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하긴, 만약 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굳이 이 회고록을 쓰려는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계는 대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만나야 할 사람은 결국 만나고 마는 것이 세상이란 말인가. 너무나 흔해빠진 경구지만, 이런 식이 아니라면 이 도시의 도서관에서 그를 마주친 일에 대해 별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만큼 기이하고 묘한 우연이었다. 그와 내가 도서관 복도에서 서로를 바라본 끝에 멍하니 서 있다가 주춤주춤 다가간 것은.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가간 건 내 쪽이었다. 그는 오히려 재빨리 뒤돌아서더니 예의 그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도서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하지만 난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금방 그를 따라잡았다. 도서관 로비의 회전문을 밀고 나가는 그의 옷자락을 뒤에서 잡으며, 내가 외쳤다.

“이봐요, 혹시 엑스……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저 허우적대며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웅성대며 구경하는 걸 눈치채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쉬며 뒤돌아보는 것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엑스라니? 난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봤어.”

“아니, 당신은 엑스가 맞아. 내가 평생 찾으며 뒤쫓은 사람. 그럼에도 결코 찾을 수 없던 사람.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장소에서 마주치다니!”

그러자 엑스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아, 결국 이렇게 되는군. 좋소.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도서관 매점으로 가게 됐다. 마침 점심시간도 지나서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와 엑스는 창밖이 내다보이는 조용한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가서 커피 좀 뽑아 올 테니까.”

뽑아 온 커피를 건네며 그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엑스는 왜인지 양손에 흰색 면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의 손이 의수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악수를 청했지만, 그는 멈칫대며 손을 감추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쳐다볼 뿐이었다.

“당신은 앤드루 김이지? 그나저나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흘러온 거지? 뭐,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왜냐하면, 사코 요이치로 박사―누군지 알리라 믿소만. 소니의 초능력부서 책임자였던 사람―에게서 당신이 날 찾아 거기까지 갔더란 얘길 들었으니까. 게다가 내 동생, 그래, 그 녀석은 또 어떻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 아이, 와이의 큰 그림일 수도 있겠지. 비록 지금 어디 있는지 뭘 하고 지내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말이오.”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홀짝대며 커피만 마셨다. 사실 엑스에게 물어볼 것은 많았다.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떤 질문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내가 사코 요이치로 박사(엑스가 말한 대로, 그는 한때 소니의 초능력부서를 총괄하던 책임자였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차차 설명하겠지만, 지금은 일단 이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넘어가도록 하자)를 찾아갔던 건 사실이다. 엑스 혹은 와이 둘 중 하나가 소니의 초능력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사코 요이치로 박사에게서 뭔가를 듣고 이 도시, W시라는 곳으로 와서 정착한 건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운명이었고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어느 스산한 가을밤 두견새 우는 소릴 들을 때 느끼는 그리움 같은 것?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 살았다던 W시를, 난 언젠가부터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만 가면 엑스와 와이가 태어난 속초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 따윈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단지 나이를 먹고 나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더이상 타향을 떠돌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짐을 꾸렸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자 엑스가 피식 웃었다.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 뒤에 오래전, 존 휠러의 연구실에서 봤던 젊은 엑스가 겹쳐 보였다.

“그 모든 마음의 흐름조차 누군가의 마인드컨트롤 결과라면? 그런 상상은 해본 적 없겠지?”

나는 마시던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엑스, 당신이 나를 조종했다는 건가요? 이 도시로 돌아오도록, 그리고 여기서 이렇게 당신을 해후하도록?”

그러나 엑스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오. 난 일반인을 대상으로 쓸데없이 마인드컨트롤을 하진 않아. 아마 내 동생 와이가 이 모든 걸 계획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해본 말이었소. 혹은 와이가 아니라 어떤 더 큰 존재가 있어서, 그가 마치 무대 위 인형을 조종하듯 나와 당신, 그 밖의 세상 모든 인물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것일지도 모르지. 여하간 반갑구려. 이렇게 만나다니.”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 도시에 머무는 겁니까?”

