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수영장

성능이 좋은 전문가용 망원경으로 빌라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궁전아파트 단지 앞의 빌라들은 층수가 낮고 상아색의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신축건물이었는데, 빌라라는 특수성과 (입시 실적이 좋지 않은 학교에 진학할 가능성이 높은) 학군 때문에 평수 대비 가격이 싼 편이었다(고 엄마와 미라 아줌마가 대화하는 것을 훔쳐 들었던 적이 있다). 고급형 단지라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매우 인공적으로 조성된 조경용 침엽수가 나의 시야를 가렸다. 나무 사이로 몇몇 불 켜진 집들이 보였지만 대부분 커튼이 쳐져 있어 내부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중, 일층에 창문이 활짝 열려 안이 잘 보이는 방 하나가 있었다. 방안에서 검은 형체가 움직였다. 어두운 색의 민소매 티를 입은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그가 옷을 벗었다. 하얗고 마른 등이 드러났다. 언뜻 윤도의 피부 톤과 비슷한 것 같은. 나는 침을 삼켰다. 하얀 등의 남자가 끈이 얇은 하얀 민소매 티로 갈아입고는 창가 앞 책상에 앉았다. 

뾰족한 턱에 하얀 얼굴, 쌍꺼풀 없이 찢어진 눈에 밤송이처럼 짧게 잘린 머리카락. 

남윤도. 분명히 윤도였다. 

그가 정말로 매일 밤 나의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니 죽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들었다. 살 떨리는 수치심을 안은 채 책상에 앉은 윤도를, 그의 미묘한 움직임을 계속 관찰했다. 공부를 하는 건지 뭔가를 쓰고 있었다. 심장박동 소리가 커졌다. 발바닥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심장 소리가 울리는 그런 느낌. 당연히 윤도가 있는 곳까지 내 심장 소리가 전해질 리 없는데도 나는 점점 커지는 숨소리를 감추기 위해 몇 번이고 숨을 멈췄다가 길게 내쉬기를 반복했다. 고작 일 분 남짓의 시간이 지났는데 마치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윤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얼른 몸을 숙였다. 

잠시 후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을 때 윤도의 방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닷새 뒤, 나는 ‘궁전 스포츠 센터’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진 나일론 소재의 가방을 든 채 집 앞 비탈길을 내려갔다. 마치 초행길을 걷는 것처럼 계속 고개를 돌려 길을 살폈다. 행여나 윤도를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길을 걸을 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핸드폰에 저장된 그의 번호로 문자를 보내면 될 일이지만, 딱히 만날 구실도 할 수 있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로 용기가 있는 성격이었으면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 테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고 그 끝에는 언제나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 반반씩 섞인 흉한 감정의 덩어리가 자리했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얼른 물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수영장. 

나의 유일한 도피처. 

대부분의 체육 활동에 젬병인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스포츠가 바로 수영이었다. 여러 이유 때문이었는데 부모님을 포함한 집안의 영향이 가장 컸다. 


