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만드는 거지 _슬릭

랑랑님, 노래는 어디서 탄생할까요? 이제 세상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노래가 존재하고 그중에 놀랍게도 제가 만든 노래도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그 질문은 저를 계속 따라다닙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제 서른 평생 노래의 기원을 찾아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그리고 이 질문보다 더 짜증나고 궁금한(혹은 짜증나게 궁금한) 질문이 또 있습니다. ‘좋은 노래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요?  뱉어놓고 보니 더욱 짜증이 솟구치네요. 그렇지만 짜증과 함께 답을 내어보고 싶다는 욕구 또한 퐁퐁 솟아납니다. 어느 날 더이상 이것이 궁금하지 않다면 저는 너무 슬퍼서 울어버릴 것 같아요.

 

이 짜증은 사실 타인으로부터 오는 짜증은 아닙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많고 많은 인터뷰를 하러 부지런히 다니는 저에게슬릭님에게 좋은 노래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잘 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자책에 가까운 짜증인 것 같네요. ‘좋은 노래는 어디서 탄생할까?’ ‘좋은 노래란 무엇일까?’ 같은 생각을 할 시간에 좋은 노래를 만들어보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일 텐데, 대부분의 시간을 그저, 더이상 이런 질문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하며 스스로에게 짜증만 내고 있으니까요. 김연아 선생님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연습 전 스트레칭을 하는 김연아 선생님에게  그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던 분이 무슨 생각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세요?”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김연아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답했죠. 지금 저에게 딱 필요한 마음가짐인 것 같습니다.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만드는 거지. 약간 변명 아닌 변명을 추가하자면, 뮤지션을 꿈꾸며 살아온 저는 완성된 음악을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는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요. 제가 노래를 발표하면 그 노래의 완성도라든지, 또 완성도라든지, 또 완성도라든지 같은 것에만 말을 얹는 경험을 너무 많이 해서 이렇게 슬프고 복잡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랑랑님께서는 처음 노래를 들었던 순간이 기억나시나요? 아무 노래가 아닌, 누군가 틀어놓은 노래 옆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노래를 재생해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던 경험이요. 물론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첫 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생 때 학원 차를 타고 가며 mp3 플레이어에 한 곡 한 곡 고심해서 모아둔 노래들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선물 받은 mp3 플레이어는 용량이 너무 작아서 서른 곡 정도만 채울 수 있었거든요. 어떤 노래를 넣을지, 또 지울지 참 오래 고민했는데, 요새는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얼 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랑님도 그런 기분을 느끼시는지요?

 

최근에 친구와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대체 무얼 들어야 할지, 내가 무슨 노래를 듣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고, 이제는 노래를 귀하게 여기지 못하게 되어 슬프다고요. 그래서 친구는 아직까지도 CD 플레이어로 노래를 듣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들으면 한 곡 한 곡 집중해서 들을 수 있고 더 잘 들린다고 해요. 저에게는 매우 신선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저는 곧장 CD 플레이어를 샀습니다. , 부정할 수 없이 소비의 시대입니다.

 

좋은 노래란 무엇일까요? 무해한 척하지만 속내가 다 보이는 질문 같습니다. 마음속에 이 물음이 떠오를 때 저는 그동안 좋아해온 노래를 다시 들으며 이 노래가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불순한 질문이 줄줄이 쫓아오는데요. 이 노래를 좋다고 생각해도 될까?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나만 이 노래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존경하는 A가 이 노래를 별로라고 하면 그때부턴 나도 이 노래를 달리 듣게 될까? 이렇게 좋은 노래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데 나는 왜 계속 좋은 노래를 만들려고 하는 걸까? 물론 어떤 좋은 노래 하나가 존재한다고 해서 다른 모든 노래가 그 하위에 놓이는 수직적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광경을 자꾸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말이 제 안에서 울릴 때는 이상하게도 제 목소리로 돌아오더라고요. 이런 뿌리 없는 잡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다보면 노래를 만드는 일이 더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게 될까봐 무서워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주 사적인 경험을 노래로 만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요약하면술김에 사랑고백했다가 차였다가 주제인 곡이지만(정말 최고로 사적이죠) 그 노래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기 때문에 노래 제목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가사를 적고 녹음하면서는 도대체 이 노래에 담긴 추함을 그 누가 품어줄 수 있을까’ ‘악기들의 조화와 믹싱으로 어떻게든 아름답게 포장해보자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제 노래들 중 공감대가 가장 넓게 형성된 노래가 되었습니다. 내용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요. 그후로 제 안에서 좋은 노래에 대한 정의가 많이 수정되었고, 심지어 그 과정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정말 저는 왜 이러는 걸까요.