“방금 전 말했잖소. 어떤 존재가 있다고. 그게 동생인지 아닌지는 더 기다려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 존재가 우릴 이곳으로 데려온 것 같다고.”

엑스의 대답을 끝으로, 우리 사이엔 긴 침묵이 흘렀다. 창밖 하늘로는 흰 구름이 빠르게 흘러갔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서관 마당엔 까치 몇 마리가 한가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구기며 내가 물었다.

“여기서 뭘 하며 지내고 있었습니까?”

“실은…… 내가 이 도시로 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방금 생각하던 참이었소. 신문에서 읽은 한 청년의 이야기. 그 청년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일을 겪었거든. 그리고 난 그에게 일어난 비극이 어쩌면 나와 동생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지. 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다오. 그래, 그 청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겠지. 그러기 위해 이 도시로 왔고, 도서관을 떠돌며 청년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거야.” 

문득 내 앞에 앉아 있는 늙은 엑스가 어떤 행동을 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엑스가 또 한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런. 앤드루, 당신도 이젠 거의 초능력자가 된 건가? 내가 뭘 할지 다 알아채다니 말이야. 그런데 이거 하나만은 꼭 말해주고 싶군. 나만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게 아니라는 거야. 당신도 많이 변했군. 하긴, 그동안 흐른 시간이 얼마인가 말일세.”

그러더니 그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신문 사본 한 장을 꺼내 눈앞에 펼쳐 보였으니 말이다. 

“……왠지 기시감이 느껴지는군요. 전과 똑같단 얘깁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난 엑스가 건넨 사본을 받아들었다. 역시나 빛바래고 날깃날깃한 종이였다. 타이틀에 ‘철원’이라는 지명이 얼핏 보였다. 

“철원이라면……? 당신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줬던 이야기의 배경 아닙니까?”

돋보기를 꺼내 쓰고 기사를 읽으려는데, 엑스가 다시 종이를 접으며 낮게 속삭였다.   

“난 이 기사 속 젊은이에게 빚을 졌네. 나만이 아니라 내 동생도 마찬가지야. 하긴, 당신도 거기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 우리 모두 그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다고. 그래, 그러고 보니 더욱 확실해지는군. 우리가 이 도시로 온 것, 여기서 마주친 것…… 마침 코트 주머니에 그 신문 사본이 들어 있던 것…… 이 모든 게 다 태곳적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이라는 사실 말이야.”

그때 갑자기 화장실이 무척 가고 싶어졌다. 전립선비대증 치료제를 복용하면서부터, 나는 최대한 커피를 적게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깜빡하고 커피 한 잔을 다 마셔버리다니. 난 주춤대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엑스에게 양해를 구하려는데, 그가 먼저 빙긋이 웃으며 손짓을 했다.

“다녀오게. 난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릴 테니.”

그러나 화장실에서 일을 보며, 난 다시 한번 기묘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엑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 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누군가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그렇게나 서두르는 걸 보면. 

지금이라도 지퍼를 대충 올리고 뛰어나가면 엑스를 잡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다음엔? 그렇게 달려나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면, 그가 순순히 모든 걸 털어놓을 것인가? 그는 언제나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져왔다. 문득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다 정해져 있던 거야. 모든 것이. 어떤 존재―그게 누군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만―에 의해서 말이야. 엑스가 사라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나머지는 내게 달린 거니까.’ 

건너편에서 손을 씻던 남자아이가 혼자 중얼대는 날 의아하단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난 그 소년에게 씩 웃어줬다. 아마 그애는 내가 이상한 중늙은이라고 생각하겠지.

