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북파워, 에쎄 라이트, 딸기 지갑

수업 시작 직전에야 나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의 분위기는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열 명의 반 아이들 중 반수 정도가 사복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는 교복 차림이었다. 학교별로 봄방학이 시작되는 날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초콜릿 박스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강사가 들어왔고,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인 영어 시간이었음에도 도통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초콜릿의 주인인) 그와 무늬를 번갈아가며 관찰했지만 둘 다 별다른 이상 징후가 보이지는 않았다. 무늬는 중간중간 졸기까지 했다. 쑥대밭이 된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게 당연했지만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그녀를 보자니 괜히 화가 치밀어올랐다. 왜 나만 이토록 고통받아야만 하는가? 순전히 누군가를 좋아한 죄밖에 없는데! 나는 영어 교재인 『Grammar in Use』 귀퉁이에 계속해서 의미 없는 사각형과 원을 그리며, 또 그려놓은 도형을 검게 칠하며 팽팽한 긴장을 이겨내려 노력했다. 

세 시간 동안의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하나둘 강의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가방을 싸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모두가 강의실을 빠져나간 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초콜릿 박스와 그 속에 담긴 내 진심이 비밀리에 그에게 잘 전달됐다고 믿기로 했다. 사실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이기는 했다. 그는 초콜릿을 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할까. 단 한순간이라도 나를 떠올릴까? 아니면 전혀 짐작도 못한 채 그저 어떤 여자아이가 줬을 거라고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을까. 오늘의 내 행동이 우리의 관계에, 나아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지고 올지 계속 고민해봤지만, 당연히 답은 없었다. 

교과서와 참고서가 잔뜩 들어 있는 책가방은 몹시 무거웠다.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고민을 어깨에 짊어진 채로, 나는 강의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까무러칠 듯 놀랐다. 복도 중간에 무늬가 떡하니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무늬의 어깨를 슬쩍 밀치며 복도를 걸어갔다. 무늬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너 나한테 뭐 할말 있지 않아?”

바보같이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버렸다. 못 들은 척 그냥 걸어갔어야 했는데. 내 앞으로 온 무늬의 입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 간첩은 못 되겠다. 거짓말 진짜 못하네. 얼굴에 다 나와.”

인생 전체가 거짓말인 나에게 감히?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나였다. 나는 잠깐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평정심을 찾고 모범생의 가면을 썼다. 누구보다도 무해한 표정을 얼굴에 띄운 채 세상 가장 평온한 음성으로 말했다.

“응? 딱히 물어볼 건 없는데?”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너 염색했네? 이번 머리 색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나는 내 주특기인, 눈이 반쯤 감긴 사회적 미소를 지은 뒤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속으로는 제발 떨어져나가라, 기도를 하면서. 무늬는 내 옆에 따라와 서더니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계속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평소에는 학원에 절대 일찍 오는 법이 없는데 말이야. 오늘은 사정이 생겨서 집에 가지를 못했거든.”

무늬가 머리카락을 넘겨 피어싱이 잔뜩 박힌 채 붉게 부풀어오른 귀를 보여주었다. 

“엄청 아팠겠다(뭐 어쩌라고).” 

“별로 아프진 않았고, 대신 웃긴 걸 봤지 뭐야?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강의실에서 어떤 남자애가 후다닥 뛰어나오질 않나, 불 꺼진 강의실엔 리본 달린 박스가 올려져 있지를 않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더라? 발렌타인데이에, 박스라니. 아무리 호기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눈길을 줄 만한 물건 아니냐고. 별수 있나. 박스를 슬쩍 열어보았지.”

“아, 정말(돌았니, 진짜)?”

“다소 좆같은 문화라고 생각하지만, 통상적으로 한국에서 발렌타인데이는 여자가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잖아? 근데 왜 네가 나온 빈 강의실에 박스가 있었을까?”

“그러게? 난 아무것도 못 봤는데 신기하다(제발 닥쳐라).”  

“내가 편지 내용까지 읊어줘야 해? 나는 내게 주어진 내 삶의 크기만큼 너를 생각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맹랑한 게 내 초콜릿 박스를 홀랑 뜯어본 것도 모자라 내 앞에서 편지 내용을 읽기까지 하다니. 수치심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무늬도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럼 내가 본 걸 다른 애들한테 말해도 괜찮다는 거지?”

“미안하지만,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고, 너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고 다녀.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니까.”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는 누가 봐도 상관이 있는 것처럼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망했다. 무늬의 페이스에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먼저 치고 나가려는 나의 옷자락을 무늬가 잡았다.

“어디 가. 나랑 얘기나 좀더 하자.”

