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7


마티아스 마우어의 미공개작 여덟 점이 독일 뒤셀도르프 코넬리우스 스트라세의 한 건물 증축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화가가 미주 여행시에 작업한 걸로 보이는 여덟 점은 스케치 작품과 미완성 유화 풍경화들이 다수이며 완성작으로는 뒷면에 제목이 적혀 있던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안 티츠My small perky hawaiian tits>가 있었다. 미주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여정중에 만나 동행하였던 심시선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작품들과 함께 복원 과정을 거쳐 K20에 특별 전시될 예정이다.

―『미술XX』, 해외단신(2009) 


*


다른 가족들은 알고 있을까? 할머니의 초상화가 긴 여행 끝에 호놀룰루 미술관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어쩌면 다 같이 보러 갈 수도 있을지 몰랐다. 그 그림에 대한 감회는 단순하지 않지만 사진으로만 본 게 다였으니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우윤은 처음 그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 기억이 났다. 생생하게 날 수밖에 없었다. 

장마 초입이었다. 우윤은 캔버스화를 신고 나갔다가 발이 푹 젖었다. 젖은 채 많이 걸었더니, 마찰 때문에 피부가 벗겨지고 말았다. 걸을 때마다 신발 안에서 철벅거리는 빗물에 피가 섞여드는 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 깨끗이 씻고 연고를 바르고 있는데 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 ……화가 발견됐대.”

“뭐라고?”

“할머니 누드화가 발견됐다고. 난리 났어, 아주. 지난주에 『빌트』부터 『슈피겔』까지 모조리 보도했나봐. 독일에서 온 재단 사람들이랑 기자들이랑 지금 할머니 집에 있대.” 

“그 사람이 그린?”

우윤이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묻자 지수가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를 키웠다. 

“그럼 누가 그렸겠어. 링크 보내줄게, 봐봐.”

열어보니 부인할 수 없게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약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몸에 비해 훨씬 큰 안락의자에 나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같은 자세로 반세기를 건너온 것이 대단해서 우윤은 조금 웃었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지만 청록색 광택이 특이한 퍼 워머를 목에 하고 있었다.

“아, 나 이 워머 할머니 다락에서 본 것 같다.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었지만.”

그림에서는 거의 영롱하다 싶은 청록색인데 실제로 만져본 적이 있는 우윤은 그게 울리 나일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배경은 그림자가 져 희미하게 사라지는 식이다. 창가에 앉아 있는 새 두 마리는 윤곽만 겨우 보였다. 할머니만 아주 명확했다. 흐리게나 그렸으면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 

“하필 엠앤엠 탄생 백주년이니까.” 

“할머니 반응은 어때?”

“엄마한테도 이모한테도 오지 말라고 했대. 부끄러우신가?”

“할머니가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아닌데.”

“네가 가봐라.”

“내가 왜?”

“네가 제일 가까이 있잖아. 할머니가 너한테 유독 물렁하고.”

평창동에서 부암동은 물론 가깝지만 내려가는 경사도 올라가는 경사도 보통이 아니었다. 우윤은 사촌언니한테 등고선을 그려봐라, 하고 화낼 수도 없어서 알았다고 했다. 대체 뭘 신고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캔버스화는 익사한 동물처럼 현관에 웅크려 있었고, 장화는 경사 길에 적합할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고등학생 때 실내화로 신던 나이키 슬리퍼를 꺼냈다. 슬리퍼도 경사에 적합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우산은 골프 우산을 골랐다. 

가다가 숨을 고르며 그림의 제목을 곱씹었다.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안 티츠>라니, 너무하잖아. 사람을 그렇게 젖꼭지로 불러버리면 어떡한담. 할머니가 마티아스 마우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마 그런 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학적인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우윤이 직접 들은 건 아니고 고모들과 아빠를 통해 들었다. 불안정하고 공격적인 상태가 되어서, 한두 번은 할머니에게 상해를 입힌 적도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이 죽고 할머니는 놓여난 기분이었을까? 아니면 영영 저주처럼 들러붙겠구나, 했을까? 

