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회



수천수만 마리의 나비떼, 아니 수억 개가 넘는 물방울 속에 휩싸여 우린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호세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지요. 그는 자신을 덮친 용오름 속에서 내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어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내 동생을 먹어버리기 전으로?”

나는 그의 거친 손을 맞잡고 딱딱한 의수로 쓰다듬어줬습니다. 

“아마 가능할 거예요! 삶은, 결국 마음먹기 나름이니까요. 잘 가요, 호세!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오겠죠!”

코앞에선 짙은 회색을 띤 거대한 공기 덩어리가 바다와 하늘을 이으며 미친듯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습니다. 난 그의 손을 놓았어요. 이제, 뒤틀린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선, 서로 각자의 길을 가야만 했으니까요. 손을 놓음과 동시에 그 불쌍한 어부는 붕 날아오르더니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그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죠.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나는 여전히 수억 마리 나비떼 같은 물방울에 휩싸인 채 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중력의 우주공간을 유영하듯 나 자신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앞으로 나아가는 듯도 했고 뒤로 밀려가는 듯도 했지요. 눈을 감았다 뜨니, 곁으로 수없이 많은 뭔가가―그러니까 어떤 실체 혹은 순간의 불꽃 같은 것들이―빠르게 스쳐가고 있더군요. 나는 점점 혼미해지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습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요. 아아, 그렇습니다! 그건 내가 통과하고 있던 비틀린 시공간의 작은 틈, 그 기이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채우고 있는 사건과 거기 얽힌 인간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그물망처럼 이어주는, 무한히 계속되는 인과관계들, 즉 세상만사 그 자체였던 겁니다! 

거기엔 낯익고 잘 아는 것들도 있었고, 낯설고 놀라운 것들도 있었습니다. 슬픈 것도 있었지만 기쁜 것도 있었고, 아름다운 것과 함께 추악한 것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빠르게 스쳐지나감에도 난 그 모든 일들의 실체와 추이를 알 수 있었고, 그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리고 사실 지금 나 역시 믿기 힘들지만, 정말로 그랬어요. 아니, 그럴 거예요. 마치 죽어가는 자가 눈을 감기 직전 단 한 순간에 생애 전체를 회상하듯 그렇게, 선명하면서도 찰나적으로 내 앞을 스쳐가더라, 이겁니다. 그 모든 광경들은, 비록 그것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무한히 넓은 시공간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거대하기 그지없는 한 장의 그림처럼 느껴졌고,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쥐어뜯는 애잔함 같은 걸 풍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모든 사건과 사람들―오대양 육대주, 태양계, 우리 은하, 사람들, 군인들, 죽어가는 자들, 태어나는 자들, 늙어가는 자들, 사라지는 자들, 다시 나타나는 자들,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자들, 무너지는 성벽, 가라앉는 섬, 용암을 내뿜는 화산, 갈라지는 땅, 밀려오는 파도, 불을 내뿜는 총구와 대포, 굉음을 내며 위협적으로 하늘을 나는 전투기들, 농작물마저 깔아뭉개며 다가오는 탱크들, 버섯구름들, 손발이 뒤틀린 아이들, 등이 굽은 물고기들, 텅 빈 눈동자의 소와 닭과 돼지들, 야생동물들, 달로 날아가는 로켓, 인간의 목소리를 담은 채 여행을 떠나는 우주선, 외계인들, 음모들, 월 스트리트, 어떤 광장에서 반세기 만에 만나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가족들, 암살당하는 사람과 암살하는 사람, 폭탄을 몸에 두르고 뛰어오는 자들과 그것을 피하는 자들, 밀가루와 쌀, 설탕과 커피, 책과 문자, 컴퓨터와 전신주들, 나와 당신, 그래요, 지금 이것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 말입니다, 그리고 내 동생,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아아,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보며 울었습니다. 눈물은 한없이 흘러나와 내 얼굴과 가슴과 손과 무릎을 적셨고,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그 신비로운 흐름 속에서 길을 잃은 채 쓰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


엑스의 노트는(그러나 정확히는 ‘와이의 노트’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왜냐하면 이걸 물리적으로 완성한 사람은 와이이므로) 여기서 끝났다.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책을 거꾸로 들고 털어보기까지 했지만, 하다못해 자그마한 메모 조각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공책을 덮고 옆의 빈 좌석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마침 승무원이 지나가기에 그를 불렀다.

