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회



빼꼼히 문이 열리더니 톰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들어가도 돼?”라고 묻고는 있었지만, 그는 이미 한 발을 안으로 들인 상태였지요.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저기, 톰, 아까 말했잖아. 오늘 중요한 투시를 할 예정이니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그러나 톰은 귀찮아하는 나의 태도엔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들어섰습니다. 양손을 뒤로 하고 있는 걸로 보아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 걸 알아내기 위해 굳이 심안을 사용하고 싶진 않았어요. 

“뒤에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방금 말했다시피 난 바쁘다고.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하고 나가줄래?”

그제야 톰은, 등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내 앞에 확 내밀었습니다. 작은 손거울이더군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거울을 밀어냈습니다.   

“뭐하는 짓이야? 지금 너랑 장난할 기분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톰은 끈질겼습니다. 그럴수록 내 눈앞에 더더욱 거울을 가까이 들이밀며 심각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엑스, 거울 속의 너를 보라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정말 모르겠어? 자, 봐. 퀭한 눈에 푹 꺼진 눈두덩, 거무죽죽한 낯빛, 음울한 시선. 이래도 네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우길 거냐고.”

톰이 내민 손거울을 들여다보니, 서글픈 눈초리를 한 수척한 남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더군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누가 봐도 그건 중병을 앓고 있는 병자의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때 톰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따뜻하게 말했습니다.

“엑스, 이제 인정하는 게 어때? 네 몸이 많이 상했다는 것을. 좀전에 복도에서 했던 말은 사실 농담이었고, 상사병에 걸렸다느니 뭐니 했던 거 말이야. 여자를 만날 시간도 없는 놈이 무슨 상사병이겠어.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지. 내 생각엔, 이건 다 과로로 인해 생긴 증세야. 원격투시로 세계의 이면을 바라보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나머지 너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이 말이지. 물론 그런 너의 열정을 나는 이해해. 나 또한 그런 목표―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지킨다는―를 위해 이 일에 투신한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엑스, 그럴수록 스스로를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왜냐하면 우린 기계가 아니니까. 초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신체 능력까지 남들보다 뛰어난 건 아니잖아.”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래전 어머니의 품을 떠나온 이후로, 그 누가 나의 건강을 그렇게 염려해줬겠습니까.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두 줄기의 눈물을 본 톰이 더욱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져와봤어. 한번 먹어보라고 말이야. 일종의 면역증강제인데, 주성분은 로열젤리와 프로폴리스이고, 거기에 열한 가지 비타민과 미네랄이 추가로 들어 있어서 너처럼 자기 몸을 혹사해가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겐 아주 딱이거든.”

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그가 건네는 약병을 받아들었습니다. 겉엔 피라미드 모양의 로고가 그려진 라벨이 붙어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라즈베리와 블루베리의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찌르더군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는데, 톰이 굳이 한 알을 직접 꺼내더니 제 입에 밀어넣었습니다.

“하나 맛보겠어? 이 약의 좋은 점이 바로 이거라니까. 물 없이 삼킬 수 있는 추어블정이라는 거. 게다가 나도 먹고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효과도 정말 좋아. 피곤하고 나른한 오후에 한 알 씹어 먹으면 절로 기운이 나거든!”

톰의 뛰어난 언변에 설득된 탓인지, 베리 향이 나는 알약을 우물우물 씹다보니 서서히 기운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기운만 나는 게 아니라, 마음속 걱정까지 일거에 날아가는 듯 상큼한 기분이 들었지요. 

“고마워, 톰. 이걸 먹으니까 확실히 컨디션이 나아지는 것 같아. 나도 한 병 사고 싶은데,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내 말에, 톰은 기다렸다는 듯 문밖에서 종이 가방을 들고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겸연쩍게 웃으며 제게 건네더군요. 받아서 안을 들여다보니, 방금 톰이 줬던 것과 똑같이 생긴 약병이 모두 열 개나 들어 있었습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난 한 병이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하며 한 병만 꺼내려는 나를 톰이 말렸습니다. 그는 종이 가방을 억지로 떠안기며 빠르게 말했습니다.  

