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다시 앤드루 김의 자서전으로 돌아와서)

광장에 도착한 뒤엔, 다른 기자들 사이에 섞여 유리 안드로포프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어이, 뭐 특별한 건 없고?”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기에 뒤돌아보니, 네덜란드 주간지 스포르트 위크의 기자 리하르트 베르베크였다. 모스크바에 와서 처음 베르베크를 만났을 때 난 스포츠지 기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지 의아해했다. “기껏해야 정치부 기자들이나 오는 곳 아닌가?” 내 질문에 리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 어차피 사람들이 정치에 가지는 관심은 스포츠나 연예인 가십에 대한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모르겠어? 그러는 자네야말로 과학, 문학 전문이잖아? 근데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혹시 브레즈네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도 하나 쓰려는 건가?” 그뒤로 우리 둘은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묵고 있는 숙소가 가까웠기에, 저녁이면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쨌든, 취임식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우린 잠시 대화를 나눴다. 주로 브레즈네프의 새로운 의상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 공산당 지도부에서 발간한 경제개발계획 실적보고서, 봤어?” 베르베크가 물었다. 잔뜩 낮춘 목소리였다. “아직 못 봤어. 왜?” 나도 최대한 작게 소곤소곤 대답했다. 얼핏 보니, 보안요원 하나가 살짝 찌푸린 얼굴로 슬쩍슬쩍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당이 매년 발간하는 경제개발계획 보고서는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소련의 국가경제가 얼마나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일종의 선전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보고서만 보면 이 나라에 경제문제란 없었다. 만에 하나 있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해결 가능한 별일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를 자세히 살피다보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날 리하르트 베르베크가 귀띔해준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내 손에 작은 종이 한 장을 펼쳐서 쥐여줬다. “봐, 지난해 소비재 생산증가율이야. 뭐 눈에 띄는 거 없어?” 나는 보안요원이 점점 더 자주 이쪽을 힐끗대는 걸 무시하고, 종이에 적힌 수치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리하르트는 손가락으로 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봐, 직물과 가죽 신발의 생산증가율. 엄청나지 않아?” 그제야 나는 이 네덜란드인 동료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알고 큰 소리로 웃었다. 전기, 비료, 차량, 트랙터, 이 모든 것들이 목표 생산량을 크게 밑돌고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의류용 직물과 가죽구두의 생산량만은 비약적으로 늘어 있었던 것이다. “서기장이 자신이 관심 있는 품목에 한해서는 집중투자를 명령한 게 아닐까?” 내가 말하자, 리하르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죽여 웃었다. 하긴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게 바로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때 리하르트가 나를 쿡 찔렀다. 바로 옆에 아까부터 이쪽을 힐끗대던 보안요원이 다가와 서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 종이를 제출해야겠소.” 그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고, 나와 리하르트는 서로 어깨를 으쓱한 뒤 순순히 표를 내놨다. “별것 아닙니다. 이건 당신네 나라에서 공개적으로 발간하는 보고서의 일부니까요.” 내가 말했음에도 그는 한동안 종이의 앞면과 뒷면을 꼼꼼히 살폈고, 심지어는 햇빛에 비춰보기까지 했다. “음, 아무것도 없군요. 하지만 그래도 압수는 해야겠소.” 보안요원이 이렇게 말하며 종이를 네모반듯하게 접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우렁찬 음악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광장 여러 곳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합창곡은 <소비에트연방 찬가>였다.

잠시 후, 검은색 볼가 자동차가 광장으로 들어섰다. 스피커의 음악 소리가 점점 더 높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였다.

나는 가방에서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 신임 의장과 그 수행원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실 모스크바로 오기 전 내가 가진 카메라는 돌아가신 삼촌에게서 물려받은 구식 라이카 한 대가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편집장이 비행기를 타기 전날 검은 가방 하나를 건넸다. “열어보게나. 추운 나라로 떠나는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야.” 가방을 열자, 그 안엔 최신형 니콘 F가 들어 있었다. “이런 걸…… 제게?” 정식 사진기자도 아닌 나에게 그렇게 좋은 전문가용 카메라가 과연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자, 편집장은 말했다. “거기 설명서가 있네.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번 읽어보라고. 다루는 법은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우리가 원하는 건 최대한 선명한 사진이야. 구도? 스타일? 예술성? 그런 건 다 필요 없어. 그러니까 뭘 찍든, 깔끔하고 선명하게. 알았지?” 그러면서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던 것이다.

