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작가라는 환영

 

1. 폐허가 된 신전─작가의 자리

 

사람들은 늪지대의 밀림이 불경하게 침범해 있는 그 신전의 신을 더이상 숭배하지 않았다. 그 이방인은 신전의 기둥 아래에 몸을 뉘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원형의 폐허들」)

 

한 남자가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신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는 꿈을 꾸는 일을 한다. 다만 꿈꾸는 일만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픽션들』에 실려 있는 이 소설은, 그의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런 것처럼 짧고, 그의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런 것처럼 읽기가 쉽지 않다. 보르헤스는 어떤 대담에서 사유나 관념보다는 이미지나 우화에 더 끌린다고 말한 바 있다. 우화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자생적이지 않고 더 본질적인 다른 이야기를 가리킨다. 보다 실제적이고 더 근본적인 다른 의미를 향해 자기 몸을 내주는 이야기가 우화라면, 우화적 독서는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현실과 근본을 밝히는 넓은 의미의 은유적 해석의 과정일 것이다. 이 짧은 소설을 메타픽션으로, 그러니까 소설 창작의 비의를 ‘비의적으로’ 드러낸 소설로 읽을 수 있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오래전 화재가 있기 전까지 신전이었던 곳에 머문다. 이곳은 이제 그의 거처이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고, 그곳에 머물고, 마지막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왜 그곳일까? 그는 왜 그곳에 있을까? 그는 그곳이 ‘자신의 포기할 수 없는 목표에 아주 합당한 장소’라고 느낀다. 폐허가 된 신전이 그에게 아주 어울리는 장소라는 뜻이다. 우연히 그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소설에는 그가 ‘남쪽’에서 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 서쪽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곳으로 오는 길은 여럿일 것이다. 소설에는 그가 배를 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말을 타고 왔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의 고국이 강 위쪽의 거친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들 중의 하나라는 내용도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강 아래 마을들 중의 하나여도 상관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남쪽, 산기슭에서 왔지만 꼭 거기서 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배를 타고 왔지만, 꼭 배를 타고 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디서나 올 수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올 수 있다. 

 

작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작가 이전을 향하지 않는다. 작가 이전에 그는 누구였는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작가가 되었는가. 이런 질문은 호사가들의 흥밋거리를 위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물어야 하는 질문은 어디 있는가, 이다. 어디서 왔는가, 가 아니라 어디에 머무는가, 이다.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곳을 자기의 거처로 정했다. 아니, 그가 정한 것은 거처가 아니라 꿈꾸는 자의 신분이다. 그가 꿈꾸는 자로 살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그곳이 그의 자리로 정해졌을 것이다. 그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을 자기 자리로 정한 것은 그가 아니다. 온전히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동시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선택이기도 하다. 자유와 운명은 작가에게는 한 단어이다. 작가는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온전히 자유롭게 창작자가 되기로 결단한다. 그러나 그 결단은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뿐인 선택지이므로, 그는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선택할 능력이 없다. 그는 다른 곳에 갈 수 있는데도, 그곳에 오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곳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곳에 온 것은 온전한 그의 뜻이다. 그는 완전히 자유롭고 완전히 부자유하다. 

페루의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표현에 의하면, 몸안에 촌충을 가진 자는, 그 기생충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은 그 사람이다. 그러나 허기를 느끼게 하고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 사람 몸안의 기생충이다. 그 스스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지만 그것은 기생충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러나 사로잡혀서. 그는 사로잡힌 자이다. 

이 사람의 이런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순과 당착의 이상한 문장이 필요하다. ‘그는 그곳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곳에 왔다.’ 모든 작가들은 자발적으로 작가가 된다. 그런데 그의 그 자유로운 선택의 시간에 그가 작가 아닌 다른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꿈꾸는 일 말고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찾지 못한다면, 그가 다른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광대의 단식은 묘기가 아니다. 그는 먹고 싶은 음식이 없어서 먹지 않는다. (카프카, 「단식 광대」)

 

 자발적으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자유와 운명이 한 단어라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 자리로 정한 곳이 왜 그곳일까. 왜 폐허가 된 신전일까. 그는 왜 시장이나 광장이나 놀이공원이 아니라 그곳을 자기 자리로 정했을까. 