“엑스, 설명해줄 테니 잘 들어봐. 일단 이중 한 병은 네가 먹어. 그리고 나머지 아홉 병은 다른 사람들에게 파는 거야. 이제야 말이지만, 이 일은 사실 꽤 쏠쏠한 부업이야. 이걸 네가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그 사람이 다시 또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그 사람은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이렇게 많은 단계를 거칠 때마다 너의 통장엔 돈이 불어나게 된다고. 다만 한 가지 조건은, 지금 한꺼번에 열 병을 모두 구입해야 한다는 거야. 물론 일시불로 말이지. 잠깐, 오해는 말아주길 바라. 난 단지 네가 너무 피곤해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이니까. 이 약을 먹기만 하면 그 보기 싫은 다크서클도 단번에 사라지고 하루하루 원기가 넘치는 즐거운 나날이 계속될 거라는 데 만원, 아니 십 달러를 걸 수도 있다고. 게다가 거기에 더해 돈까지 벌 수 있으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어, 안 그래? 아니, 이런 경우엔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속담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망설이던 끝에, 결국 열 병을 모두 사버렸습니다. 뭘 그렇게 많이 구매했느냐고요? 휴, 말도 마십시오. 나 역시 곧바로 후회했으니까요. 말주변이 없어 어디 팔지도 못하고, 종국엔 혼자서 그 많은 면역증강제를 다 먹어치워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가진 돈이 없던 나는 톰에게 빚까지 진 상태였는데요, 처음에 그는 밝게 웃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슬쩍 묻곤 했습니다.

“이봐, 엑스. 약은 잘 팔고 있겠지? 입금되는 대로 부담 갖지 말고 차차 갚으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톰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고, 이윽고 아무때나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는 세계의 이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나에게 낮고 음산한 어조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약값은 언제 줄 거지? 갚기로 한 날짜에서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고. 자꾸 이런 식으로 미루면 정말 재미없다니까.” 

그럴수록 나는 움츠러들었고 급기야는 악몽을 꾸다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로 톰이 목을 조르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꿈이었지요. 

물론, 로열젤리와 프로폴리스가 들어간 건강식품 따위에 터무니없이 큰 돈을 쓴 내게도 잘못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야박하게 굴 건 없잖습니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톰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이거, 아무 효과도 없어. 날 보라고. 암만 먹어도 얼굴은 여전히 누렇고 눈은 퀭하잖아! 넌 사기를 친 거야. 잘 듣지도 않는 영양제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아넘겼으니까. 그런데도 난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어. 돈을 갚겠다고만 했지. 단지 좀 기다려달라는 것뿐인데, 그것도 못 들어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내 입에서 실제로 나온 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죠. 

“미안해, 톰. 며칠만 더 기다려줄래? 어떻게든 돈을 변통해볼 테니까. 정말이야. 어디 팔 곳도 없고, 그래서 나 혼자 열 병을 다 먹는 중이라고.” 


그후 약 한 달 동안은 채무의 압박에 시달리며, 또 수시로 나를 엄습해오는 갈망에 압도당하면서도, 그저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그즈음 나에게 부여된 임무는 모래바람이 폭풍처럼 불어오는 고비사막에서 눈을 부릅뜨고 중국의 지하 핵실험 기지를 찾아내는 것이었죠. 사실 그동안 우리 정보기관은 소련의 위협에만 골몰한 나머지,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나라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요원의 구십 퍼센트가 소련 및 동유럽권을 감시하는 데 배치됐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십 퍼센트만이 동북아 일대 정찰에 배정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중국은 변모해 있었습니다. 발에 다 떨어진 헝겊을 칭칭 감고 떼 지어 압록강을 건너던 그런 낙후된 자들의 집단이 아니었지요. 그들은 최첨단 무기와 인공위성을 만들었고, 그걸 보란듯이 하늘과 바다로 쏘아댔습니다. 정보기관은 그런 중국의 변화에 무척 긴장해 있었지요. 나 역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모른 척할 순 없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해서 고비사막을 구석구석 파헤치며 돌아다녔고 아주 작은 낌새라도 찾아내기 위해 애썼어요. 