 

그럼에도 세상에 좋은 노래가 참 많아서 다행이에요. 좋아하는 노래가 많아서 좋아요. 그 노래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 제각각인 것도 좋아요. 끝은 없고 시작점만 많은 잡생각으로 어지럽다가도 문득 좋은 노래를 들으며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의 머릿속, 마음, 손끝 같은 것들을 오래오래 상상합니다. 그러면 대형 마트를 몇 시간씩 돌다가 푹신한 소파에 앉을 때처럼 숨을 크게 내쉬게 돼요. 좋은 노래를 만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은 골백번도 깨지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마치 이런 것이 엄청 중요한 듯이 말했네요), 붙잡아둘 수도 없고 다른 언어로 치환할 수도 없는 그 순간순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오래 쌓이기를 바라요. 언젠가는 저도 그런 노래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새로 마련한 작업실에 흡음보드를 하나하나 붙이고 있답니다. (자꾸 모자라서 벌써 서른몇 개째 재주문하고 있어요. 큰일입니다.)

 

어려서부터 이동할 때는 꼭 노래를 들었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는 이어폰을 낄 수 없으니,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기라도 하고요. 가사를 외우고 있는 노래가 별로 없어 그 위주로 부르지만 가끔은 가사가 없는 노래도 부르고,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노래도 부릅니다. (실은 이미 존재할 수도 있겠네요.) 그럴 때는 어떤 영감이 떠올라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무작위의 멜로디와 리듬을 랜덤하게 이어가곤 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노래가 된 적은 없습니다. 저는 기록도 잘 하지 않아 그냥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말아요. 딱히 아쉬웠던 적도 없고요. 아참,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는 모든 노래 가사를 인생이또둑이로 바꿔 부르는 취미도 생겼습니다. 이를테면 동요 <학교종>을 이렇게 개사해서 부르는 거예요.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생이 생이 인생이 생생 인생이 둑이 둑이 또둑이 우리 또둑이

 

정말 질리지 않는 좋은 취미예요. 랑랑님도 한번 해보셔요. 노래가 입으로 나오기 전 후다닥 가사들을 두 글자 혹은 세 글자로 자르고 나름대로 부르기 쉬운 느낌을 찾아(‘둑이로 부를지 또둑으로 부를지 같은 것들) 불렀을 때 어감이 딱 떨어지면 기분이 아주 좋아집니다. 인생이랑 또둑이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발목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름대로 야무지게 진료확인서니 영수증 같은 것들을 스캔해 보험사에 보냈습니다. 발목의 같은 부위를 자꾸 다쳐서 보험사에서 의심할까봐(?) 걱정되네요. 저는 발목도 약하고 허리도 약하고 여기저기 골골대서 참 골치 아프네요. 며칠 전 포르투갈의 여성 화가 파울라 헤구에 대한 다큐멘터리 <파울라 헤구, 비밀과 이야기>를 보았는데요.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가 오랫동안 아팠던 배우자와의 사별로 느끼는 복잡한 감정 속에는 어떤 해방감 같은 것도 있었다고 하는 걸 들으며 괜히 뜨끔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살고 싶지는 않은데 멘탈이라도 꾹 붙잡고 있으려고요. 저는 이상하게 어디가 아프면 정신이 바짝 들더라고요. 랑랑님께서도 부디 아프지 않고 건강하시기를요. 랑랑님은 제게 좋은 사람이자, 좋은 노래이기도 하니까요.

 

 

20201222

슬릭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