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나는 노는 게 좋아요


땅이 노는 꼴 

동네 친구가 오이와 가지, 옥수수가 너무 많다며 우리집에 나눠주었다. 친구의 시부모님이 직접 농사지은 작물을 또 한아름 보내주신 것이다. 친구네는 외식을 좋아하는 맞벌이부부인데 매번 시가에서 양껏 보내주는 농산물을 제때 소비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다.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동네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잔뜩 보내신다고 한다. 그분들로서는 열심히 기른 작물인데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가친척과 지인들에게 보내서 소진하는 것일 테다. 

적지 않은 연세의 시어른들은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평생 농사를 지어오신 분들은 아니어서 몇 해 지나지 않아 몸 곳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소위 ‘골병’이 드는 것인데, 어느 자식이 그것을 두고 보겠는가. 자식이고 며느리고 모두 ‘제발 농사 좀 짓지 말아라, 나중에 병원비가 더 든다’며 말렸더니, 이번에는 그 땅에 과실수를 심으셨다. 그러고는 감이 주렁주렁 열리자 그것들을 손수 하나하나 따서 깎고 말려 곶감을 무려 2500개나 만드셨다고 한다. 물론 그 곶감은 흘러 흘러 우리집 냉장고에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결국 자식들은 부모님의 노동을 말리는 데 실패했다. 

“그분들은 땅이 노는 꼴을 못 보셔.” 

친구는 말했다. 나는 문득 땅이 노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땅이 춤을 출 것도 아니고, 유튜브를 보거나 배드민턴 같은 걸 칠 리도 없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잡풀이 우거지는 정도가 아닐까? 땅이 좀 놀면 안 되는 걸까? 모두가 부지런히 바쁘게 일하며 사는 우리나라에선 땅조차도 놀아선 안 되는 걸까? 어르신 중에 이런 분들을 흔히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척 부지런하고, 땅이 노는 것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놀기를 허락하지 않는 분들을.   



‘일하다’의 반대말 

사전을 찾아보면 ‘놀다’에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우선 떠올리게 되는 첫번째 뜻은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이다. 내가 상상해본 ‘땅이 노는 모습’은 이 첫번째 뜻을 따른 것이다. ‘놀다’의 두번째, 세번째 뜻은 다음과 같다. 


2. 직업이나 일정히 하는 일 없이 지내다. 

3. 어떤 일을 하다가 일정한 동안 쉬다. 


곧 ‘놀다’가 ‘일하다’의 반대말로 쓰이는 셈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땅이 논다’는 표현은 땅이 적극적으로 놀이를 한다기보다 땅이 작물을 키워내며 일하지 않는다는 뜻일 테다. 여기서 ‘일하다’는 ‘직업이나 일정히 하는 일’을 뜻하기 때문에 이 취업난의 시대에 밤낮없이 공부하고 분투하는 취준생을 두고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애 취업이 안 돼서 아직 놀아.” 

그런 말을 들은 취준생은 얼마나 억울할까? 

나의 대학 동기 중에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아이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둔 친구가 있다. 아이 돌보느라 친구들과의 약속에 한동안 못 나오던 친구는 단톡방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 요즘 집에서 애 보면서 노니까……” 

과연 그 친구가 집에서 놀았을까? 아마도 퇴근을 할 수 있는 남편보다 더 바쁘게 24시간 일하며 녹초가 되어 지냈을 것이다.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는 일은 ‘진정한 일’로 대우받지 못하기 때문에 졸지에 ‘노는’ 게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일을 남의 집에 가서 하면 노동이 되므로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자기 집에서 하면 노는 것, 남의 집 가서 하면 일하는 것이 된다니 묘한 일이다. ‘일하다’의 반대말로서의 ‘놀다’는 자본주의에 편입된 측의 입장에서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말로 작용한다. 취준생도 전업주부도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상관없이 ‘노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와 ‘일하다의 반대말’이 모두 ‘놀다’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우리나라에서 ‘논다’는 말은 뭉뚱그려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남이 하는 일에 대해 비아냥거릴 때 ‘놀고 있네’라는 표현을 쓴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혹여 ‘노는 애들’과 어울릴까봐 걱정한다. 몸을 파는 사람을 뜻하는 ‘창녀’나 ‘남창’의 ‘창’이라는 글자는 ‘노는 여자 창娼’ 자다. ‘놀다’를 명사화하기 위해 접미사 ‘이’를 붙이면 ‘놀이’가 되지만 ‘음’을 붙이면 ‘놀음’, 즉 도박을 뜻하는 ‘노름’이 된다. ‘건전한 놀이 문화를 만들자’라는 말들을 흔히 하는데, 이 말은 ‘놀이 문화는 으레 불건전하다’를 전제한 말이다. ‘유흥’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흥겹게 놂’이다. 그 말 자체는 건전하나, ‘유흥주점’은 온갖 불건전함의 온상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논다’는 말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도 뒤틀려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놀기를 좋아하는데, 그렇게 대놓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다. 사람들이 말하는 놀기는 즐거움보다는 나태함이나 불건전함과 닿아 있으므로. 그러나 여러분, 솔직히 놀고 싶지 않은가? 일하기보다는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고 싶지 않은가? 물론 일하기의 재미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고 성취감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나는 일하는 동안 행복하지는 않다. 아마도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 또한 달리는 동안보다는 달려내고 나서가 더 행복할 것이다. 나는 놀 때 행복하며, 결국은 더 잘 놀기 위해 일한다. ‘논다’는 말에 덧씌워진 갖가지 오명을 벗겨내기 위해, 우리는 건전하고 행복한 놀기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한다. 



