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9


『보현행원품』의 다섯번째 대원이 수희공덕隨喜功德인 것에 대해 늘 감탄하게 된다. 풀어 쓰면 다른 사람이 이루는 공덕을 함께 따라 기뻐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질투 없는 마음이 또 있을까? 문화계에 몸담고 있다보면 어찌나 자주 질투에 빠지는지 모른다. 질투는 문화계를 움직이는 힘 중 하나겠지만, 많은 경우 독으로 작용하고 만다. 질투 없는 마음이 가지고 싶다. 비틀린 데 없이 환한 안쪽을 가진 이만이 가능한 경지, 범인은 끝내 다다르지 못할 경지일지 몰라도 목표로 삼으려 한다. 곱씹을수록 근사해서 딸 이름을 수희로 지을 걸 하는 생각까지 했다. 내 딸들 이름은 빛나는 마음, 빛나는 웃음인데 그때는 열심히 지은 이름이었다. 수희를 한 명 더 낳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말이다. 

―『월간불교XX』, 작가의 경전(1978)에서 


*


착륙 두 시간 전에, 명혜는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어째선지 스물두 살에 한 첫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악을 쓰고 싸우고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네가 뭔데 없었던 일이라고 해? 네가 뭔데?”

“너도 거기 없었잖아. 너는 그럼 그 일이 정말 일어났다고 어떻게 확신해?”

첫사랑이었다. 편지를 오래 주고받다가, 간간이 간절하게 만나다가 사람이 너무 많은 집이 지겨워서 직업군인이었던 그와 조금 일찍 결혼하기로 했다. 요즘 시각에는 지나치게 일찍 결혼하는 걸로 보일 테지만 그때는 스물셋이나 넷에는 다들 했으므로 그렇게 유난한 일도 아니었다. 명혜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엄마가 동생들이나 집안을 방치하다시피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무작스러운 상태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갈아넣는 데 진력이 난 상태였다. 부암동 집에서 도망쳐 단출하고 깔끔한 제 살림을 꾸리며 자기 자신만 챙기고 싶었다. 

“그래, 내가 너에게 너무 의지했지. 확신이 있다면, 알았다.”

시선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고 소박한 결혼식 후 군인 아파트에 들어갔다. 주변에서는 아이를 가져 결혼한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명혜가 계속 학교를 다니자 소문은 사그라들었다. 1년쯤 아무 일도 없었고, 소꿉놀이 하듯 잘살았는데 어느 날 말다툼이 커졌다. 

“어떻게 경찰이랑 국군이 사람들을 막 죽이냐? 그게 말이 되냐? 빨갱이들이 지어낸 거지.”

“야산에 묻혀 있어. 내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들이 야산에 묻혀 있다고.”

“오해가 있었겠지. 조사해보면 그게 아닐 거야.”

전쟁중에 심시선은 일찌감치 육촌 오빠 부부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다른 가족들의 피난이 늦은 건 서울과 의주에서 내려올 형제들과 그 가족들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고발이 있었다고 했다. 일본에서 유학했던 둘째 심시철이 공산주의자 간첩이라고 이웃이 주장했고, 사흘에 걸쳐 온 가족이 끌려가 총살당했다. 부역자라고 뒤집어쓴 다른 수십 명과 함께였다. 그때 죽은 사람이 서른 명이란 말도 있고 일흔 명이란 말도 있었는데 어쩌면 더 될지도 몰랐다. 심시철의 정치적 성향이 정말 어땠는지는 밝혀진 적 없고 이후 행방도 알 수 없다. 고발한 이웃과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도…… 소식이 심시선에게 전해진 것은 일사후퇴 즈음이었다. 그 마을을 떠난 이가 찾아와 절대 돌아가지 말라고 했다. 돌아가도 아무도 없다고. 가면 심시선도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하지 않더라도 험한 꼴을 당할 거라고.

“엄마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못해. 괴로워서 못한다고.”

“장모님이 잘못 아셨을 거야. 전쟁중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아? 인민군이 죽이고 날조한 거야.”

