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음악 감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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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전형적인 스포일드 차일드였다. 50년대 중반에 고위관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 세대가 흔히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알지ᅠ못했고 때문에 바닥에서부터 뭔가를 이뤄냈다는 끈적한 자긍심 같은 것도 없었다. 대신 그 빈자리에는 명문대를ᅠ나온 형제자매들에 대한 열등감과 기대에 못 미치는 장남에 대한 부모의 실망감이 가득차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누가 봐도 집안의 명백한 하자이자 수치인 장남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대신 가장 손쉽게 무관심을 감출 수 있는 방법인 ‘돈’으로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해왔다. 그 덕에 아빠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누구보다도 한량과 같은 생활을 즐겨왔다. 

아빠의 인생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었다. 고입 시험에도, 대입 시험에도 아빠는 번번이 미끄러졌다(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동생들은 한 번에 모든 입시에 성공했다). 때문에 아빠는 그 시대에는 흔치 않았던 재수에 삼수를 거듭해 지방에 있는 한 사립대에 (그것도ᅠ할아버지의 연줄로) 간신히 입학했고 저조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을 나온 사람은 앞다퉈 모셔가는 경제 부흥기였음에도 보란듯이 취업에 실패한 아빠는 결국 할아버지의 재산을 털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 방식의 사업이 잘 굴러갈 리가 없었으므로 암암리에 부모의 원조를 받으며 구멍을 메워나갔다. 

어릴 적, 아마도 내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화장대 서랍장에서 누렇게 바랜 문서 몇 장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맨 위에 적힌 단어가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이름이며, 그 서류가 장부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부모님에게 그 서류를 내밀자 엄마는 화들짝 놀라면서 내 손에서 종이 뭉치를 빼앗았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화장대 서랍에서. 이게 뭔데?”

“어른들만 보는 거야.”

엄마와 아빠는 나를 옆에 앉혀놓은 채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얘기를 종합하자면 그 서류는 할아버지가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작성된 이중장부였다. 그들은 당연히 어린 내가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 여겼겠지만, 나는 또래에 비해 독서량이 많았으며 부모님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영악했다.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척 연기를 하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나의 온 신경은 둘의 대화에 쏠려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사용한 단어를 지금까지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실업의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과 어떤 대학의 총장에게 건넸던 돈, 국회의원인 작은할아버지의 차명계좌…… 돌이켜보면 당시 나의 문해력을 훌쩍 뛰어넘는 정도의 내용이었으나 나는 범상치 않은 기억력으로 그 단어들을 하나하나 새겼다. 

할아버지는 당시 기준으로 따지더라도 비교적 이른 나이인 환갑을 막 넘겼을 무렵에 돌아가셨고 아빠 쪽 집안은 이전만큼 권세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막 서른이 된 아빠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방종하면서도 손쉬운 삶을 살아왔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며 철들……기는커녕 또다른 의존의 대상을 찾게 되었다. 

바로, 나의 엄마였다.

