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나는 시인이 아니랍니다!

예전에 늘 듣던 질문이 있다. “사회학자와 시인의 일을 어떻게 병행하나요?”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여러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내가 말해놓고도 맘에 들었던 답변은 이것이다. “사회학 연구를 하다 논문에 싣지 못한 자료들, 다분히 개인적인 이야기들, 범주화할 수 없는 예외적 사건들이 때로는 시가 되기도 한다.” 

사회학 연구를 수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에는 인생의 우여곡절이 담겨 있다. 그 이야기들은 연구를 위한 자료였지만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종종 들었던 말은 “살고 싶어서”였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고백하는 ‘살고 싶다’는 소망은, 인간 삶 속에 숨어 있는 빛과 그림자의 무한한 조합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치는 것이 결국 문학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연구를 하면서 만난 사람 중 몇몇과는 각별한 친구가 되었고, 그 몇몇 중 어떤 친구는 각별하다못해 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이 되었다. 그에 대해 시를 쓰는 일도 간혹 있었다. 그럴 때 내가 시인이냐 사회학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사람에 가까웠다. 

마크 그래노베터라는 사회학자의 말을 인용해보자. “경제학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학문이라면 사회학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학문이다.” 사회학은 인간의 무능력에, 혹은 인간을 짓누르는 제약에 관심을 갖는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사회학의 관심이 불평등과 빈곤, 배제와 억압, 불안정과 갈등에 쏠리듯이 문학의 주인공은 박복한 이, 사랑에 실패한 이, 삶이 지리멸렬한 이, 나아지려 노력하지만 결코 나아지지 않는 이, 매번 전락하고 또 전락하는 이들이다. 어떤 기준으로건 인간의 대표로 선정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은밀하고도 치밀한 방식으로 대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문학이고 사회학이다. 

나는 최근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장담컨대 지금의 팬데믹 사태는 분명 전 세계 작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컨대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 보더라도 마스크를 쓰고 보거나, 거리를 두고 보거나, 온라인으로 본다는 사실이 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이제 이런 평범한 문장조차 불가능해졌다. “나는 그 낯선 사람의 얼굴에 슬픔이 서서히 번져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작가들은 낯선 사람의 얼굴을 묘사할 때, 늘 마스크라는 장애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마도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그는 마스크를 재빨리 고쳐 썼다. 그때 잠깐 드러난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낯선 사람의 슬픔을 목격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들에 숨어 있다. 오래 관찰하고 곱씹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풀고 번지고 스러지고 부서지는 슬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아래는 시인들이 나눌 법한 가상의 대화이다. 


“나 오늘 공원에서 슬픈 얼굴을 봤어.” 

“진짜? 얼마나?”

“한 십 분?”

“그렇게 오래? 그게 가능해?”

“응, 결국 공원 직원이 와서 경고했어.”

“뭐라고?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라고?”

“아니, 마스크 쓰라고.”


시를 쓰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내가 직업의 무게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는 일이 시간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내 두뇌는 ‘즉’ ‘또한’ ‘결론적으로’ ‘핵심적’ ‘생산’ ‘역할’ ‘기능’ 같은 단어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과장이 아니라, 나는 ‘슬픔’이란 단어를 거의 한 달여 만에 쓰는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슬픔이란 단어를 너무 남용해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최대한 아껴 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슬픔이란 단어를 쓰고 나 스스로에게 놀란다. 너, 지금 방금 슬픔이라고 적었니? 웬일이니.        

나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문화매개는 문화정책과 문화산업을 둘러싼 계급적 동학, 조직 및 환경의 변화 속에서 부각된 독특한 직무이며, 이 직무는 상징재의 가치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논문의 무미건조한 어법을 나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반복한다. “대학은 예술의 무덤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내 상상 속에서 시는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언젠가는 금고의 비밀번호를 아예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열 수 없는 금고와 무덤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이제 누군가 사회학자와 시인의 일을 어떻게 병행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답할 것이다. 병행하지 못한다고. 나는 지금 사회학만 한다고. 그럼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예전 같았으면 “시는 쓰지 않고 시 쓰는 생각만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시에다 옮겨 적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라고 말하고 새벽에 그 말을 제목 삼아서 시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말들은 말 그대로 ‘팩트’가 되어버렸다. 

시인들 사이에선 “나는 시인이랍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 누구는 시인이 시인이라고 자기소개하는 게 뭐가 문제냐며 “나는 시인이에요”라고 당당히 자기를 소개한다. 누구는 시인이라고 하면 직업이 아닌 것을 직업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시를 쓴다”라고 작업 중심으로 말하는 편이라고 한다. 아무리 자신에 대해 당당한 시인도 공항의 출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시인이라고 쓰는 것을 어색해한다. 궁여지책으로 ‘작가’라 쓰는 사람도 있다. 작가라는 말은 왠지 건축가, 사진가, 화가, 음악가처럼 직업의 느낌이 난다. 반면 무슨 일을 하느냐 묻는데 시인이라고 하면 직업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 같다.  

