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며

국자씨에게

 

국자씨.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는 다 마쳤나요.

보통 편지는 인사와 소개, 제 안부로 운을 띄우는 게 정석이지만, 이번에는 작별부터 고할까 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점심 한 상을 뚝딱 차려내고 치운 다음 후식과 간식까지, 기나긴 시간 동안 식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이든 글이든 간명해야 한다지만, 글쎄요. 당신이 살아온 시간을 단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을까요. 애당초 듣거나 볼 생각이 없다면, 그 어떤 이야기도 소용없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미지가 꼭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먼저 멋지게 한 상을 차려주셨네요. 수완이 좋습니다. 저보다 훨씬 나으신데요.

예상보다 길어지긴 했죠. 국자씨, 당신의 이야기는 원래 중단편으로 끝날 예정이었잖아요. 물론 당신도 이야기하는 도중에 깜박하거나 그냥 넘어간 적도 있을 겁니다. 아마 더 길고 구구절절하겠죠. 먹는 속도가 빠른 사람이라면 당신이 말문을 떼기도 전에 수저를 내려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래요. 당신의 이야기를 읽고 더 써보라고 격려한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 자리에서 일어났을 겁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괜한 헛발질이라고, 그럴 시간이 있다면 좀더 어른스러운 글을 써보라며 일축했습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전 좀 이국자라는 사람을 잊고 싶었어요. 잊으려면 잊고 싶을 만큼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진득하게 앉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요. 간과한 점이 있다면, 제가 원체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국자씨, 당신은 저보다 훨씬 재밌는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당신 고집을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그러니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당신 덕분입니다.

감사하지만, 감히 국자씨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적지는 않겠어요. 그저 당신에게 더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탓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훗날 무탈하게 지내는 모습을 다른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면 기쁠 거예요. , 몇몇 사람은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말을 하기에는 국자씨에게 너무 많은 시련을 주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제가 당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신이라도 된다는 양 말하더군요. 제가 만일 그랬더라면, 당신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치워버렸을 겁니다.

여담인데 저는 손바닥에 땀이 나는 영화를 끝까지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영화관 한가운데에 앉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야 볼 수 있답니다.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 위해서 네 시간 동안 스스로 가둔 적도 있어요. 막바지에 통곡했는데, 뛰어난 작품성과 기나긴 러닝타임 중 무엇 때문인지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2년 동안은 영화관 문턱을 밟지도 못했네요.

대신 저는 끝까지 머무르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로 다짐했습니다. 지난 5개월 동안 제게 식탁 한 자리를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들려준 문장을 찾아 전전긍긍하는 제가 다소 이상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즐거웠거든요. 새치가 다섯 가닥 정도 생겼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뭘 바라고 그랬는지 물어보신다면 우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시작된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투모로우>라는 영화, 보신 적 있나요? 드라마만 보신다고 했나, 깜박했습니다. 하여튼 그 영화에서 애서가들을 경악하게 만든 장면이 하나 있었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로 인해 세계가 꽁꽁 얼어붙자 사람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 모닥불을 피웁니다. 모닥불에는 장작이 필요하죠. 짐작하셨겠지만, 그 장작은 책입니다. 뉴욕 공립 도서관은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니, 책이 얼마나 많겠어요. 제 친구는 그 귀한 장서들이 불쏘시개로 전락하는 장면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하더랍니다.

저 역시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죠. 이 책만은 지키겠다는 늙은 사서의 고집이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만 책을 던져넣을 때마다 불길에 일렁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결국 이야기는 어떻게든 제 소임을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는 누군가를 살아 있게 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길든 짧든 당신과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편, 읽는 사람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하니까요.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보거나 듣고 읽으면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설령 그로 인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들 당장은 모르는 일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들도 한때는 현재였고, 아득한 미래는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올 테니까요.

영 알쏭달쏭한 말만 했네요. 또 여담이지만, 혹자는 저더러 제 어머니도 국자씨처럼 요리에 재능이 있는지 물어봤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보다 요리를 잘하긴 하시지만, 당신처럼 매번 성공하지는 않아요. 저는 어릴 적 제 어머니가 자신의 실패작을 가차없이 개수대에 버리는 순간을 봤습니다. 그후로 저는 어머니가 만든 요리라면 한 입 먹자마자 맛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맛있긴 해요. 가끔 너무 매울 때도 있지만, 한바탕 울어버리는 핑계가 되기도 합니다.

제게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지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제가 제일 잘하는 요리는 연두부밥입니다. 연두부 한 모를 밥에 올리고 간장을 뿌린 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끝입니다. 김 가루나 치즈를 얹으면 맛있어요. 초능력자냐는 질문은 아직 못 받아봤습니다. 요리에는 젬병이지만, 제게도 남다른 능력이 한두 가지는 있어요. 우선 빵을 보면 맛이 있을지 없을지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제가 빵을 원체 좋아하는지라, 애석하게도 의사 선생님은 위궤양 환자에게는 적절치 않은 음식이라고 하더군요. , 어떤 능력이든 과하면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게임을 하면 최단 시간에 한 판을 끝내는 능력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조작 키를 눌렀는데, 단번에 캐릭터가 죽더라고요. 다음 스테이지는 어떨지 궁금하지만, 이 역시 능력에 따르는 대가입니다. 그다지 흥미로운 능력들은 아니네요. 심사위원들이 제 등급을 어떻게 매길지 궁금하진 않습니다.

국자씨, 미지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수없잖아요. 그저 저나 당신이나 미지가 잘살아가길 바랄 수밖에. 미지는 더 많은 학생을 만나면서 당신처럼 많은 이야기를 쌓아나갈 테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을 거예요. 밥이야 알아서 먹겠죠. 야무지니까 저처럼 식사 시간을 깜박하진 않을 겁니다. 저도 영 어수룩해서 걱정되시겠지만, 괜찮아요.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열심히 쓰고 있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함께한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게 어떨까요. 투고작 중 당신의 이야기를 발견한 편집부 여러분, 끝까지 함께해주신 이재현 편집자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내 죽 앉아 있었거나 잠깐 들른 독자분들 덕분에 기뻤어요. 그럼 이제 새로이 당신의 식탁에 앉거나 다시 찾아올 분들에게 미리 인사해볼까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함께 식탁에 앉아서 들어주세요. 국자씨의 이야기를.

 

2022 여름을 앞둔 봄에

정은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