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그 모든 일의 시작

늘 그랬던 것처럼 밤늦게 로스팅을 끝냈고 여느 때와 똑같이 진공청소기로 로스터 주변을 청소했다. 곳곳의 전기 코드와 가스 밸브를 일일이 확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지막 전원을 내리고 출입문을 잠갔다. 그게 보헤미안에서의 마지막이었다.


학교 앞에 있던 커피집 보헤미안에 처음 간 것은 학부생 때 선배 따라서였다. 선배가 커피 맛이 좋은 곳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지하 계단을 내려갔는데 어둑한 분위기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손님들은 대부분 교수로 보였고, 쓰고 진한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지금 생각나는 전부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보헤미안에 드나들게 된 것은 군 생활 마지막 일 년을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어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커피 좋아하는 친구 따라 다니게 되었는데 자꾸 마시다보니 커피 맛을 알게 됐고 그후로 헤어나오지 못했다. 거의 매일 갔던 것 같다. 보헤미안 점장님은 학생이 돈이 어딨느냐며, 하루에 몇 번씩 오지 말고 원두 사다가 집에서 내려 먹으라고 커피 내리는 법을 간단하게 알려주셨다. 결국 보헤미안에 가는 횟수는 그대로인데 집에서도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안암동 보헤미안은 박이추 사장님이 강릉으로 옮겨가기 전 십여 년간 운영하던 매장이었는데, 그의 제자였던 최영숙 점장님이 뒤를 이어 이름과 전통을 지켜나갔다. 경영은 독립되어 있었지만 보헤미안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 그리고 박이추 사장님의 원두를 받아쓰는 유일한 매장이어서 점장님은 자신을 사장이 아닌 점장이라 불렀다. 보헤미안은 국내에서 좋은 생두를 구하기도 힘들고 커피 로스팅하는 곳도 전무하던 시절부터 맛있고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드문 곳이었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간 군대에서의 짜증스러운 일과가 끝나고 나면, 세 들어 살던 진주 시내 옥탑방 건물 일층의 ‘월드횟집’으로 퇴근했다. 그곳에서 만끽했던 진주와 그곳 사람들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설레고 따스해진다. 옥탑방 문을 열어놓고 누워 있으면 야트막한 마을 뒷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서울에 두고 온 많은 것들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시간만큼은 행복으로 충만했다. 


퇴근해서는 주로 횟집 형님 일을 돕고 배달도 다녔다. 손님이 남기고 간 맛있는 회도 걷어다 먹으며 희희낙락, 주말에는 물차 타고 삼천포 새벽시장에 고기 떼러 다녔다. 고기를 차에 다 싣고 시장 바닥에서 형님과 먹던 굴밥의 맛이란. 


한번은 여름에 전어 떼러 시골의 작은 포구까지 찾아갔는데 전어잡이 배가 들어오지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형님은 포구 한편의 생선 말리는 평상 위에 쓰러져 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고 나는 아무도 없는 널따란 포구에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래도록 서성였다.


고기 싣고 진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차가 선 적도 있다. 기름이 떨어졌다나. 바닷물에 많이 노출되는 물차는 계기판이 죄다 망가지기 일쑤였다. 간신히 갓길에 차를 세운 후 형님과 나는 1.5리터 빈 페트병 하나씩 들고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차들이 무섭게 달려들었고 형님은 저 앞에, 나는 멀찍이 뒤에서 터덜터덜 여름 해가 기울도록 걸었다.


휴게소 주유소에서 빈병에 기름을 채워 다시 트럭까지 돌아오는데 형님이 키득키득 웃었다. “훈아, 이 뭔 고생이고.”


얼마 전 진주를 찾았을 때 형님은 그때 이야기를 웃으며 꺼내셨다.

“니 기억 안 나나? 훈아,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십 년이래이. 그때 군대 막 와갔고 설웠다 아이가. 네 나이 올해 몇이고.”


어찌 잊겠습니까, 고속도로처럼 길게 누운 그림자를 만들던 그 여름 해를, 그리고 월드횟집 십 년을. 차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진주를 떠나오면서 가슴 먹먹했던 그때의 기분을, 진주에 갔다가 서울로 되돌아올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버스가 평거동과 남강의 불빛들을 빠르게 스쳐지나갈 때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진주 사람들과 그곳에서 보냈던 몇 년은 내 인생의 가치와 지향을 바꿔놓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내게 무엇인가?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답을 만들어가다보니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을 대폭 수정해야만 했다. 요즘도 가끔 내려가 찾아뵙곤 하는 그리운 진주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는 책과 티브이에서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지평을 내게 열어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진주는 영원히, 그리운 진주다. 


오랜만에 복학한 대학원은 역시나 무미건조했다. 그렇게 재밌던 공부가 더이상 흥미롭지 않았고, 열심히 읽어내리던 논문들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논문 주제를 바꿔봤는데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석사를 수료하고 본격적으로 논문 준비에 들어가야 할 무렵 나는 훌쩍 쿠바로 여행을 떠났다. 쿠바는 내게 진주에 이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고 고민하던 문제에 확신을 갖게 했다. 육십여 일을 쿠바에서 지내며 만난 그곳의 사람과 정경은 내 오랜 미련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게 했다. “인생 뭐 있나, 재밌게 살자.”