궁전건설은 지역 토착 건설업체로, D시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 단지를 보유한 굴지의 중견기업이었다. 건설사업으로 재미를 본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러하듯 궁전건설은 백화점과 스포츠 센터, 골프장 등의 여가산업 전반에도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했다. 때문에 90년대 중반, 궁전 스포츠 센터가 문을 열었을 때 구민들은 열광했다. 골프와 스쿼시, 볼링과 수영, 푸드코트와 카페, 심지어는 영어유치원까지 구비된 혁신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성구 안에서도 교육열이 남달랐던 우리 집안 사람들은 고가의 수강료에도 불구, 자녀들을 그 영어유치원에 등록시켰고, 나 역시도 미취학아동 때부터 사교육의 홍수에 빠져들게 되었다. 자신을 합리적인(그러니까 자녀의 대입에만 목을 매는 것이 아닌 아이의 행복한 삶과 균형 있는 발달을 동시에 위할 줄 아는, 교원자격증을 보유한 교양 있는 현대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부모라 생각했던 엄마는 나를 궁전 스포츠 센터의 아기스포츠단과 영어유치원에 등록시켰다. 내 인생 첫번째 선생의 이름은 대니얼이었다(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미국 남부 악센트로 영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D시의 남자아이가 원어민처럼 영어를 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진짜 강남구가 아닌 D시의 강남구였던 우리 학군이 가진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스포츠단에 들어가 처음 수영 강습에 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일곱 살의 나는 엄마의 강요에 의해 남자 탈의실에 홀로 들어가게 됐다. 꽉 조이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두려움에 떨며 밖으로 나와 락스 냄새가 풍기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파란색의 우레탄이 깔려 있는 바닥을 지나니 엄마를 포함한 학부모 무리가 맨발로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무르팍에 매달렸으나, 엄마는 가차없이 나를 아이들이 서 있는 줄에 밀어넣었다. 몸에 군살이 없고 목소리가 큰 강사가 아이들에게 심장 부분에 물을 묻힌 후 한 명씩 차례대로 물에 들어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강사의 지시에 따랐다. 점점 더 내 차례가 다가왔고 나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거의 모든 아이들이 물에 들어갔을 땐 공포에 질려 몸이 굳어버렸다. 내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엄마가 내 뒤로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내가 안도감을 느낄 틈도 없이 그녀는 나를 물속으로 밀어버렸다. 

불시에 물에 빠진 나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깨닫자마자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었고 모든 종류의 감각으로부터 멀어져버렸다. 엄마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지옥이 바로 이곳인가? 나는 생의 의지를 순식간에 놓아버렸다. 사지를 늘어뜨리고 그저 눈을 뜬 채 물거품이 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부유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영 강사가 허우적대는 나를 순식간에 건져올렸고 똑바로 발을 디디고 서보니 수위는 일 미터도 채 되지 않는, 내 어깨 정도의 깊이였다. 그리고 시간은 오 초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 경험은 그것 나름대로 어린 내게 귀한 교훈을 주었는데, 향후 십여 년 동안 펼쳐질, 말 그대로 지옥의 구렁텅이나 다름없는 내 인생을 단 오 초 만에 축약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강제로 아기스포츠단에 들어간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초등학교 4학년에 이미 고급반까지 수료했으나, 타고난 신체 능력의 한계로 그 위 단계에는 올라가지 못해 강습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따금 주말이나 시간이 남아도는 때에 궁전 스포츠 센터에 가서 자유 수영을 하는, 취미라면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건 궁전건설에서 자신의 초기작인 궁전아파트에 사는 세대를 위해 준비한 유일한 특전인 ‘궁전 스포츠 센터 정회원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달리 더운 날이어서 스포츠 센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잔뜩 땀에 젖은 채였고, 당장이라도 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빛의 속도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샤워실에서 간단히 물 샤워를 했다. 궁전 스포츠 센터는 냉탕과 온탕, 건식과 습식 사우나 등 그럴듯한 목욕탕의 구색을 갖추고 있어 정규 강습이 없는 주말에도 언제나 사람이 많은 편이었는데, 월드컵 기간이라 그런지 그날은 수영장 안이 휑했다. 나는 샤워실 밖으로 나와 왼쪽 통로의 일반 수영장이 아닌 오른쪽 통로의 정회원 전용 수영장에 들어갔다. 일반 수영장보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사람이 거의 없어 나처럼 가만히 물에 떠 있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격이었다. 

역시나 수영장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수경을 쓴 채 곧장 물에 뛰어들었다. 이십오 미터짜리 레인을 두 바퀴 정도 돌았다. 첨벙이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숨이 가빠올 정도로 수영을 해도 답답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수경을 벗고 물위에 가만히 누웠다. 천장에 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거대한 밀실에 갇힌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었다. 수영장을 감싸고 있는 고요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귀가 물속에 잠겨 있어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어쩌면 오랜만에 노래를 불러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따지고 보면 윤도를 알게 된 건 고작 닷새 전이었다. 

