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죽어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이 살아서 승리를 거두었다면—2

일 년 반 동안 파주출판단지로 출퇴근했다. 영등포의 중고차 매장에서 380만원에 구입한 하늘색 뉴모닝을 타고 다녔다. 흔한 차종이었지만 자유로에서 차를 본 회사 동료들은 내가 운전자임을 바로 알았다고 했다. 차가 펭귄처럼 뒤뚱뒤뚱하면서 질주하거든. 시속 백 킬로미터로. 회사에는 정지돈이 운전대를 잡지 않고 운전한다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돌았다. 지가 일론 머스크야? 어떤 사람은 운전하면서 책을 읽는 모습을 봤다고 했고(J. G. 발라드의 『크래시』를 읽고 있었다고) 어떤 사람은 햄버거를 먹으며 운전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진정 놀라운 건 햄버거를 먹으며 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차는 전진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차를 팔아버린 건 정말 다행이지 뭐야. 회사 동료가 말했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내 운전 실력은 형편없었다(위의 과장된 소문들이 실력의 문제인지와는 별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른 살까지 차에 관심 없던 나는(지금도 관심 없음)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후다닥 운전면허를 땄다. 출판사 영업직이라 그런가, 합격 통보 이후 담당 부서의 부장은 면허와 차를 입사 조건 중 하나로 요구했다. 여담이지만 그는 슈트를 입고 출근할 것도 요구했는데, 출판사에 대해 아는 게 없던 나는 그러려니 받아들였다(그때까지만 해도 슈트를 입어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출근을 시작한 뒤에야 입사한 회사는 물론이고 파주출판단지 전체에 슈트를 입은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 회사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분들은 어떻게 후드티를 입고 다니지? 회사 사람들은 나를 보며 생각했다. 쟤는 왜 슈트를 입고 다니지……(의복의 관점에서 보면 출판단지는 실리콘밸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커와 시인이 유사한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운전면허를 따기 전까지만 해도 평생 면허 없이 살 생각이었다. 자동차와 운전면허가 인류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자전거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자동차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 자동차는 산업시대의 첨병이자 석유 복합체의 기관이고 글로벌 거대 기업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산물이며 환경오염의 주범, 도시 생태계의 파괴자, 남근의 상징이다! 진지한 작가라면 차를 멀리해야 돼. 오직 읽고 쓰고 달릴 뿐……

작가가 되고 보니 작가들은 글이나 인터뷰에서 했던 말,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돈이 생기는 즉시 커다란 외제차를 샀다(비싼 산악자전거를 사거나 하이엔드급 오디오를 사거나……). 그런 차를 사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한 번도 자동차에 대해 제대로 쓴 글을 본 적 없다는 사실이다. 산책과 자전거에 대해 쓰는 건 괜찮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진정성 넘치는 시인이 벤츠를 모는 풍경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재계의 틈입이다. 

벤츠를 타건 픽시를 타건 무슨 상관이냐,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동 수단은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호하는 이동 수단을 말해보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미국에서 볼보를 타면 좌파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주변 출판계 사람 중 볼보를 타는 사람 또는 볼보를 타고 싶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 반면 출판계 밖의 지인들은 볼보에 관심 없다. 1987년에서 2019년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수입차 판매는 벤츠와 BMW가 압도적인 1, 2위다. 볼보는 6위다. 볼보는 수입 초기인 1990년대에 반짝하다 사라졌지만 2017년 이후 판매가 급증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다. 좌파들은 돈이 생기면 볼보를 산다…… 믿거나 말거나. 볼보는 세계 1위의 안전성으로 유명하고 특히 SUV인 XC 시리즈의 인기는 대단하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볼보 교통사고 사망률이 낮은 이유가 볼보 오너들의 운전 성향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좌파는 죽지 않는다. 다만 변절할 뿐…… 믿거나 말거나……

여담이지만 내 지인들은 대부분 아이폰을 쓴다. 최소한 갤럭시를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경비원으로 일하던 시절 스무 명이 넘는 직원 중 아이폰을 쓰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모두 갤럭시를 썼다. 내가 속한 경비조의 조장은 말했다. 왜 불편하게 아이폰을 써? 책 읽는 모습을 본 조장은 말했다. 너 미쳤어? 1968년 미국 대선 후 영화평론가 폴린 케일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닉슨이 이길 수 있지? 내가 아는 사람 중 닉슨에게 투표한 사람은 한 명뿐이에요. 그 사람들은 다 어디에 사는지 모르겠어요. 비슷한 일은 언제나 일어난다. <명량>이 천육백만 명을 동원했을 때 지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내 주변에 <명량>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대체 그 사람들은 다 어딨는 거야!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를 출간하고 번 돈으로 자동차를 샀다. 문학사가들이 추측컨대 차종은 1927년형 싱어 시니어 또는 싱어 주니어일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의 애칭은 “등대”. 그녀는 동생과 함께 넓은 공터에서 운전을 배웠지만 운전 실력은 평생 늘지 않았다(울타리를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럼에도 버지니아 울프는 드라이브를 사랑했다. 운전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했고 속도가 주는 새로운 감각을 공들여 찬양했다. 그녀와 레너드 울프는 자동차를 타고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을 여행했으며 그로 인해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풍경과 마주쳤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지역인 서식스도 자동차가 없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동차는 ‘자기만의 방’이자 ‘자아를 소집’할 수 있게 만드는 도구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서식스에서의 저녁: 자동차에서의 단상들」은 이러한 생각이 담긴 짧은 에세이다. 흥미로운 건 이 에세이가 실린 국내 단행본 뒤표지에 있는 문구다. 뒤표지에선 에세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옛것들을 문학적으로 비탄하는 애가.” 이 서술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울프는 산책의 수호성인 중 하나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산책과 드라이브는 반대 항이다. 속도를 즐기는 사람이 산책을 좋아할 수 없는 노릇이다. 슬로우 라이프, 느림의 미학. 그게 바로 산책 아닌가?  

