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비에트연방 국가보안위원회(지금은 KGB라는 약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의장으로 취임하기 위해 루뱐카광장 칠층 건물에 들어서던 순간, 그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일행 중에 한 동양인 남자가 끼어 있는 것을 유심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의 행동거지가 유난히 차분했고 무엇보다도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가 그를 마치 보호색처럼 가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 곁에 붙어서다시피 한 채 나란히 걷고 있는 거구의 남자가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부설 뇌신경학연구소 소장인 알렉산드르 스필킨 교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인민위원회 산하 국립과학위원회 수석위원이자 국립과학아카데미의 종신회원이었으며 얼마 전 간행된 소비에트연방 대백과사전편찬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대백과사전의 제2개정판 서문은 사회주의의 성공과 과학기술의 진보라는 2대 원칙을 간결하고도 명료하면서 힘찬 문체로 설파한 시대의 명문으로 유명했다.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던 몇몇 서방의 기자들은 유리 안드로포프의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취임식에 동행한 사람들의 명단을 재빨리 본국으로 송고했지만, 거기에 왜 저명한 뇌신경학자가 끼어 있는가에 대해선 그리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때 역시 지금과 마찬가지로 각국의 지도층들은 과학기술을 우대하겠다는 공약을 자주 내놨고, 그것을 실천할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지 보여주기 위해 유명한 과학자 서너 명쯤은 곁에 두는 것이 유행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모스크바 특파원 겸 스파이로 파견된 자국의 기자들로부터 받은 사진과 기사를 분석하던 각국의 정보기관들 역시, 거기 무척이나 조그맣게 찍혀 있던 알렉산드르 스필킨 교수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날 유리 안드로포프 의장이 평소 즐겨 입던 모스크바 시내 일류 재단사의 양복 대신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에 더 큰 주의를 기울였다. 하긴, 소비에트연방의 비밀정보 업무를 총괄하는 국가보안위원회의 새 수장이 단골 양복점을 바꿨다는 것은 외국 정보기관들에겐 엄청난 빅뉴스였을 게 틀림없다. 나중에그러니까 소련이 무너진 뒤비밀 해제된 많은 문서를 통하여 밝혀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곳에 첩보원을 심어뒀고, 그것은 크렘린의 권력자들이 이용하는 양복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탓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양복점들에 겉감이나 안감, 그리고 실과 바늘을 납품하는 소상인들마저도 서방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입수해오는 정보라고 해봤자, 다음 주말 열릴 예정인 제차 전당대회 기념 만찬에서 브레즈네프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스페이스 룩을 모방한 미래적 스타일의 회색 양복을 착용할 예정이라든가 하는 등등의 소소한 뉴스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그날 입었던 브레즈네프의 양복이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디자인을 모방한 것이었다는 당시 서방 정보기관의 분석은 훗날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소련의 우주비행사였던 유리 가가린의 우주복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디자인이 바로 1960년대를 풍미했던 스페이스 룩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만약 정말로 유리 안드로포프가 단골 양복점을 바꿔버린 것이라면, 정보기관들은 서둘러 새로운 첩보망을 조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서방의 기자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타자기의 자판을 두드려댔던 것이다.

 