육촌 오빠의 아내 쪽이 이후 하와이 이민을 주선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갈 곳 없어진 심시선을 위해 국제 우편이 오갔다. 어쩌면 어려운 시절에 입을 하나 줄이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고, 친척 아가씨를 식모로 부리는 게 그저 불편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심시선은 이유를 묻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와이로 일찌감치 이민간 그쪽 집안사람의 옆집에 결핵으로 오늘내일 하며 죽어가는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의 사진 신부로 가면 엄격해진 이민법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거의 마지막 사진 신부였을 것이다. 정말 결혼생활을 해야 하는 거면 어쩌나 망설였더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랬다. 말 그대로 기우였고 그 남자는 시선이 도착하기 이틀 전에 죽어버려, 항구로 그 남자와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다른 이가 데리러 와야 했다. 남편이 데리러 오지 않으면 입국관리소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당시의 사진 기술과 행정 시스템이 훗날 같지 않아 요행이었다고 시선은 회상했었다. 육촌 오빠는 나중에 T에 돌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한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캐묻다가는 그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시절이었다. 흉흉한 눈빛이나 죽은 눈빛만 마주하고 돌아왔다고 편지가 왔고 이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이 집안의 역사였다. 

명혜는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었던 첫 남편을 더이상 사랑할 수 없었다. 명혜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입을 때리고 싶었다. 집안의 물건을 다 부수고 싶었다. 날뛰고 옷을 찢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을 사그러뜨리는 과정에서 애정도 함께 사그라졌다. 결코 말이 막히는 사람이 아닌 엄마가 자식들에게 너무나 힘겹게, 여러 번에 걸쳐 해준 이야기를 통째 부정하는 사람과는 도저히 계속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아무도 명혜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은 몇 년 지나 양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세상에 도전하듯 명혜는 결혼을 다시 하는 것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자 태호가 대신 받아두었던 물을 건넸다. 

“춥지? 내 담요 줄까?”

모니터에 하와이 섬이 보였다. 


“렌터카가 왜 세 대야?”

명준이 렌터카 수속을 할 때 놀라 물어왔다.

“넌 내가 설명할 때 뭘 들었어?”

“설명했었나?”

난정이 쿡하고 자기 배우자의 팔뚝을 찔렀다. 명혜는 언제나 난정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린 단체 여행을 온 게 아니야. 각자의 모험을 할 거야. 그러려면 차가 여러 대 필요해.”

작고 실용적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세 대가 두 대는 흰색, 한 대는 빨간색으로 준비되었다. 몇몇은 미국 온 김에 크고 화려한 차를 좀 타보고 싶었다고 명혜가 듣지 않는 곳에서 툴툴댔다. 적당히 나눠 탄 후 숙소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와이키키 해변보다는 호놀룰루 시내에 가까운 숙소까지는 삼십 분 정도가 걸렸다. 도착하니 우윤이 자신의 트렁크를 의자 삼아 앉아 있었다. 

“우윤아!”

지수가 반갑게 부르자 우윤이 일어서 먼저 난정을 포옹하고, 지수를 포옹했다. 오랜만에 봐서인지 조금 낯설어하며 해림도 우윤에게 인사를 했다. 

커다란 본채와 상대적으로 작은 별채로 이루어진 숙소는 모두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을 만한 구조였다. 

“씻고 쉬다가 두 시간 후에 본채 거실에서 만나.”

명혜가 지시했고, 각자의 침실과 욕실로 흩어졌다.

“수압이 어때?”

경아가 샤워기를 틀어보고 있는 명은에게 물었다. 

“그냥 그래.”

“세게 만들어주는 헤드 들고 올 걸 그랬다.”

“여행할 때 그런 것까지 어떻게 들고 와?”

“이삿짐만큼 싸왔으니 그 정도 추가하는 건 일도 아니었어.”

경아는 방으로 돌아가 소파에 엎드려 있는 규림을 확인하고, 해림은 어디 갔나 살폈다. 정원의 꽃 덤불 사이에 있었다. 

“엄마, 동박새가 있어.”

정말로 잎사귀 색과 비슷한 연두색 작은 새가 있었다. 