다행인 것은, 그렇게 일에 몰두하다보니 마음속 열망과 그리움도 차차 가라앉더라는 겁니다. 퀭했던 눈에서 다시 빛이 났고 푹 꺼졌던 볼엔 조금씩 살이 오르기 시작했지요. 완전히 잃었던 식욕도 되살아나서 식판에 담겨오는 밥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덕에 체중까지 약간 불어날 정도였습니다. 톰은 점점 좋아지는 내 낯빛을 보며 툭하면 이런 말을 하며 깐죽거렸어요.

“그것 봐, 엑스. 내가 뭐랬어? 확실히 나아졌잖아. 이래도 약효가 없다고 우길 거야?”

그때마다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미소로 일관했습니다.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 시간이 약이군.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면 모스크바의 초능력자도 다 잊고, 전처럼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겠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다시피, 와이를 만나는 건 결국 나의 운명이었나봅니다. 어느 날 오후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가 나를 호출했으니까요. 


그날은 일찌감치 고비사막 정찰 업무를 마치고, 다른 요원들과 정보기관 앞 벤치에 모여 앉아 콜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다들 왁자지껄하며 이곳에 들어오기 전 사귀었던 여자나 종사했던 직업 등등에 대하여 허풍을 섞어가며 떠들어댔지요. 그때였습니다.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더니 낮게 속삭이더군요.

“요원 엑스, 지금 당장 몰로디노프 박사님의 방으로 가십시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직원이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요?”라고 물었지만, 그는 질문엔 대답도 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어요. “얼른 가보라니까요.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했어요.”

난 마시던 콜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동료들에겐 곧 돌아오겠다고 한 뒤 몰로디노프 박사의 연구실로 향했습니다.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등을 문 쪽으로 한 채 창밖을 내다보던 몰로디노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앉으시오, 엑스 요원.”

나는 쭈뼛쭈뼛하며 엉거주춤 소파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앉아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몰로디노프는 뒷짐을 진 채 창밖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지난번 회식 자리에서 검은 옷의 남자들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일이 떠오르며,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들통난 게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하자 점점 더 불안해지더니 급기야는 입이 마르고 숨이 가빠왔습니다. 그러나 몰로디노프는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지요. 소파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며 두 손만 비비던 나는, 결국 모든 걸 털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어, 사실은 드릴 말씀이……”

하지만 검은 옷의 남자들에 관해 말하려는 순간, 몰로디노프가 휙 돌아섰습니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고―아아,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쩌면 그는 이 모든 걸 예견하고 있었던 걸까요? 내가 어쩔 수 없이 정보기관을 떠나게 될 슬픈 미래를 말입니다―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엑스, 지금 당장 짐을 꾸려야겠소.”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짐을 꾸리라니,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아니면 파트너인 톰이 내가 약값을 갚지 않고 있다고 일러바치기라도 한 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몰로디노프가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이번엔 좀더 부드러운 목소리였습니다.

“아니, 걱정하지 마시오, 엑스. 이곳을 영원히 떠나라는 것도 아니고,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오. 다만 상부의 지시로 당신이 어느 유명한 물리학자에게 가서 검증을 받게 되었을 뿐이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며칠 여행을 다녀오면 되는 거랄까.”

약간은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또다른 불안이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났습니다. 

“……검증이라니요? 여기 들어올 때 이미 다 끝난 거 아니었나요? 게다가 전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 걸 꼭 받아야 한다면, 여기서, 정든 이곳 정보기관 내에서 받고 싶다는 거지요!”