오늘 소비에트연방 국가보안위원회 의장으로 취임한 유리 안드로포프는 스리 버튼의 짙은 회색 싱글 슈트를 입어 파워풀한 이미지를 풍기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날 그가 입은 옷이 평소 즐기던 류드밀라 양복점 스타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에 관하여 유리 안드로포프는 모스크바 시내 모처에서 열렸던 당간부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름지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아닙니까?” 안드로포프의 이 말을 전하며, 그 익명의 제보자는 이제야 그가 했던 말의 의미가 앞으로는 새로운 스타일의 양복을 착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걸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긴, 냉전시대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취임에 관하여 기껏 써 보낸 기사가 겨우 이런 식의 신변잡기에 머물고 말았던 것에 대하여, 무조건 당시의 기자들만을 탓할 순 없다. 비록 브레즈네프가 서방 언론에게 취재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공언하긴 했지만, 공식 행사장엔 엄청나게 많은 보안요원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외국에서 온 기자들이 사전에 미리 보고한 취재 루트를 정확히 따르고 있는지 밀착 감시했고, 더 나아가 어깨너머로 기사를 몰래 훔쳐봤으며, 그러다가 문득 끼어들어 수정을 요구했다. 실제로 어떤 사진기자는 안드로포프가 입은 양복 단추의 로고를 찍기 위해 초강력 망원렌즈를 카메라에 장착하던 중 요원들에게 발각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그들은 기자가 단추를 찍는 척하면서 사실은 보안위원회 건물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고 윽박질렀으며, 기자의 양팔을 잡고 직접 모스크바공항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날 루뱐카광장에 있던 특파원 중 단 한 사람만이 안드로포프 의장을 수행하던 무리에 껴 있던 알렉산드르 스필킨 교수와 그 옆의 동양인 남자에게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은 없어진) 시카고 데일리의 과학 담당 전문기자였던 앤드루 김이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김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민 2세들이 그렇듯이 한국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적어도 그 당시엔 그랬다(나중엔 결국 모국어를 배우게 됐던 듯 보이지만 말이다). 대부분이 정치부 기자들이었던 특파원 무리 속에서, 그는 스필킨 교수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러고는 그가 왜 거기 있는지에 대하여 이상하고도 기이한 호기심을 느꼈다. 덧붙이자면, 과학 전문기자였던 그가 왜 유리 안드로포프의 취임식을 취재하려 모스크바까지 가게 되었던 건지는, 나중에 앤드루 김 본인이 자비로 출판한 한 권의 자서전에 밝혀져 있다. 물론 그 자서전이라는 것이, 다른 대부분의 비슷한 종류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적은 분량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며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앤드루 김의 자서전인 진실을 찾아서는 강원도 W시 외곽에 위치한 자비출판 전문회사 도서출판 북라이프에서 출판됐다. 저자가 자기 돈을 들여 펴낸 책답게, 표지엔 직접 찍은 듯한 전원 풍경이 실려 있고, 큰 글자로 인쇄된 제목 아래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꽤 긴 부제가 적혀 있었다. ‘사십 년 취재 인생에서 알게 된 삶의 지혜와 세상의 비밀!’이 그것이었는데, 물론 짐작하다시피 그 책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상의 비밀 역시 별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던 건, 유리 안드로포프의 취임식장에서 찍은 사진과 한 수상쩍은 동양인에 대한 기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앤드루 김의 자서전을 읽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서전의 심리학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하는 것일까. 지금도 자비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이름 없는 작은 출판사에 가면 수많은 회고록과 자서전 원고들이 산처럼 높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고의 주인들은 자신이 겪어온 모든 일들, 스스로가 기억해낸 삶의 전 과정을 종이 위에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적어내려갔고, 그다음엔 은행에서 돈을 찾아 주머니에 넣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은 보통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되기 일쑤였다. 저자 서명이 들어간 그 기이하고도 이름 모를 책들은 보통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냄비 받침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즉 책들이 처할 운명을 대충 짐작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그런 책 중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비록 구석이긴 하지만 지역 도서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행운을 누린 예가 간혹 있었는데, 앤드루 김의 자서전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했던 것이다.

W시 동북부에 위치한 한적한 주택가 골목 사이엔 얼핏 봐선 그저 약간 규모가 큰 가정집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작은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집 대문 옆에 구리로 만든 작은 현판이 붙어 있고, 거기에 ‘W시립도서관 부설 작은도서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곳은 시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이었고, 보유한 장서의 수도 오천여 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얼마 전까진 주로 어린이용 그림책과 청소년 권장도서 및 베스트셀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시립도서관장이 관내의 부설 도서관들을 모두 둘러보는 행보를 가졌는데, 그때 소규모 도서관의 도서목록을 보고 큰 실망과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마을 곳곳에 있는 작은도서관이야말로 지역주민에게 문화의 힘을 전해주는 모세혈관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중소도시의 일반적인 도서관장들과 달리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품게 된 데에는 사실 그의 과거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행정관료로서 따분한 삶을 살아왔지만, 젊은 시절엔 매년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을 투고하기도 했을 만큼아쉽게도 한 번도 당선되진 않았지만문학과 책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보기에 소규모 도서관에 갖추어진 장서들의 수준은 너무 낮았고 종류도 빈약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도서관장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대책 강구를 위한 회의를 개최했고 많은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도서 기증 활성화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의 가장 특이한 점은, 기증도서의 규모가 일정량 이상일 경우 시에서 명예사서증을 수여하고 감사의 인사가 담긴 조그만 액자를 만들어 해당 도서관에 영구 전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항들이 시립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되자마자 도서 기증에 대한 문의가 쏟아져들어왔고, 한동안은 사서들이 밤샘 근무를 하며 도서관 앞마당에 들어와 쌓이는 책들을 분류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기증된 도서들은 대부분 아무 쓸모 없는 것들로 판명됐다. 사람들은 더는 필요 없게 된 문제집과 참고서가 뒤섞인 낡고 오래된 책더미를 도서관 앞마당에 잔뜩 쏟아놨다. 그런 다음 당당하게 사서에게 걸어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줬다. “나중에 명예사서증이 나오면 이 주소로 보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그들은 유유히 사라졌다.

