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15 


1994년 7월 24일. 09:54:02. 

이만은 기억한다. 감기약을 사러 가는 길이었고, 그곳은 약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골목길이었다. 빈집이 많은 골목이었다. 집집마다 문 앞에 말라붙은 화분들이 있었고, 그 화분에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고,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들도 쌓여 있었다. 어디선가 고함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빈집이 많긴 해도 사람들이 사는 집도 여전히 있었으니까 어쩌면 TV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일요일이었다. 주말 아홉시 뉴스가 끝났을 시간이었고, 아마 스포츠 뉴스도 그때쯤에는 끝이 났을 것이다. 자취방에는 TV가 없었다. 연희는 주말연속극을 못 보게 되었다고 투덜댔었다. 그 드라마의 제목도 기억이 난다. 서울의 달. KBS에서 하던, 그가 살고 있는 동네만큼이나 가난한 달동네를 배경으로 한 주말연속극이었다. 사기꾼이 나오고, 다방 마담이 나오고, 껄렁거리는 건달이 나오는. 아무튼 그 자신의 모든 이웃들이 나오는 것 같던 드라마. 연희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한석규에게 반해 있었다. 호프집에서부터 계속 한석규 얘기만 했고, 그의 자취방에서는 더 했다. 이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공연히 남자 연예인 이야기를 하는 건 그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르는 체하고 싶어서일 뿐이라고. 연희는 그 와중에도 계속 코를 풀어대 어느새 티슈가 쓰레기통 바깥으로 넘칠 듯했다. 콘돔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었다.

감기약, 콘돔, 감기약, 콘돔, 감기약, 콘돔 콘돔 콘돔……

그는 노래하듯이, 춤을 추듯이 골목을 달려내려갔다. 골목의 외등 하나가 리듬을 맞추듯이 깜빡깜빡했다. 계단이 나타났고, 그는 달리던 속도를 잠깐 늦췄다. 계단이 거의 부서지기 직전이어서 전에도 한번 그곳에서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는 속도를 늦추면서, 그 한 발자국의 속도 때문에 혹시 약국이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하지 못하게 될까봐 조바심을 내면서 손목시계를 봤다.

09:54:02.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소리였다. 소리만 들었는데도 그 발걸음의 휘청거림이 분명히 느껴졌다. 

“그러지 마요.”

이만은 돌아섰다. 남자는 그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골목이 어두워서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만은 그 와중에도 생각했다. 감기약, 콘돔, 감기약, 콘돔……

“그러지 마요. 제발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술에 취했거나 무엇인가에 맛이 갔거나, 아무튼 정상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 그자를 무시하고 돌아서 뛰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은 그 순간을 놓쳤다. 느낌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제발’이라고 말하면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을 두고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체 무엇으로부터 달아나야 한단 말인가. 다가오는 남자는, 느낌은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시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TV 소리가 분명했다.

남자는 이제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두 걸음, 한 걸음이면 바로  코앞이었다. 이만이 본능적으로 벽 쪽으로 몸을 붙였고, 남자는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내 여자예요.”

이만이 몸을 돌렸다.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그리고 뛰려고 했다. 그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뭔가를 보았던 것이다. 뭔가, 그러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런데도 대단히 위협적인, 이해할 수 없도록 치명적인……


“내가 죽어가고 있어요.”

오래전, 최면 상태에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흐느껴 울었다.

“하느님 맙소사…… 그놈도 죽어가고 있어요.”

흐느낌이 점점 거세졌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죠!”

네번째의 칼, 혹은 다섯번째의 칼, 아니면 혹시 여섯번째의 칼…… 칼이 들어오는 느낌이 아니라 들어가던 느낌…… 하느님 맙소사……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1994년 7월 24일, 그리고 이만은 또 기억한다. 감기약을 사러 가는 길이었고, 그곳은 빈집이 많은 골목길이었다. 집집마다 문 앞에 말라붙은 화분들이 있었고, 그 화분에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고, 알 수 없는 것들이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들도 쌓여 있었다. 어디선가 고함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갑자기 문 하나가 벌컥 열리고 사람이 튀어나왔다. 좁은 골목길이었다. 달려내려오던 이만은 하마터면 정면으로 충돌을 할 뻔했다. 에이 씨발 개새끼, 뭐야. 기껏해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어쩌면 중학생일지도 모르는 아이가 문에서 튀어나오며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그 아이에게서인지, 골목 전체에서인지 몰랐다. 이만은 아이의 욕설에 반응하지 않았다. 피하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간신히 아이를 피했다. 아이는 화분에 쌓여 있던 비닐봉지들 사이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만을 노려봤다. 뭘, 보냐고, 개새꺄.

