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샛길: 코로나 시대의 산책

나이트메어 오브 타임

영화관에 가지 않는 게 금단현상을 일으킬 정도인지 몰랐다. 겨우 두어 달 안 갔는데 영화에 대한 허기가 늘 따라다녔고 그래서 애꿎은 넷플릭스와 왓챠만 매일 보는데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를 보게 된 것도 코로나 탓이다. 

친구랑 나는 여느 때처럼 왓챠에 볼만한 게 없나 뒤적거리다가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올라온 걸 봤다. 아마 소지섭의 결혼 소식 때문일 것이다. 둘 다 ‘미사’를 보지 않았고 왜인지 한번 볼까 하는 생각에 플레이를 눌렀다(이게 스트리밍 사이트의 악몽이다). 드라마는 육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진정한 충격을 경험하게 했다. ‘미사’ 1화는 호주 올 로케이션인데 그 사실을 몰랐던 나와 친구는 배경이 1990년대 스타일로 재현된 동유럽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중 문제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눈빛과 말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소지섭은 시종일관 나라 잃은 표정을 유지하다가 틈만 나면 소리를 질렀다. 그의 전 여친인 최여진은 소지섭을 버리고 돈 많은 백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분노한 소지섭은 그녀의 결혼식에 찾아가 말한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집에 김치가 없어.” 최여진이 말한다. “사다 먹어.” 그러자 소지섭이 소리친다. “니가 담가준 김치 아니면 안 먹어!!” 임수정은 남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퇴행성 유아기 현상을 겪는 여자로 그려진다.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는 정경호로 그는 노래도 못하면서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른다. 왜인지 정경호는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하고 임수정을 불러 욕조에 빠트린다. 왜인지 임수정은 심쿵하고 다음 컷이면 정경호는 갑자기 피아노 앞에 앉아서 <You are so beautiful>을 부른다. 임수정은 또다시 심쿵하고 그들은 갑자기 다음 컷에서 호주인지 동유럽인지 어딘가를 걷다가 멀쩡히 차도로 가고 있는 차를 피한답시고 인도에서 쓰러진다. 다친 임수정을 위해 정경호는 또다시 이상한 팝송을 부른다…… 소지섭은 임수정에게 사기를 치지만 임수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를 따라다닌다(어떻게 모를 수 있지, 라는 의문이 들지만 이야기 전개가 워낙 빨라 생각할 틈이 없다). 그들은 목적지 없이 걷다가 길에서 음식을 먹고 길에서 잠을 잔다. 그들에게는 대사관이라는 개념도 집이라는 개념도 없다. 그들은 진정한 유목민이다…… 이 기이하고 추상적이며 극단적인 드라마는 겨우 십육 년 전에 만들어졌고 우리는 크나큰 충격을 받으며 드라마를 껐다(솔직히 말하면 빨려들어 1화를 다 봤고 2화를 재생할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다). 2020년인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 촬영 기술, 연기 방식, 젠더 감수성, 사회적 인식 등등. 우리는 기대감을 갖고 최근 화제작인 <부부의 세계>를 재생했다(이게 스트리밍 사이트의 악몽……). 그리고 깨달았다. 전혀 나아진 게 없음을…… 


디지털 프롬나드

사실 드라마에 대한 비판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 그건 드라마 자신이 종종 그리듯 가부장적인 남성 가장이 TV채널을 뉴스나 다큐멘터리로 돌리며 훈계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드라마에 심각한 혐오 표현 따위가 나오지 않는 이상 비판은 금물이다. 드라마 비판은 오로지 나는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라는 말로 끝내야 한다. 

이상우가 최고로 치는 드라마는 데이비드 사이먼의 <더 와이어>로 1화만 봐도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 서사가 전개되는 양상이 어떻게 저렇게 썼을까 싶은 놀라운 작품이다. 오한기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다. 나도 이 드라마를 좋아한다. 오티스는 어떻게 드라마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 동시에 재미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 사례다. 금정연과 내가 요즘 나누는 대화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도 끔찍하게 웃기고 비관적인 블랙 코미디를 쓰자! 물론 우리는 쓰지 않는다. 누군가 우리에게 억만금을 주지 않는 한 말이다(억만금을 준다 해도 쓸 수 있을지 미지수……) 

왜 갑자기 드라마 이야기냐 싶겠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여행, 관광, 산책 등의 여가가 중단되거나 침해되는 상황에서 기대치 못한 호황을 누리는 게 있다면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나 인터넷 쇼핑몰일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세계에서 산책을 못하게 된 사람들은 웹에서 산책을 한다. 