엄마 역시 대규모로 복숭아 농장을 경영하는 지역유지의 이남 사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또래에 비해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며 살았다. 교육의 기회도 (오빠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지원이 적었으나) 주어졌다. 이미 언니와 오빠들은 모두 대학 교육을 받은 뒤 반수 정도는 의사나 간호사, 약사가 되어 의학 계열에 종사중이었다(당시의 대학 진학률, 특히나 여성의 대학 진학률을 고려할 때 그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출생과 함께 외할아버지가 급사해 ‘애비 잡아먹은 년’이라는 수식어를 유년기 내내 달고 살았으며, 때문에 얼마간의 애정결핍과 언제나 자기검열을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는 언니들이 졸업한 명문여고에 입학해, D시에서 모여 살고 있던 언니, 오빠들과 같은 다세대주택에 세 들어 살며 살림을 도맡았다. 그렇게 살림과 학업을 병행하며 사력을 다해 학교를 다녔으나 국립대에 입학하는 것에는 결국 실패했고, 재수를 시켜달라거나 사립대를 다니게 해달라고 요구할 정도의 배짱은 없어서 졸업 후 오빠(즉, 큰외삼촌)의 병원에서 수납 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 년간 돈을 모은 엄마는 결국 방통대 초등교육과에 입학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삶을 이어나갔으며 마침내 준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교사 수급이 시급한 곳에 주로 투입되는 ‘준’교사의 특성상 엄마는 시내가 아닌 시외, 경북 K군의 작은 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시외버스로 왕복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니며, 또 퇴근 후에는 오빠와 언니들의 밥을 차려주며 엄마는 매일 지쳐갔다. 그 와중에 엄마의 단짝이었던 미라 아줌마는 시내에 위치한 무역회사에 경리로 취직한 상태였다. 엄마는 샌님처럼 남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신과는 달리 욕망에 충실하고 제대로 놀 줄 알았던 미라 아줌마를 동경해 주말마다 그녀와 함께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법적으로 단속하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음에도 엄마는 언니와 오빠들의 눈을 피해 미니스커트에 가죽 부츠를 신고 미라 아줌마와 함께 다방과 영화관, 음악 감상실을 쏘다녔다. 그렇게 일탈을 즐기던 어느 날 미라 아줌마가 충격고백을 했다. 

“나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어.”

“누구?”

“그게…… 문제가 조금 있어.”

“왜? 그 남자 데모꾼이야? 지금 감옥에 있니?”

“아니, 어디 안 갇히고 멀쩡히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그 남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거든.”

사연을 들어보니 미라 아줌마는 시청에 다니는 공무원 김과 소규모 건설업체를 경영하는 강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인생에서 안정성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다며 공무원 김을 선택할 것을 권유했다. 하나 애초에 그런 결정을 할 사람이었으면 두 남자를 오가며 고민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모험을 즐길 줄 아는 미라 아줌마는 김보다 키가 십 센티미터는 크고 눈썹이 짙으며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강의 아이를 덜컥 임신해버리고야 말았고, 이듬해 강을 꼭 닮은 딸(그러니까 강태란)을 낳았다. 단짝 친구가 강 건너 기혼자의 세계로 떠나버리고 난 후 온전히 홀로된 기분에 휩싸인 엄마는 큰외삼촌의 소개로 몇몇 의사와 선을 보기는 하였으나 하나같이 지 잘난 맛에 사는 밥통들이라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의 혼처가 어그러지고 난 후 엄마는 슬그머니 결혼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되었다. 오빠도 언니들도 모두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난 언젠가, 주중에는 지금처럼 K군에 있는 학교에 가서 얼굴이 새카만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말이면 홀로 집에서 수박이나 잘라먹으며 남은 삶을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마음. 여름이나 겨울에는 혼자 휴가를 떠나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 는 그런 마음.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서양 여자들처럼, 그렇게. 

그러나 여름방학을 맞아 보름이 넘는 휴일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엄마는 선풍기를 켜놓은 채 방안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고, 하물며 젊은 여성 홀로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뿐더러, 국내여행이라고 한들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는 한계가 있는데다 엄마는 차는커녕 면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서른이 될 무렵, 적금 만기일이 다가오면 기필코 면허를 따고 차를 사고 말리라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답답한 가슴을 안고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라디오를 들었다. 나미의 <슬픈 인연>이 흘러나왔을 때 엄마는 문득 이국의 음악을, 그것도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부랴부랴 원피스를 입고, 서랍장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커피색 스타킹을 신고, 약사인 큰언니가 사다놓은 향수를 뿌리고, 몇 달간 신발장에 처박아놓았던 진한 자줏빛의 하이힐에 발을 구겨 넣으며 밖으로 나섰다.