그때 이만이 보고 있던 건 그 아이가 아니었다. 골목 저 끝에서 한 남자가 휘청휘청 걸어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남자의 손에 들린 뭔가가 보였다. 분명히 뭔가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인 뭔가가. 남자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달려내려오기 시작했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아이가 멈칫했고, 이만은 벽 쪽으로 달라붙었다.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씨발, 개새꺄!”

남자가 악을 쓰고 있었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이 새끼야! 내 여자라고 했잖아아!”

아이가 거의 자빠질 듯이 남자를 피했다. 아이는 뒤로 넘어져 엉덩이만 끌어 남자를 피했다. 남자가 칼을 들고 돌진하는 상대는 그 아이가 아니었다. 이만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첫번째 칼이 등을 찔렀다. 그는 돌아서면서 그것을 막으려 했고, 두번째 칼이 그의 손바닥과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 세번째 칼이 그의 배를 찔렀다. 그리고 네번째 칼, 다섯번째 칼……


씨발, 씨발, 씨발…… 찌르지 말란 말이야. 찌르지 마.


칼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들어가는 느낌…… 이만은 울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칼자루를 손으로 잡은 채,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면서. 빈집의 남자아이가 골목 한가운데 주저앉은 채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1994년, 7월 24일. 그는 또 기억한다. 감기약을 사러 가는 길이었고, 그곳은 빈집이 많은 골목길이었다. 그 골목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특이한 발소리였고, 그는 그 소리의 주인공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는 멈춰 섰다. 그 와중에도 약국 문이 닫힐까봐 미친듯이 조바심이 났고, 그래서 손목시계를 먼저 봤다. 한마디쯤은 할 시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저기요.”

이만이 돌아서며 남자를 불렀다.

“그러지 말아요.”

남자는 멈춰 서지 않았다. 발걸음이 좀더 흐느적거려 속도가 약간 늦춰졌을 뿐이었다. 이만은 다시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이만은 또 말했다.

“꺼지라고!”

순간, 남자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마치 솟구치듯이. 그러니까 도약이라도 하듯이.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갑자기 빈집의 문이 열리고 아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이만은 그 아이와 충돌할 뻔했다. 씨발, 뭐야, 이 개새끼. 아이가 소리를 질렀고, 이만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남자가 어느새 이만의 몸 위에 있었다. 도약을 하듯이 달려온 남자가 순식간에 이만의 몸을 타고 앉아 있었다. 비명은 아이가 대신 질렀다. 등에 찔린 첫번째 칼. 그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으려고 했고, 두번째 칼이 그의 손바닥과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 세번째 칼이 그의 배를 찔렀다. 아니다.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말했지! 꺼지라고 했잖아! 내가 경고했잖아아아아!”

찔리는 칼이 아니라 찌르는 칼, 그것도 아주 깊숙이 찌르는 칼…… 아아, 하느님 맙소사…… 이만은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16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누군가가 묻는다면, 1994년 7월 24일 09:54:02에 이만은 다시는 그 골목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 길 말고도 약국으로 가는 길은 많았다. 옛날 동네는 마치 길과 길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골목길들이 많았다. 그는 어떤 골목으로 가든 몇 번만 방향을 틀면 약국이 있는 큰길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게 조바심을 내며 서둘지 않았어도 그는 약국 문이 닫히기 전에 약국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기약을 샀을 것이고, 물론 콘돔도 샀을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날은? 그다음날에도 그는 그 골목으로 가지 않고, 그 다음다음 날에도 그 골목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또 그 다음다음다음 날에도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 일은 오직 그날, 그러니까 19940724095402에만 일어날 일이었을까.



17


김주희의 집은 재개발지구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있었다. 역시 폐가들이 군데군데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래 지대만큼 험한 지경은 아니었다. 김주희의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은 한쪽이 축대와 면해 있어서 재개발지구와 시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기예요.”

