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아름다움은 평등한가―1

1

 

〈베토벤 바이러스〉는 2008MBC에서 방영된 드라마로 한국에서는 클래식 음악과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최초로 다뤄 화제가 되었다. 배우 김명민이 연기한 주인공 강건우(강마에로 불린다)는 유럽 고전주의 시대의 패션과 몸짓에,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귀족주의적 풍모의 지휘자이지만, 실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인물이다. 한 에피소드에서 강마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거의 사망 직전의 상태로 어두운 골방에 누워 있을 때 그 곁에서 (환상 속의) 오케스트라를 봤다고 회고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전거와 책을 팔아 피아노를 배우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최고의 음악가가 된다.

 

극도로 빈곤한 환경에서 세계적인 마에스트로가 탄생하는 일은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겠지만, 병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를 혼자 돌보아야 하는 소년이 오케스트라라는 환상을 봤다는 설정은 터무니없지 않다. 무기력, 무질서, 혼란 속에서 우리는 질서정연하고, 우아하고, 모든 것이 조화로울 때 발휘되는 아름다움에 더 쉽게 끌릴 수 있지 않을까? 가난하고 아픈 어린 시절이 있었다면 떠올려보자. 너저분한 시골 동네. 시끌벅적한 사람들. 술에 취해 고함을 치는 동네 아저씨들. 뒤틀린 다리와 척추, 방 한구석에 둔 유리병에 오줌을 눠야 했던 질병의 시간. 그곳에는 여유가 넘치고, 정제된 음악이 흐르고, 세련되고, 모든 것이 적절하게 균형잡힌 일상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이런 환경 가운데서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일이 왜 가능한지,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업으로삼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빌리는 영국 변두리 도시의 탄광촌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난다. 춤추기를 즐기는 소년이지만, 정서적으로 투박하고 때로 폭력적이며, 술에 의존해 사는 형과 아버지가 있고, 돌봄이 필요한 아픈 할머니가 있다. 집은 비좁고 어지럽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빌리는 홀로 분투하다가, 어느 날 학교에서 여학생들이 받는 발레수업에 눈길이 머문다. 음악에 맞춰 팔다리를 우아하게 펼치고, 어깨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굳건하고 보수적으로 규칙을 지켜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담그는 일이 빌리를 매혹한다. 예측 불허하고 불규칙한 일상, 폭력과 갈등, 가난과 질병이 가져다주는 무력함 속에서 성장하던 빌리에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빌리는 결국 아버지의 도움으로 발레리노가 되지만, 영화는 빌리가 무대에서 한 마리의 백조로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순간, 그의 형과 아버지는 갱도로 이어진 지하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으로 끝난다.

 

 

2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고전주의적인 이해는 대칭, 균형, 조화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선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정확한 비례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생명체가 아름답다고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균형이 존재한다.”(『티마이오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같은 위대한 조형물을 언급할 것도 없다. 당장 유튜브에 마음을 편안하게’ ‘기분이 좋아지는등의 키워드로 검색하면, 두부나 케이크를 완벽한 비율로 나누거나 신발끈을 정갈하게 묶는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조화, 균형(비례), 대칭은 인간의 마음에 쾌적함과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몸도 예외가 아니다. 무용수의 신체는 좌우가 완전한 대칭에 가깝고, 팔과 다리, 목과 허리는 주위 공간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Vitruvian Man〉은 사람의 신체 비율을 기하학적으로 측정하여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구현한 소묘다. 이 표준적인 인간 신체는 똑바로 서서 두 다리를 벌리고 양팔을 쭉 뻗으면 하나의 원(혹은 사각형) 안에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가난과 질병은 대칭, 균형, 조화로운 삶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고 이것은 개인의 몸의 비대칭, 불균형, 부조화로 나타난다. 질병이나 사고로 한쪽 다리가 손상되면 반대쪽 다리를 더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고, 척추와 골반의 좌우대칭이 무너진다. 가난한 환경에서는 균형잡힌 식단을 준수하기 쉽지 않으며, 예측 불가능한 사건 사고에 자주 노출되므로 매일 일정한 루틴을 따르기 어렵다. 그 결과가 몸에 반영된다. 인간의 몸이 계급에 따라 평균 신장, 건강 상태가 달라지는 이유다. 그렇다면 정말 아름다움과도 관계가 있을까?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를테면 연예인들의) 얼굴 이미지를 반으로 접으면 거의 대칭을 이룬다.


건축물이나 무용작품, 한 개인의 얼굴 등이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정된 질서 속에서 적절한 자원(영양분)과 시간이 투여되어야 한다. 훌륭한 발레무용수가 되려면 우선 건강한몸으로 태어나서, 특별한 사고나 질병을 겪지 않고 자라야 하며(물론 위대한 무용수 중 누군가는 이런 일을 겪고도, 고난을 극복한다), 엄격한 자기 관리를 하면서 항상 정해진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영국 로열발레단 소속의 한국인(재일교포) 무용수 최유희의 하루를 담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매일매일 같은 루틴으로 살며, 최고 수준의 의료적 관리를 받는다. 아침 9시 연습실에서 몸을 푼 후의 짧은 인터뷰에서 최유희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원칙을 말한다.

 

“Eat well, sleep well, be healthy.”

