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랑이처럼 거지인 애가 있을까 싶었어” _이랑

어제 저는 친구의 엄마에게 백만 원권 수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수표를 받아본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친구 엄마는 약 일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이후 친구가 엄마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습득한 백만 원권 수표를, 분명 엄마가 저에게 주고 싶어했을 거라며 자기가 대신 전해준다고 하더군요. 제가 스물두 살 때 알게 된 친구와 친구의 엄마는 항상 저를 응원하고 예뻐해주는 신기한 분들입니다. 친구 엄마는 제가 집에 놀러가면랑이는 오늘 엄마랑 같이 자자~” 하시는 조금 무서운(?) 분이었어요. 그때 동침 제안은 거절했지만 어제 그 수표는 기쁜 마음으로 받기로 했습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친구 엄마 얼굴이, 목소리가 둥실둥실 떠오르는 이 종이를 과연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친구는 저를 처음 봤을 때 이야기를 하며랑이처럼 거지인 애가 있을까 싶었어라고 했는데요. 거지라는 표현에 뇌세포가 놀랐는지 갑자기 머릿속에 이십대의 제 모습이 주마등처럼 쉭쉭 지나가더군요. 돈은 정말 없었지만 스스로 거지라는 생각은 안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교는 학자금 대출로 어떻게든 다닐 수 있었고(미래의 이랑이 갚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집이 없어도 학교 동아리방에서(준이치도 함께) 살 수 있었으니까요. 책이야 도서관에서 보면 되고 필요한 물건은 주워서 획득했어요. 의자, 행거, 책상, 난로, 책장, 악기 등등 제 동기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쓸 만한 물건을 잘 줍는 저에게줍기스트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저는 그 별명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직책을줍기스트라고 쓴 명함을 만들까 생각했답니다.

 

가끔 시-원한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 저는 학교 대공연장 연습실을 찾았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체감상 수백 평은 되는 드넓은 대공연장 연습실에 혼자 있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습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면봉만큼은 아니어도 굉장히 조그맣게 보였고, 거기에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몸에 점점 한기가 들어찼습니다. 한기를 느끼며 점프하고 연습실을 빙빙 돌아도 그 공간에서 제 존재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고, 때로는 제 존재감을 아예 지워보려 이층 테라스(연습실 무대를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에 올라가 텅 빈 커다란 공간을 바라보며 한참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럴 땐 제가 연습실의 유령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시원하다못해 추울 정도로 높고 넓은 공간을 실컷 느낀 뒤, 건물 밖으로 나가면 피부에 닿는 햇살이 너무 뜨듯해서 금방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것 같았고요. 한없이 높고 넓은 공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이 요상한 감정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종교 시설들을 그렇게 높고 크게 짓는 걸까요.)

 

전에 친구와내가 살고 싶은 꿈의 집을 그림으로 그려 서로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 놀이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네요. 전 어릴 때 냉장고랑 아파트 광고전단지를 보는 걸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른이 돼서 냉장고를 사면 전단지에서 본 사진처럼 안에 수박도 들어 있고, 음료수도 들어 있고, 케이크도 들어 있는 채로 냉장고를 갖게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때 저는 딸기 요플레 뚜껑을 반만 열고 퍼먹으면 나중에 나머지 반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린이였습니다. 반만 먹었다고 생각한 딸기 요플레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꺼내 뚜껑을 전부 뜯었을 때 안에 요플레가 남아 있지 않아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맛난 음식이 꽉 찬 냉장고 광고전단지와 텅 빈 아파트 도면은 언제나 제게 상상의 기쁨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비슷한 상상놀이를 즐기는데요. 제가 꾸준히 그리는꿈의 집은 천장이 높고 방이 나뉘지 않은, 그냥 커다란 연습실 같은 공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오래전부터 이런 집에 살고 싶었기 때문에 학교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내길 좋아했던 건가 싶습니다.

 

일본 센다이에서 파친코 영업장이었던 건물을 작업실로 쓰는 사진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작업실 천장높이가 십 미터는 되어 보였고, 넓이는 학교 대공연장 연습실만하더군요. 가로세로가 각각 몇 미터씩 돼 보이는 작가의 사진 작품들이 넓고 높은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고, 사진들은 제 크기와 중력에 못 이겨 이불처럼 주름져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작업실에 찾아갔을 땐 가을이었는데도 안이 무척 서늘했어요. 작가가 내어준 따뜻한 차가 무서운 속도로 식더군요. 겨울이 되면 말도 못하게 춥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작업실 한쪽에 나무로 만든 작은 방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무 방엔 놀랍게도 기차처럼 바퀴가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닫이문과 유리창도 달린 어엿한 방이었어요. 방안에 들어가 창문을 통해 넓은 작업실 전체를 보고 있자니 마치 커다란 로봇 조종칸에 들어앉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작업실이 있어도 추워서 공간을 다 쓰지 못하고 이 좁은 나무 조종칸 안에서 일해야 한다니. 새삼 인간의 나약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했던 수표 얘기로 돌아가면, 친구 엄마가 주신 그 수표를 언제 어떻게 써야 부끄럽지 않을까 며칠 동안 고민되더군요. 꼭 필요한 물건을 살 때 보탤까(아이폰12가 나왔다던데?!) 그냥 커피 마시고 밥 먹는 데 이 수표를 써도 될까. 제가 어떻게 써도 잘 썼다고 칭찬해주실 분이지만 기왕이면 가장 멋진 곳에 쓰고 싶어요. 이 글을 쓰다보니 집을 살 때 수표를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제가 살고 싶은 연습실같이 넓은 집을 사는 날, 이 수표를 내면 멋질 것 같아요. 그런데 혹시 수표도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있는 건 아니겠죠? 오십 년 뒤에 바꿔도 되는 건가. 갑자기 걱정되네요. 검색해보겠습니다.

 

추신:

저는 2017년부터 꾸준히 해온꿈의 집이라는 게임과 얼마 전 손절했습니다. 한판 깰 때마다 상으로 받는 ‘별’로 폐허가 된 집을 고쳐나가는 재미에 빠져 제 수면시간을 오랫동안 반납해왔답니다. 만렙인데다 게임머니도 엄청 많은데… 이제 현실에서 꿈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 제대로 자고 제대로 일어나보려고요. 도저히 게임을 지울 수는 없어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2020 11 20

이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