김주희가 멈춰 섰다. 그녀의 집 앞이었고, 김주열이 발견된 폐가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기가 막히잖아요.”

김주희가 축대 아래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 저 집이 이렇게 잘 보여요. 마당까지 보이잖아요. 저기 파란 지붕 집, 저어기. 저기 묻혀 있었다는 거잖아요. 여기서 이렇게 잘 보이는 데에 말이에요.”

거기서 보이는 건 파란 지붕 집만은 아니었다. 재개발지구가 전부 다 내려다보였다. 그가 기억하는 모든 골목길들이 보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그 시절에 친구들과 숨이 넘어가도록 뛰어다녔던 골목길들. 괜히 아무 집이나 초인종을 누르고, 또 괜히 남의 집 대문을 부서져라 두드리고, 벽에 뜻도 모를 낙서를 하고, 또 괜히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던 그 시절. 

그리고 이 동네는 1994년에 자취방을 얻으러 돌아다닐 때 너무나 변한 것이 없어서 깜짝 놀랐던 바로 그 동네이기도 했다. 그 파란 지붕 집이 있는 골목에는 같은 반 친구가 사는 집이 있었는데, 그애 아버지의 눈이 사팔이었다. 80년대 초반, 아이들은 돌을 던지며 놀았고 그 돌을 짱돌이라 불렀다. 그즈음에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전경과 사복경찰을 피해 도망친 대학생들이 그들이 사는 동네, 그들이 놀고 있는 골목길로 뛰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친구 중의 한 명은 놀랍게도 공처럼 생긴 불발 최루탄을 주워오기도 했다. 자기 겉옷으로 둘둘 말아가지고 왔었는데, 어찌나 여러 번 말았는지 그 옷 속에 든 것이 사과만한 최루탄이 아니라 축구공이나 배구공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기억이 났다. 그애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마침내 그애의 겉옷 속에 들어 있던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그들 모두가 통곡을 하듯이 눈물 콧물을 쏟아냈다. 그랬음에도 그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전리품’, ‘놀라운 보물’이었다. 한강에서 보물섬을 찾고, 동네 뒷산에서 금광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은 거룩한 감동에 빠졌고, 그 놀라운 보물을 친구들 중 한 명의 집 화단에 묻었다. 냄새도 났고 위험했기 때문에 안전한 곳이 필요했으나, 또한 필요할 때마다 얼른 파내기 쉬운 곳이기도 해야 했다. 그들이 화단에다 무얼 묻었는지 궁금해하거나 수상하게 여긴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그 동네 어른들은 누구나 다 사는 게 바빴다. 애들이 뭘 하고 놀고,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따위는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은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컸다. 누구도 그런 환경을 비탄하지 않았고, 문제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스스로 쑥쑥 컸을 뿐이다. 아이들도 가끔은 죽었다. 반 친구 하나가 겨울방학 때 시골 친척집에 놀러가서 얼어 있는 연못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얼음이 깨져 죽었다고 했다. 누군가가 죽어도 수업은 계속되었고, 선생들은 출석부로 아이들의 머리를 때렸고, 집에 가다가 괜히 넘어져 무릎이 깨졌고, 이유도 없이 우르르 달려갔다가 우르르 달려왔고, 왜 웃는지도 모르는 채 배를 잡고 웃었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김주열도 그랬을 것이다. 김주희의 말에 의하면 김주열은 어려서부터 사고뭉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김주희는 말했다.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지방을 떠돌며 일을 했는데, 가끔씩 집에 오는 날에는 술만 마셨고 술을 마신 후에는 어김없이 주사를 부렸다. 김주열이 집에 안 들어오기 시작한 건 이미 중학생 때부터였다. 폐가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라 아무 폐가에나 들어가서 나쁜 친구들과 못된 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고. 담배는 초등학생 때부터 입에 댔고, 술을 마시고 본드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이미 중학생 때부터였다고 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이학년 때,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요.”

김주희가 말했다. 

“난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외롭지 않았겠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겠다…… 내가 절 찾아다니는 걸 알았을 테니까, 아주 버려진 것 같지는 않았겠다…… 생각하기 나름이잖아요. 그애가 저기서 이십 년이 넘게 날 좀 찾아줘, 찾아줘 하는데 내가 그걸 못 들었다고 생각하면……”

김주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 안 하려고요. 그애도 다 알았을 거라고. 매일 저기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면 내 마음 그애도 다 알았을 테니까요. 정말로 포기 안 했었거든요.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게 안 되는 거거든요. 그냥 사라져버렸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잊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어떨 때는, 제발 죽었다는 소식만이라도 알려줘, 그렇게 기도하기도 했거든요. 그만두고 싶어서요. 그래도 그만둬지지가 않는 거거든요.”