한때 이곳은 기도하고 예배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으나 이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신전은 장엄하고 거룩했고 신성한 빛을 발산했다. 신전을 장엄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신성하게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다. 건물의 높이나 화려함이 아니라 숭배하는 자들의 기도와 찬미이다. 신전이 왜 폐허가 되어 있는가는 물을 필요가 없다. 지은 지 오래되었다고 폐허가 되지는 않는다. 지금 이 신전이 폐허가 되어 있는 것은 숭배하는 자들의 기도와 찬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제가 사라지고 신도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사제가 사라지고 신도들이 찾지 않아 폐허가 된 신전을 이 꿈꾸는 자는 자기 자리로 삼았다. 이 꿈꾸는 자는 이 폐허를 꿈꾸기에 적당하다고 여겼다. 아니, 꿈꾸기에 대한 그의 열망이 그가 있을 자리를 정했다. 그 자리는 ‘자신의 포기할 수 없는 목적에 아주 합당한 장소’였다.

 

이 꿈꾸는 자가 시장이나 광장이나 놀이공원을 자기 자리로 택하지 않은 것은 그런 곳에서는 꿈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곳에는 그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은 이곳, 폐허가 된 신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신전이 아니고 폐허도 아니다. 폐허가 되지 않은 신전이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전이 아닌 폐허도 역시 이 사람을 끌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꿈꾸는 사람이고, 그런 곳에서만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다.

 

문학에 유사종교적 기능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종교의 거울이다.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어떤 사람들 눈에 보이는 문학의 광채는 거기서 말미암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2. 꿈꾸기─작가의 일

 

그는 한 인간을 꿈꾸고 싶었다. 그는 세심한 완벽함을 가지고 그를 꿈꿔 현실 속에 내놓고 싶었다. (……) 그가 하는 유일한 일은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뿐이었으므로(……)(「원형의 폐허들」)

 

폐허가 된 신전에 도착한 이 사람이 하는 일은 꿈꾸는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꿈꾸는 일에만 전념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무엇일까. 꿈은 현실 바깥의 세계이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이고 물화할 수 없는 세계이다. 꿈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리 실감나는 꿈도 꿈에서 깨면 사라진다. 사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 일이 중요한가? 이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사람이 이 일 말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사람이 하는 유일한 일인 꿈꾸기를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상하지 않다. 꿈꾸기가 일인가, 하는 질문은 그 안에 꿈의 실재적 역할과 기능,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한 회의를 감추고 있다. 보다 노골적으로 바꿔 말하면 이렇다. “꿈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만 놀고 이제 공부해라.” 이것은 도시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말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만 놀고 이제 일해라.” 나는 이 말을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어른들이 했던 말로 기억한다. 시골에서는, 적어도 내 유년기 때는, 근육의 구체적인 움직임이 동반된 육체의 수고가 아니면 ‘일’로 간주되지 않았다. 공부는 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독서는 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도시의 부모들이 그만 놀고 공부하라고 할 때 공부는 일이었다. 수고한다거나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공부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공부를 일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의 화법이다. 공부하는 내게 수고한다는 말을 해준 어른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쉬면서 공부하라는 말 대신 쉬었으니 이제 일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공부가 일이라는 생각을, 적어도 소년기에는 하지 못했다. 일은 실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이었다.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타나야 했다. 공부나 독서는 아무것도 나타나게 하지 못했다. 그것을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물며 꿈일 수 있을까?

 

‘꿈꾸다’라는 동사는 능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 동사가 가리키는 행위를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주체는 없다. 예컨대 ‘공부하다’나 ‘먹다’, 혹은 ‘노래하다’처럼 꿈꾸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행위를 한다. 먹는 사람은 무엇인가 먹는 행위를 하고 노래하는 사람은 어떤 노래인가를 부르는 행위를 한다. 공부하거나 먹거나 노래하는 사람은 그 행위의 주체다. 꿈꾸는 사람은 꿈꾸는 행위를 하는가. 꿈꾸는 행위를 할 수 있는가. 꿈꾸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능동태의 동사 ‘꿈꾸다’는 피동의 행위에 붙여진 이상한 단어이다. 꿈은 (능동적으로) 꾸는 것이 아니고 (피동적으로) ‘꾸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꾸는 꿈의 주체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나는 지난밤 이러저러한 꿈을 꿨다’라고 말할 수 없다. 꿈속의 서사나 꿈속의 인물들을 기획한 것이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지 왜 오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꿈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이나 그 인물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올 때 그저 속수무책으로 맞이할 뿐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는 철저하게 무력하다. 