매점으로 돌아오니, 엑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앉았던 자리엔 반쯤 비워진 종이컵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집으로 와서, 구글맵을 열고 검색창에 ‘열쇠 수리’라는 네 글자를 쳐넣었다. 그렇게 찾아낸 열쇠 수리공의 수는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는데, 인구가 삼십만이나 되는 도시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적은 수라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그중에서 “성심성의껏 귀댁의 열쇠와 자물쇠를 관리해드립니다”라는 소박한 광고문구를 적어둔 열쇠 수리공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과연 그는 정말로 성심성의껏 고객의 열쇠를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건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누군가가 벨을 눌렀고, 문을 열자 검은색 공구 가방을 든 수리공이 차분한 눈빛으로 서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고풍스러운 떡갈나무 책상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수리공은, 열쇠를 잃어버려 열 수 없게 된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며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예전엔 책상 서랍의 열쇠 하나도 손으로 공들여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망가진 열쇠 구멍을 한쪽 눈으로만 들여다보며 수리공이 말했다. 그러나 내 책상은 핸드메이드와는 거리가 먼 대량생산 제품이었다. 그건 오래전 교외의 가구 염가 할인매장에 진열돼 있던 스물다섯 개의 똑같은 책상들 중 하나였고, 떡갈나무가 아니라 수마트라산産 고무나무로 만들어진 보급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굳이 말해주지 않았고, 열쇠 수리공은 꽤 오래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며 씨름을 한 끝에 결국 서랍을 열었다. 그는 거의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겨우 다 됐습니다, 손님. 역시 유서 깊은 책상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이에요. 요즘 나오는 싸구려 보급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말입니다. 그런 후진 책상들은 열쇠를 잃어버려도 나 같은 수리공을 부를 일이 없습니다. 그냥 이쑤시개 같은 걸 구멍에 넣고 대충 돌리기만 해도 열리니까요.”

나는 그 설레발치기 좋아하는 수리공에게 얼마냐고 물었다. 돈을 받으며, 그 성실한 열쇠 수리공이 내게 말했다. 

“손님, 앞으로도 열쇠나 자물쇠가 망가지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십시오. 특별히 손님 같은 토박이들에겐 서비스를 더 해드리거든요.”

그런 다음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얼른 덧붙였다. 

“우리 같은 토박이들끼린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난 이번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도시 출신이 아님을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간 다음, 서랍 속에 봉인돼 있던 오래된 검은 파일을 천천히 펼쳤다.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가며, 엑스라는 남자가 내게 건네줬던 수많은 사본의 사본들을 꺼내 봤다. 중간쯤에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를 복사한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나중에, 그러니까 엑스가 그렇게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난 뒤로도 한참이나 더 지난 후에, 나는 그가 남긴 사본의 사본들의 원본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 이 신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그때 이미 러시아 최대의 석유 개발 기업 산하 미디어 부문으로 소속이 바뀌어 있었는데,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을 때 담당자는 난색부터 표했다. 

“1947년 *월 *일자 신문 원본이 필요하다고요? 글쎄요,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군요. 네, 그렇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간 발행해온 모든 신문을 보관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곳 러시아에서는 말이에요. 나라 이름까지 소비에트연방에서 러시아로 바뀌었을 정도니, 다른 건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그리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우린 뭔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과거의 신문을 만들어내야만 했어요. 아, 물론 이건 극비 사항이지만, 동시에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어떤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 생길 때면, 우리는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그보다 과거에 발행된 모든 신문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새 신문을 재빨리 만들어내 그 빈 곳을 채워넣었지요.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유감스럽지만 사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일은…… 원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나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당신은 정말 몰랐나요? 인간은 원래 과거를 다시 씀으로써만 현재의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그 누구더라, 여하간 무척이나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철학자도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러니 당신이 요청한 신문의 원본은 아마 구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서고에 보관해둔 1947년 *월 *일의 신문은, 이미 그날 발행했던 바로 그 신문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저 현재를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의 1947년 *월 *일의 신문일 뿐입니다. 하긴, 혹시 또 모르지요. 러시아 어느 시골 농가 창고엔 그 원래의 1947년 *월 *일의 신문이 누렇게 변색된 채 산처럼 쌓여 있을지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두십시오. 만약 당신이 어딘가에서 1947년 *월 *일의 그 신문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지금 갖고 있는 사본의 사본의 원본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게 정말로 1947년 *월 *일에 발행된 최초의 신문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럼 이만 전화를 끊겠습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군요.”

