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발목이 묶여도 끝내 넘어지지 않는 이슬아 작가님께

지난번 편지에서 새해 인사로 말문을 열었는데 또다시 새해입니다. 저는 당직을 마치고 돌아와 다음 당직까지 외출하지 않는 연휴를 보내고 있습니다. 또다시 작가님께 복된 새해를 빌며 시작합니다. 답장은 언제나 늦어도 괜찮습니다. 마감이라는 조물주 앞에 언젠가는 편지가 도착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서간문은 2인조 계주 팀 같기도 합니다. 서로의 일상에서 시간을 덜어내 서로의 일상으로 도착하는 일이네요. 하지만 저는 왠지 이인삼각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같이 발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기도 하니까요. 갑자기 작가님과 제가 서로 오른 발목과 왼 발목을 묶고 영차영차 뛰어가는 상상을 해봅니다. 만인이 배꼽을 잡고 크게 폭소를 터뜨리고도 한 달쯤은 넉넉히 유쾌할 그림이군요. 어색하기 짝이 없으니 우리는 실제로 발목 따위는 묶지 않기로 합시다.


저는 당연히 <일간 이슬아>의 맹렬한 구독자입니다. 매일 마감하는 글을 왠지 제게 개인적으로 보내는 서신의 느낌으로 받아보고 있습니다. 눈물이 나거나 축복이거나 족을 치거나 춤을 추다가 끝내 미친 것처럼 보이는 작업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실 많은 글쓰기 노동자나 창작자는 <일간 이슬아>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나도 해볼까?’라고요. 물론 저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콱 <일간 남궁인>을 시작해보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필요한 몇 가지를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처음 발상은 제 개인적인 서사 때문입니다. <일간 이슬아> 초반에 가장 유명한 캐치프레이즈는 이랬습니다.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물론 지금 작가님은 저희 어머니가 보아도 누가 시켜서 쓰는 모습이지만, 그때의 작가님은 일기장을 만인에게 전송하는 기분이었겠지요. 놀랍게도 그 시절의 글은  ‘갱갱갱신’해나가야 할 대상이 되었고요. 저 또한 글쓰기의 팔 할은 싸이월드에서 ‘인싸이더’라는 아이디를 쓰던 사람이 쌓았습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밤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끈 채 미니홈피 BGM을 틀어놓고 하얀 화면을 노려보았습니다. 잠들기 전까지 무엇인가 쓰겠다고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어떤 것이든 써졌습니다. 한 손으로 충분히 셀 수 있는 독자만이 그 글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제게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는 데 삶의 희열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일간 이슬아>와 ‘일간 인싸이더’의 퀄리티는 중국과 리히텐슈타인의 인구만큼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제 글은 너무 엉망진창이라 한국어 사용자더러 읽으라고 작성된 것인지도 애매했습니다. 거기엔 그가 근래 공부하는 외국어와 일주일간 읽었던 소설, 철학 개론서, 시집에서 차용한 단어와 의학 용어가 무작위로 출연해서 현대시의 형태를 이룹니다. 매일 집으로 돌아가 어떤 가치도 없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글을 써내고서야 잠드는 사람이 ‘인싸’였을 리도 없겠지요. ‘아싸’도 아니라 그냥 미친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아니면 자의식이 화산처럼 폭발해서 일본 열도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친구들과 놀러가 술을 마셔도 이 순간을 시로 남겨야겠다면서 노트에 적어댔습니다. 보잘것없는 단상이 기록되지 않고 지나가는 일에 발을 구르던 미련한 존재였습니다.


그것들은 매우 단호한 ‘갱신’이 필요했습니다. 그중에서 병원 이야기만 골라 훗날 모조리 뒤집어서 처음부터 다시 쓴 것이 『만약은 없다』였습니다. 대신 저는 그 다이어리에서 “나는 분명히 죽으려 한 적이 있다” 같은 문장 몇 개를 건졌습니다. 그럼에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불을 꺼놓고 ‘자신의 우울을 어떻게든 멋지게 포장’하려 애쓰는 아이디 ‘인싸이더’의 사내라니요. 소름이 돋습니다. 덕분에 데뷔 이후 한동안 ‘마감 괴물’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일주일에 열 개까지 마감해본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대부분의 날들을 매일 글 한 편씩 완성해야 잠이 드는 버릇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글쓰기의 세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고 간신히 마감을 막아내고 있지만요. 그렇게 저는 마음대로 옛날의 저를 거울로 비추어보고는, 이미 고갈되어버린 듯한 나에게서 무엇인가 계속 탄생하는 기쁨이 작가님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명이 제가 매일 받아보는 연재물이겠지요. 여전히 <일간 이슬아>와 ‘일간 인싸이더’의 퀄리티엔 인도와 바티칸 시국의 인구만큼 간극이 있을지라도요. 


