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화려함과 ‘태도’로 무장한 케이팝 걸그룹의 첨단, 블랙핑크

블랙핑크라는 아티스트는 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한두 마디 말로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물론 그 호기심의 가장 중요한 근간은 그들이 전 세계적으로 이뤄내고 있는 광범위한 성공의 크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케이팝을 연구하고 현지의 반응들을 전하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그리고 폭넓게 현상적인 인기를 이뤄낸 한국 여성 아티스트는 쉬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의 본질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영향력이 그것도 국제적인 규모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는 것은 놀라운 부분이었다. 그들은 걸그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강력한 팬덤을 구축하고 있지만, 아이돌 팬들에게는 ‘머글’이라 일컬어지는 일반 대중 혹은 음악 대중에게도 역시 비슷한 정도로 ‘유명한’ 아이돌로 인식된다. 그들의 음악은 그 어떤 다른 걸그룹과 유사하지 않은 시그니처 사운드를 갖고 있지만(저 유명한 “BlackPink in your area!”로 시작되는) 그것들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더없이 대중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아니, 대중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설득시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블랙핑크의 음악은 동시대의 현대인으로서 가지는 감성 외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전제조건이 필요치 않으며, 그 미학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한 그 어떤 독특한 취향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블랙핑크는 케이팝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전 세계 그 어느 음악 팬들에게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아이돌이다. 하지만 이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케이팝이 그렇게 오랜 시간 추구해온 코즈모폴리턴한 미학의 궁극적 요체를 입증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2019년 4월에 있었던, 코첼라 페스티벌에서의 한 시간 남짓한 퍼포먼스는 블랙핑크의 인기와 그 실체가 가장 화려하게 증명된, 그리고 내 오랜 호기심과 궁금증을 단숨에 일소시킨, 그야말로 그들의 커리어에서 가장 결정적인 무대였다. 흡사 북미 콘서트의 축약판과 같이 진행된 이 무대에서 나는 블랙핑크의 매력과 그들이 만드는 광범위한 소구력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이들의 무대 장악력과 존재감은 소위 ‘아시안’ 걸그룹이라는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케이팝의 걸그룹이 예쁘고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도attitude’가 결여되었다든지, 무대의 장악력이라는 면에 있어서도 서구의 팝스타들과 비견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식의 편견은 적어도 블랙핑크의 무대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비주얼은 물론이요, 팬들만이 모인 콘서트와는 다른, 미국 현지의 수많은 일반 참가자들까지 모인 코첼라 페스티벌의 특수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 대범함, 그리고 예의 거침없고 당당한 블핑만의 ‘스왜거’까지. 블랙핑크는 21세기 글로벌 팝 산업에서 케이팝의 위상과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사례로서 충분해 보였다.    


블랙핑크가 내세우는 ‘걸 크러시’ 혹은 ‘배드애스badass’라 불리는 태도와 이미지가 어느 날 우연히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온전히 블랙핑크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온당치는 않다. 이것을 케이팝이 미국팝 혹은 제이팝과 구분되는 혼종적인(혹은 절충적인) 특징을 증명하는 한 사례라 볼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이 모델에 관련해 블랙핑크의 소속사인 YG는 일종의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점이다. YG의 수장 양현석은 제작자로 전향한 이래로 힙합과 R&B에 기반을 둔 어반 스타일의 걸그룹에 매우 오랫동안 천착해왔다. 그중에서도 1990년대 미국 흑인음악계의 가장 대표적인 걸그룹이라고 불리는 TLC는 그의 오랜 목표였는데, 이 같은 비전이 최초로 구현된 결과가 바로 2002년에 <I'll Be There>로 데뷔한 걸스 힙합 그룹인 스위티SWi.T였다. 여러모로 실험적이었던 이 그룹은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키는데에 실패했지만, YG는 이를 자양분 삼은 음악적 노하우를 바탕으로 2NE1을 출범시킨다. 장르적으로는 ‘흑인음악’을 지향하며, 스타일과 태도에 있어서는 ‘힙합’을 내세운 2NE1은 분명 아이돌로 구분되고는 있으나 제이팝과는 엄연히 다른, 서구적이면서 현대적인 케이팝 걸그룹의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2NE1은 케이팝(혹은 아시안) 걸그룹이 강점으로 내세우는 ‘귀여움’와 ‘일상적임’의 잣대를 거부하면서 그 반대의 개념으로 강하고 화려하며 당찬 태도를 강조하고자 했고, 이는 그것이 또다른 의미의 상업적인 속임수인지와 상관없이 평단으로 하여금 동시대 걸그룹과 분명한 변별점을 만들어 그들의 음악적 성과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이 성공의 모델은 후속그룹인 블랙핑크에서 온전히 계승되었다.  