기나긴 분류작업 끝에 결국 팔십 퍼센트 이상의 책들이 버려지고 나머지가 도서관 서가에 꽂혔는데, 그중에 바로 앤드루 김의 자서전인 진실을 찾아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진실을 찾아서는 원래 버려질 운명의 책이었다. 도서관에는 무명인의 자서전과 회고록은 비치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내부 규정 같은 것이 있었고, 앤드루 김은 그들이 보기에 충분히 무명인이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그의 자서전이 도서관 서가에 진열된 데엔 좀 독특한 사연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다음과 같다.

새로 부임한 도서관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도서 기증 활성화 운동이 막바지에 달했을 즈음, 한 남자가 조그만 용달차에 책을 한가득 싣고 나타났다. 그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이 책을 어디에 놓을까요?”라고 물었는데, 나중에 사서들도 그의 얼굴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할 만큼 지극히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는 것이다. 여하튼, 마침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느라 정신이 없던 사서들 중 한 사람이 앞마당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에 내려놔주시고, 안에 가서 접수증 받아가시면 돼요.” 그러자 남자는 다시 용달차를 그쪽으로 끌고 갔는데, 그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그 용달차 남자가 두고 간 책을 확인하며 사서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기엔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게 확실한 진실을 찾아서가 노끈으로 묶인 채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권 단위로 묶인 꾸러미가 열다섯 개에 달했으니, 장장 삼백 권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앤드루 김……? 누군지 알아?”

누군가가 묻자 다른 사서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중 한 사람이 2010년판 인명대사전을 가져와 뒤졌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유명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두 명의 동명이인이 있긴 했지만, 그들 모두 자서전 속의 그 인물은 아니라는 게 판명됐다. 마침내 가장 나이 많은 고참 사서가 다음날 아침, 진실을 찾아서를 펴낸 도서출판 북라이프의 담당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출판사의 마케팅 부장 겸 운송 담당이라는 남자였다.

수고하십니다. 여긴 시립도서관인데요, 다름이 아니고…… 혹시 그곳에서 책을 출판한 사람의 연락처 같은 걸 알 수 있을까 해서요. 도서관에 그분의 자서전이 수백 권 들어왔는데, 규정상 도로 돌려드려야 하거든요.”

그러나 남자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런 건 고객의 개인정보이므로 절대 가르쳐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서가 다시 한번 간절히 부탁하자, 도서출판 북라이프의 마케팅 부장은 약간 덜 단호해진 목소리로 대충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늘어놨다.

여기에 자서전이나 회고록 출판을 맡기는 사람들이 모두 실존 인물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도서관 사서라고 하셨죠? 그럼 더 잘 알고 계시겠군요. 사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자서전 혹은 회고록이라는 명목하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해요. 그걸 누군가는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지만. 어쨌든, 우리 업계에선 소설과 자서전, 회고록, 이 셋 사이에 별다른 구분을 두지 않습니다. 소설이 스스로 허구임을 드러낸다면, 혹은 허구인 척한다면, 자서전과 회고록은 허구임을 숨기거나 허구가 아닌 척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앤드루 김에 대한 어떠한 개인정보도 우린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는 실제로 앤드루 김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앤드루 김인 척하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요. 아니, 알고 보면 책 속의 앤드루 김이 되고 싶었던 책 바깥의 앤드루 김인지도 모르죠. 그러니 앞으론 그런 문제로 우리에게 전화하지 마십시오.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진 못할 테니 말입니다.”