“실례합니다. 아르한겔스크역까진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승무원은 말없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제 거의 다 왔소.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되니까.”

알겠다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난 다시 창밖을 보았다. 검은 밤의 초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저 암흑 속에도 사실은 마을과 인가와 사람이 있겠지. 그러나 어둠에 뒤덮여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객실 천장에 달린 흐릿한 등이 창유리에 반사되어, 마치 둥근 달무리를 보는 듯했다. 그 뿌연 빛 속에 내 얼굴이 둥둥 떠 있었다. 


역은 춥고 넓고 휑뎅그렁했다. 몇몇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대합실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와이가 일하던 등대까지 가는 건 무리일지도 몰랐다. 일단 그 장소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모를뿐더러, 무엇보다도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북극해를 면한 호숫가에 외로이 서 있다는 등대에 꼭 가보고 싶었다. 대합실 구석 작은 매점에 망토를 뒤집어쓴 여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쪽으로 가서 물었다.

“지도책 하나만 살 수 있습니까?”

여인은 매점 안쪽 진열장 아래를 뒤적이더니 먼지가 잔뜩 덮인 지도책 한 부를 건넸다. 거의 제정러시아 시대에 제작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책이었다. 뒤표지를 보니, 생각보단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미안하지만, 이거 말고 좀더 최신판은 없습니까?”

그러자 늙은 여인은 황당하다는 듯 날 쳐다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곳에서 제작되는 지도는 실제를 반영하지 않는다우. 마음속 이미지를 그려낼 뿐이지. 그러니 만약 당신이 찾고자 하는 곳으로 가려면, 차라리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어가며 나아가는 편이 나을 거유. 자, 이거라도 살 거면 돈을 내든가.”

난 여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지도책을 받아 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돌아서다 말고 다시 물었다. 

“혹시 북극해를 면한 호숫가에 있는 등대를 아십니까? 거길 가려는 참이라서요.”

여인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매점 밖으로 나가 어떤 남자를 데리고 왔다. 

“이 사람이 잘 알고 있다우. 적당한 돈만 내면 당신을 원하는 어디로든 데려다줄 거야.”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식빵처럼 생긴 자그마한 밴이 시동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먼저 운전석에 앉더니 나에게 턱짓을 했다.

“자, 타시오. 등대로 가고 싶어한다고 들었소만.”

나는 머뭇대며 잠시 서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을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등대로 간다면서 출발한 다음, 울창한 침엽수림 어딘가에 나를 파묻어버리고 지갑만 챙겨 도망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아무데도 없었다. 

“등대로 가려고 하는 건 맞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 건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여기에 등대가 한두 개도 아닐 테고……”

그러자 턱수염에 가려진 남자의 입이 빙긋이 미소 짓는 게 보였다. 

“글쎄올시다.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이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소. 그러니까 그는 분명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소. ‘아마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당신 역시 그 편지에 서명했습니다. 세상의 비밀을 밝히고 그 이면을 드러내는 일에 종사하겠다고. 하긴, 거기에 자기 이름을 적은 이들 대부분은 결국 그 순간을 잊고 말지만 말입니다.’ 자, 어떻소? 이래도 내가 그 등대를 모른다고 하겠소?”

정신 차려보니, 나는 이미 그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뭐야? 당신 뭐하는 인간이지? 어떻게 와이를 알고 있느냔 말이야. 말해봐, 어디서 그를 만난 거야?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그러나 나에게 멱살을 잡힌 와중에도, 그 운전기사는 담담할 뿐이었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얼른 타시오. 저쪽에서 보안요원들이 보고 있으니까. 등대가 있는 마을에 배가 마련되어 있소. 그는 당신이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우라고 신신당부했소.”