“하와이 새답게 생겼네.”

“아니야. 어느 쪽이냐면 아시아 새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눈가에 하얀 선이 귀엽다.”

“응.”

“엄마, 나 서점 가야 해.”

해림은 어디를 데려가든 서점에 가서 그곳의 포켓용 조류도감을 산 다음에 여행을 시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점을 먼저 해결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피곤해진다는 것도. 경아는 큰이모의 발표가 있고 나면 바로 데려가주겠다고 약속했다. 


젖은 머리를 하고 거실에 모였다. 욕실을 쓰는 데는 불편이 없었는데 드라이기 수가 모자랐다. 다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오겠거니 하고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제대로 안 말리면 머리 빠진다고.”

태호가 불만족스러워했다. 

“자.”

명혜가 일어서 목소리를 고르자 모두 명혜를 바라보았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가장 기뻤던,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다른 가족들이랑 공유해도 좋고.”

오랜만에 존댓말로 말하는 큰언니를 보며 경아가 회사에서 쓰는 말투, 하고 반가워했다. 

“어려운데.”

“하지만 승부욕이 생겨.”

“제사에 승부욕이 생겨서 어쩔 거야?”

이색적인 제사 계획에 다들 술렁였다. 

“엄마가 젊었던 시절 이 섬을 걸었으니까, 우리도 걸어다니면서 엄마 생각을 합시다. 엄마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상품이 있어요?”

“아니, 그래도 제사니까 상품은 좀 그렇고 박수를 쳐줄 거야.”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다들 좀 설레고 기대에 찬 듯했다. 

“아참, 훌라는 내가 배울 거야. 예약도 해놨어. 다른 사람들은 피해서 다른 거 해.”

명혜가 선언했다. 언제나 조금 강직한 느낌을 주는 명혜가 훌라를 추는 모습을 상상해보고 몇몇이 웃었지만 웃음을 들키진 않았다. 


 

10


“가, 가버려. 네가 여기 머물면 불바다가 되어버릴 거야.”

나마카가 말했다.

“하지만 언니, 나는 이 섬을 사랑해.”

“가야 해. 다른 섬을 찾아. 너는 불에 끌리고, 불의 섬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펠레는 여행이 불가피함을 받아들였다. 나마카의 곁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고, 펠레를 따라 떠나기로 한 사람들이 있었다. 

―『심시선이 읽어주는 하와이 신화』(1989)에서 


*


명혜, 명은, 경아는 첫날 훌라 원데이 클래스를 함께 들었다. 명혜가 명준과 난정에게도 가볍게 권하긴 했지만 그 두 사람은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고 거절했다. 편안한 거절이었다. 

강습소에 도착해서, 당연히 실내에서 진행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은 학생들을 정원으로 데려갔다. 잘 관리된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한쪽에 가방과 신발을 모으게 하고 맨발로 풀 위에 서게 했다. 오전 열한시쯤이었는데 풀들이 적당히 마르고 따뜻해서 기분 좋은 상태였다. 세 자매는 편안하고 알록달록한 치마를 입고 갔는데, 선생님이 차림이 맘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줘서 기뻤다. 하얗게 센 머리를 솜씨 좋게 말아올린 선생님은 목소리에 힘이 있었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권위 있는 인상이었다. 야외용 스피커에서 우쿨렐레 반주의 하와이 민요가 흘러나왔다. 마흔 명쯤 되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자들이 주춤주춤 적당한 간격으로 자리를 잡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처음 해와 달과 땅을 배웠다. 그다음에 집을 배웠는데, 집을 표현할 때는 엄지끼리 닿지 않는 게 포인트였다. 절벽과 산, 비와 폭포, 바다와 파도, 바람과 야자수, 눈과 손, 미소와 부드러운 어깨, 꽃과 향기 맡기, 레이와 애정, 알로하와 끝내기 동작…… 모든 것이 근사한 쌍으로 이루어져 기억하기 좋았다. 충만한 경험이었다. 오전의 햇빛 속에, 각기 다른 동선 끝에 하와이에 다다랐을 여행자들이 같은 훌라를 배운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년이 더 많았다. 명혜네처럼 자매들끼리 온 것인지 친구들끼리 온 것인지는 언뜻 보기엔 알 수 없었다. 잔 땀이 나면 바람이 식혀주었다. 건물의 그늘을 잘 이용한 정원이었다. 명혜는 명상을 할 때처럼 마음속에 빛이 차오르는 걸 느꼈지만, 동작을 잊을까봐 조바심을 내는 마음까지 지우기는 어려웠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 곁에 쪼그려 앉아 간단한 메모와 그림으로 기록했다. 명은과 경아가 명혜가 메모를 끝마칠 때까지 곁에서 기다려주었다. 