 산책을 너무 아무데나 갖다붙이는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디지털 산책은 이미 많이 쓰이는 개념이다. 2018년 있었던 서울시립미술관 삼십 주년 전시의 제목은 <디지털 프롬나드>다. 프롬나드는 불어로 산책이라는 뜻이다. 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는 웹서핑(그의 용어로 내비게이션)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산책자형과 탐험가형. 산책자형은 플라뇌르가 도시를 산책하며 아케이드와 백화점, 쇼핑몰에 이끌리듯, 웹을 떠돌며 각종 플랫폼과 (인터넷) 쇼핑몰에 이끌린다. 반면 탐험가형은 게이머로 지칭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목적과 성취가 뚜렷하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이들은 뭔가를 얻기 위한 곳으로 인터넷을 이용한다. 

 도시 산책과 웹서핑은 생각보다 일치하는 지점이 많다.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 


 1. 지각의 산만

 : 발터 벤야민이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의 성향으로 사용한 개념으로 플라뇌르에게도 적용된다. 도시 산책자는 자연 또는 시골의 산책자와 달리 내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현란한 소비문화에 정신이 팔린다. 광고로 눈이 돌아가고 목적지를 잃고 방황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잠재력이 된다. 발터 벤야민은 미술 작품을 보는 등의 전통적이고 관조적인 수용방식은 금방 종교적 숭배가 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파시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봤다. 지각의 산만은 이를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영화나 도시 문화는 다른 의미의 부정적 몰입과 연결됐다. 환영은 언제나 힘이 세다. 

인터넷, 스마트폰의 해악으로 늘 언급되는 것이 산만함이다. 집중력과 주의력이 저하되고 긴 글을 읽지 못하는 현대인! 두 시간짜리 영화도 못 참는 인내심 부족! 그러나 벤야민이 지적했듯 이건 단점이 아닌 잠재력이다. 산만한 지각은 우연성, 다양성, 개방성과 연결될 수 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멀티태스킹을 원시사회 또는 동물의 특성과 연결하며 폄하했지만 관조나 몰입하는 인간이 동물보다 뭐가 나은지 잘 모르겠다.  

문제는 인터넷 환경에서도 다른 종류의 몰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플랫폼은 우리를 다양성이 아닌 편향성으로 이끈다. 알고리즘은 유사한 것을 계속해서 추천한다. 데이터 저널리스트 메러디스 브루서드가 말한 것처럼 알고리즘은 프로그래머의 편견이 반영된 통계일 뿐이다. 이로써 편향적 현실 인식은 곧 진짜 현실이 되고 둥근 지구는 평평한 지구가 되며 코로나 바이러스는 코뮤니즘이 된다. 

2. 어둠

: 플라뇌르는 도시의 밤 문화, 창녀와 연결된다. 인터넷은 다크웹, 그리고 디지털 성매매와 연결된다. 인터넷이 포르노 문화를 빠르게 흡수한 것은 남성 플라뇌르가 대도시의 여성을 타깃으로 삼은 것과 거의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도시와 웹은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스스로 증식하며 욕망에 충실하다.           

3. 자아

: 이건 1과 2와 연결된다. 과거에는 산책이라는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다. 자아라는 개념이 불투명하거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산책은 산책보다는 소요라는 말이 어울리며 단지 걷는 것이 아닌 회랑 등의 공간을 거닐면서 대화하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는 여기서 유래했다. 

장 자크 루소의 시기 즈음해서 산책은 내면을 살찌우기 위한 것으로 탈바꿈했다. 조용한 곳을 ‘혼자’ 걷는 사람은 내면에 집중한다. 그는 사색하고 머리로 글을 쓴다. 반면 홀로 걷는 도시 산책자는 자아를 확장한다. 그는 도시의 타인들과 소비문화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자 한다. 자신과 맞는 것을 찾아 소비하기, 예쁜 발을 가진 여자 쫓아가기. 디지털 산책 역시 마찬가지다. 편향성은 거듭되고 자아는 비대해진다. 인터넷은 더이상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창구가 아니다. 또다른 나의 목소리를 듣는 장소다. 내 위주의 플레이리스트가 끝없이 돌아가는 곳이다.


이러한 산책의 문제점에 대한 처방은 우연성, 익명성 등으로 이야기된다. 대표적으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표류derive 개념 등이 있다.  

상황주의자들의 표류는 심리지리학의 방법론 중 하나다. 심리지리는 도시와 일상에서 강제된 양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다. 표류는 우연에 몸을 맡기고 도시를 방황하는 것, 고착된 도시 구획에 저항하는 것이다. 기 드보르와 아스거 요른의 <파리 심리지리학 가이드: 사랑의 열정을 위한 담화>는 파리의 지도를 콜라주하여 제작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장소를 오려내어 화살표로 표시하여 연결하기. 흥미롭게도 기 드보르는 표류에 가장 적합한 이동 수단을 택시라고 했다. 버스나 지하철과 달리 택시에는 정해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택시』(금정연 저)는 그러므로 상황주의적 실천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밤의 런던을 걸으며 군중 속에 섞여 길을 잃고 헤매는 것, 남들과 구분되지 않는 익명성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즐겼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울프의 산책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훼방받지 않는 집중이 아니라 가벼운 주의산만이 상상력을 추동하곤 한다. 그럴 때 생각은 우회로로 간다. (……) 술집에서의 식사, 한밤중의 거리 산책, 도시의 자유로움은 우리의 자유에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체성을 잃기 위해서이다.  