결국 난 그 털털거리는 미니밴에 올라 어깨를 웅크리고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 등대로 가는 동안,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어떤 농담도 건네지 않았다. 중간에 문득 뒷좌석 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저기 가방에 샌드위치와 커피가 있소. 혹시 배가 고프면 요기를 하시오.”

등대가 있는 호숫가에 내린 것은 아침 무렵이었다. 아무도 없는지 등대의 불은 꺼져 있었고, 입구는 덧댄 나무판자로 봉쇄되어 있었다. 호수는 보랏빛을 띠고 잔잔히 빛났다. 

“폐쇄된 지 좀 되었소. 이쪽 항로가 없어지면서, 이 등대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으니까. 그후로 떠돌이들이 들어가 지낼 수 없도록 문을 막았지.”

“그럼 여기가……?”

“글쎄, 당신이 뭘 궁금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요. 자, 이제 됐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로 이곳을 떠나야 할 때였다. 마침 저쪽 나루터로 작은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방을 먼저 던지고 갑판에 발을 디디는데, 미니밴을 몰고 왔던 남자가 말했다.

“이 배가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줄 거요.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참, 당신이 출발하기 전 이 말만은 꼭 전해달라고, 그가 부탁했소. ‘어떤 식으로든 우린 다시 만날 겁니다. 그럼 안녕. 그리고,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 노트를 완성하는 건 바로 당신 몫입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오.’”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남자는 돌아서서 가버렸고, 곧 배가 출발했다. 동력 엔진이 달린 작은 배는 미끄러지듯 수면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번엔 어디로 가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알아서 나를 돌려보내주리란 걸,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일어나시오. 문 닫을 시간이 다 됐다니까.”

두툼한 손이 내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고동색 앞치마를 둘렀는데, 한 손엔 행주를, 다른 손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본 남자는 또 한번 껄껄 웃었다.

“어떻게 된 게, 여기만 오면 잠이 드는 거요?”

그제야 난 그곳이 어딘지 깨달았고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향긋한 커피 향이 감도는 그 따뜻한 장소는 ‘소원의 집’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굳이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곳이 내겐 일종의 마음의 고향 같은 장소이기 때문 아닐까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남자가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긴장이 확 풀어지며 편안해졌다.

“사실 이 거릴 처음 다시 찾았을 땐,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게 너무 많이 변해버렸으니까요.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은 내가 알던 그 장소가 아니었어요.”

나는 하마터면 엑스와 존 휠러 교수에 대한 이야길 늘어놓을 뻔했다. 엑스가 묵고 있다가 홀연히 사라진 엘름가의 호텔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 곧 이성을 되찾았고, 그 모든 것이 사실이든 허구이든 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 한편에 구멍이 뻥 뚫린 듯 쓸쓸한 심정으로 돌아다니다가, 이 카페를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간판부터 가게 이름, 문에 달린 저 장식에 이르기까지(그러면서 난 출입문에 달린 청동 부엉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무엇보다도 주인장인 당신까지, 뭐 하나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으니까요.”