“같이 등록할래? 셋이 훌라 출까?”

명혜가 동생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 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화산이 보고 싶어, 언니.”

명은이 진지하게 말했고, 명혜는 명은의 짐에서 등산화를 보았던 걸 떠올렸다. 

“보고 싶으면 봐야지.”

“빅아일랜드 다녀올게.”

“경아는?”

“나는…… 진짜 좋은 거 할 거야.”

막내의 막내다움에 명혜는 웃었다. 명혜가 다른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주일 코스를 등록하자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권위 있는 여성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엄마의 딸이어서일까, 첫째여서일까 잠시 혼자 생각했다. 

자매가 강습소에서 걸어나오는데 선생님이 불러 세웠다. 

“꽃을 줄게요.”

“아, 감사합니다.”

“치마와 어울릴 거예요.”

정원의 나무에서 희고 향기가 좋은 꽃 세 송이를 따더니, 명혜 명은 경아 순으로 귀 뒤에 꽂아주었다. 나이를 잘 가늠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꽃 이름이 뭔가요?”

“푸메리아.”

“저는 내일도 올 거예요.”

“알아요.”

꽃을 선물받아 기분이 좋아진 세 사람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너무 아시아식이었나, 더 나은 인사법은 없었을까 고민하며 강습소에서 멀어졌다. 달콤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향기가 오래 갔다. 


명준과 난정은 흰 차를 타고 비숍 박물관에 도착했다. 빨간 차를 노렸는데, 이미 지수가 타고 나간 다음이었다. 어쩐지 앞으로도 빨간 차의 인기가 더 높을 듯했다. 

“19세기 말에, 찰스 리드 비숍 경이 아내였던 파우아히 공주의 죽음을 기리며 만들었대.”

난정은 여행을 갈 때면 가이드북을 종류별로 산 다음, 반복해서 읽어 내용을 다 흡수해버리는 타입이었다. 명준은 그래서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난정의 필터를 통해 간추려진 정보를 곁에서 걸으며 듣는 게 좋았다. 읽고 소화하여 연결된 정보들을 나열하는 난정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누나들은 게으르다고 비난하곤 하지만. 

“여보가 죽으면 나도 뭐 만들어줘? 건물 하나 지어?”

“나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아? 야심 있네.”

난정이 모자를 접어 가방에 넣으며 코웃음 쳤다. 

“이천사백만 점의 유물이 있다는데, 구경 좀 해볼까?” 

건물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나무로 마감된 내부가 근사했다. 

“전시품 케이스들은 코아나무로 되어 있어서, 건물 전체보다도 가치가 높대.”

“코아나무?”

“하와이 제도에서 자라고 고급 목재로 쓰여. 화산재 속에서도 크는 신기한 나무인데, 악기를 만들면 소리가 좋대.”

“여보는 정말 모르는 게 없구나.”

난정은 명준의 칭찬을 그냥 흘려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그려진 태평양 지도 위에서 아웃리거 카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도슨트에게 다가갔다. 명준의 유학지는 이탈리아였기에 영어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난정은 젊은 시절 비즈니스 영어를 열심히 했던지라, 여전히 툭 치면 고급 영어가 흘러나왔다. 명준은 난정이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쩐지 자기 탓인 것도 같았다. 아이가 아팠고, 돈이 급했다는 흔해 빠진 이유로 저 특별한 여자를 주저앉힌 것이 다른 사람들인지 자신인지 헷갈렸다. 