미라 아줌마와 함께 들르곤 했던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에 간 엄마는 혼자인 게 마음에 걸려 괜히 문 앞에서 몇 분을 서성였다. 그러다 큰마음을 먹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 감상실에는 자신처럼 혼자 온 젊은 남녀들이 많았다. 긴장됐던 마음이 누그러진 엄마는 냉커피를 시켜놓고 앉아 쇼팽의 피아노곡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렸나. 음악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어김없이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고 거의 단발에 가까운 머리를 한 남자가 꽃 한 송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계속해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을 훌쩍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무시하려고 해도 자꾸만 훌쩍이는 소리에 도무지 음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커피를 다 마시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감상실 밖으로 나섰다. 문밖에 나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역시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엄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훌쩍이고 있던 그 남자였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비 맞은 유기견 같은 슬픈 표정을 짓고서는 들고 있던 꽃을 건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음악 못 들으셨죠? 사죄의 의미로 이거 드릴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받을 사람이 없어져서요.”

그게, 엄마와 아빠의 첫 만남이었다. 

나름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이고 어이없다면 어이없다고도 할 수 있는 둘의 만남은 남성측의 일방적인 추진으로 결혼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아이를 낳았고, 아빠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대차게 말아먹기를 반복하다 결국 IMF를 거치고 난 후에는 완벽히 쓰러져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에 가족을 몰아넣었다. 

결혼 후 엄마는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토록 원하던 휴가를 떠나지는 못했다. 출산 후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둬버린 엄마는 밖으로 나도는 아빠 때문에 독박육아를 해야만 했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가세가 완전히 기울고 난 후 소규모 공부방의 보조교사로 다시 일해야 했다. 

 아빠의 경우는 돈은 벌어오지도 못하면서 매일 뭐가 그리 바쁜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하기 일쑤였다. 아빠는 친구들에게는 누구보다도 호쾌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나 가족들에게는 최악인,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의 중년 남성이었다. 게다가 어릴 적 누리고 살던 때의 습관이 온몸에 배어 있어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고 생선이나 돼지고기는 냄새가 난다며 일절 입에 대지 않았고, 아무도 먹지 않는 양과자를 잔뜩 사다놓기도 했으며, (잘 붙어 있지도 않는) 좁아터진 집구석에 음악 감상실에나 있을 법한 으리으리한 스피커 시스템을 차려놓아 나와 엄마를 골고루 미치게 했다. 

후에 엄마는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그때 미라가 공무원하고만 결혼했어도 그렇게는 안 됐을 텐데.”

그런 말을 할 때면 본인의 선택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것만 같았고, 나는 어김없이 그 사실을 주지시켜주었다. 

“엄마도 최악의 선택을 한 건 마찬가지인걸.”

엄마는 내가 아빠를 흉볼 때면 누구보다 신나게 웃으며 맞다, 네 말이 맞다, 대답을 하고는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되물었다.

“근데 도대체 왜 아빠야? 집에서 아예 내놓은 부잣집 도련님이라니. 누가 봐도 최악의 상대잖아.” 

“그땐 내가 그 남자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지.”

엄마가 유년기에 겪었던 언어폭력과 방치로 인해 체화한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결국에는 이 모든 일의 시초였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랬는데, 엄마는 결정적인 순간에 조상들의 말씀을 새겨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지금 바닥이니 이제 나아질 일만 남았다며 언제나 긍정의 말을 되새기고는 했다. 아빠는 본연의 씀씀이며, 열등감에 기초한 자기중심적인 삶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다. 

당연히 삶은 계속해서 더 나빠지기만 했다. 

우리 가족은 살아오며 서로가 서로를 멀리하는 법을 배웠다. 가족이 모두 세상을 향해 잔뜩 날을 세우고 있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생채기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나는 오늘의 식사 자리를 겪으며 다시금 다짐하게 되었다. 기필코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떠나고 말 것이라고. 그것은 이십대의 여름날, 영화 속의 여자들처럼 홀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던 엄마의 마음과도 조금은 닮아 있는 욕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