편집장의 당부를 떠올리며 난 렌즈의 조리개를 돌렸고, 안드로포프와 그 일행들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포커스를 맞췄다. 온 정신을 거기에 집중하느라 리하르트 베르베크가 옆에서 계속 기웃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진짜 열심이로군.” 그는 벌써 카메라 덮개를 닫고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앤드루, 뭐하러 그렇게 미친듯이 찍어대는 거야? 어차피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저 밖에선 아무도 모른다고. 즉 그건, 우리가 송고하는 기사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바깥엔 없다는 얘기지. 그냥 대충 찍어. 그리고 아무 얘기나 꾸며서 쓰라고. 만약 우리가 진실을 쓴다면 저 밖에선 그걸 가짜로 만들어버릴 테고, 반대로 우리가 허구를 써서 보낸다면 그 사람들이 알아서 거기에 진실성을 부여해줄 테니 말이야. 어쨌든 난 지금 좋은 기삿거리를 하나 생각해냈어. 완전 특종감이지. ‘류드밀라 양복점에 스며든 서독 스파이’, 어때? ‘그들이 만들어낸 양복엔 제임스 본드도 울고 갈 정도의 최첨단 장치들이 달려 있고, 그걸 통해서 서방 정보기관들은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스포르트 위크 독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멋진 기사 아니겠어?” 그러다가 리하르트는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며 광장의 수많은 인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자넨 이 엄청난 군중 속에 몇 명의 스파이가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내 말은, 어차피 바깥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사진은 그들이 다 알아서 찍어 보낼 거라는 사실이야.”  

리하르트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카메라를 내렸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고, 그렇기에 이곳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그저 그 자체로 진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찍고 무엇을 말하든, 멀리 시카고의 푹신한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편집장은 모두 믿을 것이 확실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로 모두 믿지 않거나. 어차피 그에겐 선택의 여지 따윈 없을 테니 말이다. 기사와 사진의 진위를 가린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에 속했다. 결국 나는 안드로포프의 취임 장면을 대충 찍고 광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특파원들이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는 걸, 그날 오후 호텔 지하에 있는 외국인 전용 바에서 알게 됐다. 거기선 대강 쓴 기사에 몇 장의 흐릿한 사진을 첨부하여 본사로 보낸 기자들이 이미 보드카에 잔뜩 취한 채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그날 루뱐카광장에서 더 많은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게 되는데……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그날은 밤늦도록 다른 나라에서 온 기자들과 술을 마셨고,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객실로 돌아왔다. 바에 있을 땐 꽤나 취해 있었지만,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동안 서서히 술이 깼고, 열쇠구멍에 키를 넣고 돌릴 때쯤엔 완전히 맨 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문득, 카메라에 담긴 사진들이 궁금해졌다. 대충이라도 기사를 작성해서 보내려면 아무래도 내가 뭘 찍어왔는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장비를 세팅하고 분주히 서두른 끝에 밀착인화가 끝났을 땐 이미 정오가 지난 시간이었다. 갑자기 출출해져서 비스킷을 꺼내고 사모바르에 물을 데워 차를 끓였다. 그 남자가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한 손에 비스킷을 든 채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인화지를 확대경으로 살피고 있을 때.

남자는 낡은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수행원들 사이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겠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 노력은 실패한 것 같았다. 안드로포프의 수행원 중 유일한 동양인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좀더 솔직히 얘기하자. 사실, 난 루페 너머로 확대되어 보이는 그 남자의 모습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낯익었고, 분명 어디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확대경을 더 가까이 가져다댔다. 그래, 확실해. 난 이 사람을 만난 적 있어. 그런데 그게 대체 어디였지? 그리고 언제였더라?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도록 나는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실마리는 뜻밖의 지점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 옆에 서 있는 키 큰 소련인의 얼굴 또한 무척이나 낯익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스필킨 교수?”