프레드릭의 표정

그 기원이 오래되고 깊어 ‘제1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연극은 영어로 플레이play다. ‘악기를 연주하다’는 뜻의 영어 동사 또한 플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당놀이’ ‘풍물놀이’라는 말이 쓰이듯 예술의 기원과 놀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유명한 이솝 우화인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여름 내내 노래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노느라 먹이를 저장해두지 못한 베짱이가 추운 겨울 개미 가족에게 먹을 걸 달라고 애원하자 개미는 비웃으며 외면해버린다. 20대 시절, 홍대 근처에서 클럽 공연을 보러 다니며 놀던 나와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이렇게 외치곤 했다. 

“너무해! 베짱이는 뮤지션이라고! 베짱이의 노동요가 없었더라면 개미도 그만큼 일을 못했을걸!” 

베짱이를 옹호하던 친구들과 함께 보낸 시절은 지금도 내 인생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40대가 되었고 저마다 앞가림하느라 바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음에 우리는 숨을 돌리고,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영예로운 칼데콧상을 받은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1967)은 우리가 베짱이를 옹호하며 가졌던 불만을 훌륭히 담아낸다. 들쥐들이 열심히 옥수수와 나무 열매와 밀과 짚을 모으는 동안 꿈꾸는 듯 졸린 눈의 들쥐 프레드릭은 혼자서 딴짓을 하고 있다. 왜 일을 안 하냐는 물음에 프레드릭은 “나도 일하고 있어. 난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던 프레드릭은 모아둔 먹이가 다 떨어져 모두가 힘들어진 춥고 어두운 겨울날, 커다란 돌 위로 기어올라간다. 그리고 그간 저장해둔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말로 풀어놓는다. 프레드릭의 말을 듣고 설명할 수 없는 온기와 살아갈 힘을 얻은 들쥐들은 감탄한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나는 이 말 뒤에 이어지는 이 그림책의 맨 마지막 장면을 사랑한다. 프레드릭은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도 알아.” 

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이 일하는 동안 ‘노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이 모아둔 옥수수와 나무 열매, 밀과 짚만큼이나 삶에 꼭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다른 들쥐들은 개미가 베짱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프레드릭을 멸시하지 않았고, 프레드릭이 만들어낸 신비한 힘에 진심으로 감탄할 줄 알았다. 그런 들쥐들 속에 있기에 프레드릭은 마지막에 그런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이다. 열심히 일했던 다른 들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자신도 그들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줄 수 있음에 기뻐하며, 그들의 인정에 뿌듯함을 느끼는 수줍고도 당당한 시인의 표정 말이다. 

나는 프레드릭을 대하는 들쥐들의 태도 같은 것을 실제로 느꼈던 적이 있다. 10년쯤 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머물 적의 일이다. 그곳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놀랐던 것은, 뮤지션을 공무원이나 요리사만큼이나 사회에 필요한 직업으로 인식한다는 점이었다. 너무 특별하거나 치기 어린 일로 여기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문화를 중요히 여기고 향유하는 수준이 아주 높아서 깜짝 놀랐다.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코리엔테스 거리 양편으로는 서점과 음반가게와 공연장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시민회관이나 광장에서 열리는 무료 공연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주말이면 단벌 외투를 꺼내 입고 손을 꼭 잡은 채 무료 공연을 보러 가는 노부부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어떤 면으로는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것 같았다. 

놀이 문화가 뒤틀리거나 억압받지 않는 곳에서 예술은 잘 자라난다. 그렇다고 해서 노는 시간은 예술을 품어내는 시간이므로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않더라도, 쓸모없이 낭비하는 시간이라 해도, 즐겁게 논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잘 노는 것은 곧 잘 사는 일이며, 좋은 삶터는 곧 좋은 놀이터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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