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시카고는 아무 곳도 아니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니었다. 그저 미국이라는 공간을 향해 방출된 무엇일 뿐이었다—1

서울에서 십팔 년을 살았고 그중 십사 년 육 개월을 마포구에서 살았다. 정확히는 상수동의 반지하 투룸에서 십사 년을 살았다. 처음에는 친구와 친구의 친구와 함께 살았고 또다른 친구와 친구의 친구, 또다른 친구와도 살았으며 나중에는 어머니와 살았다. 그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고 한 명은 자살했고 한 명은 감옥에 갔으며 다른 한 명은 탄핵당하고 감옥에 갔다. 서울 시장은 두 번 바뀌었고 한 명은 감옥에 갔고 한 명은 사퇴했으며 한 명은 세 번 연임 후 임기중에 자살했다. 네번째 대통령은 현직에 있으며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중이다. 정치에 푹 빠진 어머니는 TV에 대통령이 나오면 늘 말씀하신다. 정치는 만다고 하노.

동거인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는 동안에도 나는 꾸준히 반지하 투룸에 살았다. 장마철 눅눅한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평생 여기서 살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모이지 않았고 모을 생각도 없었다. 미래에 내 삶을 저당잡히고 싶지 않아. 내 사전에 저축이란 단어는 없다!(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저축하기에는 수입이 턱없이 모자랐다) 방은 좁고 해는 조금밖에 들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겐 이 집이 지상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굳이 말하면 반의반 지하랄까. 반반지하? 4분의 1 지하? 하지만 지하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어머니는 지금이라도 주택부금 같은 걸 넣으라고 말씀하셨다. 평생 이래 살래? 

주변 환경은 괜찮았다. 횡단보도 하나 건너면 공포의 홍대였지만 집 근처는 조용했고 한강도 지척이었으며 당인리발전소에서 양화진으로 이어지는 산책 코스도 나쁘지 않았다. 절두산 순교성지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었다. 비록 나는 종교가 없고 어머니는 무교와 불교와 기독교와 샤머니즘을 필요에 따라 갈아타는 유목적 종교인이라 그들의 희생에 큰 감흥을 느끼진 않았지만 산책에는 언제나 일정 정도의 경건함과 형이상학이 필요한 법이다. 2010년대로 접어들며 당인리발전소 공원화 논의와 함께 상수동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신발 공장을 베를린 스타일로 리모델링한 카페나 호주 멜버른에서 들어온 스페셜티 커피숍 등이 생겼으며 발 빠른 어느 패션잡지는 상수를 한국의 브룩클린이라고 명명했지만 몇 년 뒤 성수가 한국의 브룩클린이라는 명명을 영원히 빼앗아갔다. 내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상수가 성수나 연남동처럼 됐으면 진작 쫓겨났을 테니까.  


작가라면 모름지기 단골 카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비참할 정도로 가난했던 습작 시기에도 자주 가는 카페는 있었다. 낯가림 때문에 직원이 스몰토크를 시도하면 커피에 코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꿋꿋이 대화도 했다. 작가를 만드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장소다. 20세기 초반 파리에 체류한 영미권 작가들이나 1970년대 파리로 망명한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 모두 작품을 쓰기 전에 적절한 장소부터 찾았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한 쿠바 작가 세베로 사르두이는 센강 좌안의 카르티에라탱에 정착했다. 그러니까 그가 망명한 곳은 유럽이나 파리가 아니라, 라탱 지구의 카페였고 그들이 만들어낸 문학예술 공동체였다.  

대구에서 서울로 망명한 내가 정착한 곳은 마포구 상수동의 카페 애플이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의 상가 건물 이층에 있던 곳으로 친절한 바리스타 겸 사장님은 날씨가 추울 때면 전기난로를 내 쪽으로 돌려줬다. 알고 보니 그의 연인이 같은 과 선배였고(교류는 없었다) 드나들던 단골들과 인사 정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부르주아 피그라는 술집도 있었다. 여기 사장의 연인도 나와 같은 과였고(선배였는지 후배였는지 모르겠다. 역시 교류는 없었다) 세상의 좁음에 감탄했다. 애플이 사라지고 단골이 된 카페는 위키드 케이크라는 디저트 카페로 르꼬르동블루 출신의 파티셰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곳이 있었다. 베르에블랑이라고 테라스가 좋은 카페가 있었고 AA디자인뮤지엄의 테라스도 자주 이용했으며 커피빈 홍대삼거리점 테라스도 좋아했다. 술을 마실 땐 니나노라는 이자카야에 갔고 새벽 세시까지 운영하는 이삭 베이커리에서 생크림 소보루를 사먹었으며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고디탕을 먹었다. 이중에는 유명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으며 프랜차이즈도 있고 중간에 업종이 바뀐 곳도 있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십대의 내가 가던 장소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가끔 단골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이나 사장과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우리들은 갈 곳 잃은 지박령처럼 도시를 떠돌다 서로를 알아보지만 딱히 할말은 없다. 여전히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중이다, 아마 영원히 그래야 할 것 같다, 복권이라도 사세요,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니니까……