할머니가 독일에서 지낸 기간은 칠 년 남짓, 이후 오십 년 가까이 삶은 이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세간에서는 그 뒷부분은 축약해버리고 마치 마티아스 마우어가 할머니 일생일대의 사랑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태엽 인형처럼 되풀이해 말했는데도 말이다.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유명세는 모든 걸 왜곡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어.”

할머니는 시달림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우윤의 가족들이 마티아스 마우어를 종종 ‘엠앤엠’으로 부르는 것은 애정이 깃든 별명이 아니라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함에 가까웠다. 전후 독일 회화 거장 중의 한 사람, 전성기에 자살한 후 끝없이 애도받고 있는 비운의 예술가…… 마우어가 애도받았던 것에 비해, 할머니는 자살의 원인으로 끝없이 비난받았다. 우윤의 가족들이 엠앤엠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입이 쓰고 떫을 수밖에 없었다. 


“영 떨떠름하시던데.”

그날, 할머니 집을 나서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하는 걸 들어버렸다. 마우어 관련해서는 떨떠름하고 심드렁하지. 그게 우리 할머니지. 우윤은 슬며시 웃었다. 열댓 명이 우르르 대문을 나설 때 옆에서 기다렸다가 조용히 들어갔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스태프 중 한 사람이려니 하는 듯했다. 

화장기도 없이, 늘 입는 옷에 스카프 하나 두른 정도의 차림으로 할머니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우윤을 보더니 식탁 위를 가리켰다. 크래커와 스프레드가 있었다. 할머니가 전채 요리만 먹으며 연명한 지 꽤 되었던 때였다. 다들 할머니의 혈관 건강을 걱정했지만 여간한 고집이 아니었다. 

“독일 가시기로 했어요?”

“이 나이에 비행기 잘못 타면 죽는다.”

“그래도 그 그림 다시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아이, 그거 어디 있을까 가끔 생각은 했지만 나 죽기 전에 수면 위로 떠오르다니 말이야.”

“할머니 예뻤던데요.”

할머니가 흐흥, 하고 웃었다. 할머니의 하와이 시절, 뒤셀도르프 시절 사진을 몇 장 본 적이 있었다. 그 사진들도 근사했지만 그림 속의 할머니는 또 달라 보였다. 모니터로 본 것일 뿐이었지만 생동감이 느껴졌다. 화수와 비슷하거나 몇 살 위였을 터였다. 그 나이의 할머니를 만났다면 친해졌을까? 우윤은 가끔 궁금했다. 

“다리는 어때요?”

할머니가 대답 없이 손을 내밀었다. 우윤은 웃으며 그쪽으로 가서 할머니를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혔다. 전보다 약해졌을 뿐, 거동이 불편한 건 아니었으면서 가끔 그렇게 엄살을 부렸다. 손녀들은 모두 할머니를 닮아 발목도 무릎도 튼튼했다. 지수가 할머니 때문에 전부 다리가 안 예쁘다고 투덜거렸다가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다. 오대양 육대주를 다닐 수 있는 다리를 물려줬더니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야, 하고 할머니가 꽥 소리를 질렀었다. 

“나는 이 집에서 혼자 살지 못하게 되면 죽을 거야. 곡기를 딱 끊고.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부암동 경사 끄트머리의 집. 할머니가 혼자 지내기에 낡고 불편했던 그 집은 한때 할머니의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했고 우윤은 상상할 수 있었다. 화가와 조각가와 사진가가, 클래식 연주자와 판소리 고수가, 작가와 배우와 무용가가 어울려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되풀이되는 이야기들은 유령처럼 실루엣을 갖게 된다. 집에 자주 놀러 와 간식을 다 먹어치우는 아저씨가 있어 어릴 적에 미워했는데 어느 날 보니 큰딸의 교과서에 실려 있더라며 명혜 고모가 놀랐던 이야기는 가족들 사이의 농담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들 친할 수 있었어요? 분야가 달랐잖아요?”

