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하여간 언제나 사랑에서 힘을 얻는 이슬아 작가님께

지난 만남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 회식은 제게 이번 달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기본적으로 한 달에 약속이 한두 개밖에 안 되니까요. 저는 아침에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났습니다. 맘 편히 저녁 자리에서 놀 수 있도록 바지런히 온갖 잡무와 집안일을 했습니다. 세 시간 전 문득 도배지에 눈길이 갔습니다. 이틀 전 하루종일 집안을 바르고 남은 도배지였습니다. 그 커다란 뭉치가 왠지 절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갑작스럽게 남은 도배지를 모조리 벽에 발라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외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혼자 도배를 하는 것은 살림계의 최종 보스 같은 것입니다. 저는 막상 닥치면 뭐든 제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았지만, 인터넷에서 절규와 회한이 가득한 셀프 도배 후일담을 발견하고 이미 풀이 발라진 도배지를 주문했습니다. 당직을 마치고 돌아와 도배지를 받자마자 하루종일 집안에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벽에 단순히 종이를 붙이는 일이 맞습니다. 하지만 가정집 벽에는 망할 콘센트도 있고 망할 방문도 있고 망할 두꺼비집과 책장과 선반과 망할 무거운 각종 집기들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풀 먹은 도배지는 대단히 잘 찢어집니다. 하루만 도배를 하다보면 작업자는 도배지에 대한 욕을 끊임없이 창조할 수 있습니다. 조물주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고 연이어 풀 먹은 도배지를 창조한 것 같습니다.


몸을 정직하게 쓰니 하루가 잘 지나갔습니다. 바르고 싶은 방에는 도배지를 다 발랐는데도 조금의 도배지가 남았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옥상에 올라가서 방수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있는 구조물을 수리했습니다. 풀이 이미 발라진 도배지는 집안 구석에 길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풀이 말라서 다음날이면 못 쓰게 될 것 같았습니다. 제 성격에 회식을 다녀와서 취기에 남은 도배지를 밤새 바를 것 같았습니다. 밤을 새서 하는 작업이라면 뭐든 익숙하니까요. 하지만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숙련된 노동자처럼 작업복을 갖춰입고 목장갑을 끼고서 지저분했던 주방 벽에 도배지를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도배지는 못 쓰기 직전이었습니다. 작업은 망할 두꺼비집과 세 개의 방문 때문에 복잡했습니다. 마지막 한 장을 남겨놓고 지금 안 나가면 늦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한 칸만 도배가 안 되어 있는 집을 상상해본 적 있습니까. 돌아오면 도배지는 못 쓰게 되는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저는 마무리 작업을 선택했습니다. 약속 시간 10분 전에 집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약속장소인 상수동은 집에서 지하철로 30분, 택시로 안 막히면 20분이 걸립니다. 그 10분을 줄이기 위해 택시를 잡았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평생 엄청나게 많은 비행기와 기차와 버스를 탔지만 기적 같은 운명의 도움으로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 운을 믿었기에, 바삐 움직이는 택시를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금요일 다섯시 반에 정체 없는 강변북로를 만날 정도로 운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동안 금요일 저녁 약속 같은 건 없었던 현실감각 또한 한몫했습니다. 주차장이 된 강변북로에서 절규와 회한이 포함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기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시간에 차가 안 막힐 수도 있나요?” 기사님은 신중하게 답했습니다. “그런 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제가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맞추려면 지하철을 탔어야겠죠?” 기사님은 다시 눈치를 보다가 의외로 호쾌하게 답했습니다. “네. 손님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당연히 택시를 타면 안 되죠.” 차가 가득찬 강변북로 한복판이었습니다. 기사님은 제가 어리석음을 자책하다 택시에서 뛰어나가 달리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약속장소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저는 많은 강박으로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대부분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무해한 강박입니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과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대표적입니다. 뭐든 스스로 해야 하고 택시나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타야 하며 불편함을 참아야 하고 타인에게 실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 총합으로 이루어진 삶은 대단히 딱합니다. 변기가 고장나면 인터넷에서 양변기 부속품을 만사천 원에 주문해서 세 시간 동안 물을 맞아가며 고쳐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보일러에서 물이 새길래 직수구와 출수구와 동파 방지 테이프까지 모조리 뜯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흙 바다였지요. 이전엔 이케아에서 책장 세 개와 다른 가구들을 잔뜩 샀습니다. 배송비가 오만 원이 넘는다길래 모조리 중형차 한 대에 싣고 왔습니다. 간신히 운전할 수 있는 공간만 남더군요. 엘리베이터 없는 4층까지 낑낑대며 들고 와 조립한 뒤 골병에 시달렸습니다.