흥미롭게도, YG의 수장 양현석은 블랙핑크의 음악과 이미지가 다분히 2NE1를 연상시킨다는 언론이나 평단의 지적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다만 블랙핑크가 현재의 산업의 요구에 발맞춰 새롭게 ‘업데이트’된 그룹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했을 뿐이었다. 프로듀서 테디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간결하고 직관적인 힙합 사운드와 로킹한 댄스 트랙이라는 공식은 유사하게 유지되었으나, 이는 훨씬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업데이트되었다. EDM보다는 힙합이나 라틴 계열의 편곡에 치중한 것도 트렌드의 교체에 따른 중요한 차이일 것이다. 이미지의 측면에서도 블랙핑크가 구사할 수 있는 변신과 표현의 폭은 더 넓어 보였다. 이들은 장난스럽고 틀에 속박되지 않는 반항아적인 악동의 이미지가 아닌, 시작부터 모든 걸 다 갖춘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걸그룹의 이미지를 들고나왔다. 힙합의 전유물과 같았던 스왜거와 플렉스가 팝음악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된 현재, 주류 팝 시장은 온갖 다양한 매력을 카멜레온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 전방위 여성 아티스트를 요구하고 있다. 블랙핑크의 이미지, 외모, 음악, 그리고 태도는 케이팝 시장의 현재를 고스란히 드러냄과 동시에 미국 시장이 선호하는 케이팝의 모델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명품과 같은 화려한 이미지의 그룹이라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퍼포머로서 블랙핑크의 재능은 종종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정당히 평가받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현재 케이팝 걸그룹의 판세를 좌우하는 그룹이 된 데 YG라는 대기업의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기획 능력이 차지하는 역할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 같은 기획 그리고 데뷔와 동시에 만들어진 명성의 무게를 감당할 만큼의 재능을 갖추고 있느냐는 점이다. 블랙핑크는 이들이 내세우는 음악과 무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재능들로 뭉쳐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그룹이 가진 파워풀한 이미지와 거침없는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제니와 리사의 능력은 주목할 만하다. 화려한 외모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중저음의 탄력적인 보이스는 주소임인 랩은 물론 버스verse 부를 중심으로 보컬리스트로서도 블랙핑크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뚜두뚜두>나 <Forever Young>에서의 랩 퍼포먼스는 래퍼로서 제니의 잠재력을 느끼게 하는 곡들이다. ‘리더’로 굳이 구분되고 있진 않지만 블랙핑크라는 팀이 가진 사운드적인 혹은 이미지적인 정체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멤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가 하면 일말의 부정적인 기운도 빨아들여 분해시켜버릴 것 같은 리사의 긍정적이고 장난스런 매너는 블랙핑크가 가진 가장 중요한 개성 중 하나다. 타고난 피지컬과 서구적인 외모가 주는 복잡한 이국적인 이미지는 래퍼로서 그의 존재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뚜두뚜두>나 <How You Like That>에서 들리는 리사의 랩은 그 플로우가 극히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발음에 있어서도 외국 멤버로서의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게 할 만큼 자연스럽다. 그의 빼어난 춤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거리street와 무대stage 어느 쪽에도 능히 대응 가능한 유연한 테크닉을 갖고 있는데, 수많은 재능 있는 여성 아이돌 댄서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수준이다.