오래전 나눈 그 대화를 떠올리며, 나는 조심스럽게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사본의 복사본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수마트라산 고무나무로 만들어진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종이답게 완전히 변색됐고, 한쪽 귀퉁이는 좀이 슬어 낡아 부스러지는 중이었다. 입으로 후 불자, 부서진 종이 먼지들이 구름처럼 떠올라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결국 그 신문의 원본을 구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생소하기 그지없는 러시아어로 적힌 본문을 해독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저 어두워져가던 연구실에서 피자 치즈 기름을 손에 잔뜩 묻힌 한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뿐이었다. 


“그게 어딨더라? 아, 찾았습니다. 여기 있군요. 보세요. 올가 스몰렌스카. 그리고 여길 또 보십시오. 블라디미르 페도로프, 바로 이 기사를 쓴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의 기자입니다. 올카 스몰렌스카, 이 여자는 취재원이죠. 그런데 혹시 올가 스몰렌스카에 대해 잘 아십니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느냐, 이 말이지요.”

엑스가 의수의 딱딱한 손가락으로 신문기사의 어딘가를 짚으며 우릴 돌아봤다. 존 휠러 교수도 나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긴,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올카 스몰렌스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리가 없을 테지요. 지금은 국립 모스크바대에서 언론학을 강의하고 있는 교수인데요, 사실 이 여자는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스몰렌스키의 아내입니다. 아, 이런, 스몰렌스키도 모른다고요? 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어쩔 수 없군요. 그냥 간단히 말해드리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1946년에 경성―그때까진 서울을 아직도 경성이라 부르고 있었는데―에 있던 소련총영사관은 강제 퇴거당했어요. 거기서 일하던 직원들은―총영사를 비롯해서 모두 다 말입니다―평양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외교관들은 언제나 일종의 첩보원 노릇을 하게 마련입니다. 뭐,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 할지라도, 어쨌거나 뭐라도 본국에 전해야만 하니 말이에요. 당시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리저리 발 빠르게 움직이며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 체카―아시죠? KGB의 전신이었던 무시무시한 기관 말입니다―로 보냈으니까요. 그중에 쓸 만한 정보가 얼마나 있었는가 따위의 지엽말단적인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도록 합시다. 그런 시시콜콜한 일을 따지려고 내가 여기 와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여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총영사관이 퇴거당한 며칠 뒤, 이타르타스 통신 서울 지부 사무실에 웬 사원이 하나 새로 입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무실 직원들은 총영사관 말단직원이던 스몰렌스키가 왜 뜬금없이 프레스 카드를 목에 걸고 거기 나타났는지, 다 알고 있었지요. (이건 여러분께만 알려드리는 건데, 사실 그의 이름도 본명이 아니었습니다. 즉 스몰렌스키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고 기자 출입증을 들고 다니며 예전에 총영사관 직원들이 하던 일을 대신 맡아 했을 뿐이지요. 그가 타스통신 사무실에서 모스크바로 보낸 전신 기록은 빈칸과 의문의 문장부호들로 가득했는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럼 다시 올가 얘기로 돌아가서, 그녀는 스몰렌스키의 아내였습니다. 명목상으론 그랬지요.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그녀가 진짜 아내가 아니라 그저 업무상 파트너였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에서의 파트너였는지 말입니다. 하여튼 올가는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 언론학을 공부한 재원이었고, 그래서 서울에서 지내는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거기서 일어난 일을 시시콜콜히 적어서 친구가 기자로 일하던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에 투고했던 겁니다.” 

이때 엑스는 자신이 들고 있던 신문의 사본을 흔들어 보였다.

