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이미 세상을 떠나 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모든 사람에게 바친다.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회상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리지 못한 나를 그들이 용서해주길 바라면서. 뭐야, 이게? 왜 이렇게 비장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써서 끼워넣은 거야?”

가까스로 일어선 나는 리하르트에게서 종이를 뺏으려고 최대한 높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잽싸게 몸을 돌리더니, 옆에 있던 테이블 뒤로 가 섰다. 

“이봐, 앤드루, 흥분하지 말고 들어봐. 여기 이런 문장도 있다고! 들어보라니까. 나는 군도의 역사를 쓸 만큼 대단한 사람이 못 된다. 내게는 군도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과연 언제, 그 누가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겠는가? 과거를 ‘회상’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은 그 모든 기록을 송두리째 없애버릴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또 이러한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와우, 이거 정말 대단한데? 정말 장중하고도 멋진 글이잖아? 앤드루, 밤마다 객실에 숨어서 소설이라도 쓰는 거야? 군도는 또 뭐고, 군도의 기록은 무엇을 말하는 거야, 응?”

대체 저건 뭐지? 내가 저런 걸 쓴 적이 있던가? 리하르트에게서 종이를 다시 가져오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도 난 열심히 과거를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저런 문장을 타이핑한 기억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겐 그럴 능력이 없었고, 더 나아가서는 저렇게 비장한 글을 써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저 모스크바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써 보낼 뿐이었다. 리하르트를 비롯한 동료 기자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놀다가 아무렇게 끄적인 글을 호텔 로비에 상주하는 전신국 직원에게 건네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종이를 높이 들고 목청껏 읽고 있는 리하르트의 눈을 피해 그의 뒤로 가는 데 성공했다. 마침 그는 막 또다른 문장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또 러시아문학에서 최초로 노예노동을 찬미한 백해白海 운하에 관한 수치스러운 책의 저자들, 즉 ‘막심 고리키’를 필두로 한 ‘서른여섯 명’의 소련 작가들한테서도 이 책의 자료를 제공받았다.”

난 그의 등뒤에서 가만히 기다리다가, 마침표가 찍힌 부분까지 읽고 나서는 잠시 숨을 고르는 리하르트를 앞으로 확 밀며 종이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내놔, 이 미친놈아! 왜 남의 기사를 뺏어가고 난리야?”

화가 난 나머지 평소 쓰지 않던 저급한 욕설들이 입에서 마구 쏟아져나오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앞으로 넘어진 채 내 밑에 깔려 버둥대는 리하르트를 한 대 치려다가, 문득 마음을 고쳐먹고 주먹을 내렸다. 지금 그를 때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쥐고 있던 멱살을 놓고 일어서서 옷을 툭툭 턴 다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엑스의 공책을 집어들었다. 그 사이에 방금 리하르트에게서 뺏은 종이를 잘 끼워넣고는 말없이 커피숍 밖으로 걸어나왔다. 뒤에선 리하르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왜 이래, 앤드루? 네가 하도 멋진 문장을 써서 읽어준 건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겨우 그 정도 일로 삐친 거냐고!”

끝까지 떠드는 리하르트를 뒤로하고 전신국 직원을 만나러 로비로 갔다. 만약 정말로 내가 보낸 기사에 이런 문장들이 뒤섞여 있다면, 그건 직원의 실수가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신국’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부스 앞에서 나는 “흡!” 하고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동안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던 네모진 투명 유리 부스 안쪽으로 시커먼 암막 커튼이 내려져 있었던 탓이다. 평소 송신할 기사를 건네던 창구는 두꺼운 골판지로 막혀 있기까지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를 똑똑 두드리며 전신국 직원의 이름을 불렀다. 

“이봐요, 주보크 씨. 안에 있어요?”

그러나 어두운 유리 부스 안에선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한번 더 두드려본 뒤 문을 밀어보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주보크 씨는 오늘 아침 국립정신요양센터로 보내졌습니다. 혹시 전신 서비스가 필요하다면, 이리 주십시오, 당분간은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됐으니까요.”