“대충 보고, 이제 미술관 가자.”

천장에 매달린 향유고래를 시큰둥하게 보며 명준이 재촉했다. 

“저 고래, 자연사 박물관에 고래 뼈를 구비하는 게 한창 유행일 때 이 박물관에서도 큰돈을 들여 확보한 건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서양 고래였대.”

“진짜?”

“웃기지? 태평양 한가운데 달린 대서양 고래라니.”

“흠.”

난정이 손가락으로 하루 종일 있는 강의 프로그램들을 훑었다. 웬만한 학교 시간표와 비슷해 보였다. 

“미술관은 자기 혼자 가라.”

“응?”

“여기 걸어다니는 책들이 있어.”

난정이 구부정하게 복도를 걸어가는 노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까 폴리네시안 항해 기술에 대해 설명하던 도슨트였다. 

“하루에 볼 데가 아니네. 며칠 여기 있을래.”

“정말?”

“미술 좋아하지만 당신만큼은 아니고. 이따 데리러 와, 폐관 시간에.”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과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을 하면 잘살 것 같지만, 은근히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상태가 자주 되곤 했다. 명준은 박물관을 배우자에게 넘기고 미술관으로 차를 몰았다. 

미술관은 기대 이상의 규모와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다. 다만 엄마의 그림이 걸려 있는 전시실은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 입구에 청록색이 슬쩍 스쳐 눈 모서리에 남았지만 명준은 고개를 돌렸다. 그 그림은 모두 함께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11


하와이에서 알던 사람을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가까이 지내던 작가가 초청 전시를 하게 되어 함께 간 것인데, 그쪽도 한국 화가가 전시를 한다니 보러 온 것일 터였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아는 얼굴이 떠오를 때의 그 반가움이란.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고 부둥켜안았지만 이름은 질척이다 늦게 떠올랐다. 양쪽이 마찬가지였으므로 서운해하지 않고 더 웃었다. 

“이제 본토에 살고 있어요. 시선씨는?”

“떠돌다 한국에 돌아갔습니다.”

돌아갔다는 말에 어찌나 놀라는지. 나의 떠돎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말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가끔 생각한다. 하와이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이승만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승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로 첨예하게 반분되어 있던 한인 사회는 세대를 내려가며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들었다. 끝내는 익숙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가 망명한 집에 밤에 몰래 가 유리창에 벽돌이라도 던졌을까? 평행하는 세계에 대해 읽어보았지만 역시 그런 게 없었으면 한다. 

―『어쩌다보니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2002)에서


*


“너무 웃기지 않아? 우리집 어른들?”

지수가 말했을 때 우윤은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가?”

“하와이에 와서 뭘 왕창 배우고들 있잖아. 보통은 안 그러지 않나?”

“아아, 참 안 변해.”

두 사람은 어린 시절 가족들 다 같이 단체 여행을 갔을 때, 어른들이 버스 앞쪽에 몰려 앉아 가이드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퀴즈라도 하면 번쩍번쩍 손을 들던 모습을 떠올렸다. 유난히 정보 습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렸을 땐 부끄러웠는데 요즘 보니 좀 귀여운 것 같아. 엄마 아빠도 고모들도.”

“그거 할머니한테서 온 성향 아닐까?”

“아마 그렇겠지.”

“할머니 그래서 갔구나. 여기를 떠나서 독일로. 이렇게 좋은 데를 두고도 배우려고. 뭐라도 배워보려고.”

지수의 말에 우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키키로 가는 트롤리를 타고 있었고, 수영복 위에 바로 입은 가벼운 원피스가 뻥 뚫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날렸다. 두 자리 뒤 해림과 규림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창밖에 정신을 빼앗긴 얼굴이 닮아 있어 지수가 킥킥 웃었다. 

“경아 이모는 똑같이 생긴 애들밖에 못 낳나봐.” 

“놀리지 마, 해림이가 언니 그렇게 따르는데 놀리면 안 되지.”

“우리 우윤이도 어릴 때 정말 귀여웠는데.”