요컨대 시인이란 정체성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해서 타인에게 사회적 정체성으로 표명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인들은 대체로 명함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내가 아는 시인 오은은 사람들을 만나면 명함을 건네는데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근사한 구절이 인쇄돼 있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나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하련다. 그나마 이따금 쓰니까 항상 쓴다고 생각하는 게 가능하죠. 아예 안 쓰면 그런 생각도 안 해요.

누군가 묻는다. 사회학자와 시인의 일을 어떻게 병행하나요? 나는 말한다. 나는 시인이 아니랍니다. 나는 연구자랍니다. 나는 시 안 쓰고 논문 쓴답니다. 논문도 힘들지만 재밌고 의미 있답니다. 한자랑 영어를 많이 써서 그렇지 논문도 상상력과 창조성이 필요하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시가 담긴 금고를 힐끗 쳐다본다. 그것은 늘 내 시야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구석진 곳에 있으면서도 늘 밝은 조명을 받고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기란 너무나 쉽다. 도대체 누가 내 시를 금고에 담아둔 것인가? 나인가? 생활인가? 직업인가? 누가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가? 나인가? 생활인가? 직업인가?

잊어버린 비밀번호를 찾는 일은 방법상으로는 간단하다. 네 자리 숫자라면 0000부터 시작해서 0001, 0002, 0003, 이런 식으로 계속하는 것이다. 언젠가 금고는 딸깍하고 열릴 것이다. 하지만 시의 비밀번호는 네 자리 이상일 수도 있다. 아니, 매일매일 시 금고의 비밀번호 자릿수는 늘어나는 것 같다. 오늘은 네 자리, 내일은 다섯 자리, 모레는 여섯 자리. 언젠가 시를 쓰려고 자리를 잡으면 그 비밀번호는 수백 자리로 늘어나 있을 것만 같다. 슈퍼컴퓨터도, 양자컴퓨터도 풀 수 없는 비밀번호로 시의 금고는 꼭꼭 잠겨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원래 시란 그러한 것이다. 매일매일 시를 써도 시 한 편 한 편이 하나의 금고이다. 비밀번호 자릿수가 많을수록 그것을 열면 좋은 시가 나온다.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다. 이제 시 금고가 너무나 많아 보인다. 그중에 어떤 것은 비밀번호가 한 자릿수다. 나는 지금 당장 그것을 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금고는 아예 열고 싶지 않다. 나는 차라리 비밀번호가 수백 자리, 수만 자리인 것을 찾아서 열고 싶다. 거기에는 너무나 좋은 시가 담겨 있을 테니까.

그러니 문제는 금고를 못 여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 눈앞에서 시 금고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 나는 그것을 하나씩 열어야 할 것이다. 가장 두려운 일은 내게 남겨진 시 금고의 비밀번호가 죄다 한 자리 숫자인 것이다.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은 너무나 쉽게 열리는 무수한 금고들을 쌓아놓고 “나는 다시 시인이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오로지 금고를 열려고 시도를 해야만, 아니 금고를 열어야만 비밀번호가 한 자리인지 수만 자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난감한 사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상자를 열어 관측해야만 고양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금고를 열어 관측해야만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 알 수 있는 사태. 그러니 비밀번호가 한 자리이건 수만 자리이건 금고는 열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열린 금고 속의 시, 좋은 시, 아니면 나쁜 시 둘 중 하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시 안 쓰고 사회학 연구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비극적 운명을 회피하고자 하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시를 쓰지 않는데 시가 담긴 금고는 나날이 늘어나고 쌓여간다. 나는 그 한복판에서 외치는 것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랍니다!” 이 회피 전략의 결론은 불 보듯 뻔하다. 나를 둘러싼 시 금고의 벽이 너무나 두텁고 높은 나머지 “나는 시인이 아니랍니다”라는 외침을 듣는 이는 결국 나 말고 아무도 없을 것이다. 


P.S. 어쩌면 이런 일도 가능하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실 비밀번호가 한 자리인 시 금고를 매일 열고 있으면서 안 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사실을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은 내가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꾸지 않는다. 나쁜 시만 쓰고 발표하지 않는 시인은 결국 시인이 아니다. 그 거짓말은 스스로에게만 수치스럽거나 파렴치할 뿐이다. 어차피 나의 시를 읽을 일 없는 타인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