돌아보니,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주보크 씨가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고요? 아니, 대체 무슨 이유로요? 그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 중 가장 정신이 온전한 이였다고요!”

내가 외치자, 로비 여기저기서 담소를 나누거나 신문을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남자가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최고급 호텔인 만큼, 모든 면에서 예의를 지켜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보크 씨에 대해 말하자면―그간 눈치채지 못하셨겠지만―그는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서방으로 보내는 신문기사 사이사이에 자기가 혼자 지어낸 망상들을 마구 끼워넣곤 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냈지요. 다행히 우린 그걸 발견했고, 불쌍한 주보크 씨가 다시 건실한 노동자가 되어 일터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로 했던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조용히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주십시오.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말은 거의 위협으로 들렸고, 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빠르게 이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객실로 들어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신문기사를 공책 사이에서 꺼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속에서 빠르게 기사를 읽던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건 유리 안드로포프의 취임식이 있기 일주일 전쯤 대충 써서 송고한 기사였는데, 브레즈네프가 특히 좋아하는 양복감이 리투아니아에서 공수해오는 최고급 플란넬이라는 소문을 파헤친 것이었다. 그런데 멀쩡하게 작성된 기사 사이사이에 처음 보는 문장들이 듬성듬성 삽입되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내용은 무려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기까지 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서 커튼부터 내렸다. 건너편 빌딩에서 누군가가 망원경에 한쪽 눈을 대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그러고도 불안이 가시지 않아 객실 문의 외시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다행히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지나다니는 이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안을 두리번대는데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그래, 저거야. 어쩌면 저 안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코드를 뽑으려는 순간,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에도 벨소리는 끊임없이 울리며 점점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마침내 수화기를 들자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세한 걸 알고 싶으면 어서 노트를 펼치시오. 시간이 없소. 시간이!

난 수화기에 입을 바짝 대고 작게 속삭였다.

“혹시 와이인가요? 당신은 이 기사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겠지요? 대답해주세요. 내가 대체 어떤 일에 휘말린 건지!”

그러나 어느새 전화는 끊어져 있었고, 귓가엔 삐― 하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의견 5.

앤드루 김은 이 페이지에 특별히 사진 한 장을 실어뒀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도인 같은 차림을 한 앙상한 노인과 푸틴 대통령이 마주보며 앉아 있는 흑백사진인데, 다음과 같은 타이틀이 붙여져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찾아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재미있는 건 앤드루 김이 사진 아래 달아둔 설명인데, 거기서 그는 분노어린 목소리로 그 둘을 싸잡아 욕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느 날 인터넷 포털 뉴스를 통해 이 사진을 접하고, 한동안 나는 할말을 잃었다. 이런 멍청하고 사리분별력 없는 노인네 때문에 내가 그렇게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단 말인가. 푸틴을 바라보는 솔제니친의 얼빠진 시선이라니. 그 바보 같은 노인은 정말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믿은 걸까? 단지 오래전 자신을 탄압했던 KGB 요원 출신 대통령이 자기 손을 잡아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제는, 앤드루 김의 주장(자신의 기사를 통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원고 일부가 서방세계로 몰래 반출되어 출판될 수 있었다는―비록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의 신빙성을 입증할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의 자서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엑스’의 말을 빌리자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일단은 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어내려가며 어떤 작은 단서라도 찾아보기로 하자. 