“가난했던 시절엔 예술 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다 알고 지냈어. 가난하고 유난했던 사람들이었지. 이젠 살아 있는 이가 몇 없어. 살아 있어도 누워 있지.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는 건 끔찍해. 얼마나 끔찍한지 몰라. 차라리 젊은 시절 행려병자로 죽은 이들이 부러울 정도야.”

할머니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우윤은 알고 있었다. 냉장고와 찬장을 열어보니 참치, 올리브, 옥수수, 새우, 마요네즈, 토마토, 계란, 조개 관자가 있었다. 우윤은 조개 관자를 구웠다. 

식탁에서 먹지 않고 할머니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먹었다. 

“몇 년 전에 말이다. 문어 초밥을 먹다가 죽을 뻔했어. 테두리의 그 질깃질깃한 것이 기도로 넘어갔지 뭐니. 하임리히, 그걸 할 뻔했다니까? 기도도 늙는지. 너도 조심해. 젊은 사람도 문어 초밥을 먹다가 죽을 수 있다.”

할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하더니 우윤의 손을 잡아끌고 화장대로 갔다. 서랍을 좀 뒤지며 고민하다가 가는 비취 목걸이를 우윤에게 주었다. 우윤뿐 아니라 다른 손녀들에게도 매번 그랬다. 인생 말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팁 하나와 액세서리 하나를, 만날 때마다 주었다. 할머니의 액세서리 취향은 엄마나 고모들보다도 나아서 우윤은 할머니의 선물을 잘 애용하곤 했다. 고모들은 왜 딸들을 뛰어넘고 바로 손녀들에게 주느냐고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원래 한 학번 건너뛴 선후배끼리 더 친해지기 쉬운 법이지, 우윤은 생각하곤 했다. 

“이건 언제 사신 거예요?”

액세서리에 얽힌 이야기들도 좋아했다. 

“칠십 몇 년인가, 너희 할아버지가 사주었지.”

“안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요?”

“누구를?”

“누구든요.”

할머니는 건성건성한 손길로 화장대를 정리하며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검토해보았다. 

“마우어가 아니었으면 나는 계속 세탁소에 있었을까? 언젠가는 벗어났겠지만 몇 년이 걸렸을 테고 아마 공부는 하지 못했겠지. 다른 이민자들처럼 결국은 삶을 일궈내고 다음 세대를 공부시키고 지원했겠지만, 나 자신은 무리였을 거야. 그 점에서 마우어를 만난 건 후회가 없어. 괴로운 방식으로 강렬했지만 가지 못할 세계에 가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너희 할아버지 요제프 리는 나를 마우어에게서 구했는데…… 마우어가 죽고 그 사람 그림자가 희미해지자 우리도 희미해지고 말았던 것 같아. 조력자 없이 그 나쁜 상황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 홍낙환씨는 좋은 동료였다가 사랑이 되었고, 언제까지 지속되는 사랑인가 확인하려 했는데 암이 방해했잖아. 만나려면 셋 다 만나야 했고, 만나지 않으려면 셋 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네.”

우윤은 마우어에 대해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었으나, 요제프 리나 홍낙환에 대해서는 흐린 기억들뿐이었다. 특정 나이 전의 기억들은 쉽게 휘발된다는 것에 상실감을 느꼈다. 부모 세대에게서 전해들은 일화들이 마치 자신의 기억인 것처럼 남아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화수나 지수만큼의 기억 정도는 가졌으면 했다. 몇 살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셋 중에 우윤이 할머니가 돌아가실까봐 가장 안절부절못했던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그 일은 당연히 일어났지만. 