노는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무늬의 말에는 함부로 거역하기 힘든 카리스마랄까, 모종의 강압성이 있었다. 나는 또 나대로 (모범생다운) 수동성이 있어서 어느새 그녀의 뒤를 따르게 됐다. 가방끈을 꽉 붙잡은 채 자그마한 여자애의 뒤를 졸졸 따르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찐따 같아 보였을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무늬가 나를 데려간 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학원 뒷골목이었다. 큰길보다 인적은 드물었지만 오래된 상가들이 죽 늘어서 있어 외진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무늬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니 중년여성을 상대로 하는 의상실과 자그마한 책 대여점이 보였다. 무늬는 ‘북파워’라고 적혀 있는 책 대여점 앞에 섰다. 평소에 내가 애용하는 큰길가의 체인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낡고 초라한 외관이었다. 무늬는 북파워의 쇼윈도를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너 돈 있냐.”

세상에 살다 살다 내 십육 년 인생에 처음으로 삥을 뜯기게 됐다. 그것도 나보다 키가 이십 센티는 작고 몸무게가 삼십 킬로는 덜 나가 보이는 동년배의 여자아이에게. 나는 반사적으로 돈이 한푼도 없다고 했고, 무늬는 또 거리가 떠나가라 웃으며 이게 다 널 위한 거라고 했다. 날 위한 갈취? 개가 웃다 토하는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지 말고 천원만 줘봐.”

나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천원은커녕 정말로 돈이 한푼도 없다고 대답했다. 무늬는 아무렇지 않게 내 바지 앞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지갑을 빼냈다(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북파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갑을 돌려달라고 외치며 무늬를 따라 들어갔다. 

무늬는 카운터 앞에 섰다. 숏컷의 중년여성이 누구보다도 무심한 표정으로 카운터 뒤에 앉아 있었다. 무늬는 내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아마도 북파워의 오너일) 그 여성에게 건네더니 내 이름으로 회원 등록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는 지갑을 내게 넘겨주며 말했다. 

“전번이랑 주소가 뭐니.”

“주소는 왜(니가 알아서 뭐하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

나는 지갑을 양손으로 받아든 채 고민했다. 설마 집까지 쳐들어오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부모님에게 내 비밀을 알린다는 식의 협박을 하려고?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집이 어딘지 절대 알려줄 수 없었다. 나는 길 건너 신세계아파트의 주소를 반사적으로 불렀다.

“어, 너 우리집 근처에 사네?”

무늬가 말했고, 나는 무늬가 쳐놓은 함정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숏컷의 여성은 내 말을 알아듣기는 했는지, 아주 빠른 속도로 타자를 치더니 만원이 적립되었다고 말했다. 아예 생으로 삥을 뜯으려는 작정은 아닌 건가? 도대체 무늬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무늬가 숏컷의 여성에게 말했다. 

“언니, 저번에 내가 여러 번 빌렸던 그거 좀 꺼내줘요.” 

아무리 봐도 언니보다는 아주머니나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적합할 것 같은 나이대의 여성인데 무늬는 그녀를 굳이 언니라고 불렀다. 다짜고짜 ‘그것’을 찾아달라고 했는데 오너는 곧장 카운터 옆의 서가 맨 위 칸으로 손을 뻗어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너는 생각보다 키와 손이 컸다. 무늬가 “얘 이름으로 빌려주세요”라고 말하자 오너는 역시나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스캐너로 한 권씩 만화책을 찍어나갔다.

“잔액은 구천원입니다.”

만화의 제목은 ‘호텔 아프리카’.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표지 일러스트를 보니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이것부터 읽어. 지금 너한테 큰 도움이 될 거야.”

나는 반강제로 책을 받아들고는, 또 대한민국의 주입식교육을 충실히 이수하고 있는 열여섯답게 순순히 가방 속에 책을 집어넣었다. 기왕에 내 돈 주고 빌린 것이니 읽기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무늬는 예약해놓은 게 있다며 예약 서가에 꽂힌 세 권의 만화책을 대여하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 걸어나갔다. 그녀를 따라나설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이무늬를 치켜세우거나 살살 약 올리는 등의 전략을 통해 그녀가 초콜릿 박스를 가져갔는지, 아니면 주인에게 제대로 전달됐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무늬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무늬는 나를 신경쓰지 않고 낯선 길을 따라 계속 걸었고, 나도 주변을 두리번대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시장 뒤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무늬가 갑자기 아파트 상가 뒤쪽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불규칙하게 놓인 에어컨 실외기와 LPG 가스통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그리고 교복 치마 주머니에서 얇은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는 에쎄 라이트였다. 니코틴 함량이 적다며 최근에 아빠가 건강을 생각해(?) 바꾼 담배였다. 무늬는 마치 90년대 초반 홍콩 누아르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담배 한 개비를 비스듬히 물더니 오른손으로 거듭 라이터 불을 댕겼다. 나는 불꽃이 일기 무섭게 일대에 가스 폭발이 일어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갑자기 무늬가 내게 외쳤다. 