“얼마 차이 안 나면서 되게 언니인 척하네.”

“너는 왜 한국어가 안 녹스니? 한마디도 안 진다니까.”

나오니까 좋았다. 들떴다. 우윤은 규림은 물론 해림까지 우윤과 지수가 데리고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막상 고모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갔던 것이다. 엄마의 등에 손을 대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 그건 엄마의 불안이 아니야, 하고. 지수와 우윤은 조금 더 신뢰를 사도 좋았다. 지수는 갑자기 직업을 바꾸고 여행을 떠나고 파격적인 행동들을 하긴 하지만 위기에 강한 성격이었고, 우윤도 해외에서 독립적으로 지낸 지 몇 년이나 흘렀으니 말이다. 

“언니, 나 해변에 도착하면 서핑을 배울 거야.”

우윤이 선언하듯 말했다.

“어, 그래.”

지수는 돗자리가 든 비치백을 발치에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우윤은 지수가 우윤에게 서핑이 가지는 의미를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우윤은 어렸을 때 아팠고, 건강을 되찾고 나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젊음 같은 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함께 아팠던 친구들을 보면 곧 죽어도 후회 없을 만큼 용감해지거나,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살아가는 듯했는데 자신은 역시 후자에 속한다는 점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래서 와이키키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서핑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말로 서핑에 끌렸다기보다는 우윤이 생각하기에 가장 무모하고 위험한 운동인 것 같아서였다.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끔은 마주해야 했다. 나는 특별히 용감하지도 않지만 겁쟁이도 아니야,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일부러 아침을 일찍 적게 먹고 현금도 넉넉히 챙겨왔다. 

“누나, 나도 배울래.”

트롤리에서 내려서, 규림이 우윤을 따라나섰다. 지수와 해림은 얕은 곳에서 스노클링을 하기로 했다. 

가이드북엔 어느 부스의 어느 강사가 잘 가르친다는 정보가 책마다 다르게 적혀 있었는데, 막상 가서 낯선 이름의 서핑 선생님을 찾기엔 쑥스럽기도 하고 운에 맡기고 싶어졌다. 가이드북을 쓴 사람도 모든 사람에게 배워본 건 아닐 테고, 서핑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장기 근속할 수 있는 일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접수를 받는 사람은 우윤을 보며 미묘하게 평가하는 눈빛을 했는데, 우윤의 근육이 크지 않은 몸이 서핑에 적합한지 살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우윤과 규림은 안내대로 아무 보안 장치 없는 테이블에 가방과 신발을 두고 해변으로 내려갔다. 

배당된 서핑 강사는 앤디였다. 앤디는 적어도 사십대 후반처럼 보였다. 쓰고 있는 까만 캡은 바닷물에 색이 빠져 있었고 체지방 역시 바다가 핥아가버렸는지 몸이 인체 모형처럼 보였다. 굉장히 노련한 서퍼겠거니 우윤은 판단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 여자친구가 나한테 배웠어. 한국에서 온 유명한 배우 '배'도 나한테 배웠고.”

배는 역시 배용준씨이려나? 배두나씨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배정남씨인가? 앤디는 성밖에 기억하지 못했고 우윤은 캐물을 만큼 사교적이지 못했다. 디카프리오의 여자친구는 너무 많아서 누구일지? 그 세 사람은 서핑 솜씨가 좋은가? 우윤은 앤디의 자랑에 되도록 큰 호응을 하려고 애썼다. 

앤디는 모래 위에 서핑 보드를 두고 간단하게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윤은 땅 위에서 하는 수업만으로도 지치고 말았지만 티내고 싶지 않았다. 요가 하듯 가슴을 먼저 일으키려면 유연성이 필요했고, 한쪽 무릎을 세우는 데는 균형 감각이, 양발로 일어서려면 순발력과 근력이 요구되었다. 과연 물위에서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에 반해 규림은 좋은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는 게 티가 났고 얼른 물로 나가고 싶어 근질근질한 듯했다. 

“자, 이제 물로 나가자.”

앤디가 제안했다. 