*


엑스가 남기고 간 노트는 어느 문구사에서나 흔히 파는 것이었고, 맨 뒷장 표지엔 ‘MADE IN KOREA’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 그것은 엑스가 남기고 간 바로 그 노트는 결코 아니었다. 그건 사본에 불과했다. 엑스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모스크바의 어느 비밀스러운 건물에서 와이가 초능력을 발휘해 그대로 따라 적었다는 공책. 그런데 아무리 똑같이 받아 적었다 해도, 과연 이것을 엑스가 남긴 그 노트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와이는 원본과 백 퍼센트 일치하는 공책을 만들기 위하여 표지의 화학성분까지 변화시키는 수고를 감당했다. 하지만 노트를 펼쳐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도 난 여전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서전을 쓰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나는 어느 쪽이 옳은지 정하지 못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그날 내가 읽은 것이 엑스의 기록인지, 아니면 토씨 하나까지 똑같다 해도 결국은 와이의 기록으로 봐야 하는 건지를 말이다.)

표지엔 어딘가의 열대 해변 사진이 조악한 컬러로 인쇄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파란 바다와 과도하리만치 붉은 파라솔. 그 모든 걸 돋보이게 해주는 표백한 듯 새하얀 백사장. 귀퉁이엔 학교, 학년, 반, 성명을 적는 네모진 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거기엔 정갈한 필체로 ‘엑스’라는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공책을 펼치자, 초등학생처럼 힘껏 눌러쓴 글자로 가득 뒤덮인 페이지들이 한없이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그나마도 공책은 새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엑스는 다 쓴 노트를 찾아낸 뒤 지우개로 열심히 문질러 지운 듯했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다시 한번 자신의 이야기를 눌러썼는데, 그래서 그런지 읽다보면 기이하게도 하나의 공간에 두 개의 이야기가 겹쳐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가 공들여 적은 이야기 아래에서 어른대는 또다른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문득, 어쩌면 엑스의 진짜 이야기는 이미 지우개로 지워버린, 그래서 눌러쓴 자국으로만 남은 원본 속에 담겨 있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18. 엑스가 철원평야의 비밀을 들려주고 와이와 재회한 뒤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다


앤드루,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사말이나 서문 따위 모두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가만있어보자, 아까 연구실에서 헤어지기 전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요? 아, 기억납니다. 천리안으로 본 철원평야, 거기서 뭔가를 발견하여 세운 공로 덕분에 우리 팀 전체가 표창장을 받고 거나한 회식까지 했다고 말했었지요? 그때 난 검은 옷을 입은 몇 명의 남자들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급기야는 그들과 함께 목놓아 고향의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쯤 이런 의문에 빠져 있진 않습니까? 대체 엑스가 어떤 공을 세웠기에 상장과 상패는 물론 식사와 술까지 대접받고 고향의 높은 분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은 건가, 라는 의문 말입니다. 또한 당신은, 내가 철원평야를 원격투시하던 중 만난 모스크바의 초능력자(내 동생 와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지만)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을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따라서 이제부턴 그 이야기를 할 터이니, 잘 들어주십시오. 아주 복잡한 얘기니까요. 하긴, 사람이 살아온 궤적 중 어느 하나 복잡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단언컨대 내 얘기는 그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사다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의 숨겨진 이면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의 삶에는, 당연히 기묘하고도 기이한 에피소드가 난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먼저, 나와 우리 팀이 상장과 상패를 받은 이유를―비록 비밀리에 수여되어 언론에 대서특필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알고 보니 그간 내가 맡아왔던 임무는 세계평화에 잠재적 위험이 되는 지역을 감시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을 미리 포착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원래 정보 계통 업무란 게 다 그렇습니다. 당사자인 요원에겐 그가 수행하는 일의 구체적 목표를 잘 알려주지 않지요. 업무가 업무이니만큼 배신자 또한 속출하는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원 개개인이 너무 많은 걸 알지 못하도록 상부에선 항상 조심하며, 임무의 세부만 지시할 뿐 결코 전체적인 큰 그림은 보여주지 않지요. 그렇기에 나도, 내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뭔지 모른 채 그저 보라고 하는 땅만을 주시하고 또 주시했던 겁니다. 

날이면 날마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철원평야 역시 그런 곳에 속했습니다. 잠재적 위협이 되는 땅.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상존하는 땅.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던 정보기관의 분석에 의하면 그러했지요. 