김주희가 또다시 말을 멈췄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길래 우는가 싶었으나 손을 떼어냈을 때 눈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주희는 미소를 띠었다. 

“안 울게 되더라고요. 찾게 되면, 그러니까 시체라도 찾게 되면 펑펑 울 거 같았는데, 정작 안 울게 되더라고요. 뭐랄까…… 안심이랄까. 끝을 낼 수가 없었는데, 이젠 정말 끝이구나. 그러니까 난…… 정말 정말 너무 끝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김주희는 이번에는 웃는 소리까지 냈다.

“못된 거죠, 나?”

“아닙니다.”

이만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가 곧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주희의 마음에 대해 자신이 알 수 있는 게 뭐가 있을 것인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끝을 내도 잘 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끝을 잘 내는 건지 모르겠네요. 여기 있으면 자꾸 그 생각만 들어서 일이라도 하러 가면 거기선 또 자꾸 들어가라 하네요. 그래서 여길 오면 또 그 생각이 나네. 어떻게 해야 이게 끝인가 싶네.”

그런 걸 누가 알겠는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끝이라는 건 언제 내야 하는 건지, 언제 어떻게 내야 잘 끝내는 건지, 그게 끝이 맞기나 한 건지…… 끝이라는 것에 잘 끝나고 못 끝나는 게 있기나 한 건지……

사라진 것을 찾아다닌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주희가 동생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동안, 그는 누군지도 알 수 없는 범인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사라진 연희를 찾아다녔다. 김주희처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김주희처럼 그 역시 끝나지 않는 이야기에 매달려 살았다. 매달고 산 것이 아니라 매달려 살았다. 마치 발목에 추가 달린 듯, 그의 인생 어느 한구석이 항상 기우뚱했다. 처음 개발했던 게임이 초대박을 치고 순식간에 천재와 부자가 동시에 되어버린 남자. 그후 다시는 그와 같은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첫번째 성공의 후광이 너무 커서 그후로도 줄곧 잘살 수 있었던 남자…… 말하자면, 성공한 남자……

그 성공한 남자는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 생의 매 순간이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완료형에 가까웠다. 칼에 찔렸다, 죽을 뻔했었다, 사라졌다, 성공했다…… 배부른 소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엄살을 떨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사는 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지루한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토록 오랜 세월 만에, 비로소 새로운 퀘스트가 열렸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업데이트였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의 등장. 김주열은 어떻게 죽은 것일까. 누가 죽인 것일까.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경고했잖아아아아!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밑으로 보이는 골목길 어디에선가. 그는 거기에 있었고, 김주열도 거기에 있었다. 



18


이만은 다시 dufma0724를 생각했다. 누구도 그에게 그런 메일을 보낼 사람이 없었다. 더군다나 0724라는 아이디까지 써가면서. 재개발지구에서 사체가 한 구 아니라 몇 구, 몇십 구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이만과 관련지어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메일은 분명히 왔고, 그것은 여전히 그의 메일함에 저장되어 있었다. 김주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이만은 핸드폰으로 다시 한번 그 메일을 확인했다.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된 후 난데없는 일들이 폭풍같이 몰아쳤다. 그 모든 것이 김주열의 사체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적어도 메일을 보낸 사람은, 그러니까 dufma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77세 강한경 역시. 교통사고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사고에서 우연한 일이 있다면, 강한경이 마지막 순간에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 반대가 아니라 말이다. 강한경은 그를 실수로 죽일 뻔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실수로 살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강한경을 만나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dufma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난이도가 높은 미션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왔다. 아주 특별한 아이템들이 필요한. 그러나 모든 게임은 어떻게든 풀리게 되어 있다. 퍼즐 게임이라면 그럴 것이다. 돈을 주고 힌트를 사든 아이템을 사든 풀다보면 풀리게는 되어 있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게임은 잘못 만들어진 게임이고, 제대로 된 게임이라면 풀려야만 하는 거니까. 그런 게 게임인 거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만은 곧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대단히 어려운 미션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는 달리 퍼즐은 첫번째 단계에서부터 풀렸다. 그는 당황했다. 뭐지? 왜 이렇게 쉬운 거지? 