“벌써?”

“그럼 계속 땅에 있게?”

우윤은 다른 사람들처럼 보드를 옆으로 들려고 했지만 보드는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고 결국 양손으로 바닥에 질질 끄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우윤이 몇 번 떨어뜨리기까지 하자 앤디가 자기 보드를 던지고 되돌아와 들어주었다. 지난 육 개월간의 운동이 무용한 것 같아 충격을 받았다. 우윤은 언제나 체격이 더 컸으면 했다. 무거운 물건을 번쩍번쩍 들 수 있으면 했다. 그래서 보기에는 하잘것없어 보이지만 근력 운동을 꾸준히 했고 쌀자루나 물통을 어렵잖게 들게 된 후로 보람도 느꼈는데, 보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해변에서 불안정했던 우윤은, 물에 들어가자 더한 꼴불견이 되고 말았다. 팔로 저어 멀리 나아가야 파도를 탈 수 있는데, 잔파도에도 뒤로 자꾸만 밀렸다. 우윤의 짧은 팔과 작은 손바닥으로는 도무지 전진할 수가 없었다. 

“누나, 힘 좀 내봐!”

파도를 탈 만한 곳까지 자기 힘으로 간 규림이 응원해주었지만 그것마저 약올리는 것처럼 들렸다. 

“내고 있는 거야!” 

결국 ‘이번 수강생은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없겠는데?’ 하는 표정의 앤디가 자기 발을 우윤의 보드 앞부분에 척 붙이고 끌고 가야 했다. 우윤은 앤디의 발바닥, 뜨거운 모래에 수십 년은 단련된 듯한 거친 발바닥을 보며 괜히 배운다고 나섰나 후회했다. 

해변에서 멀어지자 우윤처럼 옅은 후회의 표정을 하고 있는 초보 서퍼들이 가득했다. 적당한 파도가 오면 강사들끼리 순서를 봐가며 한 명씩 힘껏 밀었다. 대부분은 몇 미터 가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고, 십 미터쯤 간 사람들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보드에서 떨어졌다. 우윤의 곁으로 능숙하게 서핑을 하는 어린이가 지나갔다. 주인과 함께 보드에 올라탄 보스턴테리어도 한 마리 지나갔다. 우윤은 자기도 모르게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말았다. 곧 다른 사람을 쳐다볼 여유 같은 건 사라지고 말았지만…… 우윤은 셀 수 없이 물에 빠졌다. 물이 별로 깊지 않고 발목의 안전 끈이 보드에 연결되어 있어 그 자체로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곳곳의 돌과 죽은 산호들이었다. 초보는 물에 떨어질지 장애물에 떨어질지 조절할 수가 없었다. 우윤은 몇 번이나 안 좋은 곳에 떨어져 온몸을 긁혔다. 그 와중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래시가드를 입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팔꿈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는 건 다시 땅에 발을 디디고서야 알았다. 빠지고 떨어지고 허우적거렸고 소금물을 너무 마셔서 토할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은 느낌에 대해서는, 언제나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입원생활에 대해서도 불연속적인 기억뿐이지만 구토감과 통증은 친구처럼 익숙했다. 무척 심심했던 것도 기억났다. 고모들과 사촌들이 오면 기뻤고 방문객들이 돌아갈 때마다 울어서 엄마를 곤란하게 했던 것도 같다. 그 모든 것은 전생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기억이란 어디서 분절이 생기는 것일까? 우윤보다 늦게, 청소년기나 성인기에 아팠던 사람들은 투병생활을 생생히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걸까? 

아직도 그 무렵의 기억에 지배당하고 있는 건 엄마 아빠였다. 우윤이 아팠던 것 때문에 엄마 아빠는 세상이 우윤을 해치기 위해 존재한다고 잘못된 믿음에 빠져버렸다. 피구를 하다가 공에 맞아 얼굴이 좀 부었을 뿐인데 공 던진 아이의 부모에게 전화를 했고, 독감이 심하게 돌면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고,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반려동물이든 야생동물이든 동물은 웬만해서는 다가오지 못하게 했으며, 대다수의 식물을 옻 취급했고,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여행 가는 것도 탐탁지 않아했다. 우윤이 자취를 시작했을 땐 대형 소화기를 사오고 비상 하강기를 꺼내 길이를 재보았으며, 최근엔 직장에서 야근을 너무 잦게 시킨다며 따지려는 걸 겨우 말렸다. 우윤에게만 그랬다. 막상 자신들이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물리치료도 받기 귀찮아했다. 