치열하게 글을 썼던 시기를 언급하고 지금의 나태함까지 고백하니,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라떼’를 떠올립니다. 얼마 전 저는 『사람을 살린다는 것』(엘렌 드 비세르 지음, 황소자리, 2021)이라는 책에 추천서문을 길게 썼습니다. 이 기획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의료진이 돌아가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의 이야기를 고백합니다. 저는 처음으로 혼자 사망선고를 한 일에 대해서 썼습니다. 제가 먼저 말해놓고 당직실에서 혼자 크게 울고 나와야 했던, 의사가 된 지 고작 두번째 해의 이야기였지요.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일이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50여 명의 의료진이 털어놓는 시기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의료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젊은 시절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화자가 고령일수록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만약은 없다』의 주축도 그 시기입니다.


흥미롭게도 얼마 전 그 기획을 한국에서도 진행하기 위해 한 일간지의 본부장님을 만났습니다. 초면에도 그분은 대단히 젠틀하고 좋은 분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내용이나 어투도 언제나 정중하셨지요. 그리고 본부장님은 한 시간 정도 되는 점심시간 동안 “이런 얘기를 덧붙여 죄송하지만”으로 서두를 여는 ‘라떼는’을 세 번 하셨습니다. 좋은 말씀이었습니다만, 그 ‘죄송’들 또한 복기하는 시간과 현재의 격차를 말해주고 있었지요.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는 빛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 <일간 이슬아>의 ‘라떼는’을 보고 새삼스럽게 낯선 기분이 들었습니다. 1992년생 이슬아의 ‘팡팡 노래방 썰’과 ‘2006년 여자 사생장 구령대 썰’ 같은 것이었는데요. 그때 저는 이미 대륙 횡단을 몇 차례 마치고 평생 방랑자나 여행작가로 살기를 꿈꾸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자면 무한한 ‘라떼’의 여정이 시작되니 생략하겠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늘 뜯어먹고 살 과거가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 찬란한 시간은 우리에게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빛나는 시간들을 이미 모조리 탕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되돌릴 수 없으니 아무리 찬란했어도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엇이든 아쉽지 않습니까? 그리고 뇌리에 박힐 순간임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밖에 도리가 없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 어떤 순간을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저 또한 버리고 싶은 ‘인싸이더’를 대체할 아이디를 골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확히 무심함이자 귀찮음의 소산입니다. 하지만 이름에 들어가는 ‘궁’이라는 글자 때문에 ‘궁궐’이나 ‘활과 화살’을 연상시키는 별명이 붙었던 일은 이미 학창 시절에 졸업했습니다. 사실 더 자주 붙었던 것은 ‘궁뎅이’입니다. 학령기 아이들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명절에 학령기 ‘남궁’씨 사촌 열 명을 모아놓고 “궁뎅아”라고 크게 외치면 모조리 예외 없이 다 돌아보는 장면을 보신 적 있습니까. 이름자에 있는 ‘궁’을 이용한 무엇인가는 지긋지긋합니다. 그렇다고 1번과 2번은 너무 자아가 충만해서 부끄럽습니다. 또한 아이디에 ‘의사 겸 작가’나 ‘안톤 체호프’를 언급할 배짱은 없습니다. 사실 작가님은 ‘남들을 몹시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정해주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외로움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야말로 남들이 누구보다도 필요하니까요. 5번, othersneedyman을 대체 아이디로 진지하게 고려하겠습니다.


