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인생에서 두 번 저항하기란 어렵다―2

파리의 모든 것은 식민지 경영의 잔재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말했다. “세계는 상실로 나아가고 있다.”

뒤라스는 도미니크 노게즈와 1983년 6월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어느 날 아침 7시에 불현듯 식민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파리의 아침이었고 노쇠하고 아침잠이 없는 그녀는 일상적인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파리 6구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알게 됐다. 보도와 도로, 하수도를 청소하는 수많은 흑인이 있었고 은행과 카페에서 나오는 포르투갈인 가정부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그곳에 있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사라져버리죠. 우리를 그 장소에 내버려둔 채.”

본명이 마르그리트 도나디유인 뒤라스는 1914년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반도의 코쉰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프놈펜에서 보내고 파리에서 법대를 졸업한 그녀는 프랑스 식민성에서 비서로 일했고 몇 년 뒤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을 찬양하는 『프랑스 제국』이라는 책을 갈리마르에서 출간하지만 제2차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식민성에서 해고된다. 1943년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해 로베르 앙텔므, 미테랑 등과 반나치 활동을 했으며 전후에는 생브누아 거리 5번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동료들과 함께 공산당원으로 활동하지만 곧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게 된다. 그녀는 알제리 전쟁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몇 안 되는 프랑스인이었고 일찍이 낙태죄 폐지를 주장한 페미니스트였으며 타협하지 않는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머리로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마음속에 늘 담아두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일상을 향유하고 있는 파리가, 파리 거리의 모든 것이, 식민지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1979년 8월의 어느 날 밤부터 새벽까지의 파리를 담은 단편 영화 <부정적인 손들Les mains négatives>은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끔찍한 것”이 된다. 영화는 밤의 바스티유 광장에서 시작한다. 검푸른색으로 물든 파리의 밤과 환하게 불을 밝힌 상점들, 붉은색, 오렌지색 헤드라이트가 보이고 화면은 트래블링 숏으로 도로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나아간다. 카메라는 레퓌블리크 광장을 지나 오페라가와 샹젤리제, 개선문에 이른다. 노출 때문인지 그림자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어둠에 묻힌 거리의 사람들이 프레임 안에서 어른거린다. 뒤라스의 내레이션은 고대의 동굴과 현대의 인간을 잇는 시적이고 낭만적이며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정적인 손들>과 짝을 이루는 뒤라스의 단편영화가 하나 더 있다. <세자레Césarée>는 튈르리 공원과 콩코르드 광장이 배경인 단편영화로 1979년 8월의 어느 아침과 오후에 촬영됐다. 뒤라스는 <부정적인 손>을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찍었고 이어서 <세자레>를 촬영했다고 말했다. 

<세자레>에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이런 걸 사연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리프라이즈Repirse>에 <세자레>의 일부가 등장한다. <리프라이즈>는 오슬로의 문(학)청(년) 필립과 에릭의 흥망성쇠를 다룬 청춘……영화다. 다소 들뜨고 과장되며 낭만적인 영화지만 노르웨이 사람인 감독 요아킴 트리에는 뒤라스와 모리스 블랑쇼, 조르주 바타유와 고다르와 로브그리예를 사랑하는 누보로망-누벨바그 키드였고 그래서 역시 20대 내내 유사한 키드였던 나를 사로잡았다(물론 다른 요인도 있다, 오슬로의 풍경과 주인공들의 세련된 옷차림, cos가 국내에 수입되기 전에 cos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지금은 cos도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만 말이다). 나는 여러 지면에서 이 영화 이야기를 했다. 요아킴 트리에는 <리프라이즈> 이후 피에르 드 리외 라 로셸의 <도깨비불>을 원작으로 한 <오슬로, 8월 31일>을 찍었고 할리우드로 가서 제시 아이젠버그와 이자벨 위페르 등을 캐스팅한 <라우더 댄 밤즈>를 찍었으며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와 기이한 종교 오컬트 레즈비언 로맨스 성장영화 <델마>를 찍었다. 그의 영화는 일관되게 세련되고 적당히 속물적이며(절대 예술적이지 않다) 종종 힙스터스럽지만 주인공들이 걷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아무튼 <리프라이즈>에서 에릭과 필립은 거실의 소파에 누워 TV로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가 바로 뒤라스의 <세자레>다. 카메라는 튈르리 정원을 트래블링 숏으로 따라간다(도미니크 노게즈는 이를 ‘고결한 트래블링’이라고 말한다). 마욜의 조각상이 프레임의 왼쪽에서 등장해 오른쪽으로 사라지고 에이미 플래머의 다소 신경질적이지만 고요한 바이올린 연주가 들린다. 영화 속 영화에서 뒤라스가 말한다. 끄 레 뚜……? 에릭이 필립에게 묻는다. 끄레뚜가 뭐야? 필립이 대답한다. 음…… 단 하나 남은 게 모든 것이다……?     