“뒤에서 와서 쿵 박았다며? 나중에 통증이 심해지면 어떡하게?”

“에에이, 괜찮아.”

부모를 설득하다 우윤은 아득해졌다. 원래 불안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후천적인 불안이었고, 우윤이 원인이었다. 죄책감과 배신감이 함께 들었다. 어쩜 이렇게 속상하게 한담? 우윤이 아팠던 건 우윤 탓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 우윤이 노력해도 우윤의 부모는 변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식만 부모 속을 썩이는 건 아니었고 반대도 가능했다. 

특히나 속상할 때는 엄마가 뉴스를 보다가 울 때였다. 누군가 자식을 잃은 뉴스를 보면 엄마는 0.4초 만에 울었다. 

“나는 저 마음을 알아. 저 사람은 어떡해? 나는 안다고.”

우윤은 엄마가 뉴스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누군가 자식을 잃는 일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나는 세상이란 게 불만스러웠다. 엄마는 일 년 내내 아픈 아이가 있는 가족들에게 성금을 보냈다. 그런 지속적인 행위도 엄마의 불안을 줄이는 데는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엄마, 나는 죽지 않았어. 죽지 않으니까 사는 것처럼 살아야지.”

우윤은 방에 ‘리브 어 리틀Live a little’이라고 멋들어진 필기체로 적힌 포스터를 붙였다. 글씨 아래는 커다란 파도와 점처럼 작게 서핑 하는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고, 우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늘 아픈 아이가 있었으므로 서핑을 해봐야겠다고 결정했던 것이었다. 리브 어 리틀. 난 좀 살아볼 거야. 

물론 엄마는 우윤이 지금 서핑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게다가 두 시간 내내 보드에서 떨어지기만 했으니, 이대로 그만둔다면 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앤디는 두어 번 제대로 탄 규림을 칭찬해주고 난 다음 우윤에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우윤은 보드에 힘겹게 매달려 앤디의 떨떠름한 시선을 외면했다.

“음, 이제 시간이 다 됐어. 내일 다시 나올래? 마지막엔 거의 일어설 뻔했으니까.”

그래도 미국인다운 낙천적인 목소리로 격려해주었다. 


너덜너덜해진 채로 해변에 올라왔더니 지수는 숙면에 빠져 있고, 해림은 어디서 주웠는지 지퍼백에 든 색이 다른 깃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포켓 도감과 깃털이 든 지퍼백을 번갈아 확인하던 해림이 찌푸린 얼굴로 우윤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다 외래종 깃털인 것 같아.” 

“그렇구나.”

“하와이 새들은 산속 깊은 곳에 숨었나봐.” 

“손 씻고 와. 지수 언니 깨워서 뭐 먹으러 가자.” 

“응.”

우윤은 피곤해서 바로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규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우윤은 사촌동생이 무척이나 부러웠지만 꼬인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누군가는 건강하게, 좋은 운동신경을 가지고 태어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뿐이었다. 

“아, 무지개.”

잘 자고 일어나 기분 좋은 얼굴로 지수가 해변 저쪽을 가리켰다. 꽤 근사한 무지개가 보였다. 핸드폰 카메라로 열심히 찍어보더니 아쉬워했다. 

“엉망으로 찍히네……”

“그러게. 눈에는 이렇게 잘 보이는데.”

“나 결심했어. 할머니 제사상에 완벽한 무지개 사진을 가져갈 거야.”

“뭐?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하는 거야?”

지수의 결정에 우윤은 깔깔 웃었지만, 속으로 자신도 결정했다. 완벽하게 파도를 탈 거야. 그 파도의 거품을 가져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