그날, 나란히 앉아 동물 동영상 몇 개를 찾아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우윤이 그런 것을 보여줄 때 좋아했다. 유쾌하게 고개를 흔드는 왕관앵무 동영상과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는 정어리떼 동영상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두 번씩, 세 번씩 돌려 보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새나 물고기처럼 아주 가벼운 영혼이고 싶어.”

책을 좀 읽어주고 잡지도 좀 읽어주었다. 할머니의 다리가 느슨해진, 그러나 모양만은 근사했던 오버사이즈 돋보기는 제 기능을 못했다. 

“자고 갈 거니?”

내내 거세던 빗소리가 잦아든 다음이었다. 

“그러고 싶은데 엄마가 시래기밥 해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섭섭해할 테니까……”

“시래기? 웬?”

“이상하게 그게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요.”

“시카고엔 언제 돌아가니?”

“한 이 주 있다가요. 근데 할머니, 저 조소 그만두려고요.”

“무슨 말이야?”

“좀 이상한 이야긴데, 괴물밖에 못 만들어요. 다른 건 하나도 못 만들고 괴물밖에. 이상한 데 재능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LA에 가서 크리처 디자이너가 될까 해요.”

“그게 뭐야?”

“영화에 나오는 괴물을 구상하는 거예요.” 

“만든 거 있니?”

우윤은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져 몇 장 보여주었다. 

“아이구, 무서워라. 하지만 무서우면 잘 만든 거겠지. 근데 원래 예술보다 예술 조금 옆이 더 재밌다. 나도 그랬었다.”

너무 과거형으로 이야기하시는 거 아니야, 우윤은 현관에 서서 할머니 뺨에 뽀뽀를 했다. 뽀뽀는 뺨에, 가볍게, 건조한 입술로. 그것 역시 할머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다음에는 언제 들어올 거니?”

“비행기 표가 비싸서 겨울엔 못 오지 싶어요. 내년에 또 들어올 거고, 출국하기 전에 자주 올게요. 내일 아빠랑두 오구.”

“네가 내년에 올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할머니는 정말로 우윤이 다시 귀국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우윤은 참석하지 못한 생일 파티에서 모두에게 덕담을 하고 몇 시간 후에…… 우윤은 장례에도 가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할머니는 장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가 들어가는 단어는 사실 모조리 싫어했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내 모든 것의 뿌리. 아직 태어나지 않은 괴물의 콧등에 기대 많이 울었다.

십 년이 지났고, LA에서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에 동행 없이 탔다. 옆 좌석이 빈 자리였는데, 어쩐지 할머니가 곁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또 잔잔히 눈물이 났으므로 일부러 창밖을 바라보는 척했다. 할머니가 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8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게 나의 첫 비행이었다. 뒤셀도르프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가깝다고 했다. 내게 서류를 구비해주느라 늦어져, 마우어는 원래의 일행들과 헤어졌다. 일행들이 먼저 떠나며 내게 지은 조소를 잊을 수 없다. 비행기에서 우리 둘의 좌석도 떨어져 있었다. 나는 좌석 위로 불쑥 올라온 마우어의 거친 곱슬머리로 덮인 머리통을 뒤에서 보며 그 모든 게 미친 짓이란 생각을 했다. 위가 너무 오그라들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중간 기착지에 내려서야 뭘 좀 먹을 수 있었는데, 다시 탔을 땐 결국 다 토했다. 그렇게 비행의 질이 형편없고 비행기가 자주 떨어지던 시대에 사람들이 매일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 가끔 믿을 수 없게 느껴진다. 

―『이제는 지나온 갈림길』(1991)에서 


*


출국장 앞에 렌즈가 커다란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새 보러 가는 사람들인가?”

해림이 혼잣말을 했고, 지수는 해림이 귀여워 견딜 수 없었다. 

“기자들인 것 같은데?”