결국 앤드루 김에 대해 시립도서관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사서들은 어쩔 수 없이 앤드루의 자서전 속에서 저자에 대한 정보를 직접 찾아내기로 했다. 도서관에 근무한 지 삼 개월 정도 된 신참이 바로 그 꼼꼼히 읽기의 중책을 맡았다. “한 글자도 빼지 말고 찬찬히 읽도록 해.” 선배 사서는 그에게 말했다. “분명 어딘가에 저자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을 거야. 만약 이게 백 퍼센트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글자와 글자 사이의 빈 공간까지 허구로 채울 순 없을 테니까.”

앤드루 김의 자서전을 분석하는 과정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진짜로 중요한 것은, 작은도서관 자료실에 보관된 시민 기증도서 선정 내역이라는 파일 속엔 당시 그 모든 작업을 수행한 신참 사서의 기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엔 그가 그 책을 그야말로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정독하며 저자인 앤드루 김이 주장하거나 서술한 갖가지 정보들의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여러 곳에 문의 메일이나 전화, 편지 등을 발송한 정황이 군데군데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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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진실을 찾아서의 저자 앤드루 김에 대한 모든 것

작성자: 김유진


1. 출생: 19○○, 시카고(이민 2세대. 부모는 시카고 외곽 의류 봉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고 함)이 부분에 대하여는 미국 이민국 시카고 사무소 및 시청의 인적자료실 등에 확인을 시도하였으나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음. 의류 봉제 공장은 1990년대 중후반경 중국으로 이전했고, 따라서 더더욱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였음.

2. 학교: 시카고 소재 ○○대학교에서 물리학 전공. 그러나 학교측은 개인 자료의 비밀 엄수를 이유로 그 어떤 것도 확인해주지 않음. 저자의 학창시절을 언급한 제3학문에의 길을 참조하여, 거기 등장한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존하는 인물이 아닌 것으로 확인됨(혹은 가명을 썼다고 볼 수도 있음. 따라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허구라는 이유만으로 책 전체가 허구일 것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음).

3. 직업: 기자. 특히 시카고 데일리의 과학 전문기자로 일했다는 것은 그가 동 신문사에 재직했다고 주장한 시절의 일간지 기사 자료 검토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음. 그밖에 다른 신문사 기사에선 앤드루 김이라는 이름이 확인되지 않음. 자서전에 의하면 1990년대 후반부터 크게 활성화되기 시작한 인터넷 언론 사이트에서 프리랜서 기자 및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확인이 불가능했음(아마도 인터넷 언론의 특성상 필명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4. 가족관계: 독신. 부모에겐 외아들이었음.

5. 특이사항: 1967년 유리 안드로포프가 KGB 의장으로 취임할 당시, 신문사에선 모스크바에 앤드루 김을 파견하여 취재토록 하였음. 이는 그가 과학 전문기자였음을 고려할 때 매우 특이한 사실이었으나, 자서전에 의하면 원래 취재를 위해 소련에 가기로 되어 있던 선배 기자가 식중독으로 인한 급성장염에 걸리는 바람에 자신이 대신 가게 된 거라 함. 그러나 이 취재 여행에서 그는 특종을 하나 건지게 되고, 그로 인해 그의 생 자체도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음.

6. 가설: 1967년 모스크바에서 특종을 낚았으나 신문사에 의해 거부된 후, 국제관계의 다양한 역학 사이에 숨어 있는 비밀과 음모의 배후를 캐는 일에 주력하기 시작했음(적어도 자서전의 기록에 의하면 그렇다고 함). 주로 냉전시대 양대 진영 사이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에 주목했고, 특히나 미국과 소련이 한때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었던 것으로 알려진 싸이코트로닉스(초심리학 무기)’ 개발 및 연구 분야의 비밀을 캐는 일에 집착했음(이 역시 자서전의 기록에 전적으로 의거하는 바임). 그 과정에서 그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엄청난 비밀에 접근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파격적이고도 기이하기 그지없는 가설을 세웠으나 모두에게 무시당했으며, 결국엔 그런 그의 광적인 태도가 시카고 데일리에서의 해직을 앞당기는 촉매로 작용함.

7. 결론: 약 한 달간 이루어진 확인 작업에도 불구하고, 앤드루 김이 실존 인물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전혀 확인하지 못함. 그러나 책 속에 서술된 내용은 역사의 커튼 뒤에 드리워진 심연의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자료로 판단되며, 그것의 사실 여하를 막론하고라도 본 도서관에 한 권 정도는 보관해둘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료됨.