 

잘 먹고, 잘 자고, 건강을 유지하면서반복적이고 정례적인 훈련 속에서, 15세기 이후 전해온 발레무용의 역사와 아름다움의 질서에 개인의 삶을 조화시키는 것. 단순한 이 한 문장은 훌륭한 무용수의 신체적 조건을 타고난 사람이, 더 나아가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은 다음을 요구한다. 개개인이 지닌 개성과 충동, 주변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예측 불허한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적절히 차단하면서, 거대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 완전한 조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오래도록 인류에게 공유되어온 아름다움의 이념 자체이며, 아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이다.

 

 

3

 

이른바 모더니즘 예술로 불리는 흐름은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왔던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에 반기를 들었다. 현대미술은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에게는 아름답기는커녕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베토벤의 음악은 비록 음악사와 음악학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얼마간의 적응 기간을 거치면 듣기에 좋지만,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진지하게 듣기는 훨씬 어렵다. 발레는 지금도 대표적인 무용 양식이지만, 무용이 곧 발레는 아니다. 현대무용은 바닥을 기고, ‘기괴하게움직이고, 대칭과 균형과 조화를 고의로 무시하는 어긋남을 표현한다(공옥진의 병신춤은 어떤가?). 수십 년을 잘 먹고, 잘 자고, 건강을 유지하면서특정 무용 분야에 요구되는 기술을 연마하고 그 기술이 가능한 신체를 만드는 데 인생 대부분을 쏟지 않더라도, 개인의 특별한 사정과 감정을 표현하는 무용공연도 자주 시도된다.

 

우리 시대가 여전히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에 집착했다면 데이비드 툴이나 극단 타이헨은 무대에 오르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데이비드 툴의 몸은 대칭적이고 균형이 잡혔기는커녕 하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상체는 목부터 척추까지 굽어 있다. 타이헨의 배우들은 뇌성마비로 팔과 다리의 근육이 강직되어 적절한타이밍에 적절한속도로 팔과 다리를 뻗지 못한다. 이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과 가장 거리가 멀다. 큰 원 안에서 똑바로설 수 없을 뿐 아니라 쭉 뻗을팔이나 다리도 없고, 있더라도 끝까지 펼쳐지지 않는다. 설령 펼쳐지더라도 그것이 몸을 둘러싼 원의 끝에 딱 맞게 닿지 않으며 팔은 원 밖으로 나가고 다리는 원주에 훨씬 못 미친다.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의 이상에 비추어 보면, 장애를 가진 몸은 언제나 미치지 못하는상태로 존재한다. 이 몸은 결여, 궁핍, 부재, 없음의 존재다. 이상적인 몸, 이상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몸은 언제나 궁핍이다(사실 이러한 아름다움의 관념하에서는 최고의 발레무용수조차 언제나 결여의 상태에 있다). 그렇다면 장애예술 혹은 장애무용은 무엇을 추구할까?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못하는 몸으로 도대체 무엇을 원할 수 있을까?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표준에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장애무용은 어떠한 표준 앞에서 궁핍함을 채우기 위해 춤을 추기보다는, 자기 안에 가득한 무엇인가를 넘치게한다. 다리가 없는 데이비드 툴이 다리가 있는 무용수처럼 움직이려 애쓴다면, 그는 궁핍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대신 실제의 그는 다리가 없는 자신의 존재를 오히려 더 넘치게 표현하려 바닥을 장악한다. 극단 타이헨은 중력에 맞서 하늘로 올라가려 하기보다(그때 이들은 결핍된 존재다) 자신의 강직된 팔다리로 땅의 중심으로 나아간다. 이는 본래 땅을 지향하는 자기 존재를 넘치게표현하려는 시도다.

 

 

4

 

데이비드 툴이 바닥에서 발레무용수와 함께 춤추는 유명한 영상인 〈The Cost of Living〉을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영상은 youtube.com에서 볼 수 있다. 이 연재를 읽고 계신 분들이 영상을 함께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2013년 함께 연극을 준비하던 친구가 이 영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당시 우리는 장애예술이 어떠한 사회적 의미가 있으며,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지 고민하던 차였다. 친구는 영상에 나온 데이비드 툴의 춤이, 자신이 본 장애인들의 퍼포먼스 가운데 가장 (새로운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말했다. 장애인의 공연 영상이 종종 장애인을 그저 불쌍하게 묘사하거나, 비장애인의 무대에서 소품처럼 소비하거나, 지나치게 엄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 영상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데이비드 툴의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전혀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특별한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내 몸을 보았을 뿐이었다. 내 눈에는 데이비드와 함께 춤추는 발레무용수의 대칭’ ‘균형’ ‘조화가 있는 신체만이 들어왔다. 나에게 데이비드의 몸은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조화롭지도 대칭적이지도 균형 있지도 않은데, 심지어 특별함마저 없다면, 그런 예술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약 내가 발레무용수의 몸을 가진 사람이었더라면, 오히려 데이비드의 몸짓에서 어떤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탄광촌에서 무질서와 혼란, 질병 가운데 살아가는 빌리에게 발레가 아니라 현대무용도 매력적일 수 있을까? 가난과 억압, 개인의 소외와 혼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은 역설적으로 가난과 억압, 개인의 소외와 혼란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히 질서 잡힌 삶과 몸을 지닌 무용수와 관객들에게나 매력적인 공연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고전주의적인 것이든 현대예술적인 것이든,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