강연료가 박한 지방 강연도 많이 다닙니다. 굳이 그 시간에 놀 필요도 없고 요청 주신 분들에게 거절하는 것이 죄송스러워서입니다. 한번은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지방 강연장에 도착했는데 담당자분이 대중교통 타고 온 강사는 처음 봤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병원에서는 의료용으로 엄청나게 많은 일회용품을 쓰지만, 근무하면서 종이컵은 단 하나도 쓰지 않습니다. 환경보호와 물자절약을 위해서입니다. 저번에는 냉장고에서 6개월 전에 볶아놓은 오징어볶음을 발견했습니다. 오징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곰팡이가 수북했지만, 솔직히 걷어내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습니다. 조금 아까웠고 6개월 전에는 맛있었거든요. 식재료가 낭비되는 일은 너무 싫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여행지에서는 항상 게스트하우스에서 잤습니다. 몸이 조금 불편한 게 마음이 편했습니다. 아동보호단체에는 천만 원을 일시불로 기부해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저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이상하게 엄격하고 인색합니다.


그 총합이 저라는 사람입니다. 혼자 벽지를 주문해 도배하고 롤러로 옥상에 페인트를 바르는 저는 그래서 존재했습니다. 벽지가 못 쓰게 되어 낭비할까봐 차라리 조금 늦겠다고 판단한 저도 그래서 존재했고요. 누군가에게는 사연이 있습니다. 언제나 타인은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약속장소에 한 시간 이십 분 늦는 일은 일방적으로 무례합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였습니다. 제 안의 강박과 강박이 충돌했기에, 저는 한 시간 삼십 분간 택시에 앉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 욕심이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딱 두 점만 남은 떡볶이를 나중에 먹겠다고 냉장고에 넣는 저를 보고 혀를 차던 이전 애인을 떠올렸습니다. 삼 일이 지난 떡볶이를 냉장고에서 꺼내 먹어도 누군가에게는 해가 되지 않겠지요. 그러나 어떤 강박은 명백하게 타인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중에서 누군가를 가장 괴롭게 만든 것은 바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강박입니다.


단연코 글쓰기는 세상으로부터 제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한 강박일 것입니다. 저는 응급실을 포함한 제 주변의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막 사람들이 제 글을 봐주기 시작할 때, 지금의 저도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글을 써냈습니다. 당연히 연애와 사랑에 대한 것도 있었지요. 『제법 안온한 날들』에 나오는 연애담은 제가 써왔던 연애 이야기의 10분의 1도 담지 않았습니다. 그 글들에서는 저로 가정할 수 있는 화자와, 분명히 누군가를 모델로 썼겠지만 그 사람과는 완벽히 닮지 않은 대상이 출연했습니다. 적어도 실제 모델이 그 사실을 눈치챌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영원히 행복했을까요? 하찮은 창조자에게 박제당한 사람이 영원히 그 사료를 감동적으로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게 될까요?


그것은 기록자와 기록당하는 자의 전쟁이었습니다. 일단 기록해버린 많은 진심은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겠지요. 대상으로 묘사된 사람이 자신과 외양이 다르다고 다투는 일 또한 예사였습니다. 문제는 지금도 끊임없이 창작하고 있는 연인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엿보면 도저히 자신에 대한 사랑이 진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는 변형되었지만 일부는 사실인 일이 섞여 있으니까요. 심지어 감정만은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인은 혼란스럽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럼에도 창작자는 ‘하마’처럼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쓰고 또 쓰다못해 제 글을 본 연인의 반응까지 창작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지어내는 글이 실제라고 믿지 않아요. 언젠가부터 당신의 글은 저로 치환할 수 없는 주인공으로 바뀌고, 당신은 가상의 현실에서 고독해야 했어요. 그것은 되려 저를 고독하게 만들거나 당신의 작화로 태어난 저를 공격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당신의 글을 읽곤 무감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서 독해했어요. 저는 이제 당신의 글을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믿어요. 당신이 언제 어떤 편지를 쓰더라도, 나는 그 글에 당신의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 믿어요. 그것은 당신이라는 연인을 불신하도록 귀결되었지요. 저는 당신이 영원히 거짓만을 쓸 것이라고 장담해요.”