죽고 싶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매일 밤 청승맞은 노래를 부르는 내 목소리를 그애가 들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의 내 흘러넘치는 감정이 창 너머로 다 전해졌다는 생각을 하면 자꾸만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 사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시점,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나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윤도를 만난 그날 이후로, 매일 밤 나는 불을 켜지 않은 채 그의 방을 바라보며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참 동안 관찰했다. 그리고 이내 달아올랐다 곧장 허탈한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계속 숨죽이고 있다보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새벽이 되어서야 침대에 눕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온몸을 통해 내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나라는 존재가 커다란 진공관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 

나는 다시 수경을 끼고 물속으로 깊이 잠수했다. 바닥에 가슴팍이 닿는 게 느껴졌다. 해저에 사는 고대어가 된 것처럼 나는 한참 동안 차가운 물속에서 유영했다. 눈앞에는 온통 푸른 타일만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과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과 그 말을 할 때의 목소리가 자꾸만 나를 휘감았다. 나는 시종일관 힘차게 헤엄치던 다리와 팔의 긴장을 풀고 몸을 늘어뜨렸다. 마치 낙엽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물위에 떠올라 수영장 바닥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영원히 물속에 있고 싶어. 

잠겨 있고 싶어.

아무 소리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며 그저 부유하는 상태로 남고 싶어.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상태로 그렇게. 

그래서 내 감정과 내 마음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게 되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견딜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물위를 부유하다 고개를 들었다. 폐가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한 시간도 넘게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물 밖으로 나와 샤워실 쪽으로 향했다. 너무 오랫동안 차가운 물속에 있었던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나는 샤워실에 들어가 곧장 수영복을 벗고 온탕에 들어갔다. 대리석으로 된 탕 벽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커다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수증기 때문인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입을 벌린 채 천장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야, 해리.”

고개를 내리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윤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냐. 못 볼 사람 봤냐.”

“여기서 너 처음 보는 거 같아서.”

“그러게. 나도 자주 오는데 너 처음 보는 거 같네.”

“수영한 거야?”

“그럼 수영장에서 뭘 하겠냐. 근데 너 계속 탕 안에만 있었던 거야? 나 두 시간 동안 수영했는데 너 못 본 것 같은데.” 

나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정회원 전용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고 말했다.

“정회원? 너 졸라 부자네.”

궁전에 사는 것을 뻔히 알면서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보다는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윤도가 온탕 가장자리에 올려놓은 작은 바가지에 집중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윤도의 은색 수영모자와 수경 그리고 빨간색 스피도. 윤도가 방금 전까지 입고 있었을 수영복. 한참을 그것만 바라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윤도가 내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내 몸을 훑는 윤도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탕 깊이 들어가 몸을 숨겨보려 했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윤도가 웃으며 말했다. 

“너 진짜 털 많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내 가슴팍을 문질렀다. 또래에 비해 발달 속도가 빠르고, 몸에 털이 많은 것은 내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촉감이 엄청 부드럽네. 부럽다. 어른 같아 보여. 나는 털 하나도 없는데.”

윤도는 나와는 달리 몸이 하얗고 매끈했다. 나는 윤도에게 퉁명스럽게 그만 만지라고 했다. 

“느낌 좋은데 왜.”

자꾸만 아랫도리가 빳빳해지는 것 같아 윤도의 손을 애써 뿌리쳤다. 그리고 윤도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주말에 왜 혼자 수영장에 왔냐고 물었다. 윤도는 주말에 집에 있으면 엄마 가게 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밖에 나올 구실을 만든다고 했다.

“가게? 엄마 가게 하셔?”

“어. 요 앞에 송원 막창. 거기가 우리 엄마 가게야.” 