신원미상의 남자에 의해 입고된 300권의 책 중 도서관에 보관할 한 권을 뺀 나머지 299권은 운영 규정에 따라 일정 기간 공시 후 소각 처분하는 길밖엔 없다고 판단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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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진실을 찾아서, 앤드루 김 . 도서출판 북라이프.

 

1. 저자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여행을 떠나다


1967년 새해 벽두, 편집장이 나에게 말했다. “자네, 모스크바에 가지 않겠나?” 나는 좀 놀라서 물었다. “모스크바 특파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편집장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래…… 맞아.” “거기라면…… 앨런 선배가 가기로 이미 내정되어 있던 것 아닌가요?” 하버드를 졸업한 수재인 앨런 구스는 나보다 삼 년 먼저 입사했고, 과학이나 문학 기사 나부랭이나 쓰던 나와는 달리 정치부에서 승승장구하던 능력자였다. 듣기론 모스크바 특파원 자리도 먼저 자원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온갖 정열을 쏟는 남자이기도 했다. 사실,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이 된다는 것은 출세와 승진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곳이 춥고 갑갑하며 생필품 구하기도 힘든데다 온종일 보안요원들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끔찍한 도시라 해도, 그곳으로 가겠다는 야심찬 기자들은 언제나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편집장이 나에게 뜬금없이 소련행을 주문한 것이었다.

앨런 선배는요?”

내가 되묻자, 편집장은 잠깐 흠칫했다.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가 서서히 평온을 되찾더니 약간은 가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구스는 몸이 안 좋아. 급성 식중독인데 며칠 동안 입원해야 한다더군.” “그럼 다 나은 다음에 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제가 알기론 선배가 그곳 특파원 자릴 간절히 원했다던데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어. 자네도 알다시피 소련 특파원으로 가려면 먼저 갖가지 서류들을 보내서 그곳 보안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그런 다음에 허가가 떨어지면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는 거지. 그런데 만약 이쪽에 사정이 있어서 제날짜에 입국하지 못한다면, 다음 심사 때까진 어떤 특파원도 들여보낼 수가 없는 거야. 하여튼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그 모양이라니까. 융통성이라곤 없단 말이지. 앨런의 소련 입국 날짜는 일주일 뒤로 잡혀 있는데, 그때까진 그가 퇴원하기 힘들 것 같아. 설혹 억지로라도 퇴원을 한 다음 들어간다고 해도 입국심사대에서 걸리고 말 거야. 놈들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굉장히 까다로워.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우리 미국 언론사들을 물 먹일 궁리만 하지. 그러니 병든 미국인 기자가 자기네 나라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돌려보낼 게 확실하다고. 그리고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몇 명 검토해봤지만, 지금 당장 서류를 보내도 통과할 만한 직원은 자네밖에 없다네.” 그제야 난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선배의 대타가 되어 모스크바로 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자, 편집장이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원래 오기로 했던 특파원이 위독해서 자네를 대신 보내는 거라고 해두면, 그들도 별말 없을 걸세. 게다가 무엇보다도 자네 서류는 아주 깨끗하니까. 그러니 딱 일 년만 고생하게. 대신 돌아오면 문화부에 좋은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지.” 그렇게 하여 나는 모스크바행 특별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사실, 시대적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소문에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유쾌하고 호탕한 남자이며 서방세계에서 생산되는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 의류와 최고급 스포츠카에 열광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유화정책이 알고 보면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할 거라는 의구심이 국내엔 팽배해 있었다. 그가 아무리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어도 결국 언젠가는 대륙 간 탄도미사일을 태평양 너머로 쏘아올릴 게 확실하다는 불안이 워싱턴 정가를 맴돌았다. 나 역시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기에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 모스크바의 시민들은 생각보다 덜 무뚝뚝했고(보안요원이 없는 곳에서는 오히려 친절하기까지 했다) 국영 상점에선 웬만한 생필품은 다 구입할 수 있었다(어쩌면 내가 외국인 특파원이기에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게다가 호텔은 좀 낡았지만 빵과 수프가 맛있었고, 특히나 아침에 나오는 커피는 정말 최고였던 것이다.

여하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된 것 같다. 내 인생을 바꿔놓은 그 사건에 대하여 말해야 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처음 몇 달간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적어도 그 모든 것을 겪기 전까진 확실히 그랬다.