“따라서 이건, 기자였던 블라디미르 페도로프가 1946년에서 47년 사이 서울에서 타전되어 온 투고를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써낸 기사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점점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어가는 서울 시내를 바삐 돌아다니며 온갖 정보를 쓸어모으던 스몰렌스키에게 본국으로부터 특별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마도 1947년 여름쯤이었습니다. 아내가 건네주는 수화기를 귀에 대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는 바로 아까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바로 그 라브렌티 베리야였어요. 처음에 스몰렌스키는 엄청나게 긴장했지만―왜냐하면 당시 소련에서 베리야의 악명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그가 지시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란 걸 알고 곧 안도했습니다. 그가 전화를 받아서 끊을 때까지 옆에 앉아 있던 올가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자, 제가 읽어드릴 테니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스몰렌스키는 처음에 긴장하여 약간 목소리를 떨었다. 그러나 곧 그는 안정을 되찾았고, 전화를 끓었을 땐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묻자, 스몰렌스키는 말했다. 

―지금 병원으로 가봐야겠어. 거기에 미군의 원조를 받으며 치료중인 쌍둥이가 있는데, 그중 한 아이를 모스크바 의학 아카데미 부설 병원으로 데려오라는 베리야의 지시가 있었지. 한 아이는 워싱턴으로, 그리고 다른 한 아이는 모스크바로 데려가서 치료를 한 뒤, 다시 이곳 한반도에서 만나도록 하자는 게 그의 의견이야. 내 의견을 묻기에, 당연히 찬성한다고 했지. 지금 미국과 우리 사이엔 얘기가 잘 안 풀리고 있잖아. 회담은 지지부진하고 서로는 서로를 불신하며 의심하고 있다고. 이럴 때 평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이벤트가 열린다면?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아? 하여간, 그러고 보면 베리야는 머리가 엄청 좋다니까. 하긴 그러니까 거기까지 올라간 거겠지만.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데려올 수 있을까? 

고심하는 아나톨리에게 내가 말했다.

―전에 존 깁슨이라는 기자와 밥을 먹은 적 있지 않아요? 그 사람에게 연락해보지 그래요?

그러자 스몰렌스키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는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사람을 보내며 분주하게 굴더니,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중략)

아이를 데려오는 날, 나는 카메라를 들고 뒤따랐다. 그쪽에선 제프리 허드슨이란 군인이 아이를 데려갈 책임자로 나왔고, 뉴욕 데일리의 존 깁슨 기자가 사진기를 든 채 따라왔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서로 포옹을 하며 미소 지었다. 그런 다음 각자 쌍둥이를 하나씩 안고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러나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두 아이가 서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치며 울어댔으니 말이다. 몇 번을 다시 찍은 끝에 완전히 지쳐버린 우리는, 그냥 우는 모습 그대로의 사진을 양쪽 신문사에 전송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촬영을 마친 뒤, 한국인 간호사가 우리에게 뭔가를 물었다. 통역의 말에 의하면, 각자 어느 아이를 본국으로 데려갈지 정하라는 것이었다. 스몰렌스키는 나에게 알아서 고르라고 했다. 허드슨이란 군인을 쳐다보니, 그도 누굴 데려가는 게 좋을지 몰라 당황한 눈초리였다. 그때 존 깁슨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그럼, 제비뽑기를 하면 어떨까요? 공평하지 않습니까?

결국, 우린 종이 두 장에 각각 팔, 다리, 라고 적은 뒤 딱지 모양으로 잘 접었고, 그걸 간호사가 하늘로 던져올렸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내가 먼저 딱지 하나를 골랐고, 허드슨이 남은 딱지를 손에 쥐었다. 우린 존 깁슨이 ‘하나, 둘, 셋! 펼쳐 보세요!’라고 외치는 순간 각자의 손에 쥔 딱지를 펼쳤다. 내가 든 종이엔 선명한 펜글씨로 ‘다리’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곧 한 아이가 나의 품에 맡겨졌다. 그때 어느새 잠잠해진 아이가 왠지 슬픈 눈초리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허드슨이 불편한 자세로 나머지 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우린 처음과는 달리 어색한 분위기로 인사를 나눴고, 각각 반대 방향으로 난 문을 향해 밖으로 나왔다.