어느새 난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하긴, 당신은 내가 굳이 읍소까지 해가며 애걸한 이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갈 곳 없는 사람들, 나 같은 자들이 한낱 정보기관의 자그마한 회색 방에 그렇게도 애착을 가지는 이유를 말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곳에 자의로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거기서 지내며 나는 난생처음으로 스위트 홈의 따뜻함을 맛보았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밤이 왔을 때 편히 눈 감고 잘 수 있는 곳, 머무를 수 있는 곳, 이 한 몸 눕힐 수 있는 곳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어느새 나는 정보기관의 내 작은 방을 안식처로 여기고 동료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곳을―다만 며칠이라고 해도―떠나야 한다니, 그야말로 내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요.

몰로디노프는 그저 말없이 서서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말했습니다. 

“미안하오, 엑스. 이번엔 나도 어쩔 수가 없군요. 우리 기관 역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니, 검증을 받으라면 받을 수밖에.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길 바라오. 어차피 이건 다 요식행위고, 테스트가 끝나면 곧바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해둘 테니 말이오. 자, 그럼 어서 가서 간단한 짐을 꾸려서 일층 로비로 내려오시오. 당신을 데려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결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로비에는 회색 옷을 입은 남자 두어 명이 손을 앞으로 모아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역시나 회색인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알 수 없었지요. 남자들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정보기관 뒤쪽으로 난 문으로 안내했습니다. 평소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뒷마당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지더군요. 주먹으로 눈가를 훔치며 보니, 주차장엔 국방색 미니 버스 한 대가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버스에 오른 나는 맨 뒷좌석으로 가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회색 옷의 남자들은 나와 대각선으로 떨어진 자리에 앉았습니다. 기사가 뒤를 돌아보더니(그도 역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정든 정보기관을 떠나 이곳 시카고에 왔던 것입니다. 

그후의 일은, 앤드루,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시카고에 도착한 나는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 이삼 일간 여독을 풀었고, 마침내 당신과 존 휠러 교수를 만났지요. 


자, 이제 정말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군요. 조금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지. 왜 내가 공책에 모든 것을 적은 뒤 이곳을 떠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연구실 복도에서 당신과 헤어진 뒤 난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올라오면서는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 있던 노인에게 삶은 달걀 두 개를 룸서비스로 올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휠러 교수의 연구실에서 저녁으로 피자를 먹긴 했지만, 온종일 떠들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었으니까요. 달걀을 다 먹고 물을 마신 다음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꿈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몽환적이면서도 사이키델릭한 음악이 나른하게 흘러나오더군요.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비몽사몽을 오간 지 얼마나 됐을까, 문득 객실 천장에서 어떤 이상한 얼룩이 스멀스멀 움직이는 게 보였습니다. 처음엔 너무 피곤한 탓에 헛것이 보이는 거라 여겼지요. 그래서 잠시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떠봤습니다. 하지만 얼룩은 사라지거나 정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며 서서히 넓어지고 있었어요. 

‘혹시 위층에서 물이 새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자다가 물벼락이라도 맞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하지만,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얘기할지 말지 고민하며 얼룩을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그저 평범한 얼룩이 아니었어요! 얼룩들은 이리저리 퍼지고 움직이고 물들어가며 거대한 세계지도를 그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느 순간에 낡고 오래된 호텔 천장엔 시베리아와 몽골, 캄차카,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인도, 아메리카, 남극 대륙,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지요. 왜 천장에 세계지도가 생겨났는지, 저 기묘한 얼룩이 지시하는 것이 뭔지를 말입니다. 

“고비사막! 그래, 그거였어!”

얼룩은 나에게 고비사막을 보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정보기관을 떠나기 직전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보고 또 보던 그 황량한 모래의 땅을 말이에요. 