그 일은 1967518, 즉 내가 모스크바에 온 지 네 달이 지났을 때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날은, 나중에 소련의 서기장이 된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가 국가보안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던 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취재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다음 호텔 로비에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며칠 전 편집장은 호텔 카운터로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다. “잘 있었나, ?” “, , 편집장님은요?” “나야 뭐, 언제나 잘 지내지. 요즘 일이 바빠서 말이야. 그나저나 거기엔 별일 없고?” 이렇게 묻긴 했지만, 우리는 전화로 나누는 대화는 백 퍼센트 도청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꼭 전달해야 할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는 암호를 섞어 말하기로 사전에 미리 약속해둔 터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약간의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편집장이 덧붙인 말은 다음과 같았다. “며칠 뒤 루뱐카 식당에 새 주방장이 온다는데, 알고 있나?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새로운 음식을 맛보려고 엄청나게 몰려들 거야. 자네도 거기 가서 신 메뉴를 주문하고 어떻게든 레시피를 알아내서 최대한 빠르게 본사로 송고해주길 바라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사실 편집장의 말은 모두 암호였고, 그 진짜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며칠 뒤 유리 안드로포프가 국가보안위원회 의장으로 취임하네. 많은 언론사들이 특종을 낚으려고 기다리고 있어. 자네도 반드시 거기서 빅뉴스를 하나 건져야 하네, 알겠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간 KGB는 엄격한 비밀주의를 고수해왔다. 그러나 최근 불기 시작한 변화의 기류에 맞춰 그 악명 높은 정보기관도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모든 제스처가 일종의 쇼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런 쇼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전까진 완벽하게 비밀로 치러졌던 의장 취임식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각국 특파원들에게 취재를 허락하는 특별 초청장을 보냈고, 그래서 나 역시 시카고 데일리의 모스크바 특파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던 거다. 낫과 망치가 그려진 초청장의 뒷장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수많은 금지 사항들이 인쇄되어 있었고, 그 맨 아래엔 붉은색 고딕체로 위의 사항을 어길 경우 강제 퇴장당할 것임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건 굉장히 큰 변화였고, 나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어쩌면 대단한 특종을 건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긴장하여 손가락을 뚝뚝 꺾고 있다가, 호텔 로비의 대형 페치카 위에 걸려 있던 시계가 여덟시 반을 가리킬 때 일어섰다. KGB 본부 건물이 있는 루뱐카광장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지만, 미리 가서 기다릴 요량이었다.