그 메일은 처음 온 것이 아니었다. dufma가 또 있었다. rmgodufma. ‘그해여름’을 영자로 타이핑한 아이디였다. 0724는 붙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주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된 메일이었다. 그에게는 메일함을 정리하는 습관이 없었다. 가끔씩 불필요한 메일들을 일괄적으로 삭제하기는 했지만,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고 일관성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메일은 영구히 삭제되었고,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메일은 영구히 보관되기도 했다. rmgodufma는 그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무 이유 없이 보관이 된. 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dufma 중에서 유일하게 남겨진 것일지도 모르는. 

역시 첨부 파일만 붙어 있고 내용은 없는 메일이었다. 그 메일을 받았을 때는 십중팔구 그걸 그래픽디자인 관련 포트폴리오라고 여겼을 것이다. 회사 계정도 아니고 개인 메일 주소까지 알아내는 사람들의 능력은 때때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이력서와 함께 구구절절한 사연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예 소설책 한 권 분량의 게임 시나리오를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는 읽지 않았다. 첨부 파일을 열어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rmgodufma의 첨부 파일에는 캐릭터들이 담겨 있었다. 단순한 캐릭터들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아니, 지나치다기보다는 아예 작정을 한 듯한. 심하게 말한다면 막 컴퓨터를 배운 사람이 그래픽 툴을 이용해 쓱쓱 그린 것 같은. 그러나 분명히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그랬다. 거기엔 뭔가가 있었다. 단순함 이상의 뭔가가. 이만은 거의 숨까지 멈추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그 그림들을 들여다봤다. 시간이 흘렀다.

P의 게임. 친구 P가 만들었던, 제목조차 못 붙였던, P의 게임이 떠올랐다. 겨우 스물한 살에 혈구암으로 죽어버린 P의 유작이 된 게임. 친구들은 그를 이름 대신 이니셜로 불렀고 혹시 그가 만든 게임을 추억할 일이 있으면 P의 게임이라고 통칭했다. 이름을 부르면 그가 너무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 추억 중에는 P가 죽어가던 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P는 그 스스로 붙인 이니셜이었다. 애플에 자극받아 만든 그의 닉네임이 배, 즉 페어pear였다. 그의 성이 배씨이기도 했다. 

 유작이 된 P의 마지막 게임은 초기 단계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었다. 한 소년이 동굴 속에서 쫓기고 있다. 동굴 저멀리 어디선가 스며들어오는 한 줄기 빛. 그 빛을 향해 소년은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다. 동굴은 때로 가파르고, 때로 물에 잠겨 있고, 때로 날카로운 종유석들로 뒤덮여 있고, 때로는 온몸의 살갗이 다 찢어지도록 기어나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좁다. 그러므로 소년은 필사적으로, 피를 흘리며 달리고 있다. 동굴은 괴생물들로 우글거려서 때로는 무언가가 날카롭게 날아와 소년의 눈알을 파먹고, 때로는 물속에서 솟구쳐나와 소년의 발을 한입에 물어 삼킨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피를 흘리며, 기어가고 있다. 그래픽디자인은 P가 스스로 했다. 공들여서 디자인했지만, 그래봤자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생생하게 여겨지던 소년의 절규가 인상적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건 꽤나 무서운 게임이었다. 소년은 게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게임을 만든 P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게임의 키는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쫓겼고, 더 나쁜 것에 쫓겼고,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해졌다. P가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그 게임은 완성될 수 있었을까. P가 죽었을 때, 그들은 모두 P가 게임 속에 갇혀버렸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동굴 속에 갇혀버린 죽음,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공포. 그렇게, 게임 오버. 아니, 영원히 가닿을 수 없게 된 게임 오버. 

연희는 그 게임과 관련이 없었다. P를 만나본 적조차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가면서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희구나.

연희였다. 연희가 맞았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아니었다. 연희가 아니라면 누가 dufma0724 같은 아이디를 쓸 것인가. 몰랐던 것을 깨달은 게 아니라 확인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 단순한 캐릭터…… 그 표정들…… 그것은 그를 그려놓은 캐리커처였다. 1994년에, 연희가 휙휙 그려놓고는 한 번도 그에게 주지 않고 구겨버렸던.

