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찰나의 무게

진지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학생회 월례회의가 끝난 후 2학년들이 먼저 소강당을 빠져나갔다. 남은 1학년 여학생들이 무늬의 곁을 에워쌌다. 

“너 괜찮아?” 

아이들의 물음이 무색할 정도로 무늬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닦으려고 불렀나보네. 그래도 생각보다 별거 없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중을 나온 아이들은 이미 이런 문화에 익숙한 것 같았다.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무늬가 말했다. 원래 선배들이 초장에 기를 제압하기 위해 후배를 세워놓고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주며 그것을 ‘닦는다’고 표현한다고 했다. 나는 정체 모를 의식을 겪으며 고등학교 생활의 만만찮음과 하찮음을 동시에 느꼈다. 


*


4월이 되었고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첫 모의고사가 치러졌다. 배치고사 이후로 치는 첫 시험이라 긴장이 됐다. 선생들은 고1 첫번째 모의고사 점수가 수능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두 번 생각해도 고등교육의 가치 없음을 증명하는 것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말을 하며 아이들을 겁주기 바빴다. 나는 곧 찾아올 나의 몰락을 예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책상 앞에 붙어 있으며 매일매일을 초조하게 보냈다. 윤도는 중학교 때와 다르지 않게 시험 따윈 별로 신경쓰지 않고 여전히 까불거리며 놀기만 했다. 우리의 관계 역시도 중학교 때와 같았다. 배치고사 전교 1등 출신의 반장인 나와 애매한 성적을 가진 그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 되어 서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가 한 점 위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우연히 급식실에서 앞뒤로 서게 됐을 때 윤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어깨에 고개를 턱 올려놓고는 했다. 찰나의 순간, 그러나 분명히 윤도의 체중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 그런 날은 그 찰나의 순간이 하루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첫 모의고사가 끝나고 중앙 현관에 전교생의 성적표가 붙었다. 1등부터 523등까지의 성적 모두가. 북적대는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나도 내 성적을 확인하려는데 놀랍게도 맨 윗줄에 여전히 무늬가 자리하고 있었다. 첫 끗발이 개끗발인지라 나는 당연히 추락했지만 생각보다는 선전해 10위권에 안착하게 되었다. 떨어진 성적에 실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쁜 마음이 들었다. 더이상 누군가의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지목되지도 않고 지칭되지도 않는, 맨 앞도 맨 뒤도 아닌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 나를 감쌌다. 성적이 나온 날, 누군가가 성적표를 발기발기 찢어놓았다. 다음날 중앙 현관엔 코팅된 성적표가 다시 붙었고 그 앞에 CCTV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쓰인 경고문. 

석차표 훼손시 엄벌에 처함.

이무늬와 은유리. 1등과 523등의 이름을 전교생 모두가 기억하게 되었고, 그것은 내 마음에 지워질 수 없는 어떤 형태를 남겼다.  


*


중학교 때만 해도 학교에서 가장 큰 축에 속했던 나인데 어느새 아이들이 내 시선 높이까지 자라기 시작했다. 밤새 물이라도 주는지 더러는 나보다도 더 큰 애들도 생겨났다. 윤도 역시 조금 키가 컸고 야위었던 팔뚝에 근육이 붙었다. 나는 마치 미라처럼, 혹은 소금 기둥처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천천히 말라붙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깜냥에 맞게 커가는 것만 같았다. 나만 빼고 모두가 저마다의 속도로 앞으로 뻗어나가는 느낌. 나는 그게 못내 이상해서 먼 곳을 바라보듯 자꾸만 그 아이들을 흐릿한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윤도에게서 이전과 다른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매주 보던 그의 몸이 이전과 다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해의 봄, 주중에는 내내 학교와 학원에만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교문 앞에 서 있는 학원 버스를 탄 무늬와 윤도, 혜영, 나. 학원으로 간 우리는 수학이며 영어 단과 수업을 들었다.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조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멍한 정신으로. 

주말이면 윤도와 수영장을 갔다. 둘이 있을 때의 윤도는 학교에 있을 때의 윤도와 확실히 달랐다. 물속에서 나의 손을 잡고 물 밖으로 나와서는 나를 보며, 내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윤도의 팔과 다리가 조금씩 길어져서 나의 팔과 다리 길이와 비슷해지는 게, 이상하게 좋았다. 윤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자주 실없이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이 좋아서 자꾸만 우스갯소리를 하게 됐다. 그리고 그건 분명 평소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수영을 마치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윤도의 스쿠터를 타고 대로를 달렸다. 젖은 머리카락이 다 마를 때쯤이면 윤도의 컨테이너 박스에 도착했고, 우리는 몇십 권씩 빌려놓은 만화책을 읽었다. 윤도는 내가 윤도의 바이크와 똑같은 바이크가 나온다는 이유로 소개해준 『내 남자친구 이야기』를 몹시 열중해 읽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종류의 책들을 더 많이 알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나란히 누운 채, 때로는 서로의 무릎을 벤 채 『원피스』와 『타로 이야기』, 『파라다이스 키스』와 『나루토』를 함께 읽었다. 분명 나는 두 번 이상 읽은 만화였음에도 윤도와 같이 읽으면 더 재밌게 느껴졌다. 내가 2권을 다 읽으면 윤도가 그것을 이어받아 읽기 시작하는, 그런 사소한 일들이. 

때로는 하나밖에 없는 베개를 나란히 베고 누워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 윤도가 먼저 잠이 들면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길쭉하게 찢어진 눈에 끝이 휘어진 코와 작은 입술 같은 것들을 찬찬히 보며, 이상하게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결코 눈을 감아버리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는 없었고, 이런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끓고는 했다. 


*


언제부터인가 순수한 사람들을 보면, 착하고 순하고 타인에게 날을 세우지 않고 아무런 경계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조마조마한 마음이 든다. 

그의 남은 인생에 훼손되고 망가질 일만 남은 게 아닐까 하는 주제넘고 과장된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해 여름의 태리가 내게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그 불길함이 일종의 징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