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간혹 스텝이 꼬이는 남궁인 선생님께

남궁인 선생님과의 이인삼각은 대충 상상해봐도 너무 웃기는군요. 우리는 잘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키와 보폭이 차이 나는데다가 어깨동무를 하기에도 어색하고 허리에 팔을 두르기에도 어색한 사이니까요. 하지만 만약에라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제 안에서 뜨끈뜨끈한 승부욕이 발동할 게 분명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린 좋은 팀일 수도 있겠습니다. 둘 다 잘 뛰잖아요. 거만한 저는 선생님에게 무조건 제 발걸음에 맞춰 따라오라고 지시하겠죠. 친절한 선생님은 최대한 맞춰주실 테고요. 주도권을 5:5로 나누면 아름답고 공평하겠지만 이인삼각은 그런 게임이 아닙니다. 서로 너무 배려하면 죽도 밥도 안 되죠. 둘 중 한 사람이 치고 나가야 합니다. 더 용감한 사람의 맹렬한 기세를 덜 용감한 사람이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이인삼각의 필승 비결입니다. 우리 둘의 사회적 지위와 나이, 지정 성별, 체구, 연봉 등을 고려해봤을 때 선생님보다는 제가 치고 나가는 것이 밸런스가 맞습니다. 저의 기세를 그저 겸허히 따르십시오. 혹시나 진짜로 발목을 묶게 된다면 말입니다.

 

새삼스럽지만 <일간 이슬아>를 꾸준히 구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창간호 때부터 읽어주셨지요. 읽어주신 분들 덕분에 전업 작가가 되었습니다. 고단하지만 꿈만 같은 일이에요. 선생님 계신 쪽으로 큰절 올립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 사이에 또 오해가 있습니다. 

 

이번 <일간 이슬아>에서 ‘라떼는’을 봤다고 쓰셨지요. 정정하건대 저는 ‘라떼는’을 쓴 적이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라떼는’이 성립되지는 않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라떼는’의 핵심은 어떤 이가 자신보다 덜 오래 산 사람 앞에서 과거의 무용담 혹은 고생담을 늘어놓으며 상대방 인생의 경험치를 일면 축소하는 말하기 방식이잖아요. 경험의 양이나 길이로써 대화의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가 ‘라떼는’을 ‘라떼는’으로 만듭니다.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죠. 세상 모든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도움을 받아 탄생합니다. 언급하신 「세월과 노래」라는 글에서 저는 노래라는 게 얼마나 기억을 뒤죽박죽 휘젓고 연결시키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노래가 가진 막강한 힘을 설득하기 위해 2003년 팡팡 노래방과 2006년 여자 기숙사를 잠시 소환했고요. 그것을 ‘라떼는’ 서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 인생의 경험치를 다른 사람의 경험치와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글에서 ‘라떼는’의 함량은 0%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 글을 읽고 저에게 시전하시려던 것은 ‘라떼는’이 맞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대륙 횡단을 몇 차례 마치고 평생 방랑자나 여행작가로 살기를 꿈꾸고 있었는데……”라고 쓰셨지요. ‘이미’라는 단어가 이 문장을 완벽한 ‘라떼는’으로 만듭니다. 물론 저는 선생님의 대륙 횡단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방랑자를 꿈꾸는 모습은 좀 지루해서 안 궁금하지만 친구가 먼 곳에 다녀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으니까요. 언제든지 들려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제 글이 ‘라떼는’이었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모처럼 빛나는 인물들을 대거 등장시킨 아름다운 글이었는데 고작 ‘라떼는’으로 받아치시다니. 첫번째 편지에서의 불호령을 다시 한번 쩌렁쩌렁하게 반복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제 글을 제대로 읽으신 것 맞습니까? 숱한 오해로 점철된 독자편지와 항의메일을 날마다 받는 게 저의 일상이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까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의 이인삼각 동료이시잖아요. 선생님이 엉뚱한 스텝을 밟으면 제 스텝도 꼬이므로 확실히 정정해봅니다.  

 

적고 보니 약간 까칠했네요.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말이에요. 