남자는 여전히 행주로 커피잔을 하나씩 닦으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마 이 카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벌써 이 도시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가 이래 봬도 한때는 잘나가는 기자였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내게 남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고, 기자로서의 명예는 갈가리 찢겨나가고 말았어요. 세계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아무리 많이 캐내어도, 편집장은 절대로 그걸 기사화하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는 내가 입수한 정보 자체를 믿지 않았어요. 얼마나 많은 사악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지. 각국의 비밀 기관들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무의식과 의식을 조종하는지. 비록 임기를 다 채우고 돌아오진 못했지만, 모스크바에 특파원으로 파견됐을 때 알아낸―왜냐하면, 여기서 다 말해줄 순 없지만, 어쨌든 거기서 나는 소련 정보기관의 일인자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직접 만났으니까요―어마어마한 사실들에 대해서마저, 편집장은 그저 코웃음만 칠뿐이었어요. 하여간, 최근 몇 달간 나는 신문사에 사표를 내야겠단 생각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그래요, 그럴 때마다 여기 와서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마음을 달래곤 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드디어 편집장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르지 뭡니까. 담배를 피우며 주간지를 읽던 그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면서 진지하게 말했어요. ‘여어, 앤드루.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자넨 역시 이런 조그만 신문사에서 썩기엔 아까워. 그렇게나 대단한 세계의 음모와 비밀을 추적하고 있는데, 좀더 큰물에서 놀아야지. 안 그런가?’ 어리석게도 난, 이번에야말로 편집장이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손을 부여잡으며 외쳤지요. ‘이제야 제 말을 믿어주는 거군요! 모스크바에 있을 때 누굴 만났는지, 대학생 때 세계적인 물리학자 존 휠러의 연구실에서 어떤 장면을 목격했는지, 소련을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며 얼마나 손에 땀을 쥐는 모험을 했는지, 그러다가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공책을 어떻게 잃고 말았는지. 그렇습니다. 북극해를 면한 호수에서 배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며, 내 정신은 서서히 혼미해졌어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몇 날 며칠을 보내면서 꿈과 생시가 완전히 뒤섞여버렸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손에 힘이 스르르 빠지면서, 나는 가방을 깊고 깊은 바다에―아니, 어쩌면 그곳은 호수였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북극해로 흘러드는 거대한 강의 하구였을 수도 있고요―빠뜨렸습니다. 안 돼! 난 울부짖었어요. 그 안엔 내 모든 모험의 증거물인 공책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난 편집장님의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특파원 노릇을 그만두고 모스크바를 탈출해야 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울부짖는 걸 지켜보다 말고, 배를 운전하던 남자가 말했어요. 울지 마십시오. 진정하란 말입니다. 비록 글씨가 적혀 있던 물리적 실체로서의 노트는 저 아래 물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거기 담긴 내용은 모두 당신 내부에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당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거기서 그 기억을 다시 적으세요. 새로운 공책에 말입니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중요한 건 하얀 종이 위에 적힌 흑연의 흔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검은 선들이 말해주는 진짜 이야기들이니까요. 듣고 보니 그의 말이 옳기에, 난 가까스로 울부짖길 멈췄습니다. 뭐, 그다음에 어떻게 해서 소련을 빠져나와 시카고로 돌아왔는지는, 워낙에 누차 얘기했기에 편집장님도 잘 알 테고요. 하여간 이곳으로 돌아온 뒤, 난 밤마다 공책에 담긴 기록을 복기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그러니까 제가 아침마다 늦잠을 자고 지각하는 것도,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툭하면 계단에서 넘어지는 것도 밤을 새워가며 공책을 복기하거나 혹은 세계의 배후를 조종하는 초능력 부대의 음모를 캐느라 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는 거지요. 하여간, 이제라도 저를 믿어줘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저는 더 큰 신문사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여기서, 이 정든 사무실에서, 더더욱 열심히 일하며 진실을 추적하고 싶을 뿐이지요!’ 열정에 가득차 미친듯이 떠들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편집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진짜로 화가 난 것 같았고, 어떻게 보면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지요.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물으려는 찰나, 그의 손에서 뭔가가 휙 날아왔습니다. 무언가, 아주 단단하고 원반형에다 반짝이는 것이. 거의 광속으로 날아오는 그것을 잽싸게 피하며, 난 그게 편집장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재떨이라는 걸 알았지요. 다행히 거기 맞진 않았지만, 대신 유리로 만든 재떨이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어요.”