지금은 성폭력으로 더 유명해진 운동권 출신 유명 정치인의 인스타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의 일이다. 숲속의 해먹에 누워 셀카를 찍은 게시물이었다. 중년 남성의 셀카는 거북했지만 더 거북한 건 함께 올린 글의 내용이었다. 원래 해당 정치인에게 호감이었던 친구는 끔찍해하며 게시글을 소리내 읽었다……(그래야 끔찍함이 배가된다며, 특히 해시태그에 주목하라고 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인공적인 구조 속에 너무도 깊게 묻혀버렸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의 모든 삶이 인간의 인위에 갇혀버렸다. (…)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 아마도 기다림일 것이다. 동력 기계와 정보통신 기기로 무장한 우리들의 삶에는 기다림이 실종되었다. 우리는 바람도 푸른 잎사귀도 별빛도 잊어버렸다. (…) 우리 삶속에 자연을 받아들이자. #숲 #혼자놀기 #나뭇잎 #햇살 #책 #독서 #바람 #추억 #어린날 #고향 #참나무 #소나무 #토지_책 #기다림 #역사 #민초 #슬픔 #한 #사랑 #꿈 #미래”   


 


지금은 자동차 문화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지만 과거를 보면 그렇지 않다. 자동차는 여성들이 집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인 동시에 집이기도 했다. 남성들이 여성 운전자를 의심하고 비웃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는 순간 지배에서 벗어나 동등한 위치에 올라선다. 내 자리를 넘보는 소수자, 약자에 대한 혐오. 대중문화에선 종종 자동차를 이러한 상징으로 다룬다. <델마와 루이스>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샤론 월리스는 <델마와 루이스>를 다룬 글에서 이 영화가 정체성과 욕망, 시네마틱 픽션과 실제 삶에 대해 복합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속으로 좋아해온 자동차 문화, 기계와 속도의 문화를 즐기게 해줬다고 말했다. 이데올로기적 배치들은 항상 우리를 특정한 발언과 생각 속으로 밀어넣는다. 중요한 건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이 경우 나이브한 상대주의에 빠질 뿐이다) 자동차와 같은 코드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황주의의 전략으로 말하면 전환detournement이다. 더이상 전복적이지 않은 지배 문화의 요소를 혁명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어떤 여성들에게 자동차는 곧 집이다. <웬디와 루시>에서 웬디는 실제로 차에서 자고 차에서 생활한다. <어떤 여자들>의 세번째 에피소드 주인공인 한 여성은 애정과 관심을 자동차의 이동을 통해 표현한다. 또하나의 표현법은 말horse인데 재밌는 건 둘 모두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이다(‘야타족’을 떠올려도 좋다. 그게 뭔지 안다면……).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홀로 목장을 운영하는 여성은 우연히 먼 거리를 출퇴근하는 여성 변호사를 알게 된다. 그녀는 변호사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자신의 이동 수단으로 변호사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변호사는 이 관계를 어색해한다. 

이 에피소드의 원작 소설은 마일리 멜로이의 「트래비스 B」다.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 남자다. 켈리 라이카트는 성별을 바꾸는 간단한 장치로 길과 이동수단을 본래의 이데올로기에서 분리했다. 「트래비스 B」에서 말과 자동차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고 좋게 봐줘도 찌질하다. 반면 <어떤 여자들>에서는 주인공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장소로 표현된다. 유대감을 느낀 관계가 단절된 후 주인공은 차를 타고 남부의 길고 텅 빈 도로를 달린다. 피곤함에 지친 그녀는 졸음운전을 하고 자동차는 도로를 벗어나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벌판으로 들어간다. 일종의 버지니아 울프적 교통사고. 카메라는 광활한 벌판 위에 홀로 남은 자동차를 비춘다.

영화잡지 『필로FILO』 13호에는 켈리 라이카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주인공들이 계속 길을 떠도는 상태에서 이야기가 끝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들 그게 너무 슬프다고 하는데 남은 삶 내내 정착하는 건 좋을까? 탐색이 계속되길 바란다. 안 바라도 계속되기 마련이지, 그렇지 않나?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