세자레는 1952년 하이파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도시다. 뒤라스는 세자레라는 장소와 유대계 공주 베레니케, 그리고 로마의 황제 티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파리의 중심에 있는 (훔쳐 온)오벨리스크와 (훔쳐 온 것들로 가득한)박물관을 배경으로 들려준다. 그러나 내레이션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거나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하다. 에릭과 필립이 불어를 알아듣지 못했듯 나 역시 불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뒤라스의 단편영화를 본다. 아주 가끔 몇 단어를 알아듣고 궁금한 부분은 유튜브의 자동 번역 기능을 빌린다. 영어로 번역된 대본 전체를 구글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뒤라스가 부여한 의미를 알기 전과 후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냐고 말한다면 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의미를 알고 나면 시시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명확하지 않고 다소 미적지근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전이 더 좋은 이유는 단지 시간과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그리고 가끔은 이것이 문제의 전부이기도 하다). 작품이나 사태를 파악할 때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그래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속박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런 강박은 버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엉터리로 내용을 해석하거나 나이브한 이해에서 멈추게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한다. 책을 끝까지 보지 않고 이야기하면 안 돼 또는 괜찮아, 영화의 장면이 어떤 작품의 오마주인지 알아야 해 또는 상관없어, 지젝을 이해하려면 라캉을 봐야 되고 들뢰즈를 이해하려면 스피노자를 봐야 되고 결국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 구약과 신약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은 플라톤을 원문으로 봤다, 원문에는 사실……  등등. 전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만들기 때문에 문제적이고(모든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후자는 무성의함, 불성실한 태도, 자기변명, 반지성적인 유행을 묵인하기에 문제적이다. 당신이 만약 작품 또는 사태에 반응하고 그 순간의 맥락에서 충실하게 접근했다면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충실도를 판단하는 것이 어렵고(이것 역시 불가능에 근접한다)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 뿐이다.  

다시 뒤라스로 돌아가자. <부정적인 손들>과 <세자레>는 파리를 가장 아름답게 담은 영화들이다. 뒤라스는 파리를 어두침침하고 공사중인 폐허로 담았지만 그래서 다른 영화에서보다 아름답다. 물론 뒤라스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 진짜 파리다! 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뿐, 그녀가 파리에서 발견하고 싶은 것을 그녀는 발견했다. 말년에 프랑스 북부의 해변 도시 트루빌에서 지낸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곳에서 보면 파리는 실패작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도시다. 흑인들의 숙소를 공격한 방화 사건이 이 년 동안 여섯 차례나 일어난 곳이다. 운전 예절을 배우지 못한 자들이 욕을 해가며 거칠게 차를 몰고 다니고 차로 사람을 죽이는 곳이다. 이방인들을 제일 불친절하게 맞이하는 곳도 파리다.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파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요아나 하지토마스와 칼릴 요레이는 아티스트 듀오다. 그들은 2020년 5월 15일 아트 플랫폼인 이플럭스의 온라인 전시 <프롬 마이 윈도우/프롬 유어 윈도우>에 영상 작업을 공개했다. <마르그리트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Marguerite>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뒤라스의 <부정적인 손들>을 다시 만든 것으로 코로나로 락다운 된 파리의 풍경을 담는다. 영상은 개선문이 보이는 도로에서 시작한다. 뒤라스의 영화와 달리 자막이 내레이션을 대신한다. 샹젤리제의 신화적 의미와 시네마를 연결하고 정체성과 사랑, 코드와 정체성, 감시와 처벌, 몰수된 자유와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텅 빈 밤의 질감은 뒤라스의 파리와 전혀 다르다. 뒤라스의 영화는 밤과 새벽, 아침과 낮을 구분하기 어려운 데 반해 <편지>는 훨씬 어둡고, 그래서 더 선명히 밤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로 촬영된 영상이기 때문일까. 영상의 후반부에 세차게 비가 내리는 도시의 풍경이 나온다. 어둠 속에 묻힌 거리는 오직 번개가 칠 때 잠깐 보일 뿐이다. 