“뭘 보고 있냐. 와서 바람 좀 막아봐라.” 

나는 또 무늬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양손을 동그랗게 말아 라이터를 감쌌다. 다행히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무늬의 담배에 불이 붙었다. 무늬는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잡은 채 하늘을 향해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기사식당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중년의 택시 기사와 같은 그녀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니 긴장됐던 마음은 어디 가고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얘는 도대체 어디서 담배를 배운 걸까. 

“왜 쪼개냐.”

“너 하는 짓이 웃겨서.”

“넌 담배 안 피우냐?”

“응.”

무늬가 담배를 몇 모금 빨아들이더니 이내 바닥에 버리고는 이 사이로 침을 뱉었다. 그리고 골목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떨어진 채 연기를 내뿜고 있는 담배를 발로 열심히 비볐다. 그리고 곧장 무늬의 뒤를 쫓았다. 마치 무늬가 어미라도 되는 듯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 병아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초콜릿 박스가 어디로 간 건지 파악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하며 무너진 자존심을 달랬다. 느릿느릿 팔자걸음으로 걷는 무늬의 뒤를 따르다보니 어느덧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오 분 정도 언덕을 올라가자 언덕배기에 단층의 주택과 상가들이 주르르 서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늬는 그중 평상이 놓여 있는 가게 앞에 섰다. 가게에 달린 오래된 철제 미닫이문에 ‘미루나무 상회’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물론 주변 어디에도 미루나무는 없었다. 무늬가 미루나무 상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민짜 술 담배 다 뚫리는 데로 유명하거든.”

“근데?”

“내 주변 애들, 언니들 할 것 없이 죄다 저기서 사는데 주인 할배가 나한테는 절대로 안 팔더라고. 보시다시피 내가 좀 동안이잖니. 근데 넌 아무리 봐도 민짜로는 안 보이잖아?”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남들이 이십 년 동안 클 몫을 다 커버렸다. 학교에서 내 별명 중 하나는 늑인, 즉 늑대 인간이었다. 이미 성인 평균에 근접한 키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구부정하게 다녔고, 체모의 양과 굵기도 성인의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표정이, 눈빛이 다른 십대와는 조금 달랐다. 비밀은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조숙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고 매일 밤 거울 앞에서 자기 위로를 하고는 했다). 이무늬는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에 유달리 마른 편이라 좋게 봐줘야 중학생이고, 얼핏 보면 초등학생 같았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분홍색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커다랗게 딸기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턱이 뾰족하고, 키가 작고, 숏컷을 한 딸기 캐릭터가 무늬와 꼭 닮아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무늬, 지갑이 그게 뭐야. 초딩이야?” 

무늬는 그런 내 반응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지갑에서 만원짜리 네 장을 꺼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저기 들어가서 이걸로 에쎄 라이트 두 보루 좀 사와.”

무늬는 보편의 일진들처럼 막무가내로 삥을 뜯을 생각은 아니고, 그저 간편한 중간 유통망(?) 정도로 나를 이용할 작정인 듯했다. 나는 내가 듣기에도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늬야, 내가 네 기호에 반대하는 건 아닌데…… 술 담배 하는 걸로 선악을 판단할 만큼 편협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이런 불법적인 부탁을 들어주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아. 지금 나도 교복을 입고 있기도 하고.”

“내가 보기보다 입이 꽤 무거운 편이다? 근데 계속 입이 무거우려면 우리 사이에 일종의 친밀감 같은 게 필요하지 않겠어?”

“글쎄 아까부터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나랑 친해지고 싶다면야 고맙지. 그런데 인간관계라는 게 말이야……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건 없어.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담배 사다주고, 뭐 그렇게 친하게 지내자는 거지. 내 말 못 알아듣겠냐?”  

내 십육 년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대로 이무늬의 담배 공급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인가.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렇다 할 협상을 하기에는 내가 쥐고 있는 카드가 너무 없었다. 일단 이무늬가 무슨 말을 떠들고 다닐지 몰랐고, 여자애들 사이에서 무늬의 파급력이나 신뢰도가 얼마나 되는지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그녀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었다. 확실한 건 무늬가 초콜릿을 만들고 편지를 쓴 사람이 나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 설사 내가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한다고 한들 무늬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내 인생이 완벽히 뒤집힐 수도 있었다.

“알겠어. 돈 이리 줘.” 

나는 돈을 받아들고 미루나무 상회의 미닫이문을 확 열었다. 삐걱이는 마찰음이 크게 울렸다. 어깨를 쫙 편 채 당당하게 걸어들어갔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생산된 것인지 종잡을 수조차 없는 빛바랜 과자와 라면이 선반에 빼곡했고 그 위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주인을 불러야 하는데 아무래도 교복 차림인 게 걸렸고, 태어나서 한 번도 담배를 사본 적이 없는지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얼마 안 돼 오른쪽 구석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창호지가 붙은 미닫이문이 열렸다. 성별과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쪼그라든 노인이 쪼그려앉은 채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뭐 줄까.”