나는 벌떡 일어서서 객실 책장에 꽂혀 있던 『소비에트연방 인명대사전』을 꺼내왔다. 그건 매년 2월 초 소련 국영 사전 출판사에서 발행하여 공공기관 및 외국 특파원 등에 제공하는 일종의 연감 같은 것이었다. 그 사전의 단점은 거기에 실린 인물들의 정보가 알고 보면 백 퍼센트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그래도 장점을 찾자면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 정도였다. 여하튼, 매년 증보되기에 이제는 두 손으로도 들기에도 힘들 만큼 무거워진 사전을 가져와서 침을 발라가며 한 장씩 넘겼다. S 항목에 알렉산드르 스필킨 교수가 있었다. 이름 옆엔 조그만 흑백사진이 있었는데, 비록 인쇄 상태가 조악하고 뿌옇긴 해도 그가 인화지 속 키 큰 소련인과 동일인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 스필킨: 물리학자, 뇌신경학자, 인공지능 전문가. 이르쿠츠크 국립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의학 박사과정 수료. 이후 옴스크 국립대학 부설 뇌신경 및 인공지능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소비에트연방 대백과사전』 필진으로 참여했으며, 현재 모스크바 국립 뇌신경학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스필킨에 대한 인명대사전의 설명은 간결하고도 명료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대충 훑어만 보고도, 나는 아까 루뱐카광장에서 스필킨 교수와 같이 서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인이 누구였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미스터 엑스’였다! 

물론 그게 그 남자의 본명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예전에 시카고대학교 연구실에서 남자를 처음 봤을 때 그의 신분은 비밀에 싸여 있었고, 정부에선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그를 ‘엑스’라고 불러달라고만 요청했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크렘린이 멀지 않은 바로 이곳, 루뱐카광장에서 소련 최고의 물리학자와 함께 서 있다니, 이거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나는 확대경을 들고 남은 인화지를 서둘러 살폈다. 하지만 사진들은 모두 안드로포프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따라서 미스터 엑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얼굴은 흐릿하게 알아볼 수만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제길. 속으로 욕을 하며, 엑스가 좀더 선명하게 나온 사진은 없는지 하나하나 확대경으로 비춰봤다. 그러면서 리하르트의 꼬임에 넘어가 취재를 대충 마치고 술이나 마시러 갔던 나 자신에게도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녁때쯤, 혼자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켠 뒤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밖으로 나가던 리하르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디 가?” 내가 묻자, 그는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특종 낚으러. 아까 말했잖아,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그래서 지금 류드밀라 양복점으로 가는 거야. 성공하면 그땐 축배를 들자고!” 그 뒷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류드밀라 양복점이라고? 웃기는 소리. 어디 가서 또 술이나 푸고 있겠지.” 어쨌든, 리하르트 놈 때문에 나는 어쩌면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사진 한 장을 놓친 셈이었다. 


2. 존 휠러와 저자가 엑스를 만나다


엑스를 처음 만난 것은, 물리학과 졸업반이었던 1965년 여름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물리학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학부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 연구를 할 생각이었기에, 수업이 없을 땐 주로 교수의 연구실에서 실험을 도왔다. 게다가 그때 우리 학교엔 존 아치볼드 휠러라는 엄청나게 유명한 물리학자가 특강 및 연구 활동을 위해 교환교수로 머물고 있었는데, 나는 어떻게든 그와 한 번이라도 더 마주쳐보고 싶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제자가 되어 일하고 싶었고, 만약 휠러 교수가 허락만 해준다면 시카고에서의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연구소가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으로 떠날 의향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세계적 석학의 반열에 올라 있던 존 휠러의 눈에 들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제자를 뽑을 때만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런 나에게 드디어 존 휠러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한 장의 공고문 형식으로 나타났고, 난 재빨리 그것을 포착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여름방학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멀리 여행을 떠났다. 아마도 나 역시 기회만 닿는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해 여름, 난 학교에 머물길 택했다. 휠러 교수의 여름 특강을 듣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간에 결국 난 행운을 움켜쥐게 되었는데, 학교에 남은 덕분에 휠러 교수가 연구실 문 앞에 붙여둔 종이쪽지를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유의 악필로 대충 휘갈겨 쓴 그 메모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알바생 구함. 여름방학중 약 7일간 본인의 실험을 도울 수 있는 자. 원하는 학생은 지원서를 제출하길 바람.’