이제 커피잔을 다 닦은 남자가 하품을 했다. 어디선가 괘종시계가 뎅뎅 울리기 시작했다. 종은 열두 번을 울린 후에 멈췄고, 곧 이상한 적막이 소원의 집을 가득 채웠다. 가게를 둘러보니, 남아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말고,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카펫 위 여기저기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주웠습니다. 그런 다음엔 티슈를 한 장 뽑아 담뱃재까지 모두 닦아냈지요. 그제야 편집장이 정말로 말하려던 게 뭔지 이해가 되더군요. 어쨌든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유리까지 다 주운 뒤에야 난 허리를 폈습니다. 재떨이를 던진 게 미안한지, 편집장은 안절부절못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애써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더군요.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는데.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여하간, 정말 미안하네만, 이젠 나가줬으면 좋겠어. 자네는 자네 나름대로 추적해야 할 진실이 있고, 또 우리에겐 우리 나름대로 좇아야 할 사건이 있으니까. 내 생각에 우리가 찾는 것과 자네가 찾으려는 건, 뭐랄까…… 영원히 평행선을 따라 달릴 것 같아. 언젠가는 그 둘이 서로 만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직은 요원한 일이니까. 안 그런가?’ 난 고개를 끄덕였어요. 왠지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편집장과 악수를 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상자에 짐을 옮겨 담았습니다. 옆자리에 있던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흘끗댔지만,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요. 마지막으로 맨 아래 서랍을 열자, 두툼한 파일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습니다. 표지엔 ‘천리안 브라더스’라고 매직으로 큼직하게 적혀 있었는데, 나는 잠시 그 파일을 손에 든 채 추억에 잠겼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휴,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너무나 긴 이야기니 말이에요. 엑스라는 남자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보여준 온갖 출처들의 집합체라고 하면 될까요? 아니, 그냥 이건 넘어가기로 할게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음, 예를 들어 먼 미래의 어느 날 내가 혹시 회고록이라도 쓴다면, 그땐 그 파일 안에 들어 있던 사본들, 그것의 원본들,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다 써볼 예정인데요. 그때 책이 나오면 당신에게도 꼭 한 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세요. 어쨌거나 그 파일을 상자에 넣고, 난 사무실 밖으로 나왔어요.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앤드루, 이봐, 잠깐만 기다려!’ 처음엔 못 들은 척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 멈춰 섰어요. ‘그래, 편집장의 마음이 변한 거다. 그는 내가 이 신문사에서 다시 일해주길 바라는 거야.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나를 잡으라고 한 거겠지.’ 두근대는 심정으로 돌아보니, 동료 기자가 계단참에서 종이 한 장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둘러 다시 올라간 나에게, 그는 볼펜을 내밀며 이런 말을 하지 뭡니까. ‘편집장님이 사직서에 서명을 받아오라고 했어.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안 생긴다나? 하여튼, 네가 이렇게 떠나게 되어 서운한 마음뿐이야. 알지? 비록 여길 떠나더라도 종종 만나자고.’ 왠지 입에 발린 듯한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난 사직서 귀퉁이에 내 이름을 휘갈겨 적었습니다. 그러고는 정말로 뒤도 안 돌아보고 그 건물을 빠져나왔지요. 그게 바로 지난 금요일 저녁에 생긴 일이에요. 즉 그날부터 난 실직자가 되었다, 이 말이지요.”

남자는 어느새 앞치마를 벗어서 벽에 박힌 못에 걸고 있었다. 문득 그가 정말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저 남자는 남의 얘길 듣는 데 싫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이 의자에 앉으면, 그러니까 차분하고 과묵한데다 언제나 입가엔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바리스타 앞에 앉아 있노라면, 당연히 자기 내면의 온갖 사연을 다 털어놓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일 테니까. 그러고 보니, 머리털로 가려진 남자의 양쪽 귀가 하얀 코르크 마개 같은 것으로 막혀 있는 듯도 보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카운터에 앉아 헛소리를 주절대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귀마개를 착용한 것을 말한다―남자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야기하는 사람은, 혹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자신의 사연이야말로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이며 독특하고 기이하여 그 누구의 심금이든 울릴 수 있다고 믿게 마련이지만, 듣는 이 또는 읽는 이들에겐 그것마저 또 하나의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일 뿐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곤 하니 말이다. 잠시 남자의 눈치를 보다가, 그냥 하던 얘길 마저 하기로 작정했다. 만약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티를 낸다고 주절거리기를 멈췄다면, 이 세계엔 단 하나의 이야기도 남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