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아름다움은 평등한가―2

1

 

왼편에는 김경한과 그의 친구들이 있다. 오른팔을 옆구리에 바짝 붙이고, 몸을 숙인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두 다리로 휠체어를 화려하게 통제하다가 바닥에 누워 양다리를 춤추듯 공중에서 휘젓는다. 그 모습은 그 자체로 멋지지만, 강직되고 굽은 팔로, 사회의 구석진 특수학교 기숙사 307호에서 십 대를 보내는 김경한을 떠올릴 때면 그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그곳은 어디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김경한의 화려한 발놀림은 오직 307호 안에서만 빛이 난다. 이제 오른쪽을 돌아본다. 이진성과 천명륜이 사는 세계가 있다. 곧은 자세로 가볍게 걷고, 달리고, 힘들이지 않고 말하는 아이들이 가득한 장소. 어떤 미래로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활기차고 개방된 곳이다.

 

두 세계의 비대칭성이 늘 괴로웠다. 왜 그가 만난 특수학교 세계와 일반학교 세계는 이토록 다른가. 이 좌우 비대칭은 곧바로 위아래의 비대칭으로 바뀌어 그의 몸에 투영되었다. 그의 상반신은 일반학교 세계에 속할 수 있었다. 그의 팔은 천명륜의 팔과 다르지 않으며, 그의 두뇌는 이진성의 두뇌와 다르지 않다. 반면 그의 하반신은 특수학교 세계에 속했다. 바닥을 지탱하지 못하는 다리. 굽고 휘어진 것. 구석진 곳에서 어디로도 연결되지 못하는 작고 사소한 것.

 

그의 몸은 사등분으로 찢길 것 같았다.

 

 

2

 

(공정하지 못한) 불평등은 왜 우리를 괴롭힐까. 우리는 어째서 누군가가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상황 앞에서 마음이 불편해질까. 불평등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불평등 자체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지적 능력, 면역력, 체력, 유머 감각, 부모의 재산과 학력에 있어 서로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에, 개개인이 평등한 삶의 기회를 분배받지 못한다는 점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물론 불평등이 모두 불편한 것은 아니다. ‘공정한불평등은 그 자체로 불편하기보다는 바람직해 보인다. 하루에 열두 시간씩 매일 발레연습실에서 땀을 흘린 무용수가 무대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매일 야식을 먹고 잠들어 연습에 지각하기 일쑤인 무용수가 덜 아름답게 춤춘다면, 이러한 불평등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정의가 실현된 것으로 느낀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하는 일레인 스캐리는 불평등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감각과 비례와 대칭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각이 서로 관련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비례적이고 대칭적인 사물이나 인간을 바라볼 때 편안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듯, 평등에 대한 감각 역시 비례성과 대칭성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서 온다는 것이다. 일찍이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 음악 소리, 케이크, 장미, 신체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표면을 사랑하는 건 쉽다. 이 모든 것들에서 영혼은 평등과 유사성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는다고 썼다(『음악론』). 공정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fairness’ 역시 유럽어에서 아름다운이나 어울리는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근거로 든다. 아름다움과 정의로움(공정한 평등)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유사한 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일견 놀라운 일이다.

 

보통은, 인간의 아름다움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일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열 명의 친구 가운데 아름다운 한 친구에게만 주목하면, 아홉 명의 친구들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홉 명의 친구가 가진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재능, 섬세한 취향, 도덕성은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개인의 개별성보다는 인간의 보편성에 주목한다. 우리가 오백 미터만 공중으로 뛰어올라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인간의 차이는 극히 하찮을 것이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으로도 그렇다. 천 년 후에 2020년을 되돌아본다고 생각해보라. 당신과 나의 차이는 거의 인식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를 개인으로 만드는 무수한 차이들, 성격, 취향, 키와 몸무게, 어떤 분야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재능은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으로 21세기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잠시 촛불처럼 반짝 불을 밝혔다 꺼져버린 흔적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평등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저 먼 기원으로 올라간다. 1776년 공표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self-evident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선언했다. 미국독립선언문뿐 아니라 세계인권선언과 우리나라 헌법 역시, 모든 인간이 원래부터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자연법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의 동등함은 현실에서 우리가 맺은 계약이나 합의가 아니며, 과학적 진실도 아니다. 모든 인간의 평등은 저 먼 곳에서부터 유래되어온, ‘자명한 원칙’(자연법)이 보장한다.

 

이 자명한 원칙은 물론 원칙일 뿐이어서 현실에서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들은 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펼친다. 각종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름다움과 무대에 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3

 

배리어프리는 객석에 앉아 좋은 예술작품을 볼 기회를 모두에게 평등하게 제공하는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곧 무대 자체를 열린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창작에 대한 열망을 표현할 기회를 갖기 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대는 (계단이 있어서 올라갈 수 없다는 문제 이외에도) 정상적이고 멋진 몸을 가진, 훈련된 사람들의 공간으로만 여겨졌다. 특히 무용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나이가 들거나, 장애가 있거나, 특별한 무용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현대무용은 다양한 몸과 삶의 이력을 지닌 사람들을 무대로 불러들였다. 여기에는 확실히 어떤 해방감이 있다. 이전까지 타인의 시선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했던 존재가, 무대 위에서 자신을 주목하라고 적극적으로 온몸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무대에 오른다는 건 관객의 시선을 받겠다는 선언이다.

 

무대가 중요한 이유는, 그간 (‘자연법에 기대) 먼 곳에서 바라보며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해온 거리 유지 전략을 과감히 버리고, 한 개인을 구체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준다는 데 있다. 무대에 올라간 배우나 무용수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든, 관객은 그의 몸과 표정, 목소리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라면, 극단 타이헨의 몸짓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일은 예의에 어긋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쳐다보지 않고, ‘거리를 두고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우리 각자가 어떤 몸을 하고 있는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해야 평등의 원리가 구현될 수 있다. 당신은 나보다 더 키가 크고, 잘생기고, 지능이 훨씬 높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차이를 인식하면 사람들은 왜 당신도 나도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똑같이 ‘1를 행사하고 ‘1씩 받는지 의심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정치적 평등을 위해 우리는 의도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감추어야 한다. 2020년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의와 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로의 몸이 지닌 차이를 무시하고 보편적으로 보유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주목하려 그 어느 때보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무대 위의 정의(평등)는 그 반대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아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 저 사람의 어떤 신체적·정신적 특성이 현재의 아우라를 형성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무대 위의 정의(평등)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초점에서 시작된다. 강렬한 초점을 유지하고 작은 탁월성들을 발견하는 훌륭한 비평가가 많은 사회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며, 결국 아름다움의 세계 자체를 더 평등하게 만든다.

 

2019년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의 공연을 준비했다. 이 공연에서 나는 열아홉 살의 그를 만나고 싶었다. 사등분될 위기에 처한 그의 몸을 아주 자세히, 강렬한 초점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나는 줄곧 그가 평등한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 ‘자연법에서 시작했다. 즉 먼 거리에서 그를 바라보면서, 그가 얼마나 나의 친구들과 동등한 인간인지를 의식했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김경한도, 그도, 천명륜도, 이진성도 몸, 지능, 관심사와 사회적 배경, 학력 등 무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등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뚫어지게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그는 영 마음이 불편했는지 공연 준비 기간 내내 냉소를 풍겼다. 나는 우리가 용기를 내어 작은 탁월함이라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면, 2020년의 관객은 1990대의 마을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를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