임무를 수행하는 틈틈이 나는 정보기관 부설도서관을 찾아가 『20세기 전쟁사』라는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읽었습니다. 철원평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요. 휴,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오래전 거기서 열흘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죽은 양측 군인들의 수가 무려 만오천 명에 달한다지 뭡니까. 철원평야의 전투를 읽으며, 나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몸서리를 쳤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한 조각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는 사실이, 당신은 믿어집니까? 게다가 그 땅이 그리도 중요했던 게 바로 쌀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또 어떻고요! 한국인의 주식이라는 쌀. 그렇습니다, 그곳은 한반도 중부 내륙 최대이자 유일한 곡창지대였던 겁니다. (사족이긴 하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책을 읽은 후 나는 쌀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얗고 고슬고슬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맛좋은 쌀밥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둥글고 반짝이며 먹음직스러운 쌀알에 담긴 무언가를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뭘 주식으로 삼고 있느냐고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세상엔 쌀 말고도 먹을 수 있는 곡물이 지천에 널려 있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콩이나 조, 수수, 옥수수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먹는 것에 별로 큰 흥미를 갖고 있지도 않아요.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에선 초능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식곤증에 시달리며 잠만 자게 되니까요.) 

어쨌거나, 『20세기 전쟁사』에선 그 끔찍했던 전투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끝맺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곳에선 해마다 가을이면 황금물결이 넘실대고 추수를 하는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다.’ 뭐라고요? 그거면 된 거 아니냐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원격투시를 통해 본 것들은 다 뭐가 되는 거지요? 넘실대는 황금빛 물결 아래서 아무도 모르게 썩어가는 시체들 말입니다. 이루지 못한 꿈에 시달리며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 죽은 사람들 말이에요. 풍성한 추수만 있다면, 그 아래 지층에 켜켜이 파묻힌 온갖 내밀한 사정은 다 잊혀도 된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얘길 계속하면 뭣하겠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그래요, 나도 이젠 그것에 대해선 더는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기묘하고도 슬픈 광경은 나 같은 사람들, 그러니까 세계의 이면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에게만 허락된 장면이니만큼 이쯤에서 함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다만, 그 깊은 땅속을 투시한 뒤부터 나는 때로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 땅, 철원평야를 포함한 극동아시아의 그 나라―어쩌면 나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광기에 휩싸이는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짜인가에 발행될) 신문을 보니, 그 나라에선 항상 불안해하며 툭하면 두려움에 빠져드는 불행한 사람들이 프로판가스가 가득 든 통을 짊어진 채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기이하고도 슬픈 시위를 벌인다고 합니다. 광장에 모여든 그들의 머리는 온통 새하얗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며 손은 거칠고 허리는 굽어 있지요. 그 땅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괴이한 시위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또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 마치 동대문시장에서 단체로 구입한 듯한 독특한 디자인의 등산 조끼를 걸치고 하나같이 두려움에 빠진 표정으로 가스통과 함께 돌진하는 그 불행한 시위대는 언제나 홀로 떠돌아다닙니다. 자기들이 왜 밤마다 악몽에서 깨어나 공포에 떨어야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하지만 나만은, 적어도 땅 밑에서 켜켜이 쌓인 채 썩어가는 그 끔찍한 시체들을 목격한 나만은 그 불행한 사람들, 허리가 굽은 채 무의식을 지배하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들이 그런 괴상한 행동을 벌이는 이유를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들은 땅속에서 스며나오는 시체 썩는 냄새에 감염된 자들이었던 겁니다. 아침에 대문 앞에 던져진 신문을 읽거나, 혹은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을 때, 그들에게 문득문득 찾아올 공포와 슬픔은 바로 그 냄새, 즉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지표를 뚫고 올라오던 그 지독한 공기에서 비롯되었던 거지요. 거기에 감염된 사람은 마치 좀비가 자신이 좀비임을 알지 못하듯, 스스로의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합니다. 지표 아래 깊숙한 땅에서 뿜어져나오는 시체 썩는 냄새가 그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맨틀 아래에서 들려오는 죽은 자들의 두런거림이 그들의 잠을 방해하지만, 그 불행한 사람들, 공포에 빠진 기이한 시위대는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자신들이 감염됐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을 뿐이지요. 

