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안녕, 고리롱

인류는 언제부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을까? 고인돌에도 별자리가 새겨져 있고,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도 별이 함께 그려져 있다고 한다. 하긴, 별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원시 인류는 가로등도, 상점 간판의 불빛도,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매일 밤 보았을 테니까. 아니, 별이 쏟아질 듯해서 칠흑 같지 않은, 온통 블링블링한 밤하늘을 보았겠지. 노곤한 하루를 마치고 나면,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까. 우리처럼 ‘인류’가 되지 않고 조금 다른 진화의 길을 따른 영장류도 별을 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도 빼곡하게 들어찬 수많은 별로 눈부신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때가 있을까? 동물원 안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면, 조금 밝혀줄 수 있을까, 동굴 같은 사육장의 밤도, 그 안에 갇힌 삶도.

고리롱의 죽음을 기억한다. 지난 2011년, 서울대공원의 로랜드고릴라 하나가 사망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부모와 고향을 떠나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직 아기였던 시절 창경원으로 온 뒤 43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로랜드고릴라의 평균수명이 40년가량이라고 하니, 누군가는 고리롱이 장수한 끝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썩 괜찮은 마지막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종종 이 로랜드고릴라를 보러 갔다. 학교에서 서울대공원까지는 지척이었다.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생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밤 10시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던 시절이었다. 정규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조용한 둘레길을 살살 걸어가면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동물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평일 저녁의 동물원. 동물들은 이미 대부분 실내 사육장으로 옮겨진 뒤여서 흡사 텅 빈 듯 적막이 감돌았다. 내 발걸음 소리 뒤로 알 수 없는 동물의 길고 낮은 울음소리가 헛헛하게 퍼져나갔다.

전철로 40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원서를 낸 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아침 6시 21분 전철을 타야 0교시 시작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일 같은 전철에 타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는 3량 두번째 문 오른쪽 끝이었다. 반 아이들은 대부분 입학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고, 나처럼 쓸데없이 멀리서 온 극소수의 학생들은 그 틈을 파고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내 못난 성격을 통째로 바꿔 멋진 사람으로 탈바꿈할 절호의 기회인 줄 알았는데, 구체적인 실현 방법은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다. 6시 21분 전철을 놓치거나 졸다가 제때 내리지 못하고 아침부터 대공원역까지 갔다 온 날이면 담임선생님은 우리집 근처 고등학교들의 이름을 줄줄 읊어주었다. 인생에도 ‘문제은행’이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삶은 뻔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게 낯설었던 그 도시에서 아는 곳이라고는 어릴 적 가본 동물원뿐이었다. 전철을 타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곳.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유인원사였다. 침팬지, 오랑우탄,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원숭이, 그리고 나. 다른 관람객은 모두 빠져나가고 유인원만 가득한 실내 사육장에 들어서면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다윈이 말한 생명나무의 같은 가지에서 비교적 최근에 갈라져 각자 진화해온 종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자리. 나는 유리벽 밖에 꼼짝 않고 선 채로, 그들은 유리벽 안에서 부산스럽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소리를 질러대면서 서로를 응시하는 시공간.