우리가 꾸는 꿈이 그러하다면,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고,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주체적 행위가 아니라 우연적 현상에 불과하다면, 이런 질문이 따라붙는 것은 당연하다. 꿈꾸기를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은 현상이 아니라 행위에 붙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보르헤스의 소설 속 이 인물이 꿈꾸는 일을 했다는 진술은 부정확하지 않은가. 꿈꾸기가 그 사람의 유일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려면, 폐허가 된 신전에 자기 자리를 잡고서 꿈꾸는 것을 자기 일로 삼은 이 사람이 우연적 현상으로서의 꿈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꿈을, 주체가 되어 꾸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다. 그는 잠속으로 찾아오는 미지의 꿈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획하고 의도한 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꿈속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말의 뜻 그대로 그는 꿈을 꾼다. 꿈을 꾸는 행위를 한다. 꿈꾸기는 그의 치열한 행동이고 엄숙한 노동이다. 그의 일이다. 그가 꿈을 통해 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을 꿈꿔 현실 속에 내놓는 것이다. 

“그는 한 인간을 꿈꾸고 싶었다. 그는 세심한 완벽함을 가지고 그를 꿈꿔 현실 속에 내놓고 싶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사라져버리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진짜 사람을 탄생시켜 현실 세계 속으로 내보내는 것이 그가 꿈을 통해 하려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육체를 가진 인간의 탄생. 그래서 그의 꿈꾸기는,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냉장고를 만드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 못지않게, 어쩌면 그런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된다. 실용주의자들 눈에는 무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꿈꾸기를 통해 이제까지 세상에 없었던 진짜 생명체가 탄생하니까. 있던 것들의 단순 반복에 대응하는 새로움의 출현, 생산에 대응하는 창조. 이 일이 만만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필사적일 수밖에. 그러니까 치열할 수밖에. 이 마술적 계획이 그의 영혼 전체를 탈진시켜놓았다고 보르헤스는 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 꿈꾸는 자가 원한 것은 한 사람을 꿈꿔 꿈 밖의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다. 그의 꿈꾸기는 공상의 작업이 아니라 생명을 출산하는 과정이다. 그는 꿈꾸는 것 말고는 하는 것이 없지만 그 유일한 일을 통해 위대해진다. 그는 꿈꾸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꿈꾸지만, 꿈을 꿈으로써 숭고해진다.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숭고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숭고하다. 큰일을 한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숭고한 일을 한 사람이 위대하다. 창조야말로 위대한 일이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숭고하다. 창조야말로 숭고한 일이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위대하다. 그의 꿈꾸기의 결실인 생명이 그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증언한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꿈꾸는 자들에 의해 세상에 나타났다. 자동차와 텔레비전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이 있기 전에 누군가의 꿈속에 있었다. 약자를 보호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상이 누군가의 꿈속에 있었다. 그 꿈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동차도 텔레비전도 없이, 약자와 이웃에 대한 배려 없이 약육강식의 본능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많은 것들이 누군가 꿈꿔서 내놓은 것들이다. 지금 누군가 꿈꾸고 있는 것을 미래의 사람들이 누릴 것이다. 당장 써먹을 수 없다고 꿈꾸기를 포기하면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없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생산하는 데에만 가치를 두면 미래는 오지 않는다. 현재와 다르지 않은 미래를 미래라고 할 수 없다. 미래는 누군가의 꿈속에서 꾸어지는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은 그때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인물, 한 세계가 태어난다.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리 잠자’와 ‘K’를 탄생시켰다. 「변신」과 「선고」의 세계를 세상에 내보냈다. 알베르 카뮈는 ‘뫼르소’와 『이방인』을,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죄와 벌』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들과 그들이 제시하는 사상과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얼마나 생생하고 사실적이고 압도적인가. 어떤 인물이 그들보다 실제적이고, 어떤 세계가 그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만큼 사실적이고 압도적일 수 있는가. 그들과 그들의 세계를 허구라고, 실체가 없다고, 그저 책 속에 있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깔볼 수 있는가. 이 인물들과 이 사상들과 이 세계들이 그냥 태어났겠는가. 그럴 수 없다. 보르헤스의 소설 속 꿈꾸는 사람이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생명을 가진 참 인간과 사상, 의미 있는 세계를 창조해서 이 세상에 내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직 그것만이 그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한다. 꿈꾸는 것은 그가 필사적으로 해야 할 그의 일, 과업, 루터에 의하면 소명(beruf)이다. 