<파리 심리지리학 가이드: 사랑의 열정을 위한 담화Guide psychogéographique de Paris: discous sur les passions de l’amour>(1956)


소풍과 논쟁

내가 요즘 보는 드라마는 <마블러스 미시즈 메이즐>(2017~)로 상우씨가 알려준 것이다. 196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려고 하는 여성의 분투를 다룬 드라마이다. 과장되고 수다스럽고 뻔뻔하지만 그게 드라마의 배경과 딱 들어맞는다. 4화에는 뜬금없이 제인 제이콥스가 등장한다. 그녀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1961)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전설적인 도시 이론가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면 모를까 드라마에 나올 유형의 사람은 아닌데 ‘미시즈 메이즐’은 그녀가 마틴 루터 킹이라도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등장시킨다. 그 점이 좋다. 당신이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야, 라는 태도. 게다가 지금 읽고 있는 책 중 하나인 리처드 세넷의 『짓기와 거주하기』(2018)에도 그녀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사소한 우연이지만 이런 우연이야말로 읽기의 진정한 즐거움 중 하나다. 예상치 못한 마주침과 연결, 일종의 콜라주. 세넷은 제인 제이콥스를 토론토에 은거한 맛이 강한 향신료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그녀와의 인맥을 은근 자랑하며(자랑할 만하다) 소풍과 논쟁을 통해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제인 제이콥스는 논쟁의 끝에서 늘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


코로나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코로나 시대에 대해, 또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다른 것을 쓰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반면 데이비드 린치는 최근 기고에서 늘 하던 말을 했다. 그는 격리 상태에서 램프를 만들고 명상을 했고 명상이 당신을 구원해줄 거라고 말했다. 역시 거장인 걸까, 구제불능인 걸까).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막막하고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 지금까지의 생각이나 행동, 방향이 무의미한 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문, 어느 날은 모든 게 원상복귀되고 사람들은 늘 그랬듯 망각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어느 날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빠진다. 걱정이나 불안과는 다르다. 어떤 이들은 희망을 말하고 어떤 이들은 전환을 말하는데,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것보다 토대가 사라진 느낌, 미래에 대한 근거가 생각보다 허약했으며 우리는 지금까지 허공을 짚으면서 그게 땅이라고 믿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뭔가를 계획하거나 전망하기보단 중지하게 된다. 문득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가 주장하는 ‘관광의 철학’은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든다. 관광의 철학은 평소 접하지 않는 정보를 접하면서 생기는 ‘오배(誤配)’, 우연한 상황과의 만남에서 오는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코로나 이후에도 그런 게 가능할까.  

이상우는 지금 베를린에 있다. 우리(나, 금정연, 오한기, 이상우)는 아이메시지 단체창이 있고 그곳에서 종종 안부를 전하고 부질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날 밤에는 핸드폰이 빛을 발하기에 봤더니 금정연과 이상우가 주고받은 시적인 문자가 수백 개 있었다. 최근 들어 읽은 가장 좋은 텍스트였고 그 문자들을 ‘서신 교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고 싶었지만 그만뒀다.  

독일은 안전하다고 상우씨가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백인들은 이제 인종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했다. 한기씨의 답장이 왔다.


한기: 독일에서는 검은 펜이 아니라 파란 펜이 기본이라는데 맞나요

상우: 헉. 처음 들음  

         한기씨랑 간짜장 먹고 싶어요.

한기: 헉 저도

        탕수육도

상우: ㅠㅠㅠㅠㅠㅠ

한기: 정연씨 동네에서 감자탕 먹고 무덤 간 게(무덤은 서오릉을 뜻함*지돈 주) 상우씨 본 마지막날인 듯

        <체르노빌> 괜찮나요 봐야겠져? 

상우: 괜찮아여

지돈: <미시즈 메이즐> 4화에 제인 제이콥스 나오네요 깜놀

상우: ㅋㅋㅋㅋ 저도 깜놀 

         시즌 2가 더 좋은 거 같아요 

         벤앤제리 드시면서 행복하시길ㅠㅠㅠ


폴 비릴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연성이 실체를 보여준다'면 '실체'의 발명은 '우연성'의 발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난파는 배의 미래주의적 발명이고 추락은 초음파 비행기의 발명이며 체르노빌의 용해는 원자력발전소의 발명이다. 그러므로 플라뇌르는 대도시의 발명이고 코로나는 자본주의의 발명이며 미래는 이 둘의 발명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