지수의 짐작이 맞았다. 악랄하기로 유명한 국회의원이 미주 순방에 나서는 모습을 담기 위해 몇 사람이 카메라를 들었고 곧이어 아이돌 그룹이 지나가자 훨씬 많은 수가 검은 구름같이 움직이며 사진을 찍었다. 

“너 학교 가면 자랑할 수 있겠다, 아이돌 봤다고.”

“누군지 모르는데?”

“몰라? 규림이는?”

규림도 고개를 저었다. 사촌동생들만 믿었던 지수는 아까 팬인 것 같은 사람들에게 물어나 볼 걸 아쉬워했다. 못 알아본 게 미안해서 묻지 못했다. 

인천에서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에선 누가 누구와 앉을지로 가벼운 혼란이 있었다. 명혜는 태호와 탔고, 상헌이 일정 때문에 후반부에 합류하기로 해 화수와 앉으려던 지수는 화수가 명은과 앉고 싶다고 해서 해림과 앉기로 했다. 명준과 난정 부부, 경아와 규림이 가운데 열에 나란히 앉았다. 

“해림이가 지수를 따르네.”

경아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이모, 그 말을 좀 덜 놀란 듯 해줄 수는 없어?”

“아니, 내가 뭐.”

“뉘앙스가 너무 실렸잖아.”

초등학생의 모범이 되기엔 다소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지수였지만, 해림의 작고 따뜻한 손이 아무렇지 않은 신뢰를 담아 잡아오면 기분이 좋았다. 어린이가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한국에 남은 것은 경아의 남편인 정보근이었는데, 이 집 저 집의 화분 관리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물려준 것들도 있어. 막 서른다섯 살쯤 먹은 애들이라고. 하나라도 죽이면 큰일 나. 당신이 생물학자니까 믿고 맡기는 거야.”

경아가 출발 열흘 전부터 내내 겁을 주었다. 

“아니, 분야가 너무 다른데……”

“농담이 아니야. 집마다 지시 사항을 남겨두고 가니까 제대로 지켜.”

그러다가 명혜, 명은, 명준이 설정해둔 현관 비밀번호가 모두 심시선의 생일을 변형한 것임이 밝혀졌다. 

“뭐야, 한 집이 뚫리면 다 뚫릴 판이잖아. 도둑이 싹 털어가도 할말이 없어. 여행 다녀오면 바꾸자.”

명은이 제안했다. 

“네가 바꿔. 난 안 바꿀 거야. 어차피 훔쳐갈 것도 없는데, 뭐.”

명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는 진짜 바꿔야겠다.”

복원 작업이 한창인 작품들 때문에 경계심이 강한 명준은 그날로 당장에 바꾸었다. 난정은 배우자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말리진 않았다. 

“집을 오래 비우려니까 좀 신경 쓰여.”

“그래도 비행 시간이 기니까 너무 짧게 다녀오긴 그렇잖아.”

비행기에 타서도 초조해 보이는 명준을 내버려두고 난정은 전자책 단말기를 켰다. 이백 그램 남짓한 무게는 역시 손목에 부담 없이 좋았다. 옛날에 수레로 책을 끌고 다녔다는 사람들이 들으면 얼마나 분할까, 엉뚱한 생각도 했다. 어울리고 맞는 시대에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기야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게 아닐까도. 행운이 불운을 상회할 리 없었다. 

“역시 더 상세한 노트를 만들어두고 왔어야 했어.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작업했는지 단계 별로 써뒀어야 했다고. 만약 이대로 비행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잠시 난기류에 시달리자, 명준은 중얼거렸다. 

“아무거나 집어서 좀 읽어.”

난정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읽는 것이라고, 동의할 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이모는 요즘 뭐해요?”

이륙하자마자 잠들었다가 난기류에 깨어 화수가 물었을 때, 명은은 화수의 존댓말이 신경 쓰였다. 언제나 반말을 쓰지 않았던가? 다른 조카들은 여전히 반말을 쓰는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화수는 존댓말과 섞어 썼다. 