 

잠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좋은 말도 나쁜 말도 잔뜩 들으며 연재를 이어가는 중인데요. 전업 작가란 꿈만 같은 일이지만 가끔은 정말 환장하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분명, 저보다 더 심한 말을 들으시겠죠. 인터넷이 아닌 현실의 응급실에서요. 어쩌면 멱살을 잡힌 적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울면서 항변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수없이 마주하셨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아찔해지고 숙연해집니다. 모든 직업이 고달프지요. 어떤 직업은 특히 더 고달프고요. 오늘도 고달프게 일하고 돌아오셨을 선생님께 친절과 기품을 잃지 않기 위해 잠시 눈을 붙이고 돌아오겠습니다. 

 

(두 시간 뒤)

 

안녕하세요. 아까보다 친절하고 기품 있는 이슬아입니다. 짧게라도 자고 일어나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피로가 풀리니 점점 기억나더군요. 선생님의 지난 편지에 아름다운 문장 또한 얼마나 많이 적혀 있었는지. 그렇게 좋은 편지에 까칠하게 응수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피곤할 때 어리석어지네요. 체력이 인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튼튼해지고 싶어요. 바쁠 때에도 상냥함을 잃지 않고 싶으니까요. 선생님처럼요. 

 

고작 ‘라떼는’을 가지고 따박따박 따졌지만 사실은 어른들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합니다. 어린이들의 말을 듣는 것만큼이나요. 또한 ‘라떼는’식의 말하기가 언제나 별로인 것도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박완서, 사노 요코, 토니 모리슨 등 유구한 세월을 온몸에 간직한 선생님들이 세상으로 돌아와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저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모든 말을 받아적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응급실 청소노동자 이순덕님의 이야기도 그랬고요. 물론 남궁인 선생님의 과거 이야기에서도 제가 배울 것들이 많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과거 속 남궁인 선생님은 도대체 왜 자꾸 불을 끈 채로 글을 쓰시는 겁니까? 

 

시력에 좋지 않습니다. 정서에도 딱히 좋을 것 같지는 않고요. 요즘도 불을 끄고 집필하신다면 그러지 마십시오. 은은한 주광등 조명을 권유해드립니다. 하지만 쇼핑에 무심하시죠. 구매를 미루실 게 분명합니다. 말 나온 김에 하나 사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남궁인 선생님을 생각하며 제가 고른 제품은 완벽한 구 모양의 보름달 조명입니다. 밝기 조절은 9단계에 걸쳐 가능하며 색깔 조절은 무려 열여섯 가지나 옵션이 있습니다. 글을 쓸 때에는 조명을 9만큼 밝게 켜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쓸 글이 없고 그저 슬프기만 한 날에도 아예 다 끄지 마시고 최소한 1만큼은 켜두세요. 밝기가 1인 것과 0인 것은 천지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았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지만 일요일 점심에 방영하는 <출발! 비디오 여행>만은 챙겨보는 편입니다. 29년째 방영중인 프로그램이죠. 엄청나게 재밌지는 않습니다. 엄청나게 탁월하지도 않죠. 그저 몹시 꾸준하고 평이하고 안정적인 즐거움을 줘요. 그런 즐거움을 기복 없이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압니다. 제가 사수하고 싶은 행복은 그런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요일 점심마다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는 시간 말이에요. 어떤 월화수목금토요일을 보냈건 간에 일요일에는 늦잠을 잔 뒤 천천히 아침을 먹고선 후식과 함께 텔레비전 앞으로 가고 싶습니다. 오래된 MC들의 싱거운 개그에도 웃음이 날 것입니다. 다 보고 나면 옆사람도 저도 스르륵 잠이 들겠죠. 꿈에선 여러 영화가 섞일 테고요. 낮잠에서 깬 뒤엔 부은 눈으로 서로에게 물어봅니다. 무슨 꿈 꿨냐고. 그럼 잠냄새를 폴폴 풍기며 각자 호소합니다. 방금 꾼 꿈이 얼마나 무섭거나 이상했는지. 다행히 그것은 모두 꿈입니다. 