아직은 계획에 불과하지만, 나는 언젠가 그 나라로 돌아가 땅 밑을 파헤치고 시체를 꺼낼 겁니다. 그런 다음 슬픔과 원한에 사무친 모든 죽은 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거예요. 하지만 모두 다 머나먼 미래의 일. 따라서 지금은 철원평야를 관찰하다가 모스크바의 초능력자를 만났던 그날 얘기부터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보고했는지, 그리하여 결국 어떤 공을 세우게 됐는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그날 아침, 난 파트너인 톰에게 내가 본 것을 구술했습니다. 그는 모든 걸 녹음한 뒤 자기 방으로 돌아가 한 글자씩 받아 적었고요. 그렇게 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보고서: 정보국 요원 엑스가 천리안 원격투시를 통해 알아낸 사항들>

1. 한반도 철원평야 인근 땅속에서 무언가 수상한 것을 발견함: 그 일대 지하에 대한 철저한 조사 및 규명이 필요하다고 봄.

2. 적국의 천리안 요원과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교류함: 신문 결과, 이는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우발적인 일로서, 그 과정에서 기밀정보가 새어나간 흔적은 없음.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하여는 엄격한 주의 및 경고를 내릴 것이며 앞으로 접촉 엄금 등의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임. 


팀장인 레오니드 몰로디노프는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바로 상부에 보고서를 올려보냈습니다. 듣기론, 보고를 받은 상부에선 내가 투시한 것이 과연 무엇이냐를 두고 꽤 오랫동안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철원평야 일대의 땅속을 철저하고도 꼼꼼하게 뒤져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요. 온갖 첨단 장치가 동원되어 이루어진 수색의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철원을 비롯한 위도 38도 인근의 한반도 지하 전역에서 적들이 파놓은 게 확실한 의문의 지하통로가 발견되었으니까요. (물론 내가 천리안으로 본 건 그게 아니었지만―왜냐하면 당신도 알다시피, 난 단지 땅 밑에 켜켜이 쌓인 죽은 자들을 봤을 뿐입니다―막상 그런 뜻밖의 결과를 얻고 보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정보국에선 그렇게 찾아낸 지하통로에 ‘땅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부설도서관에 가 참고도서 코너 맨 아래 꽂혀 있는 대사전을 꺼냈습니다. 그러고는 ‘ㄷ’자 색인이 있는 부분을 펼쳐 ‘땅굴’이란 단어를 찾아보았지요. 

‘땅굴: 땅을 파서 굴과 같이 만든 큰 구덩이. 토굴이라고도 하며, 무 등을 이 속에 묻는다.’ 

다 읽고 나서, 난 주위를 스윽 둘러봤습니다. 사서가 보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뒤에 주머니에서 형광펜을 꺼내 ‘무 등을 이 속에 묻는다’라는 문장에 줄을 그었어요. 왜냐하면 내 생각엔, 그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으니까요. 

