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지 못하고 말았다. 이완, 마르탱 게르, 엑스. 이 세 개의 이름은 모두 가짜 같았고, 설령 그 모든 게 진짜였다고 해도 이젠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엑스에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심지어는 본인조차 모르는 진짜 이름이 있는 것 같았고, 때로 나의 임무는 그가 가진 단 하나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느껴졌으니까. 

“이런 순진한 젊은이 같으니라고. 정말 모르겠나? 나는 지금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일세. 그러니 잠자코 들어보게, 서두르지 말고 말이야.”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니, 고집스럽게 하던 이야길 계속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비밀스러운 편지에 대한 사연이었다. 


실라르드와 작스가 가져온 정보는 베를린에 파견되어 있던 연합군 측의 첩보원으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그 첩보원은 제3제국의 한 연구소에서 타자공으로 일하던 중년의 독일 여성이었는데, 작스는 정보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그 여자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아인슈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 말 많은 경제학자는, 노老물리학자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실라르드가 팔꿈치를 툭 쳤을 때에야 겨우 입을 다물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박사님. 제가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정말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작스는 정말로 미안해했고, 쉴새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다행히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마음은 금세 풀렸다. 그는 최고의 과학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관대한 사람이었다. 다만 또한 최고의 과학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쓸데없는 말로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상황을 아주 싫어했을 따름이었다. 

“박사님, 이 메모를 한번 읽어봐주십시오.”

실라르드는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속기실에서 일하는 그 중년 여자가 빼냈다는 정보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아인슈타인은 한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쥔 채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이럴 수가. 결국 그들은……?”

메모를 다 읽은 아인슈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박사님. 읽으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우라늄을 이용한 신무기의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독일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들이 국가의 명령을 받고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메모의 가장 아래쪽에 적혀 있지요.” 이렇게 말하며 실라르드는 메모지 하단에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독일은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유럽 최대의 우라늄 광산을 봉쇄한 상태입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박사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아인슈타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네. 결국 그자들은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겠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무엇을 하면 되지? 당신들이 내게 원하는 건 대체 뭔가?”

그러자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며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작스가 앞으로 나왔다. 그의 눈이 교묘하게 빛났다.   

“대통령께 편지를 써주십시오. 이게 우리들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이 이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미합중국의 대통령에게 한 장의 편지를 써달라는 것. 그 편지의 내용은, 독일보다 먼저 우라늄을 이용한 신무기 개발이 이뤄져야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하는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들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훨씬 더 단호한 표정이었다. 

“지금 날 보고 그런 끔찍한 무기를 만드는 일을 도우라는 건가, 응? 내가 그런 일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 자네들은? 그런 비극은 알프레드 노벨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난 그처럼 회한으로 가득찬 삶을 살고 싶지 않아. 거절하겠네.”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다가 먼저 말을 꺼낸 쪽은 후배 물리학자인 레오 실라드르였다.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말이에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선수를 치지 않는다면, 그래서 저 악마 같은 히틀러가 먼저 그 가공할 신의 무기를 손에 넣는다면, 도대체 인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입니다. 우리 과학자들에게는 인간을 구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노과학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작스를 힐끗 쳐다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하긴 세상의 그 어떤 과학자도 다이너마이트를 만들고 평생 악몽에 시달린 알프레드 노벨 같은 길을 또다시 걷고 싶어하지 않겠죠. 그러니 그냥 생각만 해봐주십시오. 결심이 선다면, 편지를 써서 저에게 주면 됩니다. 그럼 우린 그걸 가지고 바로 백악관으로 갈 것이고요. 루스벨트는 망설이고 있어요. 그는 아직 우라늄을 이용한 새로운 무기의 위력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 상태고, 따라서 히틀러가 그걸 먼저 만들어냈을 경우 지구를 덮칠 끔찍한 위험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지요. 만약 당신 같은 최고의 물리학자가 편지를 써준다면 루스벨트는 분명 당장이라도 무기 개발에 착수할 것입니다. 그럼 결국 박사님은 인류를 구원하게 되는 거고요.” 

