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해 지는 걸 보러 가요

예전에는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비밀번호 분실 대비용 질문을 고르고 그에 대한 답을 적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려동물의 이름이나 좋아하는 영화 제목 따위의, 본인이라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치트키를 설정해두라는 귀여운 요구였다. 질문과 답을 모두 맞히면 비밀번호를 새로 정할 수 있게 해줬다. 나는 질문 중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을 고르고 법정 스님의 수필 『무소유』를 적어 넣곤 했다. 문고본의 헤진 책등에 테이프를 덧발라가며 그야말로 닳도록 읽었다.


법정께서는 『어린 왕자』를 무척 좋아해 주위 사람들에게 서른 권도 넘게 선물하셨다고 한다. 한때 나는 스님 흉내를 내느라 『무소유』를 여러 권 사다가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그 숭고한 ‘연쇄 선물마’를 따라 하기에는 나의 인간관계가 턱없이 빈약했다. 책이라는 것은 선물하기가 은근히 까다로운 물건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자의 독서 취향이 있고,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책 좀 읽으라는 뜻이냐며 발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권은 선물할 데를 찾지 못해 내가 읽던 책 옆에 나란히 꽂아 두었다가, ‘무소유’를 이중으로 소유하는 게 영 머쓱해서 한 권만 남겨두었다.


어린 왕자는 해 지는 광경이 좋다고 했다. 나도 좋아한다. 특히 여름철 지루한 장마 끝의 노을을 사랑한다. 마치 솜사탕을 여기저기 헤쳐놓은 듯 색깔도 높이도 서로 다른 구름층이 여러 갈래로 휘몰아치다 갑자기 멈춘 듯한 하늘. 그 역동적인 하늘에 내려앉는 노을은 어찌나 붉고 또 어찌나 강렬한 황금색인지. 그렇게 황홀한 황혼은 태양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지구에서 태어난 나를 칭찬한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미국이 정오일 때 프랑스에서는 해가 지지, 단숨에 프랑스로 달려갈 수만 있다면 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불행히도 프랑스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러나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놓기만 하면 되었지. 그렇게만 하면 맘 내킬 때마다 해지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던 거야.


『어린 왕자』를 읽을 때면, 안타깝게도 나는 이 대목에서 집중력을 잃고 만다. 나도 법정 스님만큼이나 어린 왕자를 사랑하지만, 책 읽기를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어 다른 데를 봐야 한다. 문학의 범주에서 직업병의 영역으로 하릴없이 흘러가버리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서다. 그게 잘 되는 날은 숨을 크게 몇 번 쉰 다음 내용을 마저 읽고, 안 되는 날은 책을 덮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태양과 소행성과 어린 왕자의 개략도다. 천체와 관측자의 크기 및 거리는 실제 비례와 다름에 유의.


의자에 앉아 노을을 감상하고 있는 어린 왕자의 얼굴은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있다. 소행성은 어린 왕자의 뒤통수 방향으로 자전하고 있다. 소행성의 자전에 따라 어린 왕자가 앉아 있는 의자는 해로부터 멀어지는 중이고, 어린 왕자가 보기에 해가 지평선 아래로 서서히 내려간다. 만약 여기서 의자를 뒤로 물리면, 해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고 어두운 밤이 빠르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일몰을 한 번 더 보려면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해를 향해 다가가야 한다. 해가 지평선 위로 조금 올라올 때까지. 그런 다음 다시 의자에 앉아 해가 지는 광경을 감상하면 된다. 사실 그의 소행성은 아주 작아서, 반대쪽으로 움직이면 밤, 일출, 낮을 빠르게 거친 뒤 금세 다시 일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분위기는 좀 다르겠지만. 내가 어린 왕자라면 의자에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소행성이 자전하는 속도에 발을 맞추어, 지평선 위에 살짝 걸려 있는 해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노을 속으로. 더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어떤 번역본에서는 어린 왕자가 의자를 뒤로 물리지 않고 ‘당겨’ 앉는다. ‘옆으로 옮겨’ 앉는 어린 왕자도 있고,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의자를 ‘움직이는’ 어린 왕자도 있다. 영어판에서도, 일어판에서도, 어린 왕자가 의자를 움직이는 것은 몇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실 『어린 왕자』의 번역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의 쟁점이 알려져 있다. 우리 번역본의 경우, 70년대 비주류 외국어 텍스트의 번역 환경, 중역 과정에서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단어와 문장구조,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초기 번역본에 대한 존중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겠으나, 결론만 말하자면 프랑스어판의 어린 왕자는 ‘의자를 당겨’ 해 지는 것을 볼 뿐, 어느 쪽으로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이 의자를 움직이는 대신 해가 스스로 저물도록 명령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때도, 가로등 켜는 사람에게 ‘쉬고 싶을 땐 계속 걸어가면 된다’고 일러줄 때도 어린 왕자는 방향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생텍쥐페리가 지구를 누비며 대륙 간 항로를 개척하던 조종사였음을 상기할 때, 나는 그가 제대로 된 방향을 알았을 것으로 생각할 따름이다.