“지장보살이 하나 발견됐어. 그걸 프로세스하고 있지.”

“아.”

“사진 보여줄까?”

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은은 비행 모드로 해둔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어때?”

“머리가 크다. 옛날에 만들어서 그런가?”

“아니…… 이 시대에도 잘 만드는 사람들은 엄청난 걸 만들었어. 비례가 어그러진 건, 만든 사람이 뛰어난 장인은 아니었던 탓이지. 누군지 몰라도.”

“몇백 년 후에 혹독한 평가를 받을 줄은 몰랐겠죠.”

“거의 천 년.”

천 년이라는 명은의 대답에 화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카의 눈썹 쓰는 방식이 언니랑 비슷하다고 명은은 잠깐 생각했다. 

“지장보살은 원래 여신이었던 거 알아?”

조카와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아저씨같이 생겼는데?”

“응, 그렇지만 원래는 인도의 대지 여신이었대. 흡수되면서 남자가 된 거지.”

“시선 처리가 왜 이래요? 어딜 보고 있는 거야?”

화수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크게 만들었다. 

“어깨 너머. 구제하지 못한 중생 때문에 신경 쓰여서 뒤돌아보는 거야. 동료들끼리 가끔 그런 농담을 해. 모든 사람 다 챙기고 일 혼자 다 하려는 사람 있으면 그렇게 지장보살처럼 살지 말라고.”

명은은 조카를 웃기지 못하고 약간 머쓱해졌다. 

“할머니 살아 계실 때 종종 불경 읽지 않았어요? 불교 신자였던 건가?”

“그 불경들 지금 나한테 있는데. 아니, 엄만 신자였던 건 아니고 그냥 오래된 텍스트를 좋아했어.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오래 다듬은 텍스트들 읽으면 마음 편해진다고. 성경도 읽고 온갖 걸 읽었는데 좋아하는 부분만 좋아했을걸.”

“편해져요?”

“응?”

“마음이 편해져요?” 

“전근대에 쓰인 거잖아. 위안을 얻다가도 화가 나고, 화가 나다가도 위안을 얻고 뭐 그럴 수밖에 없지. 읽어보고 싶으면 너 줄까?”

“아니에요.”

화수가 얼마 있다 다시 눈을 감았고, 명은은 기척으로 보아 조카가 다시 잠든 건 아님을 알았다. 그래도 명은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준 게 고마웠다. 


해림이 한참 새 이야기를 하다가 얕게 코를 골며 잠들었다. 감긴 한쪽 눈꺼풀에서 눈썹까지 붉은 모반이 있어 누군가 장난스럽게 엄지로 문지른 것처럼 보였다. 지수는 엄마와 이모의 통화를 지나가다 얼핏 들었기 때문에, 해림이 작년에 학교에서 문제가 있었단 걸 알고 있었다. 모반 때문에 놀린 걸까? 그렇게 보기 싫지 않고 눈을 뜨면 더 눈에 띄지 않는데 초등학생들은 외모에 예민한지도 몰랐다. 화수에게 일어난 일을 잘 몰랐던 해림이 화수의 흉터를 보며 “어? 언니도 있었네. 왜 이때까지 몰랐지?” 하며 착각했던 때의 미묘한 공기를 지수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해림도 알겠지만. 

“누나, 나 들을 것 좀.”

규림이 화장실을 갔다가 들렀는지 지수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수가 전화기의 잠금을 푼 다음 건넸다. 

“야, 거기 든 거 나 다음 공연 셋 리스트라서 아무도 안 보여주는 건데 너니까 주는 거야.”

“알았어.”

규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경아 이모가 규림과 해림 때문에 늘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지수는 기내용 이어폰을 뜯어 연결했다.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어보았다. 음질은 형편없었지만 매일 새로운 음악을 하나만 발견해도 좋은 하루라고 믿고 있었다. 비행 시간이 여섯 시간이나 남았으므로 기회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