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다음이 왜 없어

다음은 없어요

택시를 타고 이동중에 전화를 받았다. 딱 한 번 만난 적 있는 신문사 기자였다. 짧은 인사 뒤 그가 대뜸 말했다. 

“연재 한번 하시죠.” 

본인이 맡은 지면에 원고를 연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사실 그전에 같은 신문사의 다른 기자들로부터 원고 연재 청탁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다른 신문에서 온 제안도 몇 번 거절해온 터라 형평에 맞지 않다 생각했고 연재를 시작하기엔 여력도 없어서 그랬다. 나는 원고를 빨리 쉽게 쓰는 편이 못 되어서 연재를 시작하려면 정말이지 크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신문 연재 제안을 거절한 데는 또다른 이유도 있었다. 주간지나 신문에는 개편이라는 게 있다. 시작할 때는 담당 기자와 함께 원고의 방향에 대해 조율도 하고 코너 제목을 짓는 데도 제법 고심을 하지만 한창 열심히 쓰던 중에 대대적인 개편이 있으면 하루아침에 갑자기 연재 종료 통보를 받곤 했다. 개편은 윗선의 결정이고 불가항력인지 담당기자는 건조하게 그 사실을 전할 뿐이었다. 나름대로 연재의 흐름을 늘 생각하고 있던 나는 주간지나 신문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연재 종료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성향상 전통적인 매체보다 새로운 플랫폼과 일할 기회가 더 반가웠다. 더 새로운 기술과 더 젊은 사람들, 더 신선한 매체를 만나 일하면 현재적인 호흡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군데서 제안을 받으면 해봤던 일보다는 새로운 일 위주로 응하는 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주간 문학동네』 연재 제안도 ‘온라인 문예지’라는 실험적 형식이 마음에 들어서 응했다. ‘말’이라는 주제로 써보지 않겠느냐는 기획 방향도 내게 맞춤해서 좋았다. 신생 매체로부터 원고 등 업무 의뢰 메일을 받아보면 우선 매체에 대한 소개부터 자세하고 친절하다. 그리고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의뢰하는지, 그 이유도 정중하고 명확하게 말해준다. 원고료와 예상 일정, 기획 방향을 알려주고 내가 달리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조율도 충분히 한다. 

“연재 한번 하시죠.” 

택시 안에서 전화를 통해 갑자기 들은 이 말은, 내가 그동안 신문사에서 연재 제안을 받으면 왜 좀 불편했는지를 집약해서 알려주고 있었다. 늘 너무 갑작스러웠고, 왜 나에게 의뢰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대지 않았으며, ‘우리 매체에 대해선 당연히 잘 알고 계시죠?’를 전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시혜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내가 한자리 마련해줄게’ 같은 느낌. 젊은 기자는 그렇지 않았지만 나이 든 남성 기자는 예외 없이 그런 뉘앙스였다. 나와 통화를 한 사람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 기자였다. 나는 조금 기분이 나빴다. 그는 전화를 걸어서 내게 ‘지금 통화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저 말에 이어서 간략하게 다음 개편의 방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나는 새로운 연재를 곧 시작할 예정이고(바로 이 원고다), 지금은 다른 일이 많아서 연재를 더 맡기는 힘들겠다고 했다.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는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이런저런 사정 설명 끝에 ‘이번에는 어렵겠고, 다음에 제가 쓰고 싶은 주제가 생기고 여유가 될 때 기회가 닿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허, 다음은 없어요.” 

좋게 해석하자면 그는 이번에 꼭 연재를 해줬으면 좋겠다, 섭외 욕심이 난다는 마음을 농담처럼 전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농담이었지만. 나도 거절에 대해 일말의 미안한 마음을 싹 지우고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러시다면 저도 정말 괜찮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도 그에게 ‘다음’을 허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적 공간적 차례 