방문객들이 떠나자, 노과학자는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인류의 파멸을 앞당기는 데 기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음을 알았다. 만약 그가 편지를 쓰지 않는다면 히틀러가 지구를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편지를 쓴다고 해도, 결국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무기가 이 세계를 완전한 파멸로 이끌어갈 게 틀림없었다. 그가 밤마다 불면에 시달리거나 악몽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인간이라는 종족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펜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 다음 천천히 서랍을 열었고, 거기서 가장 깨끗한 인도네시아산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과학자는 맨 위에 “친애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께”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또박또박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세번째 날, 여기까지 얘기한 엑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마치 자신이 아인슈타인 박사라도 된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런 채로 무척 오랫동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통에, 나는 한마디 질문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작스라는 대통령의 측근과 실라르드라는 동료 과학자를 만나고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부분까지 얘기하셨어요.” 그런 다음 나는 그때까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걸 드디어 질문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아니, 마르탱 게르,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 거죠?”

마르탱 게르라고 부르자, 노인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자네 방금 나에게 마르탱 게르라고 했나?”

그는 이렇게 되물으며 즐거워했고,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잠시 후 노인은 오른손으로 의수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희석군,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생겨난 고대로부터의 기억을 머릿속에 저장한 채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는 법이라네. 다만 그걸 인식하지 못할 뿐. 그러나 그런 모든 태초의 기억들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시 떠올릴 수 있지. 고도의 정신훈련 과정을 거친다면 말일세. 그래, 난 지금이라도 자네를 훈련시켜 자네 몸안에 존재하는 삼십억 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낼 자신이 있어. 그럼 아마 자넨 밤마다 원시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의 꿈을 꾸게 되겠지. 마치 내가 밤이면 밤마다 차갑고 단단한 광물질이 되어 지층 맨 밑바닥에서 말없이 기다리는 꿈을 꾸듯이. 어쨌든,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걸세. 내 진짜 나이를 묻지 말게나. 비록 1945년에 태어나긴 했지만, 내 안에 담긴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길고 영원하니 말일세.”

그날 헤어지면서 엑스는 내일도 시간 약속을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매점 문을 나서는 그의 코트 뒷자락엔 여전히 실밥이 늘어져 있었다. 다음엔 가위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였던 것 같다. 노인의 코트 자락을 깨끗이 정리해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일이 한 통의 편지로부터 비롯됐다는 주장은 어쩌면 말도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쓰지 않았더라도 결국엔 누군가가 그런 편지를 썼을 테고, 만약 아무도 편지를 쓰지 않았다 해도 일어나야만 할 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사람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고, 따라서 모든 일은 결국 그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중요한 것은, 그 편지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단어를 쓰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그 편지가 여러 사람의 손을 돌고 도는 동안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아인슈타인의 서재 밖 벚나무 잎이 하나둘씩 떨어질 즈음, 드디어 세계 최고의 석학이 쓴 편지가 루스벨트의 손에 들어갔다. 그게 1939년 10월 11일의 일이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정말로 폭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또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네. 그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어. 과연 이 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지. 만약 루스벨트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일을 추진했더라면, 아니 어쩌면 정반대로 아예 그 일을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걸세. 내 동생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의수와 가짜 팔을 흔들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당신과 동생에게 말이에요.”

내 질문에 그는 종이컵에 든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한날한시에 태어났다네. 즉 쌍둥이였단 말이지.” 또 한번의 꽤 오랜 침묵 후에 노인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게 뭔지 아나? 그건, 나와 내 동생이 모두 합쳐 세 개의 팔과 세 개의 다리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라네. 우린 결합쌍생아, 아니 좀더 쉽게 말하면 샴쌍둥이였다네. 그리고 그 모든 건 아인슈타인의 편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 내가 동생과 한몸으로 붙은 채 태어난 것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