실제로 처음 통로가 발견됐을 때, 적들은 그게 겨우내 무를 파묻어두기 위해 만든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무를 보관하려면 엄청나게 깊고 큰 토굴이 필요했다는 게 그들의 해명이었지요. 그러자 우리 측 정보기관에선 이런 반문을 제기했습니다. ‘무만 보관할 생각이었다면 뭣 때문에 그리도 큰 토굴을 팠어야만 했는가?’라고요. 그 질문에 적들은, 그러고도 남는 공간엔 다음해 김장을 위하여 새우젓을 숙성 보관할 계획이었다고 연달아 해명했습니다. 새우젓을 토굴에 보관할 경우 맛이 더 좋아지고 영양가는 훨씬 높아진다는 어느 영양학자의 논문을 추가로 제시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정보기관에선 그 해명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게 중론이었으니까요. 다만 당시 통역을 맡았던 남자가(그의 고향은 한국의 충남 홍성이라는 곳이었고 집안 대대로 새우젓을 생산하여 판매해오고 있었는데)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을 뿐입니다. 그는 고향 마을에 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폐광을 기억해냈고, 그 오래된 광산에 새우젓 항아리를 보관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당신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그의 발상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지요. 폐광에 넣어둔 새우젓은 일 년간 적당히 숙성되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최고 품질의 젓갈로 재탄생했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쪽 정보기관은 나사에 있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최첨단 유동 역학에 기초한 계산을 수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얻어낸 결론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어요! 슈퍼컴퓨터는 그 통로가 완성되면 시간당 삼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이동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물론 그게 가능하려면, 무리 맨 앞과 맨 뒤의 유속이 일정하고 중간에 결코 정체가 일어나서도 안 되며 모두가 똑같은 속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말이에요. 즉 뒤집어 말하면, 맨 앞에 가던 사람이 갑자기 바닥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해도 계산 결과가 완전히 뒤바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 토굴의 쓰임새를 두고 격론이 오갔습니다. 한쪽은 끝까지 무와 새우젓의 보관 장소라고 우겼고, 다른 한쪽에선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이동하여 아무도 모르게 침투를 감행할 수 있는 루트라고 주장했으니, 이건 처음부터 결론이 날 수 없는 토론이었지요.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누군가는, 그곳이 사실은 적이 만든 위장용 땅굴일 뿐이며 진짜 통로는 더 깊은 땅속, 그러니까 거의 용암에 발바닥이 닿을 만큼 뜨거운 지하에 뚫려 있다는 주장까지 펼쳤습니다. 그렇게 깊고 깊은 지하에 만들어진 통로를 통하여 매일 하루에도 수천수만 명의 적들이 지표면 여기저기를 뚫고 올라온다는 거지요. 그런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느 깊은 밤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을 때, 주택가 밀집 지역 한구석의 화단이 들썩이더니 갑자기 얼굴에 흙이 잔뜩 묻은 한 사람이 땅 위로 기어나오는 겁니다. 그는 머나먼 북쪽 어딘가에서부터 뚫린 좁고 뜨거운 통로를 지나 그곳까지 침투한 자인데요. 그 사람은 동네 어디쯤 대문이 열린 집을 찾아 들어가 펌프로 물을 길어 세수를 하고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낸 뒤 유유히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이 주장을 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렇게 교묘히 섞여든 사람의 본모습은 아무도 알아낼 수 없으며, 오직 등에 가방을 메고 학교를 오가던 어린 학생들만이―그애들은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 받은 교육 덕분에 수상한 사람을 한눈에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고 합니다―그 실체를 간파하고 재빨리 달려가 113을 누른다는 거지요.  

어느 쪽 주장이 사실이든 간에, 결국 양측은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기로 합의했다고 합니다. 통로를 만들던 이들은 아직 완성을 못했기 때문에, 또 그 반대편은 언젠가 이 거대한 토굴을 써먹을 때가 도래하리라는 믿음으로, 각자 입을 다물었던 거예요. 