다음날 아침, 난 떨리는 손으로 존 휠러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안에선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두드린 뒤 약 오 분 정도 서 있던 나는, 용기를 내어 손잡이를 돌려봤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다만 경첩이 녹슬었는지 귀에 거슬리는 끼이익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퍼졌을 뿐이었다.

창을 등지고 앉아 뭔가를 쓰고 있던 휠러 교수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왔나?”

“알바생을 구한다는 메모를 보고 왔습니다.” 

머뭇대며 대답하자, 세계적인 석학은 그제야 펜을 내려놓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래? 물리학과 학생인가?”

나는 그렇다고 했고, 얼마나 그와 함께 일하고 싶은가에 대하여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존 휠러는 빙긋이 웃더니 서류 더미와 책이 잔뜩 쌓여 있는 책상 한구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원서는 저기 두고 가게. 일단 검토한 후에 연락하도록 하지.” 지원서를 내려놓고 연구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교수가 나를 불렀다. 

“잠깐. 지금 대학원생인가?” 

“아직 학부생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물리학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휠러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도 잊은 듯 또다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기도 머쓱해서 도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그가 물었다. 

“그래? 물리학을 계속하고 싶단 말이지? 그럼, 자네가 관심 있는 건 어떤 분야인가?” 

그 순간 내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평소 존경해온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그런 특별한 질문을 해줬으니 말이다. 나는 거의 얼이 빠진 상태로 물리학의 온갖 주제에 대하여 떠들어댔다. 교수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은 채 내 이야기를 들었고, 중간엔 서너 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양자 파동과 정보전달이라…… 매우 흥미로운 주제군. 그러니까 자네는 정보가 파동 상태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 쪽인가?” 

“네, 그렇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다 사라진 후에도,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물질의 소멸이 이루어진 뒤에도 그것을 이뤘던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존 휠러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창밖에선 공놀이를 즐기는 몇몇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역광 때문에 교수의 미세한 표정 변화 같은 건 잘 보이지 않았다.

“케임브리지의 스티븐 호킹을 아나? 자네 생각은 그와 정반대로군.”

순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이미 젊은 천재 물리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호킹 박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부생 주제에 그런 위대한 학자의 견해와 정반대되는 주제를 연구할 계획이라니. 어쩌면 존 휠러는 속으로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몹시 부끄러워졌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다만 저는 블랙홀에서 모든 것이 소멸할 때 정보 역시 완전히 무無가 된다는 그의 이론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 

내 말에 휠러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신경쓰지 말게. 새로운 걸 찾아내고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지. 어쨌든, 지원서는 잘 읽어볼 테니 거기 두고 가게나. 그런데 이름이……?”

“김. 앤드루 김입니다.”

하지만 방학이 거의 끝나가도록 휠러 교수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방학이 열흘 정도 남았을 즈음, 난 그가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구한 게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석학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물리 이론을 떠들어댔던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풀이 죽은 채 남은 며칠을 보냈고, 실망을 달래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주로 페이퍼백으로 출판된 공상과학소설이었는데, 특히나 필립 K. 딕의 기이하고도 음울한 디스토피아가 나를 매료시켰다.