지금 자주 가는 장소들은 어떻게 될까. 카페 플로르나 레되마고처럼, 하다못해 학림다방처럼 남아서 도시의 역사와 기억을 증언하는 장소가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보이는 카페도 있다. 나름 명성을 획득하고 예술가와 유명인, 업계 종사자 들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 다시 말해 작가가 되려면 가야 하는 곳?(21세기 서울에 그런 곳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인플루언서가 되려면 가야 하는 장소는 있다. 너무 많이.) 하지만 나는 그런 장소에는 가고 싶지 않다(라탱 지구를 피해 파리 우안에 자리한 솔 벨로적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솔 벨로를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은 ‘예술가들의 아지트’다(단어 조합부터 극혐). 옆자리엔 영화감독, 뒷자리인 시인, 건너편에는 설치미술가…… 여담이지만 사대문 안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영화감독 홍상수의 신작 <도망친 여자>에서 수영(송선미 분)은 예술가들이 우글우글하는 술집의 단골이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만난 건축가에게 호감을 품지만 문제는 역시 그곳에서 만난 시인이 그녀를 스토킹한다는 사실인데……(스포일러라 여기까지) 나는 아무나 오는 곳이 좋고 아무나 오는 곳이 오래 지속되고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무나의 흔적은 기록되지 않는다. 내가 가던 장소들이 모두 사라진 이유가 그 때문일까. 우리 모두 아무나라서? 하지만 나는 아무나가 좋다. 금정연과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최상은 돈이 많고 유명하지 않은 것이다. 최악은 유명하고 돈이 없는 것이다. 이 미친 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도 모르는 부자…… 그러므로 예술가와 정치가는 최악으로 향하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알려지지 않고 사라지는 게 나쁜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잊히는 것. 펠렉스 페네옹이나 조셉 주베르처럼 한 권의 책도 내지 않고 사라지기(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책을 냈지만). 하지만 문제는 사라짐에도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망각을 두려워한다. 도시의 급격한 변화, 개발지상주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 상처 입고 기억을 잃은 도시. 역사가 없는 도시는 아무리 훌륭해도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대체 도시가 원하는 종류의 역사란 뭘까.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장소place와 공간space을 구분한다. 장소는 안전을 의미하며 공간은 자유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집은 장소이며 도시는 공간이다. 그러나 도시에도 장소의 오라가 부여될 수 있다. 뉴욕은 수많은 문학과 영화, 그리고 역사로 인해 장소가 되었다. 파리도 마찬가지다. 서울은 장소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중이다(이를테면 “I·SEOUL·U 너와 나의 서울”). 물리학자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덴마크의 크론베르크 성에서 장소와 공간의 역학에 대해 생각했다. 단지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에 불과한 이 성이 장소가 된 것은 이곳이 『햄릿』의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햄릿이 실존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셰익스피어가 크론베르크 성을 배경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에(죽느냐 사느냐) 이곳은 장소가 되었다. 공간/위치와 장소/운동량의 불확정성 원리. 그러므로 제인 제이콥스의 책 제목이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셰익스피어나 제인 제이콥스처럼 거창한 뭔가가 아니더라도 공간이 장소가 되기 위해선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지인과 서울을 떠나는 것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지인은 서울이 싫어서 어떻게든 이곳을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가능하면 파리나 베를린으로. 나는 망설였다. 서울을 떠나? 그건 좀…… 헉. 설마 서울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한남이라서? ……

서울을 떠나기 두려운 건 경제적인 문제나 외국어 탓도 있지만 좋든 싫든 서울이 내게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육칠 년의 시간이 걸렸다. 어떤 도시라도 이 이상,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나는 그런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디아스포라는 이 과정을 평생에 걸쳐 거듭하는 사람들이며 유목민은 이러한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개념상 그렇다). 현대인은 장소를 잃은 대신에 공간을 얻었다, 라고 말해도 좋을까. 사이버스페이스, 코워킹스페이스, 인디스페이스……?

장소는 단지 사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구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처음 몇 년 동안은 같은 처지의 대구 친구들이나 학교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에 온 게 아니라 대학가나 서울 안의 대구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은 ‘봄’이라는 이름의 카페 겸 와인 바에서였다. 이제는 옷가게로 뒤덮인 홍대의 걷고 싶은 거리(지만 걷고 싶지 않은 거리)에 있었던 곳으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세계,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몇몇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들과 어울리고—그분들은 심지어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진정한 의미의 서울 사람이었다!—매일 가는 장소들이 생기면서 서울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대구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이었다. 한기씨를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성남 시민이며(분당이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생물학과에서 문창과로 갓 전과한, 반스를 신고 다니는 미국 인디 문화에 나오는 너드(하지만 주인공) 느낌의 시네필……(비록 나는 컨버스를 신고 다녔지만 한기씨를 보는 즉시 같은 종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깨달았다). 학교에 적응 못하고 교정을 떠돌던 나는 오한기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학교라는 장소에 적응했다. 마찬가지로 등단한 그해, 금정연과 이상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문단이라는 일종의 장소를 견딜 수 있었을까. 상우씨 역시 그랬을 것이다. 우리와 대화를 하는 상우씨를 본 문단 사람들은 깜짝 놀라 말했다. 상우씨 말할 줄 알았어요? 그들은 이상우를 몇 년간 봤지만 말하는 모습은 처음이라고 했다. 늘 조용히 있다가 돌아가더라구요. 상우씨가 그동안 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존 케이지는 1959년 8월 『음악적 만남』에 실린 ‘무에 관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연이 계속되면 될수록 우리는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며 이는 즐거운 일이다. 제자리에 있는 것은 초조하지 않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할 때 초조해질 뿐이다. 우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우리는 서서히 그 어디에도 없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