타스통신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미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옷깃을 잘 여민 뒤 그들에게 건네줬다. 

―잘 가렴. 넌 복 받은 아이야. 조국의 의료기술은 세계 최고이니, 반드시 다시 걸을 수 있게 될 거다. 

나는 차 안에서 장교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아이의 밝은 미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올가 스몰렌스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요? 우리 형제가 그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진행되던 미국과 소련의 두번째 회담은 그해 가을 결국 결렬됐고, 평화를 상징하는 이벤트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게 되고 말았으니까요. 우린 모두에게 잊혀졌고 서서히 흐릿해졌습니다. 마치 그들, 허드슨과 스몰렌스키가 서명했던 서류―쌍둥이 각각을 본국의 수도로 데려가 치료한 뒤 다시 만나게 한다는 장밋빛 약속이 담겨 있던―의 잉크 자국이 희미해지듯 말이에요.

잠시만요. 실례합니다. 눈물을 좀 닦고…… 아아, 이걸 읽을 때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군요. 나와 동생이 함께했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얘기니까요. 게다가 더 슬픈 게 뭔지 아십니까? 그 모든 것이, 즉 내가 알고 있는 과거의 모든 일들이 그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든가 이런 낡고 찢어진 사본들을 통해서만 파악 가능한 얘기라는 점이죠. 그래요, 천리안으로 멀리 떨어진 시공간을 암만 잘 살피면 무엇합니까? 달의 뒷면을 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고비사막의 지하 핵실험 기지를 투시하면 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정작 나 자신은 이 세상 하나뿐인 동생도 만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엑스가 책상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와 존 휠러는 당황했다. 마침내 교수가 그의 들썩이는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미스터 엑스, 진정하세요. 동생과의 일은 우리도 정말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이별을 하다니요. 그나저나, 그럼 당신은 지금까지도 모스크바로 간 동생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거군요?” 

그러자 그가 엎드려 있던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실은 얼마 전 난 동생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물론 그건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지만 말이에요! 난 내 동생의 존재를, 소련의 비밀 핵무기 실험 기지를 투시하던 중 처음으로 감지했습니다. 아아,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군요. 그날의 감동이 말이에요! 여하튼 그래서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해서 동생을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연입니다. 

잠깐! 그런데 중요한 건(이 부분에서 엑스는 다시 말소릴 낮췄고, 문밖 복도에서 누군가가 엿듣고 있기라고 하다는 듯 과장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 모든 걸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정보기관엔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동생과 천리안을 이용해 비밀리에 교신한 것을 알면, 그들은 날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우린 또다시 헤어져야 하고, 그러고 나면 정말 영원히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아니, 어쩌면 그자들은 이미 눈치챘을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거죠. 아, 그럼 정말 안 되는데. 생각해보니, 그들이 요즘 나를 뭔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굳이 초능력을 검증한다는 명목으로 날 이곳에 보낸 것도, 나와 내 동생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긴 그들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죠.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그애는 적국의 정보기관 소속이니까요. 그러니까 나와 내 동생은, 공식적으론 서로 적인 셈입니다. 진짜 기가 막히지 않나요? 참, 제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내 동생 역시 소련의 정보기관에서 초능력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순전히 나의 천리안을 통해 알아냈고요. 그리고 그건 동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애도 자신의 천리안으로 나를 찾아냈습니다. 우리 둘은 서로가 서로를 동시에 알아보았지요.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에게 끌려가듯 그렇게, 헤어진 그날부터 오직 떨어진 반쪽을 찾아내는 일만이 인생의 목표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