Figure 1 <Oslo, 31, August>, 2011


“파리엔 흑인이 너무 많아. 난 나 자신을 우윳빛으로 만들고 싶어.” 1940년대 중반 파리에 도착한 프란츠 파농은 친구인 망빌에게 말했다. 내가 처음 파리에 와서 느낀 것도 비슷하다. 첫날 공항에서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짐을 풀고 집 주변을 산책하는 동안 만난 대부분의 사람이 흑인이나 아랍계였다. 나는 백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백인(남성)이 되고 싶었거나 아니면 한국에 사는 동안 스스로를 백인(남성)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백인(남성)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세계가 자기 집 앞마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들은 두려울 게 없고 두려운 게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믿는다(그런 의미에서 플라뇌르적 산책을 실천하는 데 가장 최적화된 것은 백인(남성)이다). 

파리 북역과 동역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지 말라고 했다. 특히 밤에는 절대 가면 안 돼. 숙소에서 동역은 걸어서 십오 분 거리였고 북역은 이십오 분 거리였다. 자주 산책하던 생마르탱 운하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면 동역이 나왔다. 햇살이 반짝이는 생마르탱 운하 와 달리 동역 쪽으로만 가면 하늘 가득 먹구름이 끼었다. 잿빛으로 변한 골목에서 약쟁이와 걸인들이 걸어나오고 체육복을 입은 중동 갱스터가 아이폰을 훔쳐갈 것 같았다. 북역에 들른 적이 있는데 역 주변은 흑인들로 가득했다. 다들 덩치가 산만했고 인상이 살벌했다. 다가와서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웨어 아 유 프롬? 코리아? 두 유 노우 봉준…… 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금정연과 이상우는 이틀 간격을 두고 차례로 파리를 떠났다. 이상우는 새벽 비행기를 예매했는데 늦지 않으려면 심야에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나 나이트버스는 동역 바로 앞의 정류장에서만 탈 수 있었다. 

―괜찮을까요?

내가 말했다. 솔직히 나는 밤의 정류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상우씨는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엄지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새벽 두시 반쯤 집을 나섰다. 골목에서 잠을 자고 있던 흑인 노숙자가 접근했다. 틈을 주면 안 돼!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후드티를 입은 사내들이 골목에서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있었고(영화 같지만 영화가 아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지만 동양인은 없었다. 백인과 흑인, 중동계 사람들. 보디가드처럼 덩치가 큰 흑인도 있었는데 그는 정류장을 지키는 일종의 경비였다. 일종의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가장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모만 보고 자꾸 무서워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북역에서 흑인 청년에게 가방을 도둑맞고 얼굴에 침 세례를 받은 선배 소설가 이야기도 떠올랐다. 굳어 있는 나를 보고 상우씨가 말했다. 지돈씨 어서 들어가요. 상우씨가 버스에 타고 난 뒤 나는 킥보드를 타고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과속 단속 카메라에 킥보드를 탄 내 모습이 찍혔을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우씨도 나도 무사했다. 파리 생활에 적응하고 난 뒤 나는 친구와 종종 동역과 북역으로 산책을 갔다. 역 주변에는 여전히 유색인이 많았지만 안전했다. 한 흑인은 역사 안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근처에 사는 노동자였고 취미로 피아노를 배웠지만 지금은 그만뒀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나면 가끔 밤 산책을 나와 역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한다고. 노숙자로 보이는 흑인이 접근한 적도 있지만 우람한 근육을 가진 경찰에 의해 제지당했다. 노숙자는 우리에게 담배를 빌리려고 했던 거였다.  