그곳에 로랜드고릴라가 있었다. 녀석은 사육장을 당장이라도 깨부수고 뛰쳐나올 것처럼 미친듯이 돌진해 유리벽에 몸을 던지고, 영화 속 킹콩처럼 사육장 안을 폭주했다. 앉아 있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작은 공간 속을 거대한 고릴라가 하염없이 뛰고, 부딪히고, 달렸다. 녀석이 바로 내 눈앞에서 발악을 시작하면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투명한 장애물 정도는 가뿐하게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 같은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가 내게 달려들어 내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헤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 생생한 공포의 끝자락에는 우울이 묻어나왔다. 갈 곳이 있어도 갈 곳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던 고등학생처럼, 폭주하는 고릴라 역시 거기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인원사에 울려 퍼지던 기괴한 포효 소리, 그 큰 덩치로 온몸을 유리벽에 던질 때마다 강한 진동으로 전해지는 쿵쿵 쾅쾅 소리. 나는 그 앞에 조금 비켜서서, 동물과 동물원과 세상살이와, 공포와 불안과 분노와, 우울과 텅 빔과 쓸쓸함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얻고, 또 많은 생각을 비워냈다. 쓸쓸함과 무시무시함이 교차하던 저물녘의 유인원사는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나는 화려하고 밝은 동물원보다 고색창연하고 을씨년스러운 동물원을 좋아한다. 동물원은 쓸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인류원’에 들어가 있다면 그럴 것처럼.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 그런 사람이 나온다. 주인공 빌리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동물원에 갇힌다. 지구의 인간 서식처를 그대로 재현했지만 화장실만은 완전히 노출된 공간에 알몸으로 전시된 채로 먹고, 싸고, 씻는다. 수천의 트랄파마도어 관람객은 그의 몸을 관찰하고 그의 행동마다에 환호한다. 그들은 남성인 빌리와 합사시킬 여성 지구인을 하나 더 납치해 온다. 빌리는 인공 서식처에서 ‘짝짓기’에 성공하고, 동물원 안에서 아이가 나고 자란다. 동물원에 ‘전시된’ 동물을 한껏 가련하게 여기면서도 자꾸만 찾아가서 기꺼이 관람객이 되는 나는 트랄파마도어에서 온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랑꾼이다.

서울대공원에는 꼬마라는 이름의 말레이곰이 있다. 언젠가 탈출해 청계산을 누비고 돌아다니다 어렵게 되잡아 온 말레이 꼬마. 나는 그 녀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배에서 난 형제와 함께 엄마를 타고 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자기가 있는 곳이 동물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부산스럽고도 즐겁게 노느라 정신없는 꼬마를 보며, 아기란 저런 것이구나 했다. 매우 귀찮아하면서도 이따금 제 새끼들을 핥아주는 어미 곰을 보며 부모란 저런 것이구나 했다. 꼬마는 자기가 있는 곳이 동물원이라는 것을 인지해서 탈출했던 것일까? 대전 오월드에서 탈출했던 퓨마 뽀롱이는 분류상 ‘맹수’에 속한다는 이유로 발견 직후 사살되었다. 고리롱이 사육장 밖으로 나섰다면 어땠을까. 그는 세상을 한 번쯤은 들었다 놨겠지. 내 머릿속은 자유니까, 상상 속에서 그에게 자유를 주어본다.

창경원 시절에 한국에 와서 오래오래 살다 죽은 고리롱이 고릴라치고는 천수를 누렸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의 저물녘은 편치 않았다. 로랜드고릴라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더이상은 야생에서 데려올 수 없게 되자, 이들을 확보하고 있는 동물원이라면 어디나 번식에 관심을 가졌다. 서울대공원에서도 고리롱을 젊고 적극적인 암컷과 맺어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보양식을 해 먹이고 도움이 된다는 약을 먹이거나 다른 고릴라의 짝짓기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고리롱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에는 ‘결국 후손을 얻지 못한 채로 죽고 말았다’는 내용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강령이라도 내려온 것 같았다. 그가 우리나라 동물원 역사에 어떤 존재인지, 전 세계 동물원의 로랜드고릴라 역사에 있어서는 어떤 존재인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동물원에서 인기리에 ‘전시’된 개체로서 어떤 볼거리를 제공했는지를 조명하거나 그의 사망을 깊이 애도하는 기사는 드물게 읽혔다. 부고 기사 제목은 “‘야동 보는 고릴라’ 고리롱, 49세 노환 사망”이었다. 얄궂은 생이다.

다큐멘터리 속 고릴라를 마주할 때면, 고리롱이 고향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의 삶은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낮에는 그 우람한 몸매와 끝없는 용맹의 위엄을 떨치고, 밤에는 설핏 잠을 깨어 쏟아지는 별을 보았을까. 이따금씩 커다란 유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들어 별똥별이 지나간 찰나의 길을 따라 허공을 그어보았을까. 나는 그의 말년을 잠시 엿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진정 멋지고 상대에게 경외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최고의 수컷이었다. 어쩌면 하늘의 별이 되었을, 안녕, 고리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