그곳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송원 막창’은 지역 사람들에게 예전부터 유명한 일종의 체인점 브랜드였다. 원조 송원 막창과 2대, 3대 가게가 D시의 번화가마다 자리해 있었고, 소문에 따르면 한 가족이 전부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수성못 근처에 위치한 2대 송원 막창의 경우, 필로티 형식의 엄청나게 큰 건물과 넓은 주차장 덕분에 장사가 잘되기로 유명했다. 정작 있는 집 자식은 본인이면서 나보고 부자라고 하다니. 괜히 짜증이 났지만 동시에 아무렇지 않게 내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윤도의 대범함과 순수함의 원인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경우 가난은 인간을 쪼그라들게 한다. 가난하지 않은 자는 마음을 쪼그라들게 하는 이유 하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윤도는 덥지 않냐며, 괜찮으면 함께 나가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윤도의 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 얼굴도 왠지 윤도의 피부와 비슷한 색이 되어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샤워를 했다. 자꾸만 윤도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탈의실로 나와 각자의 로커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나는 오래된 가방이 부끄러워 궁전 스포츠 센터 마크가 보이지 않게 가방을 말아 쥐었다. 윤도는 독서실에 들고 왔던 나이키 신발주머니를 등에 멨다. 탈의실 입구에서 키를 반납하고 신발을 신는데 윤도가 말했다. 

“아직 많이 더워? 얼굴이 엄청 빨갛네.”

“어, 탕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그것도, 다 벗고 있는 너와 함께).”

“우리 뭐 찬 음료수 마실래? 나 동전 많아.”

“그래.”

윤도와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자판기 쪽으로 갔다. 윤도의 주머니에서 백원짜리 동전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엄마 가게 카운터에서 뽀렸어.”

동전 한줌을 훔친 주제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 윤도. 그 미소가 어이없게도 귀여워서 나는 또 잠깐 절망해버리고야 말았다. 윤도는 자판기에 동전을 잔뜩 집어넣고 포카리 스웨트를 뽑았다. 나보고도 먹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했다. 나는 평소처럼 데자와를 골랐다. 

“너 그거 왜 먹어?”

“난 원래 데자와만 먹는데.”

“그거 토 냄새 나던데.”

“뭐라고?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포카리야말로 미지근한 오줌 같아.”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괜히 사소한 것에 발끈해버린 내가 부끄러웠다. 윤도와 함께 있을 때면 평소의 나와는 다른 유치한 모습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십오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견고한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져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 

그러거나 말거나 밖으로 나온 윤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앞을 보며 걸었다. 한참 동안 별말 없이 나란히 걷던 우리는, 커다란 버드나무 옆에서 트램펄린을 타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윤도가 손가락으로 트램펄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봉봉이다.”

“그러게. 나 어릴 적에 봉봉 타는 거 진짜 좋아했는데.”

“지금 탈래?”

“아니, 수영해서 진 빠져(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너와 뜨거운 탕에 앉아 있느라 진이 빠진 거지만).”

“그래도 한 번만 타자.”

“나 너무 커서 안 들여보내주지 않을까?”

“괜찮을 거야. 어른들도 타던데 뭐.”

“아냐. 덥고 피곤해.” 

“그래? 나는 같이 더 놀고 싶었는데……”

슬픈 방아깨비 같은 윤도의 얼굴을 보니 괜히,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애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고심한 것이 티 나지는 않게 대답했다. 

“그럼, 뭐 다른 거 하고 놀면 되지(아무리 너일지라도 축구나 농구 같은 걸 하자고 하면 죽여버릴 것이다).”

“노래 부르러 갈래?”

“노래? 노래방 가자고? 나 돈 없어.”

“돈 없어도 돼. 노래방 말고 오래방 가자.”

“오래방?”

“오락실에 있는 거 있잖아.”

“아, 그걸 오래방이라고 해?”

“남들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렇게 불러.”

“그래, 그럼 거기 가자. 오래방.” 

우리는 나란히 서서 오락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