사족이지만, 그날 광장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서 나는 한 여자와 세게 부딪쳤다. 서두르느라 모퉁이를 돌아오는 그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 미안합니다.” 어설픈 러시아어로 사과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늘씬하고 아름다운 북구의 미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아, 괜찮아요! 그런데 당신은 혹시…… 외국인 기자인가요?”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주느라 내가 손을 내밀자, 금발 미인은 다시 한번 활짝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우리 둘 사이엔 어떤 감정의 교류 같은 것이 흘렀다. 적어도 난 그랬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거기서 끝이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의장의 취임식 전에 미리 도착해 있으려면, 그런 데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언제나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해왔고, 그중에서도 특히 공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 거기서 암만 아름다운 미인을 만나 순간적으로 불꽃이 튀는 듯한 느낌을 얻었다 하더라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자로서의 본분인 취재였다. 역시나 아쉬운 듯 미소 지으며 연신 돌아보는 여자를 뒤로한 채, 나는 빠르게 걸었다. 드디어 멀리 루뱐카광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견 1.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저자인 앤드루 김은 자신이 평소 여자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사실 그의 자서전은 일관된 주제에 의해 정연하고 개연성 있게 전개되진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사건과 회상들이 마치 나무가 가지를 치듯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그렇게 멀리 비약해버렸던 이야기들은 문득 자기도 모르게 원래의 시점으로 되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도 마찬가지로 앤드루 김은 유리 안드로포프의 의장 취임식에 대한 서술에서 건너뛰어 갑자기 수많은 여자들과의 연애에 얽힌 추억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안드로포프의 KGB 취임식 이야기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론, 앤드루 김이 광장으로 가다가 러시아 미인과 부딪쳤지만, 정말로(자서전에 적은 대로) 가벼운 인사만 나눈 뒤 곧장 걸어가서 기자로서의 본분을 다했다는 거다. 두번째 가능성은(인간의 본성을 생각했을 땐 오히려 이게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알고 보니 그는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남자였고, 따라서 안드로포프의 취임식이 아무리 중요한들 그 기회를 그냥 날려버렸을 리가 없다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앤드루 김이 그날 아름다운 러시아 여성과 부딪쳤을 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다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 그는 특유의 친절하고도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 같은 미인에게 이런 불편을 드리다니!” 외국인다운 어설픈 러시아어로 사과하는 앤드루에게 여자는 호의 어린 감정을 품었으리라. “아니, 괜찮아요. 제가 오히려 죄송한걸요.” 그러면서 여자는 떨어뜨린 물건아마도 가방이나 책이었겠지만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잠깐, 제가 주워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앤드루는 얼른 손을 내밀었고, 당연히 둘의 손끝은 살짝 닿았다. “, 이런!” 두 남녀는 동시에 이렇게 외치며 손을 빼고, 그런 다음 다시 동시에 손을 내밀기를 반복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지 말고, 어디 가까운 데 가서 따뜻한 차라도 마실까요? 이것도 인연인데 말이에요!” 그리고 남자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앤드루 김입니다. 미국에서 온 특파원이죠.” 그 말에 여자는 더욱 밝게 웃으며 그가 악수를 하기 위해 내민 손을 꼭 잡았다. “라이사라고 해요.” 중요한 것은, 그때 이미 앤드루의 머릿속엔 안드로포프라는 이름 따윈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저기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사모바르로 끓인 홍차를 파는 작은 찻집이 있어요.” 라이사가 대답했고, 두 남녀는 나란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다음 둘은 장소를 옮겨 보드카를 마셨고, 마지막엔 앤드루의 숙소인 외국인 전용 호텔로 걸어들어갔다. 여자가 십 달러 지폐가 여러 장 들어 있는 핸드백을 메고 호텔 정문으로 걸어나온 것은, 그로부터 약 반나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그날 밤, 앤드루 김은 책상 앞에 앉아서 뒤늦게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는 결국 안드로포프 의장의 취임식을 취재하지 못했다. 라이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와 너무 오래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호텔 로비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동료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여자한테 팔려서 취재도 안 오고. 적당히 하라니까.” 부러움 섞인 얼굴로 가볍게 책망을 하며 그는 사진 한 장을 건넸다. “하여간 본사에 송고는 해야 하잖아. 이걸 보면서 대충 꾸며서 쓰라고.”

사진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멀리서 찍은데다 약간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천장의 불빛에 사진을 비춰봤다. 가운데 서 있는 당당하고도 풍채 좋은 남자는 유리 안드로포프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행원들의 무리. 갑자기 앤드루 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 속의 한 인물을 주시했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사들 틈에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보였기 때문이다. 체구가 자그마한 그는 얼핏 봐서는 동양인처럼 보였고,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영국식 레인코트, 일명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다. “좋았어! 바로 이거야.” 시카고 데일리의 특파원은 손가락으로 딱 소릴 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비록 흐릿하고 인화 상태도 엉망이었지만, 그는 사진 한 장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앤드루는 타자기를 자기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빠르게 뭔가를 치기 시작했다.

 

1967518일 정오, 한 남자가 보무도 당당하게 루뱐카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국가보안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는 유리 안드로포프였다. 처음부터 눈에 띈 건 그가 평소와 달리 류드밀라 양복점에서 맞춘 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 역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노선(특히나 의상에 관한)을 따르기로 작정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KGB 의장의 새로운 양복 스타일보다 더 확연히 눈에 띈 것은, 바로 그의 뒤를 따르는 수행원들의 무리였다. 특히나 그들 사이에 조용히 서 있던 한 신비로운 동양인 남자는 기자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과학아카데미 회원이자 소비에트연방 대백과사전편찬위원인 알렉산드르 스필킨 교수 옆에 붙어서 있었다. 그때 문득 그 동양인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록 먼 거리였지만 니콘 카메라의 초강력 망원렌즈를 통해 나는 그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무척이나 낯익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황급히 셔터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세게 쳤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검은 옷을 입은 보안요원이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런 렌즈는 사용 금지인 걸 모릅니까?” 결국 나는 그 동양인의 사진을 찍지 못했고 카메라까지 압수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기이하고 낯익은 동양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