 

 

3. 불의 신─창작의 영감

 

그는 그 미지의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 이 여러 형상을 가진 신은 자신의 이름이 지상의 언어로 말하면 ‘불’이고, 한때는 사람들이 이 원형의 신전에서(그리고 똑같은 다른 신전들에서) 자신에게 제물과 제사를 드렸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신은 마법을 써 그가 꿈꾸고 있는 영령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겠으며……. (「원형의 폐허들」)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과 수차례의 반복된 실패와 거듭된 시도 끝에 마침내 이 꿈꾸는 남자는 자기가 그렇게 원하던 그 일, 한 사람을 꿈꿔서 세상에 내보내는 일에 성공한다. 이 성공은 그의 성공이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많은 시간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고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그의 성공이 아니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람을 ‘꿈 밖으로’ 태어나게 할 수 없었다.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그는 신의 힘을 빌려야 했다. “땅과 강의 신들에게 탄원을 끝낸 그는 호랑이이기도 하고 말이기도 한 그 석상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고, 그 미지의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불의 신은 그가 꿈꾸고 있는 형상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생명은 (꿈꾸는) 사람의 수고만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사람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흙으로 모양을 빚는다고 인간이 되지 않는다. 흙으로 빚어진 형상에 생기를 불어넣자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꿈을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는 작업에 불의 신의 생기가 필요했다. 창작에 영감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감의 시간은, 보르헤스의 이 소설에 의지해서 유추하자면, 광범위하게 유포된 상식적인 인식과는 달리 처음이 아니라 나중이다.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초월자인 신의,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창작자의 부단하고 필사적인 노력과 시도 다음에 왔다고 말한다. 작품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게 하는 것이 영감이다. 창작의 실마리가 아니라 매듭이다. 고민하고 애쓰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창작자의 작업실로 찾아와 한 세계를 완성하게 하는 것이 영감이다. 용 그림의 눈동자는 마지막에 찍힌다. 신은 흙으로 만들어진 형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 역은 아니다. 창작자의 고민과 수고의 산물인 흙의 형상이 있어야 신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영감에 의지해서 자동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지난한 수고의 과정 속으로 영감이, 은총처럼 임한다.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이라는 말을 한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이다. 그는 프랑스 낭만파 시인 라마르틴의 예를 들어 이 문장의 뜻을 설명했다. 라마르틴은 어느 날 숲길을 거닐고 있을 때 한 편의 시가 완성된 형태로 섬광처럼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 시를 그대로 옮겨 적기만 했다고, 자기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재에서 수없이 고쳐 쓴 방대한 분량의 원고뭉치가 발견되었다. 작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관념,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택,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신의 영감에 의해 위대한 작가와 작품이 탄생한다는 낭만적인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라고 할 것이다. 

 

영감이 창작자의 의지나 수고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임하는 신적 자동기술이 아니라는 말은,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 하강하는 계시가 아니라는 뜻이다. 흔히 떠올리는 상투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압도적으로 ‘하강하는’ 신적 권능이 아니라 창작자 개인의 노고와 인내의 심연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어떤 기운이다. 우연한 강림이 아니라 필연적인 끌어올림이다.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의 잠 속으로 그냥 이유 없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애쓰고 분투하는 창작자의 꿈 속으로 필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다. 들어와서 그 수고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린다. 불러일으킨다. 

성경만이 아니라 모든 위대한 작품은 성령이 쓴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했다. 이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감에 대한 이런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사야와 다윗과 마태와 바울, 이 인간 저자들에 의해 쓰인 각기 다른 책들이 어떻게 성경, 하나님의 책으로 불릴 수 있는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참된 생명을 탄생시켜 세상 속으로 내보내기 위해 애쓰고 분투하는 이사야와 다윗과 마태와 바울의 필사적인 꿈속으로 성령이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그들의 수고로 만든 작품에 성령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았겠는가. 