사전에 따르면 ‘다음’의 기본 의미는 ‘시간적, 공간적 차례에서 어떤 기준점의 바로 뒤’다. 공간적 차례에서의 쓰임새는 학교에서 나란히 줄을 섰을 때 ‘진희 다음은 나, 나 다음은 혜경이다’처럼 비교적 단순하다. 이것을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홍대입구역 다음은 신촌역, 그 다음은 이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의 예는 물리적 실체(진희, 나, 혜경)가 한 공간 속에 인접해 늘어서 있을 때의 쓰임새이므로 보다 구체적이고, 뒤의 예는 ‘홍대입구역-신촌역-이대역’을 잇는 지하철 노선을 하나의 선으로 떠올려 선후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더 관념적이다. 우리는 지하철의 방향을 고려해 ‘이대역 다음은 신촌역, 그 다음은 홍대입구역’이라고 순서를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시간적 차례는 더더욱 관념적이다. 조금 더 복잡한 추상화의 단계를 거친다. 현재를 기준으로 이전의 시점을 과거라 하고, 이후의 시점을 미래라 하며, 그것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일방향의 직선으로 시간을 상상할 때에야 차례가 생긴다. 과거 다음은 현재, 현재 다음은 미래다. ‘다음을 기약하자’라고 말할 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간을 뜻하는 것이다. 한편, 보다 구체적인 시간적 차례도 있다. ‘물을 끓인 다음에 라면을 넣는다’ ‘방 청소를 한 다음에 거실을 청소한다’ 등 행동의 시간적 순서를 말할 때가 그렇다.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고 말하지만, 시간적 차례를 상정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언어학자 대니얼 에버렛이 삼십 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연구한 아마존강 유역의 소수민족 피다한(Pirahã)족의 언어에는 내일을 뜻하는 단어도 없고, 미래형 동사도 없다고 한다. 이는 노엄 촘스키가 말한 인류의 ‘보편문법’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언어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보편문법’이란 인간의 두뇌에는 타고난 보편적 언어 기능이 있어, 모든 언어에는 공통된 부분이 있고 이를 보편적인 문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이다. 처음에는 촘스키의 이론을 배워서 적용하려고 했던 에버렛은 피다한족의 언어에 ‘보편문법’에서 벗어나는 예들이 너무 많아서 새로운 이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언어의 기본 특성은 유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고유의 문화가 언어에 예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었다. 피다한족은 음식을 저장하지 않고 도구는 그때그때 야자나무 잎 등을 엮어 대충 만들어서 한두 번 쓰고 버린다. 오늘 하루 이후의 삶을 대비하지 않는데,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만 집중하면서 대단히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다음’이 무의미하다. ‘카르페 디엠’ 같은 말도 없이, 아니 그런 말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을 매순간 실천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촘스키의 ‘보편문법’ 이론에 부합하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에게는 피다한족처럼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강렬히 현재에만 집중하며 행복감을 누릴 능력은 없다. 우리는 다음을 준비하며 자꾸만 현재를 희생하려드는 특성을 지닌 부족이다. 한국어로 ‘다음’은 더 나은 미래, 가능성, 더 안정적인 지위 등등 다양한 함의를 품는다. 



See What’s Next

앞서 말한 전화를 끊고 나서도 “허, 다음은 없어요.”라는 기자의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말에 상처받아서는 아니었다. 나야 그가 제안하는 기회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마도 일해온 방식대로 일할 그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나에게 ‘다음’이 더 많을 것이다. ‘다음은 없다’는 그의 말이 맴돈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많은 사람들, 특히 현재의 청년 세대들을 압박하는 기득권의 말하기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기회는 내 측에서 주는 것, 지금 잡지 않으면 두번째 기회는 없는 것.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다음은 없다’고 말할 때, 청년들은 ‘이생망’을 읊조리게 된다. ‘이번 생은 망했어.’ 이번 생 안에 다음이 없으니 다음 생이나 기다려볼 수밖에. 

며칠 전 어린이 독서 교육 전문가 김소영 선생님과 함께 팟캐스트를 녹음하던 중 이런 말씀을 들었다.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실수할 수 있게 해줘야 해요.” 나는 그 말을 적어 왔다. 어린이들은 실수를 통해 배운다. ‘이번’의 실수는 항상 더 나아질 ‘다음’의 밑거름이 된다. 실수를 해도 언제나 다음이 있으므로 괜찮다고 느껴야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더 많이 배우게 된다. 그리고 사실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다. 언제나 다음이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겁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기꺼이 실수를 통해 배우고 또다시 도전할 수 있다. “괜찮아, 다음엔 더 잘하자.” 다음은 도전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주문인 것이다. 

나는 기존 미디어가 아닌 새로운 매체나 플랫폼의 도전과 성장을 지켜보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쓰는 언어 또한 매체이고, 피다한족과 우리의 관념이 다르듯이, 보고 듣는 매체의 성격에 따라 생각도 변화한다. 지난 주말 정세랑 작가가 쓰고 이경미 감독이 만들고 정유미 배우가 연기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며 무척 즐거웠다. 공중파 TV와 달리 수많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이 시리즈는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다. 넷플릭스는 처음 온라인 DVD 대여 서비스로 시작했다가 인터넷 기반의 영상 컨텐츠 기업으로 거듭났다. 각 나라의 공고한 기존 방송 네트워크와 별개로 190개국에 진출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제는 세계적인 미디어 기업이 된 넷플릭스의 첫 슬로건은 “See What’s Next”였다. 다음을 보라. 우리에겐 언제나 다음이 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