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남북조시대의 예술가─1

최인훈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구보씨가 서울을 산책하며 있었던 일과 일상의 상념, 관념적인 넋두리 따위를 쓴 작품이다. 박태원의 소설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쓴 이 소설에서 문학평론가 김현은 김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다른 작가들도 가명으로 등장하며 아마 구보씨는 최인훈이면서 최인훈이 아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금정연과 오한기와 이상우와 박솔뫼와 내 친구들은 대부분 실명으로 등장한다. 그게 바로 남북조시대의 예술가와 지금의 소설가가 다른 지점이다.

가명으로 써도 누군지 다 안다면 왜 가명으로 쓰는 것일까? 픽션 속의 인물일 뿐이라고 말하려고? 소송을 피하려고?

애초에 문제가 생길 내용은 쓰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나는 생각한다(어떤 일이 문제가 될지 완전하게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문제는 차후로 두고).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은 이런 생각을 가로막는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내면 깊이 침잠해들어가 심연으로부터 비롯한 어두운 욕망을 샅샅이 드러내야 하는 것 아닌가(다만 가명으로). 그렇게까진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써야 하는 것 아닌가(역시 가명으로). 검열은 예술의 적이다! 어둠을 직시하고 그걸 글로 써라(물론 가명으로)!

나로 말할 거 같으면 뭐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다. 진짜 검열하는 기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시대에는 오로지 반대 의미의 검열이 넘친다.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선택되고 묘사되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세상에는 부당하고 어리석은 일이 너무 많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맞서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은 다른 차원의 겹을 요구한다. 마음속 깊이 있는 생각이나 사람들 사이의 질투, 폭력, 욕망은 그 자체로 투명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쓴다는 것은 문학의 장르적 속성 중 하나에서 기인한 착각일 뿐이다(의식의 흐름이 진짜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문학의 기법인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이나 비극을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때로는 문학을 위한 문학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을 위한 문학이라는 ‘폄하’는 메타적이고 유희적인 형식 실험을 일컫는 말이지만 오히려 인간의 욕망, 심연 등등을 운운하며 옹호되는 것이야말로 문학을 위한 문학이라는 표현에 더 어울리는데, 그러한 것들이 문학장의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소비 형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고 문학은 곧 세상의 일이다.

그러므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산책에는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 이름이란 무엇인가.

. 산책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름이 달라도 기술어구가 동일하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현실의 인물과 동일하(게 느껴진). 다만 그것은 특정한 조건─예술적 재현─을 필요로 하며 재현된 인물이 현실의 인물과 완전히 동일한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술어구의 다발, 쉽게 말해 몇몇 정보가 같으면 우리는 동일인물을 떠올린다. 어떤 소설이 20세기 초반의 물리학계를 다루는데 등장인물을 하루 열두 시간씩 자는 부스스한 흰 머리칼의 천재 물리학자이며 상대성이론을 만들었다고 설명하면, 이름이 톰 크루즈라 하더라도 아인슈타인이 그 모델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야. 그 인물의 모델은 톰 크루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거나 오한기일 것이다(여기서 오한기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같지 않다. 오한기의 정신은 정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한기와 정신이 이상한 사람만이 기술어구의 다발이 같아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고유명사가 같은데 기술어구가 다르면 어떻게 될까. 흥미로운 점은 단지 고유명사가 같을 뿐인데도, 우리는 관성적으로 두 대상을 유사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내가 글에 이상우를 등장시키면 누구나 소설가 이상우를 생각할 것이다(가수 이상우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옛날 사람일지도……). 이상우와 전혀 다른 지점을 써도 그라고 생각하거나 이상우를 아는 사람은 이 사람이 이상우인가, 이상우에게 이런 점이 있었나, 라면서 말이다. 솔 크립키가 『이름과 필연』에서 언어에 대한 분석철학의 해석을 반박하며 하려고 했던 이야기도 이와 유사하다. 버트런드 러셀이나 프레게 등의 이론에 따르면 고유명사=기술어구이거나 =기술어구의 다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와 같은 순환논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유명사를 설명할 수 없다. 기술어구들이 고유명사를 존재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술어구가 다르면 고유명사가 같아도 다른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고유명사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물리적 의미에서의 관성처럼 말이다.

우리가 명사에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의미에서 고민해볼 지점이 있다. 존재는 동사적 현상, 관계, 움직임, 변화지만 인식을 위해서는 고정점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니클라스 루만에게서 빌려온 단어로) 구별과 선택이라고 부른다. 정보는 오로지 구별과 선택이라는 행위에서 탄생한다(물리적 개념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구별과 선택은 근본적이지만 특히 문학은 구별과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예술 장르이다. 언어가 그 주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문학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다. 산책은 구별과 선택을 최소화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산책은 왜 문학에서 그렇게 사랑받는 주제일까. 그건 문학이 문학을 폄하하면서밖에 쓰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한기의 신작 소설 제목은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아직 한 글자도 쓰지 않았지만 제목은 정해졌다고 한기씨는 말했다.

예약판매도 해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예약판매는 왜 하는 거예요?

저는 모르죠.

정말 모를 일이다. 예약판매는 왜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일찍 사면 어떤 이득이 있는 걸까. 애초에 예약판매로 구입한 책을 더 일찍 산 거라고 할 수 있나. 물량이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예약판매는 뭔가요?

이번 원고는 예약판매에 관한 건가요? 한기씨가 물었다.

아니요. 내가 말했다. 늘 그랬듯 산책에 관한 겁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