위대한 책은 신의 입김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모든 위대한 책은 성령이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신은 작가의 열정과 노고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영감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날 것. 영감을 부정하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 것. 왜곡이나 악용은 더욱 삼갈 것. 모독하지 말 것. 다만 필사적으로 ‘꿈꿀’ 것. 영감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듯, 그러니 바라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애쓰고, 애쓰면서 기다릴 것. 초대할 것. 애씀이 초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것. 그조차 알지 말 것. 영감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말 것.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4. 불에 타지 않는 사람─불멸에 대하여

 

  그는 불길의 날개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불길은 그의 살갗 속을 파고들지 못했다. 불길은 그를 할퀴고, 그를 집어삼켰지만 그는 불의 열기를 느끼지 못했고, 타지도 않았다.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원형의 폐허들」, 100쪽)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어느 날 우리의 주인공은 ‘북쪽 신전’에 살고 있다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불 속을 걸어도 타지 않는다는 초인적인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그 사람이 자기가 꿈을 꾸어 세상에 내보낸 아들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불의 신의 도움을 받아 태어난 그 아들은 불에 타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신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 중 단지 ‘불’만이 자신의 아들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단순히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으면 어쩌나 고민한다.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불의 신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고, 그러므로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듣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탄생시킨 그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번에는 그의 거처에 불이 났다. 폐허가 된 ’불의 신‘의 신전이 불에 의해 붕괴되어간다. 불길은 벽들을 집어삼키며 활활 타오른다. 처음에 그는 살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까 생각한다. 그러다가 곧 생각을 바꾼다. 불길이 자신을 힘든 삶에서 해방시켜줄 거라고. 자신의 노년을 영화롭게 만들어줄 거라고. 그래서 불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신전을 무너뜨린 불은 그를 태우지 않는다. 그는 불 가운데서 무사했다. “불길은 그를 할퀴고 그를 집어삼켰지만 그는 불의 열기를 느끼지도 못했고 타지도 않았다.” 그 순간, 마침내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 역시, 그가 탄생시킨 그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꿈꾸어 태어난 환영이라는 것. 그 역시 불의 신의 도움을 받아 누군가의 꿈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 안도와 치욕과 두려움이 깨달음과 같이한다. 

 

누군가를 꿈꾸는 자는 누군가가 꿈꾼 자이다. 누군가가 꿈꾼 자가 누군가를 꿈꾼다. 작가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위대한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서 태어난다. 작가가 작가를 태어나게 한다. 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들의 자궁이다. 책은 책에서 태어난다. 작가는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읽은 놀라운 책들의,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환영이다. 위대한 작가와 그 작품의 품(즉, 꿈) 속에서 창조된 정신적 존재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작가로 살도록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비록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강렬하고 위대한 독서 경험의 영향력 아래서 힘들게 빚어져 작가가 되는 것이다. 

위대한 책, 보르헤스의 정의를 따라 말하자면 성령이 쓴 책, 혹은 그런 책을 쓴 작가의 불멸에 대한 은유를 읽는다. 불의 힘을 빌려 태어났기 때문에 이 사람은 불에 타지 않았다. 신전에 불이 났을 때 이 꿈꾸는 사람은 처음에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살려고 하다가, 살 만큼 살았으니 그냥 불에 타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하지 않는다. 그는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불은 그를 태우지 않고 그는 죽지 않는다. 그는 죽으려고 하지만 죽지 못한다. 죽으려고 하지만 죽을 수 없다. 죽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운명이 된다.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은 그 작가들의 책을 읽은 사람들, 읽고 쓴 사람들, 즉 그 작가들의 꿈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다. 사라지지 않는다. 불멸한다. 복음서의 예수가 믿는 이들에게 약속한 말과 같이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다.’ 

왜 예수는 그렇게 말했을까. 어떻게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우리의 문맥을 따라 풀어서 말하자면, 환영일 때 가능하다. 신의 도움을 받아 태어난 생명일 때 가능하다. 믿는 자는 신에 의해 태어난 자, 곧 꿈꾸어진 자이다. 꿈꾸는 자가 아니라 꿈속에 있던 자, 꿈속에서 신의 생기를 받아 태어난 자이다. 

이 태어남은 다시 태어남이고, 종교적 용어로 ‘거듭남’이다. ‘거듭나다’라는 단어의 원 뜻은 ‘위로부터 태어나다’이다. 이 두번째 태어남은 그러니까 육(肉)이 아니라 영(靈)에 의한 태어남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불멸하는 비밀이 여기 있다. 그는 부모로부터 피와 살을 받은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꿈꾸는 자의 꿈속에서 불의 신의 생기를 받아 ‘위로부터’ 태어난 환영인 것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