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바다―리듬

리듬은 리듬 밖에서
리듬은 거처가 아니어서
리듬에 섞여들어간 나의 대부분이어  


걷는다. 멈춘다. 모래 위에서는 잘 멈추어지지 않는다. 약간의 비틀거림이 동반된다. 이 위태로운 중단이 시에서의 행갈이와 비슷하다고 너는 느낀다. 걸음은 문장처럼 의미처럼 얼마간 이어진다. 멈추지 않아야 하는 순간에 멈추거나 멈춰야 하는 순간에 멈추지 않으며 너는 멈춤을 대충 여기저기에 끼워넣는다. 리듬은 아무데나 있다. 리듬이 너를 데려간다. 공사장 드릴 소리가 해변의 아름다움을 끊어놓을 때 발생하는 춤을 본다. 그러나 보는 즉시 춤은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그 춤을 삼키며 스스로 낫는다. 걷는다. 멈춘다. 백사장은 지구의 맨살이므로 맨발로 밟는 편이 예의인 것 같다. 바다는 움직이는 피부처럼 밀려온다.


밀려오는 물과 물에 얹힌 빛들이 조용히 서로의 무게를 교환하는 장면 속에서 네 몸은 수평선과 수직으로 교차하는 어색한 직선의 모양으로 멈춘다. 물결에서 난반사된 빛들이 흘러다니는 얼굴은 부드러운 해변과 어울리지 않게 다소 경직되어 있다. 너는 풍경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풍경으로부터 박리되었다고 느낀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물 부딪치는 소리가 이곳으로 밀려오는 숱한 파도 중 어느 개체의 부서짐인지 알 수 없다. 듣고 있노라면 잊힌 꿈도 끌어낼 것 같은 원초적인 박자에 기꺼이 귀기울이면서도 너는 얕은 의기소침에 빠진다. 촉각을 배제한, 장면과 소리로만 경험되는 바다라면 이제 되었다고. 거대한 손에 의해 던져진 듯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맨몸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수영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부럽다고.


걷는다. 멈춘다. 네가 몸의 관성을 육지보다 바다를 향해 갖는 인간종의 일원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제나 너를 조금 풀죽게 했다. 달아오른 살갗을 적시고, 사방이 물인 장소에 머리를 담근 채 물 밖의 시공간이 옅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면. 물속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수면을 하나의 두터운 창으로 삼을 수 있다면. 물의 감촉, 물의 온도, 물의 흐름에 접속하고, 물의 움직임에 너의 움직임을 녹여볼 수 있다면. 물과 몸의 협력으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나 얕은 물도 북한산 꼭대기로 가는 길보다 험난하게 느껴지기에 너는 여전한 의기소침 속에서 바다를 보고 듣는다. 뒤섞이는 물과 빛을 헤치며 둥둥 떠 있는 몇 개의 머리들이 멀리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너는 네가 나고 자란 도시를 탓하고 싶다. 실외에서 가능한 물과의 접촉은 장마철 갈색으로 범람하는 골목의 빗물에 발등을 적시거나, 공원 분수대로부터 솟구쳐 흩뿌려지는 물의 조각들에 머리통을 내어주는 경험 정도가 전부인 일상 속에서 언제 어떻게 물을 배울 수 있었겠는가? 서울에서 물속과 가장 닮은 공간이라면 성당의 예배당일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들이 허공을 탁하게 메우는, 알아들을 수 없게 뭉개진 성가가 공명중인 장소. 그러나 너에게는 종교가 없다. 신의 가호가 몸을 감싸듯 빈틈없이 달라붙는 액체의 연한 집요함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 네가 한 번도 수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열 살 즈음 몇 달 정도 문화센터 수영장에 다닌 적이 있다. 그러나 배운 동작은 곧장 잊어버렸다. 몸으로 익힌 것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다는 세간의 속설이 무색하게, 일 년 뒤 다시 수영장을 찾았을 때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뜨지 않는 몸을 키만큼 물이 차 있는 수영장 내부에서 간수하느라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 많은 노력이 문제였을까? 물은 부자연스러운 의지에 대한 모종의 척력을 품고 있는 것일까? 몸에 힘을 빼면 떠오른다고 했는데 힘을 뺀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달 간의 수영 강습은 모두 꿈속의 일이었을까? 자유형을 마스터하고 배영으로 트랙의 끝에 도달하여 뿌듯했던 기억은 대체 뭐였을까? 수영의 방식은 너에게서 이상하리만큼 모조리 지워져 있었다.