 

저에게 <출발! 비디오 여행>은 이런 시간까지 포함된 무엇이에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서 점차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더 깊은 사랑을 느꼈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얼마든지 반복되어도 좋을 듯한 일요일 오후마다 그런 사랑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평생 같이 경험하며 평온하게 탐구해갈 일만 남아 있기를 저 역시 소망했습니다. 과연 그런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모두를 잃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결국 다 상실시켜버리는 게 시간이잖아요. 그 사실은 저를 허무하게 만든다기보다는 더욱 절절하게 만듭니다. 선생님 말대로 무엇이든 아쉬워집니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한 일요일 오후에 옆사람을 있는 힘껏 껴안아보는 것도 그래서겠죠. 내일이면 영영 헤어질 것처럼요. 

 

내일 헤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게 끝날 텐데요. 마지막엔 모두가 죽을 게 분명한 세상에서 최대한 많은 이를 늦게 죽도록 만드는 것이 남궁인 선생님의 일이군요. 선생님은 앞에 있는 환자가 죽지 않는 결과를 12년째 추구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환자의 의지와 정반대로 싸우면서요. 죽음이 뭔지 모르겠다고 하셨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죽어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나은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살고 싶었어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분명 죽으려 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때 진짜로 죽지는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이 편지를 쓰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저는 남궁인 선생님이 살아 있는 게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기다리고, 읽고선 따박따박 따지고, 그러다 사과하고, 하나의 글 안에서 여러 인격을 들키고, 놀리고, 조롱하고, 걱정하고, 선물하고, 소중한 이야기 중 하나를 꺼내놓고, 그에 따르는 슬픔도 덧붙이고, 금세 농담을 하고, 편지를 보내고, 또다시 답장을 기다립니다. 선생님이 살아 있어서요.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얼굴도 상상합니다. 한강에 13분간 잠겨 있었다가 생으로 돌아온 사람의 알 수 없는 표정 같은 것을요. 그의 13초와 13분과 13년을 헤아리다가 아득해집니다. 그 앞에 10초간 서 있다가 집으로 가는 선생님을 상상해도 아득해져요. 선생님은 저보다 9년 먼저 태어났는데 가끔은 90년 넘게 산 것처럼 지쳐 있습니다. 너무 많은 고통과 죽음을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아홉 살 때 할 법한 말실수를 내뱉고 후회하기도 하시지요. 제가 비슷한 이유로 후회하듯이요. 

 

그 모든 선생님의 일부를 목격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저에게 선생님은 아주 복잡한 의사 겸 작가이고 가능성의 수호자입니다. 선생님이 소생시키는 무수한 가능성, 아름답기도 끔찍하기도 아무렇지 않기도 한 그 모든 가능성은 결국 삶을 겪어낼 몸을 의미하잖아요. 몸을 살리는 일의 기술자라는 건 굉장합니다. 온갖 고통 속의 몸들을 살리고 돌아와서 자고 일어난 뒤 길고 수많은 글을 완성하는 것도 굉장하고요. 그런 선생님께 ‘라떼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쯤 듣고 또 들을 수 있다고 이제는 생각합니다.  


“이미 고갈되어버린 듯한 나에게서 무엇인가 계속 탄생하는 기쁨”은 선생님이야말로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서간문 연재를 시작한 이후 선생님 안에서 2주에 한 번씩 뭔가가 탄생되는 걸 봅니다.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언가입니다. 선생님은 전에 비해 힘이 빠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 더 훌륭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편지에서 지친 사람이 지니게 된 지혜를 읽습니다. 빛나는 시간을 모조리 탕진하셨다고 느끼는 건 스스로에 대한 오해입니다. 미중년 남궁인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이 부디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다가 낮잠에 들 수 있기를 소망하는 일요일입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운동의 강도를 높이고자 헬스장에 있을 법한 랙 기구를 집에 들였습니다. 본격적인 스쿼트와 턱걸이를 위해서입니다. 각종 글쓰기에도 끄떡없는 몸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당연하게도 매일 아침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절망의 옆구리와 뒤꽁무니를 보며 농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근력과 체력이 필요합니다. 선생님도 부디 러닝과 조기축구를 관두지 말고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용맹하게 뛰고 골도 많이 넣으십시오. 잘 먹고 잘 자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최대한 늦게 죽도록 말입니다.


삶에 시달리면서도 최고의 이야기를 모색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스꽝스러운 이인삼각도 힘닿는 대로 계속해봅시다.

 


2021년 2월 21일

마찬가지로 간혹 스텝이 꼬이는

이슬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