사족이지만 필립 K. 딕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이제 나는 그가 진정으로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세상의 어두운 비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었고, 그래서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의 소설에 표현된 근미래 지구의 끔찍하고도 어두운 모습은 사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던 일들에 대한 묘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당시엔 그저 그 모든 걸 작가의 기괴한 상상 정도로만 여겼고, 그랬기에 도서관에서 아이스티를 마시며 속 편하게 읽어댈 수 있었다. 그저 킬링타임용으로 말이다! 어쨌든,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딕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는 미쳤다는 누명을 썼고, 암페타민 중독이라는 헛소문에 시달렸다. 하긴, 그러고 보면 예로부터 세상의 비밀을 아는 자들은 언제나 그런 취급을 받아왔던 것 아닐까.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불길한 미래를 가져올 자라는 악명에 시달리다 쓸쓸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땐 알지 못했지만, 나의 앞날 또한 그런 것이었다. 모두에게 오해받고 외면당하는 불행한 삶 말이다. 단지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너무나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 난 여기에, 이 자서전에,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다. 원고가 완성되면 유명한 출판사에 먼저 보낼 테지만, 만약 그들이 진실을 드러내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사재를 털어서라도 세상의 비밀을 만천하에 폭로할 결심인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딴 데로 샌 것을 독자 여러분에게 사과하며, 다시 원래의 흐름으로 돌아가보도록 하자.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날도 난 필립 K. 딕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존 휠러 교수가 보낸 대학원생이 나를 찾아왔던 바로 그날 말이다. 한 형사가 미래의 범죄자로 지목되어 쫓기는 장면을 읽느라 손에 땀을 쥐고 있던 순간,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낯선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네가 앤드루 김이냐? 얼른 가봐. 휠러 교수님이 널 찾고 계셔.”

언젠가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는 물리학과 조교인 레너드 서스킨드였다. 물론 슬프게도 나는 그때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가 나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추측건대, 그는 내가 존 휠러 교수와 처음 만났을 때 분명 연구실 밖에서 문에 귀를 붙이고 있었으리라!)를 엿들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땐 이미 레너드 서스킨드는 새로운 블랙홀과 정보 이론으로 스티븐 호킹에 맞서는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어 있었다. 아이디어(블랙홀에서 물질이 소멸한 뒤에도 정보는 남아 있다는 이론 말이다)를 도둑질당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나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게 원래는 내 것이었음을 증명하고자 했으나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학문적 성과가 처음부터 나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작성한 방대한 논문은 주류 학계에서 철저히 거부당했다. 당시 나는 논문을 백 부나 복사하여 각각 누런 서류봉투에 담았고, 스카치테이프로 밀봉했으며, 꼼꼼하게 우표를 붙여 각 대학교의 유명한 물리학자들에게 보냈다. 안에는 그들의 견해를 묻는 질문지와 함께 회신용 봉투까지 따로 넣어뒀지만, 단 한 마디라도 답신을 준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나를 위해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존 휠러는 그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즉, 내 편이 되어줄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겪으며 난 다시 한번 내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주류라고 불리는 자들이 얼마나 비열한지!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진실을 호도하는지! 


※ 의견 2.

앞서와 마찬가지로, 앤드루 김의 이야기는 갑자기 다른 데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는 비분강개의 어조로 세상의 모든 불의를 비판하고,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 삶을 살아왔는가에 대하여 지루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또한, 웬만한 전공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듯한 엄청나게 복잡하고도 괴상한 방정식을 동원하여 레너드 서스킨드의 이론이 원래 자신의 것이었음을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레너드 서스킨드는 스티븐 호킹이 블랙홀과 정보에 관해 내놓은 이론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여 유명해진 물리학자다. 블랙홀로 모든 것이 빨려들어갈 때 정보마저 소멸된다는 호킹의 생각에 맞서 레너드 서스킨드는 비록 모두 무無가 될지라도 정보는 남는다고 말했으며, 결국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기나긴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앤드루 김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전개한 방정식이 모두 틀렸으며 오류로 가득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카이스트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두 명의 교수에게 그 방정식의 검토를 부탁했고(두 사람 모두 익명을 요구했기에, 어쩔 수 없이 여기엔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한다) 그들로부터 그런 결과를 전해 받았다. 결국, 저자의 주장은 일종의 망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몇몇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할지라도,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자서전 전체를 허구로 봐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게 또한 나의 견해이기도 하다. 자서전이란 마치 한 인간의 생과 같아서, 전체가 진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체가 거짓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자서전으로 돌아가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니 존 휠러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내가 묻자, 그는 뒤돌아서더니 빙긋 웃었다. 

“미안하네. 그동안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자네에게 이제야 연락을 취하게 됐네. 어떤가, 앞으로 며칠간 내 실험에 동참할 의향이 있나?”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교수님과 함께 일할 수만 있다면 저에겐 크나큰 영광이죠!”

“고맙네, 그럼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일단 앉게나.”