블랙핑크의 지난 커리어를 돌아보며 내가 가장 흥미롭게 여겼던 점 중 하나는 이들이 매우 적은 수의 곡만을 발매하면서 이미지의 소비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철저한 싱글 위주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블랙핑크는 데뷔 후 현재까지 두 장의 미니 앨범을 내놓았을 뿐이고, 올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덟 곡이 담긴 첫 정규 앨범을 발매한 바 있다. 동시대 라이벌 걸그룹으로 종종 소환되는 레드벨벳이나 트와이스는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여자친구, 오마이걸 등과 비교해도 훨씬 적은 아웃풋으로, 신을 대표하는 걸그룹의 위상으로 본다면 분명 불만스러운 지점이다. 누구나 짐작하는 대로, 이는 블랙핑크 멤버들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기획사인 YG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Light Up The Sky>에서 프로듀서 테디는 이 같은 싱글 위주의 활동, 그러니까 하나의 곡을 내놓고 이 곡을 중심으로 히트를 이어나가는 전략이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의 전략에 있어서 하나의 방편(혹은 불가피한 결과)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이들의 음악에서 파악되는 일종의 패턴이다. 매번 지향하는 장르나 사운드의 방향을 조금씩 틀지만 이는 블랙핑크라는 그룹 안에서 일정한 패턴을 갖고 어레인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각별한 흡인력을 갖고 있고, 이는 앨범 아티스트로서가 아니라 히트메이커로서 블랙핑크의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 양날의 검과 같은 효과를 갖기도 한다. 이는 2NE1을 성공시킨 바 있는 프로듀서 테디에 의해 수행되는 퀄리티 컨트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꾸준한 결과물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실패에 대한 확률을 최소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블랙핑크는 데뷔부터 불완전하지만 성장하는 신인이 아닌 이미 완성된 팝 스타의 이미지를 갖고 데뷔했고 이 같은 독특한 톤 앤 매너는 블랙핑크가 적은 수의 히트 싱글만으로도 효과적인 커리어를 구축할 수 있었던 또하나의 이유가 된다. 


최근에 발매된 블랙핑크의 새 앨범은 이들이, 그리고 YG가 지난 수년간 정교하게 연마한 모든 노하우의 결정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가늠케 한다. 야심차게 《The Album》이라고 명명된 이 작업은, 메인 프로듀서인 테디의 곡들이 건재해 전반적인 톤을 통제함과 동시에, 검증된 팝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인터스코프 레이블과 함께 꾀해왔던 북미시장 공략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다. 블랙핑크가 이미 제시했던 정체성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보다 팝적인 접근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뚜두뚜두> 등으로 기억되는 공격적이고 스왜거 넘치는 힙합풍 걸그룹이라는 틀을 벗어나 케이팝 그룹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총천연색의 이미지를 가진 걸그룹으로서 변신을 꾀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미국 팝계 최고의 작곡가 중 한 명인 라이언 테더의 센스가 빛을 발하는 <Bet You Wanna>나, 팝 스타 셀레나 고메즈와 함께 한 경쾌한 댄스 팝인 <Ice Cream>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블랙핑크의 서명과도 같은 장중한 분위기 속에 미니멀한 비트를 입은 힙합 트랙인 <How You Like That>이나 <Pretty Savage>도 좋지만, 맹렬한 에너지로 이 시대 걸그룹이 품은 솔직하고 당찬 태도의 핵심을 전달하는 복고적인 댄스 팝 찬가 <Lovesick Girl>은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 속에서도 그들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수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곡, 블랙핑크의 보컬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You Never Know>를 들으며 아주 소박한 진실 하나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그들이 얼마나 강하고 당찬 태도를 가진 그룹이든지 간에, 아이돌 그룹이 가진 근본적인 고민과 아픔은 누구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대변할 수 있는 메시지와 팬들과의 진심 어린 소통에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