천장에 생겨난 세계지도에서 고비사막을 찾다 말고, 난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봤습니다. 혹시라도 몰래 감시하는 눈은 없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는데, 아까 낮에 연구실에서도 말씀드리긴 했지만, 정보기관이 아닌 외부에서 초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문틈이나 창밖, 커튼 뒤, 옷장 속, 그 어디에도 수상한 점은 없었고, 그제야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천장의 어느 한 점을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약 삼십 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나의 몸이, 아니 나의 정신과 영혼이 고비사막의 어딘가를 향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모래사막은 여전히 삭막하기 그지없었고, 밤의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반사하며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사막 위 허공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구석구석 살폈지만 별다른 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사막뱀 한 마리가 지루한 듯 스르륵 기어가고, 외따로 떨어진 게르 한 채가 얼핏 보였을 뿐이었지요.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왠지 쓸쓸한 심정으로 천리안을 거두어들이려다 말고, 난 멈칫했습니다. 고비사막의 벨벳 같은 어둠 속에서 시선 하나를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더더욱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그 시선 역시 나를 느꼈는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더군요. 우리는 사막 위 허공에서 주춤대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 멀어지길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상대방을 탐색하고 관찰하던 우리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아아, 드디어 다시 보는군!”

그렇습니다. 그건 모스크바의 루뱐카광장 상공에서 만났던 바로 그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지요. 그 미스터리한 적국의 요원, 머나먼 모스크바에서 고비사막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던 와이 역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사랑, 그리움, 열망 같은 감정은 결코 감출 수 없는 법이거든요. 그 사람의 눈빛이 모든 걸 드러내버린다고 할까요. 그 누구더라, 유명한 시인이 이런 말을 했지요. 나무뿌리가 대지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듯이, 라고요. 사막 위 허공에서 만난 적국 요원의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중 가장 밝은 별보다도 훨씬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우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막의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갔어요. 하늘에 뜬 둥글고 푸른 달이 지표면에 은빛 가루를 뿌려댔고, 모래언덕은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갔습니다. 조그만 돌 틈으로 도마뱀이 재빨리 모습을 감추고, 어디선가 대상들의 낙타 방울 소리가 울려퍼졌어요. 방울 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다시 작아지더니 달빛 아래 긴 그림자를 남기며 스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둘 사이엔 전처럼 기이한 통로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지요!

나와 그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통로는 서서히 넓어지며 커졌고, 거울처럼 열린 그 구멍을 통해 우리는 또다시 서로를 마주보았습니다. 아아, 그렇게 마주친 우리의 얼굴은, 그야말로 똑같았지요! 

전에 철원 평야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 거울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었던 겁니다. 그건 실재이고 현실이며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 그 자체였지요. 놀란 표정으로, 우린 서로를 샅샅이 관찰했습니다. 눈도, 코도, 입도, 턱도, 모든 것이 똑같더군요. 그때 그가, 아니 와이가 오른손 검지로 내 손을 가리키며 궁금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습니다. 

―아아, 이거?

나는 내 딱딱한 의수를 그에게 내밀었어요.

―의수야. 가짜 팔이지.

그러자 이번엔 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왼발을 들어올리더군요.

―내게도 있어, 가짜 다리.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공기의 파동을 타고 전해져 뇌와 몸 전체를 울리더니 내 존재의 밑바닥까지 흔들었습니다. 

―너희는 원래 몸이 하나로 붙은 쌍둥이였어. 경성의 큰 병원에서 수술을 하며 둘 중 한쪽은 팔을, 다른 한쪽은 다리를 가지게 되었단다. 

오래전 김호선이 들려줬던 이야기가 여전히 내 머릿속에 생생했습니다. 그후로 난 떨어진 나의 동생, 내 몸의 일부, 원래는 하나였던 피붙이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요. 그런데 지금, 거울을 보는 듯 똑같이 생긴 사람이 딱딱한 의족에 몸을 의지한 채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와이였어요. 