이걸 불 꺼진 방에 틀어박혀 쓰는 사람이 행복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랑은 어떤 시공간에 남겨두어야 가장 완벽합니다.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죽어버린 시간은 모두 미지의 영역으로 가버립니다. 그것을 풀어내서 기록해도 당시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한 공기에는 비견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일방적인 죽음만은 아니기 위해 그런 것을 쓰고 있겠지요. 어쩌면 강박이 그것을 자꾸 이상한 형태로 부활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전에 저는 지난 연애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 모조리 털어놓기로 작정했습니다. 시간이 일주일이나 걸렸고 어마어마한 양의 알코올이 필요했습니다. 기억의 퍼즐을 모조리 맞춘 느낌이었지만, 막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기록되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면 말이라는 수단은 휘발되기에 더욱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죽음에 저항하는 일은 그렇게 힘겹습니다. 다만 짧게 발설할 수 없기에 우리는 길고 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혀 오해가 없으려면, 분명히 명시된 대상자가 등장해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글을 써야겠지요. 알다시피 그것은 이미 불가능해진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분명히 그런 꿈이 있습니다. 저는 절대적인 사랑에 기반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그것은 반은 실존하는 인물이고 반은 가상인 인물에게 바치는 경배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저는 제 모든 것을 끌어다가 평생을 바쳐 글을 쓸 것입니다. 아쉽게도 그 사람은 제 옆에 없고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아직 모릅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제가 일기장에 썼던 글을 많이 인용합니다.


“언젠가는 꼭 너의 따뜻한 손에 대해서 글을 쓰겠다고 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과 너의 따스한 품에 관해서도, 네가 했던 신비로운 말과 짧은 눈썹과 같이 들었던 음악에 대해서도. 약속한 글을 전부 실현하다보면 분명 평생이 걸릴 거야. 우리의 믿을 수 없는 순간들은 한 제국의 역사처럼 방대해서 기록하는 데 거의 한 생을 온전히 소모해야 할 정도니까. 그렇다면 나는 너를 기록하는 역사가가 되는 거야. 네 옆에 일생을 머물면서 너를 치밀하게 기록하는 사람, 너에 대해 모든 것을 기억하고 또 편찬하는 사람. 나는 기꺼이 생을 다 바치는 당신이라는 역사의 지극한 사서가 되는 거야.”


저는 사랑에 빠지면 단 한 사람하고만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지냅니다. 하루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고야 맙니다. ‘당신이라는 역사의 사서’라는 표현은 덕분에 탄생했습니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어떤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였겠지요. 이렇게 작가의 많은 것은 박제됩니다. 그것은 치욕스러운 반대급부가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쓰는 사람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부수고 가장 격하게 만드는 일은 모두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견고한 강박을 부수는 일 또한 사랑이라면 가능합니다. 연인이 타박하면 저는 남은 음식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있고, 호쾌하게 호텔을 예약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사랑에 빠졌을 때, 저는 능히 아무것도 쓰지 않고 살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연인을 위해서 사랑에 대한 창작을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다만 사랑이 부서지면 강박은 다시 공고해지기도 합니다. 이별의 미움을 이기기 위해 핸드폰을 끄고 온 집에 도배지를 바르기도 하고, 다시 이렇게 연애담을 쓰기도 합니다.


치욕을 예견하면서도 용기를 내서 사랑에 대해 적을 때 우리의 손끝에서는 무엇인가 굉장한 존재가 탄생합니다. 그것은 미지의 발끝까지도 미치지 못하지만, 패배를 동경하기에 유난히 아름답습니다. 그곳은 생략과 절제와 가상과 창작과 온갖 가능성이 있는 세계입니다. 작가님이 만난 택시 기사님의 사랑 이야기처럼요. 기록을 마친 자아는 너무나 중독적입니다. 작가님도 저도 그 눈물나는 순간을 겪었기에 지금도 치욕을 이기고 글을 적어내고 있겠지요. 스무 살의 까궁인은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랑은 말해버린 죄조차도 너무 아름다우니.” 토악질이 날 만큼 느끼한 문구지만, 20년 전의 제가 너무 큰 사랑에 빠져 표현하려고 발버둥쳤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박제임은 분명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도 사랑은 작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미지를 동경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패배로 귀결되는 전쟁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슬아와 남궁인의 서간문 연재, 이대로 괜찮은가’ 대담회에서 와인을 한 병 마신 작가님은 세 번 반복해서 다짐했습니다. 제가 기-승-전-응급실로 마치는 글을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요. 역시 이 편지에서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의궁인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어떤 직업이나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의 그입니다. 역시 작가님은 제 답장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파악한 영리한 사람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적는 사람은 작궁인(‘작은 남궁인’이 아닌 ‘작가 남궁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박제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오해의 소지를 남겨놓은 사람입니다. 타박당하느라 쩔쩔매고 처량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엉망진창인 연애를 마치고 돌아와서 다시 이렇게 쓰는 사람입니다. 단언합니다. 작가의 연인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의 사이에 있는 폭발물 같은 오해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일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2021년 3월 29일

이 편지조차 사실임을 장담할 수 없는

남궁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