나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에쎄 라이트 두 보루를 달라고 했다. 노인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천천히 방안으로 기어갔다. 한참 동안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고,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거의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서 노인이 포장지가 반쯤 뜯어진 에쎄 라이트 두 보루를 내밀었고, 나는 노인에게 만원 네 장을 건네고 도망치듯 가게 밖으로 나왔다. 노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 뒤통수를 향해 외쳤다. 

“문 닫고 가!”

나는 담배 두 보루를 무늬에게 안겼다. 무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방에 담배를 집어넣었다. 드디어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어졌다. (이무늬에게서 정보를 캐내겠다는 본연의 임무는 깡그리 잊어버린 채) 뒤돌아서 가려는데, 무늬가 다급히 나를 붙잡았다. 

“부탁할 게 하나 더 있어.”

“(아이씨 또) 뭔데?”

“앞으로 학원 끝나고 나랑 집까지 같이 가자.”

“왜?”

“글쎄…… 집도 같은 방향이고…… 심심하니까?”

심심하다고? 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매일 나를 개처럼 부릴 작정인 걸까? 학원에 처음 등록한 날 혜영이 내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너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무늬…… 우리 학교에서는 좀 유명한 편이야.” 관심이 가지 않아서 굳이 더 묻지는 않았지만…… 도대체 어떤 방면으로 유명하다는 것일까? 사실 그녀가 담배 몇백 갑을 피운다고 한들, 그 어떤 참혹한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한들, 내 비밀에 대해 입을 닫아주기만 한다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일단은 무늬의 캐릭터를 (그러니까 자신의 말대로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 파악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 이빨을 숨긴 채 꼬리를 흔들며 무늬의 곁을 맴돌아야겠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관찰하며 차근차근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약점을 잡아 목을 비틀어야겠다는 내 나름의 계산이 섰다. 그래, 해보자. 나는 결연하게 가방끈을 고쳐 잡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학원 끝나고 집까지 데려다달라는 거지? 같은 반인데 그 정도는 문제없지.”

“아니? 무슨 소리야. 밤거리도 위험한데 이 누나가 너희 집까지 데려다주마.”

내 거처를 노출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실랑이를 하다 결국 고전적인 갈등의 해결 방법인 가위바위보를 하게 되었고 세 번의 접전 끝에 내가 승리했다. 

미루나무 상회에서 큰길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지만 내리막길이라 비교적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큰길을 건너 신세계아파트 단지를 넘어서자 넓은 정원이 딸린 오래된 양옥들이 줄지어 있는 언덕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 언덕을 올라갔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겨드랑이가 땀에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무늬는 매일 다니는 길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체 체력이 강한 편인지 (담배를 피우는데도 불구하고) 숨 한 번 헐떡이지 않으며 잘도 걸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학원의 수학 선생이 아무래도 국어 선생과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느니, 생물 선생이 저녁 대신 식욕억제제를 먹는 것을 봤다느니,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를 혼자서 떠들어댔다. 그러다 갑자기 우뚝 섰다. 

“여기가 우리집이야.” 

숨을 가쁘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는데 동네에서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장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삼층은 되어 보이는 석조 저택이 보였다. 세련되거나 깔끔하지는 않지만 규모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구석이 있는 공간이었다. 마치 동굴의 입구처럼 생긴 검은 철문도 군데군데 칠이 벗어져 있었으나 내 키를 훌쩍 넘을 만큼 크고 무거워 보였다. 무늬가 철문 앞에 서서 도어 벨을 누르자, 새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알림음이 짧게 울리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문밖으로 튀어나와 무늬를 덮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나나.” 

무늬가 검은 그림자를 어루만졌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귀가 바짝 선 도베르만이었다. 내 키만한 도베르만의 이름이, 나나라니. 도대체 누구의 작명 솜씨일까.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개가 무늬의 얼굴을 정신없이 핥았다. 경미한 개 공포증을 앓고 있는 나는 나나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도망치기 위해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무늬가 그런 나를 보고는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진짜 입 무거운 편이니까.” 

“거듭 말하지만 네가 말하는 그 초콜릿과 나는 아무 상관도……”

“됐고,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묻자.”

“뭔데?”

“왜 하필 윤도야?”


왜 윤도냐고? 

무늬의 질문에 일순간에 굳어버린 나. 곧바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슨 소리야? 초콜릿 받은 사람이 윤도야?”라며 둘러댔다. 그리고 무늬가 대답하기 전에 잽싸게 뒤돌아섰다. 

언덕을 따라 걸어내려오며 생각했다. 

왜 윤도냐니……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윤도니까. 윤도여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