처음 수영이 가능했던 순간이 생각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물위로 떠올랐던 것인가? 겁 없이 머리를 담그고 팔과 다리와 몸의 국소적인 근육들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 너는 이제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 호텔 수영장이나 목욕탕의 냉탕처럼 수영을 위해 마련된 물들, 혹은 계곡, 호수, 바다에 몇 번쯤 들어갔었다. 멀리서 볼 때 물은 땅과 같이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다가가 발을 담그면 물은 쉽게 열렸다. 너는 몇 번이고 떠 있어보려고 했다. 물의 열림을 방어해보려 했다. 매번 잘 되지 않았다. 너보다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너의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뛰어들어 아무렇지 않게 떠오르는 그곳에서 너는 기껏해야 허리 정도를 담근 채 서 있거나 모래 위에 앉아 있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곧잘 하는 일들이 너에게는 언제나 쉽지 않다는 감각. 언제나 실체적인 물보다 추상적인 하늘 쪽에 몸을 더 많이 내밀며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예감. 바다 앞에서 너의 리듬은 끊어졌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해갈하기 위해 도착한 장소에서 매번 다른 종류의 그리움과 일정 분량의 슬픔을 느껴야 했다. 배우면 되잖아. 네가 너의 아쉬움을 토로하자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조언하던 친구 앞에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어보았다. 다시 배운다고 한들 과연 수영이라는 행위가 네 뼈에 안착할 수 있을지 너는 의문이었다.


수영을 할 수 있다면, 물의 연속적인 흐름에 냉큼 끼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는 눈앞의 바다를 바라본다. 땅 위의 리듬과 다른 리듬을 몸에 새긴 뒤 그것을 바다 안에서 풀어낼 수 있다면. 몸의 리듬은 매 순간 변경되지만 언제나 육지의 시간에 탑승해 있다. 이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빗겨나 과거와 미래를 조금씩 앞뒤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장소라면…… 역시 물속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물은 이미지를 결집시키고 실체들을 용해하면서 탈객체화 작업, 동화 작업을 수행하는 상상력을 돕는다. 또한 물은 통사의 유형, 이미지들의 지속적인 연관, 이미지들의 감미로운 움직임을 가져다주어 대상들에 묶여 있는 몽상을 해방한다라고 적은 바 있다. 사실 너는 물에 대해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슐라르의 글은 네 인식의 테두리보다 언제나 약간 과잉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다. 다만 물을 닮은 감미로운 움직임이라면 네가 갖거나 하지 못하기에 더욱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물의 움직임 때문에 물은 언제나 변화하는 이미지가 된다. 차갑거나 뜨거운, 온도가 있는 공간인 동시에 방향과 모양을 가진 움직임으로서의 물. 부드러운 양수 속에서 너는 태어남을 예감했을까? 조만간 너를 둘러싼 모든 물의 자리에 단단한 땅과 만질 수 없는 공기가 들어차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었을까? 탄생 이전에는 총체적 공간이었던 물이 태어난 이후에는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먼 곳의 장소로 변화할 것임을, 네게 주어진 물의 단위가 느닷없이 변경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곳에서 시공간이란 너에게 어떤 감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을까?