문득 근황조차 알 수 없는 옛 애인들이 생각납니다. 저는 모두를 진심으로 궁금해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서 점차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될 때 저는 더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제 평생 같이 경험하면서 평온하게 탐구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것이 제가 바라는 행운이었기에 작가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저는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근황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이지요. 사실 저 또한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 많은 것들을 궁금해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글쓴이를 궁금해하고 애인과 주변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병원에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근본이 이기적이고 시시한 사람입니다. ‘호모 큐리어스’라기에는 불투명하고 꼬여 있고 힘에 부칩니다. 그래서 고작 애인조차 위로하지 못함을 ‘교양 있는 현대 서울말’을 핑계삼아 고백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환자 앞에서 말을 던지고 10초 정도는 가만히 생각해보는 의사입니다. 위로하지도 애써 달래지도 않고 그냥 생각합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심한 제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우스>는 의대생에게 흥미로운 드라마입니다. 저 또한 조금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하우스’처럼 천재적인 괴팍함으로 모든 환자의 진단을 꿰뚫는 의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성실한 의사와 평범하게 성실한 의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패배는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비슷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죽음과 삶은 얼굴과 뒤통수처럼 너무나 다르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유의미한 것은 아니라고요. 어떤 죽음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지만 어떤 죽음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신물이 납니다. 죽음에 대한 말장난까지도요. 사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엉키고 엉켜 저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게 죽음을 물었지만 저는 항상 얼버무릴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인간이, 제 앞에 있는 환자가 죽지 않는 결과만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일해왔을 뿐입니다. 확실히 유의미한 결과는 자신의 죽음뿐이겠지요. 나머지의 죽음에 대해 저는 답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제 입에서 나와 숱하게 확대재생산된 그 많은 말들 중에, 단연코 제가 후회하지 않은 말은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 왜 그런 말을 던져버렸을까 생각합니다. 언젠가 김밥천국에서 혼자 라볶이를 시켜놓고 옆 테이블의 사내들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당장 뛰어나가 차도에 몸을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경솔하고 부족하고 대단히 주관적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에 당사자성은 그다지 용납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 또한 당사자가 아닙니다. 말이 세상으로 번져나갈 때마다 매번 모조리 주워담아 삼켜버리고 싶습니다. 작가님처럼 그 또한 괜찮고 온전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날 밤, 생각을 깊게 하거나 오래도록 뒤척이면 위험합니다. 저는 술을 잘 마십니다. 술이라는 존재에 패배한 적은 많았지만, 앞에 있는 사람에게 술로 패배한 적은 많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어떤 생각도 깡그리 지워질 만큼의 술을 마셔야 잠에 듭니다. 섀도복싱shadow boxing처럼 혼자 마시면서 주량을 넘겨야 술과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다음날 그나마 온전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요. 어느 순간 일파만파로 제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있다면, 저는 그때 전화기를 꺼두고 환자를 진료하고 있거나 애써 술에 취해 사경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명절을 앞두고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병원과 의사들이 쉽니다. 하지만 응급실은 쉬는 날이 없습니다. 상태가 나빠진 환자들과 상태가 나빠질 환자들이 모조리 찾아왔습니다. 출근하자마자 환자와 보호자에게 피치 못하게 욕을 먹었고, 근방의 환자를 떠맡아 새벽까지 중환자실을 거의 새로 다 채웠습니다. 명절 또한 치명적으로 외로운 날입니다. 누군가는 가족이 없거나, 그런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한 명은 한강에 맨정신으로 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한강에서 의식을 잃고 가라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약을 먹은 채 본인의 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살렸습니다. 직업도 다양했고 나이도 천차만별이고 중증도도 제각각이었지만, 지독한 외로움은 같았습니다. 그중 죽음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한강에 가라앉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폐에는 물이 가득차 있었고 갈비뼈는 부러졌으며 심장이 멎었다가 돌아왔지요. 그를 살리려면 정말 치열한 계산과 인공호흡기와의 집요하고 성실한 사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밤새 싸웠습니다. 그리고 거의 하루가 되어갈 때까지 그의 신원이나 나이조차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오래도록 그는 ‘무명남’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아침에야 그는 간신히 돌아왔습니다. 의식을 차리고서야 그의 부모님과 간신히 통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는 대답을 몇 번이고 들었습니다. 그럴 리 없겠지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럴 리 없겠지요.


퇴근하기 직전 저는 한강에 13분간 잠겨 있었다는 그와 눈빛을 마주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짧은 시간이 담배 한 개비와 농담 두 개쯤의 가치를 지닐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치킨집에서 생맥주 500cc를 놓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잔 더요”라고 외칠 때까지의 시간이기도 하겠지요. 그 시간 동안 스스로 폐에 한강물을 집어넣는 일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CT 영상에 훤히 보이는 그 한강물을 기어코 꺼내고 또 꺼내서 그를 결국 생으로 돌려놓는 일을 생각합니다. 삽관 때문에 그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괜찮냐는 말에 고개만 끄덕입니다. 기억이 나느냐는 말에는 애매하게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글쎄요. 그런 기억은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까요. 그것은 13년 같을까요. 아니면 13초 같을까요. 단언컨대 저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릅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대신 ‘알겠다’고 대답하곤 10초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거짓말은 너무 만연해 있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제 입에서 나옵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요. 그래서 저는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행복을 바랍니다. 하지만 제가 이것들을 마주하고 돌아와 고통스럽지 않다면 자기회피일 것입니다.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위선자일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이것들을 모두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강물에 폐를 담그는 고통을 궁금해하지 않는 순간부터 저는 무가치한 인간일 것입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2021년 2월 11일

분명 죽으려 한 적이 있는

남궁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