그렇습니다. 이제 짐작했겠지만, 내가 상장과 상패를 받고 검은 옷의 남자들로부터 식사와 술까지 대접받은 건 바로 그 토굴을 찾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상을 받게 된 연유를 들었을 때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기묘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 정작 그 안에 파묻힌 채 신음하는 사람들은 발견되지 못하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점점 분위기에 휩쓸려갔습니다. 상을 탄 뒤론 복도에서 만난 요원들이 모두 아는 척을 했고 먼저 말을 걸며 친하게 굴었으니까요. 그전까진 쉬는 시간마다 항상 혼자였는데, 상장과 상패를 받은 후론 다들 내 옆자리에 와 앉으려고 할 정도였어요. 혼자 앞마당에 있는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커피만 마시던 나는, 그때부턴 다른 요원들과 어울려 콜라를 마시며 신나게 떠들었지요. 난 행복했습니다. 아아, 동료란 게 이런 거구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란 이런 거였어. 나도 모르게 이러한 탄성이 절로 입 밖으로 터져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신나는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문득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어둠이 엄습해왔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요. 정보기관 의료실에 있는 닥터에게 상의했더니, 그는 활짝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초능력을 과다 사용하다보면 흔히 나타나는 과부하 현상입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엑스. 적절한 약을 처방해줄 테니까요. 그나저나, 이번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면서요? 축하합니다. 당신은 정말 우리 팀의 에이스로군요.”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더니 약장에서 조그만 약병을 하나 꺼내줬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제약회사에서 임상시험중인 약입니다. 기분이 우울하고 눈물이 날 때마다 한 알씩 드셔보세요.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감에 사로잡힐 테니까요.”

나는 약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복도로 걸어나왔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컵에 물을 받아서 알약을 삼킬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어요. 그저 한숨만 나오고 뭘 상상해도 슬프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갈망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지요. 그때였습니다. 저쪽 끝에서 톰이 걸어오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는 내 얼굴을 오래도록 응시하더니 뒷짐을 지고는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겠어, 엑스. 네가 지금 왜 그렇게 우울한지 말이야!”

사실 난 그렇게 촐랑대는 톰이 귀찮아서 어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 기분이 저하되는 이유를 안다는 말에 그만 솔깃해져 같이 매점으로 걸어갔지요. 그는 나를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게 하고는, 혼자 가서 커피 두 잔을 뽑아왔습니다. 내게 한 잔을 내밀더니, 자긴 먼저 벌컥벌컥 마시더군요. 다 마신 종이컵을 구기며 톰이 말했습니다. 

“엑스, 내 생각에 넌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혹시 상사병이라고 들어봤어? 그리워하는 대상을 만나지 못하면 생기는 마음의 병, 그걸 상사병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그 증세가 딱 지금의 너와 같다 이거지. 입맛도 없고 얼굴은 해쓱해지고 툭하면 울 것 같고…… 자, 이제 털어놔보겠어? 대체 어떤 여자야? 누굴 만났기에 그렇게 하루하루 말라만 가는 거냐고.”

톰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드디어 답을 찾았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난 정말 일종의 상사병 비슷한 것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만 그 대상이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이 아니라, 멀리 모스크바의 차가운 돌 광장 어딘가에 있을 와이라는 게 좀 특별한 점이었다고 할까요.  

어리둥절해 있는 톰에겐 대충 얼버무리고는 얼른 그 자리를 떴습니다. 

“미안, 톰. 갑자기 할일이 생각나서 말이야. 오늘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밤 열두 시까진 절대 방해하지 말아줘, 알겠지?”

이렇게 외치고는, 미친듯이 달려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다음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고 앉아 모든 감각과 능력을 동원하여 심안을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레오니드 몰로디노프를 비롯한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느라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샘솟던 와이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억누르고만 지내왔어요. 하지만 톰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은 거지요. 그를 다시 만나는 건 나의 운명이고,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하며, 결국엔 만날 수밖에 없으리란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제기랄―아, 미안합니다. 웬만해선 고운 말 좋은 말만 쓰며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자꾸 이렇게 몰고 가는군요. 귀에 거슬렸다면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모스크바를 향해 두둥실 떠오르던 나의 정신은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로 인해 푹석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심안은 꺼지고 시야는 어두워졌으며 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요. 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누구야?”



* 리하르트가 읽는 앤드루의 기사 속 문장은 모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열린책들, 2020)에서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