걷는다. 멈춘다. 물은 허공을 향해 경쾌하게 증발하고 있다. 물이었던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리듬이 있다. 물은 지속된다. 멈춘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걸음의 리듬이 모래 위에 발자국으로 남는다. 악보처럼, 어느 구간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어느 구간에서는 좁은 간격을 통해 망설임의 순간을 드러내고 있다. 너는 뒤돌아 네가 서 있는 곳까지 이어진 발자국들을 본다. 네 걸음의 리듬이 기입된 모양을 확인한다. 탁상 달력의 칸칸이 나누어진 공간 위에 날들이 기입되듯이, 리듬이라는 것은 무척 막연하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는 그림이 될 때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여러 사람과 함께 걸었다고 해도 무엇이 누구의 발자국인지 알아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들의 리듬에 대해 너도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리듬은 언제나 내 것보다 쉽게 포착되기 때문에. 르페브르가 리듬에 대해 했던 멋진 말들이 있다. “리듬의 경우, 삶 속에 이미 주어진다. 리듬은 몸이 반응을 하는 순간 쉽게 포착된다. 그러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다. “리듬은 체험된 것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 말이 곧 리듬이 알려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해변은 너무 넓어서 바람이 불어오는 왼쪽을 과거, 바람이 떠나가는 오른쪽을 미래라고 불러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공간에 비유해본다. 비유가 한 대상을 다른 관념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하는 일이 아니라 두 대상 간의 유사성을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행위로 기능할 수 있다면. 두 개의 단어를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사물처럼 다루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한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 너의 일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닮음 속에 네가 서 있다. 해변의 왼편과 오른편으로 비유되고 있는 과거와 미래 역시 이곳에서는 서로 꽤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 번역가인 너의 영어 선생님은 말했다. 한국 시인들은 시에서 시제를 엄격하게 사용하지 않더라고요. 과거형과 현재형을 뒤섞어요. 그 말인즉슨 한국어에서 과거와 현재는 영어권에서처럼 엄격한 분류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한국인들은 과거 어쩌면 미래 역시도 현재와 매우 밀접하거나 잘 분리되지 않는 대상으로 감각한다는 것,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 그들은 하나까지는 아니지만 서로 붙어다니는 세 사람 같은 존재이고 한국어로 글쓰는 자는 어깨동무하고 있는 세 명의 윤곽을 멀리서, 아주 흐릿하게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구획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들의 그림자를 받아 적으면서도 각각의 이름을 적시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어의 느슨한 울타리가 시간을 익명의 언덕에 풀어버린다. 그림자 안쪽에서 나와 너와 그가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자유.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반죽해버리는 근사한 언어. 네가 한국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측면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어느 시를 퇴고하며 너는 문장의 시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 현재 시제로 교정하였는데, 그 순간 시가 죽어버리는 경험을 한 적 있다. 너는 황급히 원래의 문장으로 복원하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시는 조금 상처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이리저리 시제를 옮겨다니는 운동을 하며 여러 시간 속에 자유롭게 혼재하던 시는 그러지 말라는 꾸중을 들은 것처럼 주눅들어버렸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획의 엄격함이 통제하지 못하는 개별 시제만의 리듬과 뉘앙스가 존재하기에 그것을 가끔은 섞어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어로 시를 쓰는 모두가 감각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시라는 장르에서 시간은 이리저리 몸을 펼쳐볼 수 있는 공간을 누린다.


걷는다. 멈춘다. 이 글은 2인칭으로 쓰였다. 과거의 분량을 넓히면 너는 하나의 세포가 되었다가 세포 이전의 미립자로서 세계 어디에나 분포해 있다. 과거의 넓이 안에서 나는 더이상 나의 몸으로 엮여 있는 내가 아니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너나 그나 그들이 되어버리기에 글의 시간이 넓어질수록 인칭의 변화는 자연스럽다. 너의 죽음이 포함된 넓은 미래 역시 마찬가지로 너를 너로부터 벗어나 세계 곳곳에 녹아들게 한다. 그렇게 모든 나는 모든 너를 들여보낼 수 있을 만큼 열린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 모두와 한몸이라면, 지금 당장 나를 너라고 쓴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달라지는 것은 오직 쓰는 사람의 기분뿐이다. 그러나 기분은 사실 모든 것이며 그렇게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게 된다. 이 산뜻한 기분. 내가 사라지고 너만 남은 기쁨의 가장자리에서 이 글은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