검게 그을린 얼굴로 돌아온 나는 수료한 상태에서 논문 주제를 또 한 번 갈아엎는 무모한 짓을 벌였다. 내 석사논문 주제는 ‘쿠바혁명과 여성혁명’이었다. 더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주제로 빨리 논문 쓰고 졸업하는 게 목표가 됐다. 한편으로 논문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직업으로 택한 일식 요리사를 준비했다. 일식 요리사 자격증을 따면 진주에 내려가 형님 일을 도우며 살 요량이었다. 일식 조리사 학원에 등록했다. 자격증 대비반이어서 옆으로 매는 스포츠가방에 사시미칼 두 자루와 스테인리스 계량컵을 넣고 다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짤그락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뭔가 공부 아닌 다른 일을 진짜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상 배워보니 일식은 형식미가 굉장히 중요했는데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내 기질과는 맞지 않았다. 자격증 실기시험날 출제된 요리는 하필 닭 버터구이였는데, 평소 닭을 일절 먹지 않는 나는 생닭에서 뼈를 칼로 발라내는 것이 너무 혐오스럽고 징그러웠다. 그렇게 어물쩍대다 결국 내 손가락을 발라내고 말았다. 심하게 벤 것은 아니었지만 도마에 피가 떨어져 마치 닭이 흘린 피 같았다. 그 순간 이건 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시험 감독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상처에 감을 밴드를 갖다주며 시간 충분하니 빨리 응급처치하고 마저 시험에 임하라고 조언해줬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짐을 다 싼 상태였다. 그는 내게 시험 보다 말고 어디 가느냐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가방을 어깨에 들쳐멨다. 계량컵이 사시미칼에 부딪히는 소리가 시험장 안에 낭랑하고 크게도 퍼져나갔다. ‘땡!’


일식 요리사의 꿈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곧장 보헤미안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다친 손가락은 쓰라렸지만, 가슴 한쪽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가 그날따라 정말 맛있었다. 컵을 앞에 두고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커피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점장님이 시험 잘 봤느냐고 물었다. 불현듯 커피 일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 진지하게 고민했고 결심이 선 순간 주저 없이 점장님께 말씀드렸다.


“커피 일 배우고 싶은데 일 좀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보헤미안에 들어가 오 년 동안 커피를 배웠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보자면 결코 짧은 시간도, 긴 시간도 아니다. 그곳에서 보낸 오 년은 내게 매우 농밀한 시간이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나날들이었다. 지금 그렇게 돌이켜 생각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커피에 미쳐 지냈다. 하루 대부분을 커피 생각만 하고 커피 공부를 하며 지냈다. 밤에는 외국 커피 책과 논문 자료를 쌓아놓고 뒤적였고 낮에는 카페 주방과 로스터 앞에서 보냈다. 매일 공부해도 공부할 것이 늘어만 갔다. 공부할수록 오히려 모르는 것이 방대해지는 게 재미있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 지식이 실제 커피 로스팅이나 추출 과정에서는 그리 쉽게 구현되지 않았다. 그 간극은 내 탐구심을 더욱 자극했다. 무언가 알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를 그때 처음 배웠다.


보헤미안은 내게 바벨의 도서관 같은 곳이다. 점장님은 일에 관해서는 혹독하리만큼 무섭고 깐깐한 분이었다. 하지만, 커피에 대한 열정은 적어도 내가 옆에서 지켜본 오 년간, 조금도 식을 줄 몰랐고 끊임없이 공부에 정진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었다. 가끔 나태해지려다가도 점장님 책상에 펼쳐진 새로운 커피 책과 밑줄 쳐진 자료들을 보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명성이나 권력에 초연한 태도 또한 매우 지혜롭고 멋져 보였다. 오랜 노력과 열정으로 쌓아올린 커피에 대한 자긍심을 돈과 쉽게 교환하려 하지 않는 태도는 그후로도 내게 큰 준거점이 되었다.


내가 커피 공부를 하러 미국을 대여섯 번이나 오갈 때 점장님은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주셨고 업무 스케줄을 보름이고 한 달이고 모두 비워주셨다. 내가 로스팅을 처음 시작한 이후 한참이나 내어놓은 그 형편없던 커피를 두고도 묵묵히 믿고 기다려주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강릉 보헤미안 박이추 사장님 커피만 마시다가 간혹 내가 로스팅한 커피가 나가면 손님들은 대번에 불만을 쏟아냈고 점장님은 자기 잘못인 양 죄송하다며 커피를 다시 내려드렸다. 그런 일이 있던 날이면 나는 차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로스터와 자료 앞에서 수없이 초라한 새벽을 맞았다.


보헤미안을 떠날 때 엄청난 계획과 대단한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간의 데이터와 경험을 토대로 좀더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나라고 카페를 차려 돈을 벌고 싶은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때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멋진 카페가 아니라 그것을 위한 준비와 공부였다. 특히 스페셜티 커피의 꿈을 펼치기 위해 꼭 필요한 산지 다이렉트 트레이드와 커피 생두에 대한 공부가 하고 싶었다. 커피 일 하면서 내가 쓴 돈이 번 돈보다 훨씬 더 많다. 보헤미안을 나올 때 내게 남은 것은 천만 원짜리 적금과 중고 에스프레소 기계가 전부였다. 이걸로 홍대 인근 구석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서 책과 커피 속에 파묻혀 지내리라 마음먹었다.


커피와 관련해서 내가 가진 가장 큰 꿈은, 우리가 커피를 통해 얻는 행복과 이윤의 일부를 커피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더 맛있고 더 멋진 커피를, 그 커피를 재배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으로 소개하는 것. 빈한하지만 아름다운 커피 산지 이곳저곳을 커핑 스푼 하나 들고 헤매는 언젠가의 나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종이 나부랭이 흩어진 책상 앞에, 로스터 앞에, 커핑 컵 앞에 선다. 나는 보헤미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