태양을 향해 걷거나 등지고 걷는 것은 적도에서의 얘기고, 고위도 지역에서라면 약간 옆을 바라봐야 하는데 ‘약간 옆’이란 방위각 몇 도일까, 소행성이 구형이 아니라 아령이나 팽이 모양이라면, 텀블링하는 소행성이라서 자전축이 자꾸 바뀐다면 언제 어디서 일몰을 볼 수 있을까 따위를 따지고 있노라면,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멋진 붉은 벽돌집”의 가격을 몰라 감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는 어른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린 왕자여, 그 집의 가격이 십만 프랑이라던데 유로로 바꾸면 얼마인지 궁금해하는 나를 용서해다오. 금 시세 대비 환율만 알려주면, 그거 하나만 계산해보고 책장에서 『무소유』를 다시 꺼내 읽겠다고 약속한다.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 두었다가 임이 오시는 날 굽이굽이 펴지 않아도 퍽 괜찮을 것 같다. 하루가 엄청나게 기니까 일몰도 오랫동안 볼 수 있다. 게다가 수성은 태양 가까이에 있어서, 해가 지구에서보다 두세 배 크게 보인다. 거대한 태양의 아래쪽 끝이 지평선에 닿을 때부터 위쪽 끝마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열여섯 시간. 지구에서는 불과 2분 남짓인 것을 생각해보면, 수성은 일몰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최고의 행성일지 모른다.


게으름뱅이는 아니지만 슬플 때면 해 지는 것을 보러 가는 어린 왕자에게 수성을 추천해야 할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해가 하루에 두 번 지는 명당이 있기 때문이다. 적도를 따라 펼쳐진 루거스 평원Lugus Plantia, 그 한쪽에 라트비아의 시인 라이니스Rajnis의 이름을 딴, 80킬로미터 크기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다. 크레이터 둘레의 언덕에 올라 일몰을 기다리면, 놀랍게도 해가 지는 듯하다가 다시 빼꼼 올라온다. 해가 서쪽에서 뜨다니! 태양은 한동안 가던 길을 되짚어 올라오다가 다시 원래 방향으로 순행한다. 두번째 일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재미있는 일은 일출 무렵에도 일어난다. 해가 동쪽에서 뜨다 말고 도로 졌다가 재차 떠오르는 것이다.


지구는 공전주기 1년에 비해 자전 주기 1일이 현저히 짧아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자전주기의 몫이다. 수성은 다르다. 공전주기 88일에 비해 자전주기 59일이 너무 길어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은 공전과 자전의 하모니에 의해 결정된다. 수성 어디에서나 두 번의 일출과 두 번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도가 결정한다. 서경 90도 혹은 동경 90도 근처가 명당이다. 여기서 멀어지면 태양이 역행하는 시점이 점차 바뀌어서, 하루 두 차례의 역행 중 한 번만 볼 수 있다. 경도 0도나 180도에 가까워지면 해가 오던 길을 잠시 되짚는 시점이 정오에 가까워진다. 이곳의 한낮은 그야말로 뜨겁다.


아침 알람을 끈 후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빈사 상태로 이부자리 안에서 괴로워할 때, 해가 두번째로 뜰 때까지 한숨 더 잘 수 있다면 그 잠은 얼마나 달콤할까? 수성의 시인들은 두 번의 일출과 두 번의 일몰에 대해 노래하겠지. 소설가들은 첫번째 일몰과 두번째 일몰 사이의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나쁜 마법사가 첫번째 일몰을 두번째 일몰로 착각해 엉뚱한 주문을 거는 바람에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되살아난 공주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까.


언젠가 해 지는 걸 보겠다고 충동적으로 관악산에 오른 적이 있다. 정상에서 멋진 노을을 보며 갖은 상념을 떨쳐버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려오다보니 사방이 캄캄해서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있는 곳이 등산로의 바위인지 마른 계곡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낙엽을 밟는 내 발소리가 나를 위협해 올 무렵, 두 개의 불빛이 보였다. 하산길에 내가 올라가는 걸 보셨다는 등산객 부부였다. 곧 어두워질 텐데 아무 장비도 없이 혼자 휘적휘적 산에 올라가는 나를 보시고 혹시나 하고 산 중턱에서 기다리셨다고 했다. 좌절한 젊은이가 잘못된 선택을 하러 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시 나타나줘서 고맙다고도 하셨다. 좌절한 게 아니라 그저 경솔한 것일 수도 있는데, 다른 길로 내려갔을 수도 있는데, “머지않은 장래에 사라져버릴 위험에 처해 있는 일시적인 존재”를 위해 어두운 산속에서 랜턴을 들고 기다려주다니. 나누어주신 랜턴을 들고 앞서가는 어른들의 발자취를 따라 산에서 내려오는 그 저녁은 참으로 따뜻했다.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 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가 슬플 때마다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