그 밤 내내, 그는 컴퓨터 화면에 뜬 캐릭터의 얼굴을 바라봤다. 같은 캐릭터가 각각 다른 배경에 그려진 세 장의 그림이었다. 소년일까, 청년일까. 캐릭터는 뒤를 돌아보고 있기도 했고, 멍한 표정으로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배경은 사막 같기도 했고, 동굴 같기도 했고, 꿈속 같기도 했다. 명암으로만 보여지는 깜깜한 어둠 속, 캐릭터는 두 손을 얼굴 가까이 들어올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기도 했다. 사운드가 있다면 분명히 비명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림이었다.

캐릭터의 얼굴이 그와 닮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였다. 지극히 만화적인 캐릭터였으니까. 그때도 그랬었다. 연희가 그의 얼굴을 캐리커처로 그려서 보여줬을 때, 그는 떼를 쓰듯이 묻고 또 물었다. 왜 이게 나야? 왜 이게 난데? 왜 이게 나냐고? 지나치게 못생기게 그려진 캐리커처였다. 친구들 모두가 그걸 보고 웃음을 터뜨렸었다. 너 원래 이렇게 생겼어. 뭘 바래. 이 정도면 잘생긴 거야. 한마디씩 안 거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연희는 그의 캐리커처를 다시 그렸고, 다시 그릴 때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잘생겨지기는 했다. 그러나 눈은 항상 같았다. 소심한 눈,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눈, 혼자서만 살짝 웃고 있는 것 같은 눈…… 그는 속쌍꺼풀이 있었고, 그 속쌍꺼풀에 보일 듯 말 듯 점이 하나 있었다. 워낙 잘 안 보여서 어머니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점이었다. 어머니가 어느 날 너 눈에 뭐가 묻었니, 물었을 때 나 태어날 때 엄마가 묻혀놓은 거거든, 대답한 적도 있었다. 아, 맞다 점이 있었지.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었다. 연희가 몇번째인가 그렸던 그의 캐리커처에 그 점을 찍었을 때, 그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완전하게. 

그러나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캐릭터에서 자신을 발견한 건 그 점 때문이 아니었다. 캐릭터의 점은 너무나 미세하게 찍혀 있어서 점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소심한 눈,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눈, 혼자서만 살짝 웃고 있는 것 같은 눈…… 그것은 연희를 만나던 당시의 그의 눈이었다. 그는 수줍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수줍고 소심한데 느닷없이 과감한 행동을 할 때가 있어서 친구들을 놀래키곤 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말을 듣는 게 재미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을 놀래킬 만한 일을 찾아내는 데 골몰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을 것이다.

비명을 지르는 눈은 없었다. 적어도 그때 당시에는 그랬을 것이다. rmgodufma의 메일에 첨부된 그림에서 비명을 지르는 눈을 발견했을 때, 그가 놀란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 눈은 칼에 찔린 후의 것이었다. 칼에 찔린 후, 몇 년 동안이나 툭하면 거울 속에 나타났던 그의 눈. 그는 노트북 앞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집에서 가장 큰 거울이 있는 곳이었다. 욕실의 불을 전부 켜고, 그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림 속의 눈이 거기에 있었다. 비명을 질렀던 눈, 아니, 비명을 지르는 눈이었다.  그 rmgodufma은, 아니 dufma0724는 이 눈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19


정보는 대부분의 것을 해결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것’일 뿐이다. 정보가 실체에 가닿기 위해서는 여전히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도 핵심적인 무언가가.