―우리는 완벽하게 닮았어. 만약 도플갱어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지? 세상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글쎄, 잘 모르겠어. 거의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이번엔 내가 대답했고, 우리 사이엔 또 침묵이 흘렀습니다. 누가 먼저 자신의 모든 걸 밝혀야 할지 알 수 없어 망설이고 있던 거였죠. 솔직히 그때 나는 좀 불안했습니다. 적국의 요원과 절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어기고 있었으니까요. 만약 이번에 다시 발각된다면, 정보기관에서 쫓겨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기에, 난 몸서리를 쳤습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불명예 퇴출을 당할 경우, 퇴직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자격마저 잃게 되는 것이었지요. 다른 건 몰라도 연금만은 꼭 받고 싶었기에, 난 더더욱 긴 시간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번에도 와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난 소비에트연방 국가보안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어. 이미 눈치챘겠지만, 몇 가지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 여긴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 우리가 뭘 하는지 정도는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말이야.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도 신분을 밝히고 말았습니다. 상대편이 그렇게나 솔직한 태도로 나오는데, 나만 끝까지 모든 걸 감추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으니까요. 

―나 역시 미합중국 중앙정보국 산하기관에 소속돼 있어. 그런데 실은 나도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 건지 정확히는 몰라. 여기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비밀이고, 우리는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거든. 그리고 나도 너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내가 이곳에서 뭘 하는 건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겠지?

내 말에 와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지요.

―지금 내 이름은 엑스지만, 그 외에도 몇 개의 이름을 더 가지고 있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내가 왜 그렇게 여러 이름을 가져야 했던 건지, 아직도 잘 알지 못해. 그런데, 와이는 네 본명인 거야? 

―아니, 나 역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어. 모두 남들이 내게 붙여준 거였지. 어쨌든, 지금은 와이가 내 이름이야. 마치 지금 엑스가 너의 이름인 것처럼.

그런 다음, 우리 둘 사이엔 또다시 기나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사이 고비사막엔 서서히 새벽이 밝아왔지요. 그런데 당신은 사막에서 해가 뜨는 장면을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정말 안타깝군요. 그건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광경이거든요. 어쨌든, 나와 와이는 왠지 쓸쓸하고도 답답한 심정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습니다.

―잠깐, 누가 온 것 같아. 이 시간에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다급하게 외치는 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다려, 나가지 마! 

문고리에 손을 얹다 말고, 난 멈칫하며 동작을 멈췄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갔지요.

―안 되겠어. 문을 열지 않으면 모두에게 민폐라고. 미안해, 와이.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지?

나는 와이에게 양해를 구함과 동시에, 문밖에 대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잠깐만요! 곧 열어드릴게요!”

그때 고비사막 너머 더 머나먼 어딘가에서 와이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마치 깊은 물속에서 듣는 고함처럼 먹먹할 뿐이었습니다.

―뭐라고? 안 들려! 좀더 크게 말해보라고!

이렇게 외쳤지만, 나는 결국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우리 사이의 텔레파시가 끊어지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나와 와이를 연결해주던,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늘고 긴 줄. 그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줄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툭 하고 끊어졌습니다. 동시에 메아리인 듯 아닌 듯 와이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귓가를 스치며 사라져갔지요. 

―내겐 오래전 헤어진 형이 하나 있어…… 쌍둥이 형 말이야…… 우린 샴쌍둥이였다고 들었어……

갑자기 세상이 한 바퀴 핑그르르 돌고 지구의 자전은 두 배속으로 빨라지더니 거꾸로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쌍둥이 형? 방금 와이가 쌍둥이 형이라고 말했어! 아아,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어느새 문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커져서 이젠 거의 북소리처럼 들리고 있었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잠금쇠를 풀며 외쳤습니다.

“네, 네. 다 됐습니다. 지금 열고 있어요!”

현기증을 참으며 겨우 문을 열자, 복도엔 놀랍게도 톰이 우두커니 서 있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