존 휠러는 연구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탁자 앞의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나 무심코 의자에 앉으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검은 소파 한구석에 웬 남자가 마치 유령처럼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런 소개가 늦었군. 이분은 미스터 엑스라고 하네.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미스터 엑스, 이 사람이 방금 말한 물리학과 학생입니다. 이름은 앤드루 김. 그가 이제 곧 시작될 우리의 실험을 도와줄 겁니다.”

휠러 교수의 소개에 그 유령 같은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그냥 엑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그의 체구는 무척 작았고 그나마도 깡말라 있었다. 머리를 히피풍으로 길러 뒤로 묶어선지 어딘가 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나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앤드루 김입니다. 그냥 김이라고 불러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잡은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자, 엑스라는 동양인 남자가 빙긋 웃었다.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 한쪽 손은 의수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소매를 걷어 마네킹처럼 생긴 자신의 가짜 팔을 내게 보여줬다. 

“어쩌다가 이런……? 무슨 사고를 겪었나보군요.”

당황하는 나에게 미스터 엑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고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아니에요. 차라리 사고였다면 덜 슬펐겠지만 말입니다. 뭐 어쨌든…… 이런 손을 달고 살게 된 이유는 앞으로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유령처럼 스르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는 것이었다. 난 그의 시선을 좇아 창 너머를 보았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얀 구름만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을 뿐.

“그런데, 실험은 어떤 것입니까, 교수님?”

문득 앞으로 이 괴이한 풍모의 남자와 해야 할 실험이 뭔지 궁금해져서 교수에게 물었다. 존 휠러는 실험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웃었다. 

“그래, 이제 실험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된 것 같군. 사실은 지금 하려는 실험엔 뭐랄까, 좀 문제가 있어.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서 미안하네만, 여하튼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실험은 아니란 거지. 게다가 정통 물리학과도 거리가 있고 말일세.”

순간 나의 당황하고도 난감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교수는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그런 건 결코 아니야. 나쁜 일도 아니고. 다만, 이건 일종의 초과학에 관한 문제야. 그러니까 변경지대의 과학이라고 할까. 여하튼, 학계에선 완전히 무시하는, 그런 것들인 셈인데…… 그런 분야의 과학이 있다는 건 자네도 당연히 들어봤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번 실험에 자네를 고용한 건 지난번 나눈 대화가 무척이나 흥미로웠기 때문일세. 그때 자넨 정보가 전달되는 방식에 대해 지금까지의 학설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제시했지. 그러면서 이렇게도 말했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라고. 사실 어떻게 보면 그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야. 정통 과학계로부터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지. 하지만, 자네의 그러한 오픈 마인드야말로 지금 이 세계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네. 그래서 그때 난 자네야말로 이 실험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확신한 거야. 왜냐하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실험은, 철저하게 마음의 눈―보통 그런 걸 심안心眼이라고 부르지―으로 관찰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야. 자, 어떤가? 여전히 나와 함께 이 새로운 실험을 진행할 마음이 있는가?”

사실 그건 생각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자, 존 휠러는 안도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실험은 반드시 비밀리에 수행되어야 하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미스터 엑스는 정보기관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야. 국가에서 추진하고 있는 마인드컨트롤 무기의 총책임자나 마찬가지이니 말일세. 따라서 실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네도 비밀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실험에 대한 모든 것을 발설하지 않겠으며 만약 발설할 경우 어떠한 종류의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살벌한 내용의 서약서를 앞에 두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떠한 종류의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라는 문장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난 볼펜으로 이름을 적었다. 

그런데, 이 자서전을 읽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실험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미스터 엑스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엄청나게 긴 이야기를 늘어놨기 때문이다.

“저의 초능력에 대하여 정확히 평가하려면, 먼저 제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알아야만 합니다. 나의 능력과 나의 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무엇이니까요. 하긴 모든 게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현재는 결국 그의 과거의 총합이지요. 그리고 그건 세상 모든 것에 적용되는 논리이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아마 지구조차도 스스로의 과거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이렇게 말하며 미스터 엑스는 창밖으로 잠시 눈길을 돌렸고, 그런 다음 탄식하듯 나지막하게 내뱉는 것이었다.

“아아, 정말로 긴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