그는 안찬기를 생각해냈다. 사실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그 이외에는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안찬기는 그의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였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칼에 찔렸을 때, 그리고 그로부터 육 년인가 칠 년쯤 후 또다른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첫 게임이 대박을 치고 얼마 후, 그 게임의 유저였던 고등학생 하나가 자살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만든 게임이 호응을 얻고, 그로 인해 회사까지 차리게 되고, 회사 이름을 달아 출시를 한 첫 게임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그렇게 꿈같은 시절이 흘러가던 무렵이었다. 매스컴에서는 고등학생의 자살 원인을 게임 중독으로 보도했고, 그후 엄청난 역풍이 몰아쳤다. 고등학생의 자살은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심지어는 게임 안에 자살 코드가 들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덕분에 매출액은 더 올랐지만 쏟아지는 비난은 거의 우박 같았다. 부모님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일을 대충 PC방 운영쯤으로, 어쨌거나 그 비슷한 일로만 알고 있었다.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카이스트 교수도 되었을 아이가 ‘그런 일’이나 하는 게 마음이 아프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사건’ 이후 그나마 자리를 잡고 사는 게 고마워서 아픈 마음, 부끄러운 마음이 잊혀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고등학생 아이가 자살을 했다고 하고, 그게 아들의 ‘PC방’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이 칼에 찔렸을 때처럼 자식을 보호하지 못한 부모로서의 무한한 고통과 죄의식에 빠져들었다. 그런 부모님을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부모님조차 그러했으니 세상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악화된 여론 때문에 그 게임의 메인 개발자였던 이만 역시 참고인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담당 형사가 바로 안찬기였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경찰서도 아닌 곳에서 몇 년 만에 또 담당으로 만나게 된 우연도 우연이었지만, 그 두 사건이 너무나 다른 종류의 사건이어서도 그랬다. 한 형사가 칼부림 사건을 담당하고 또 IT 관련 사건도 담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겼는데, 사실 그건 그의 생각이었을 뿐이고 그 사건들은 그런 것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발생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도 같았다.

안찬기는 이만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윽박지르고 조롱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가 칼에 찔린 피해자였음에도 그랬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래서?’였다. 그래서, 봤다는 거야, 못 봤다는 거야? 그래서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어쨌다고? 거참,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그래서, 뭐라고? 분노는 자신을 찌른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경찰들, 그중에서도 담당 형사였던 안찬기에게 남았다. 어떤 미친놈이 느닷없이 누군가를 칼로 찔러야 했다면 자신이 아니라 이 안찬기란 놈이어야 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생 자살 사건으로 인해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안찬기는 달랐다. 그는 친절했다. 그것도 무한히 친절했다. 그사이에 안찬기가 달려져서라기보다는 이만이 달라져서였을 것이다. 자살 사건으로 인해 게임이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그 게임에 돈을 쏟아붓다가 가정이 깨지고 파산까지 하는 정신 나간 놈들이 알려졌고, 그런 놈들의 돈으로 수익을 쌓아가는 게임의 매출 규모도 알려졌다. 그러므로 안찬기가 친절하게 대한 사람은 오래전에 칼에 찔렸던 청년이 아니라 이제 돈을 벌고 있는, 그것도 무지하게 많이 벌고 있는 한 젊은 사업가였을 것이다. 이만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그사이에 세상을 배웠다.

그랬음에도 당시 안찬기의 친절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참고인 조사는 수월하게 끝났다. 자살한 그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심각한 왕따를 당했다는, 그때까지는 매스컴에 보도도 되지 않고 있던 사실을 알려준 사람도 안찬기였다. 헤어지면서는 나중에 소주나 한잔 하자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정말로 몇 번인가 연락이 오기도 했었다. 이만은 만나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걸 다 잊고 살게 될 줄 알았다. 잊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언제나 상처를 덮는 건 그것보다 더 큰 상처였다. 고등학생의 자살 사건 역시 그랬다. 그 사건은 그전까지 심각하다고 믿었던 모든 일들을 덮어버렸다. 칼에 찔렸던 자국을 하루종일,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평생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더 큰 상처로 덮였던 자국이 아물자 다시 그 밑의 흔적이 드러났다. 칼에 찔린 상처는 생각보다도 훨씬 깊었다. 대충 찌르다가 주저한 흔적이 아니라 칼의 손잡이까지 다 찔러넣겠다는 듯이 있는 힘을 다 주어 찌른 상처였다. 그자는, 범인은, 그후 그 칼을 빼냈을까. 아니면 찌른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을까. 그래서 내 몸에 찔린 그 칼의 손잡이를 나 스스로 잡고 빼내야 했을까. 이만은 가끔 두 손바닥을 둥글게 모아 그 손잡이를 잡아보곤 했다. 기억 속에 없는 그 손잡이는, 그러나 여전히, 상처 속에 남아 있었다. 통증은 때때로 미친듯이 격렬했다. 그러고 나면 사는 게 미친듯이 재미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