인종과 인종에 대한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만약에 그날 밤 나와 상우씨가 린치를 당했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실제―이를테면 포털 댓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족/중동계/흑인이 실제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 그러니 이민 또는 난민을 반대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라는 주장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까. 우리의 경험은 실제라고 믿는 현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알제리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프랑스 사람이 에스파냐 사람에게 침을 뱉으면, 에스파냐 사람은 이탈리아 사람에게 침을 뱉고, 이탈리아 사람은 몰타 사람에게, 몰타 사람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은 아랍인에게, 아랍인은 흑인에게 침을 뱉는다.”(여기에 황인의 자리는 없지만 흑인이 선배 소설가에게 침을 뱉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어디 들어가는지는 뻔하다). 

인종차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것을 불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차별과 혐오의 감정은 거의 본능처럼 느껴지며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신경인류학은 혐오를 진화 과정에서 발달한 필수적인 감정으로 본다. 다시 말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 다른 차별에는 무감각할 수도 있다. 프란츠 파농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인종과 식민지 문제에 있어 누구보다 첨예한 사상가였지만 동성애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파리도 마찬가지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는 파리 코뮌과 68혁명을 거쳤고 수많은 사상가를 낳았지만 일상에서의 차별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2008년 공쿠르 상을 받은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 작가인 마리 은디아이는 사르코지가 당선되고 난 뒤 프랑스의 보수화에 저항해 파리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베를린에서도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소식이 들린다. 인종 문제에 계급 갈등이 들어오고 계급 갈등을 팬데믹이 격화시키고 팬데믹 안에서 동성애 혐오가 자라고 퀴어 이슈에 성차별이 얽혀있으며 성차별은 다시 인종 갈등과 겹쳐지고 이 모든 것은 정치에 이용되거나 환원되며 일상에 스며든다.

 

에드가르 모랭은 레지스탕스였고 전후 뒤라스, 로베르 앙텔므 등과 함께 라 뒤 생브누아 그룹에서 활동했다. 토론과 술, 대화와 산책이 끊이지 않았다. 전후의 파리는 낭만과 혼란의 시기였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시대였기에 사람들은 전선을 선택해야 했다. 뒤라스와 에드가르 모랭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미래와 양심은 스탈린주의에 있다고 그들은 한때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곧 박살났고 파리의 공산주의 진영은 분열됐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을 비판하길 거부했다. 에드가르 모랭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두 번 저항하기란 어렵다. 한번 나치와 부르주아에 대항해 싸운 사람들은 공산주의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자신을 받아준, 자신의 고향 같은 곳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외면했고 이 때문에 장 주네는 사르트르를 포기했다. 저항은 특정한 대상이나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본성에 저항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대상이나 친구들에게 저항해야 할지도 모르고 믿어왔던 것에 저항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 역시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


*이 글에는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아녜스 푸아리에, 노시내 옮김, 마티, 2019)과 『고통』(마르그리트 뒤라스, 유효숙 옮김, 지만지, 2013), 『말의 색채』(마르그리트 뒤라스, 유지나 옮김, 미메시스, 2006), 『물질적 삶』(마르그리트 뒤라스, 윤진 옮김, 민음사, 2019), 『프란츠 파농: 혁명가와 페미니즘』(T. 데니언 샤플리-화이팅, 우제원 옮김, 인간사랑, 2008), 『프란츠 파농』(알리스 셰르키, 이세욱 옮김, 실천문학사, 2013)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