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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힘을 내고 싶을 때는 하라 료의 소설을 읽는다. 그의 소설에는 늘 아래와 같은 후기가 붙는다.


이 책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 단체명, 기업명, 개인 이름, 작품명이 자주 나오지만 소설이기 때문에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 이름을 사용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어떠한 불편도 끼치지 않으려고 주의했지만, 그럼에도 나의 부주의가 드러난다면 책임은 등장인물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 부족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방법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 예를 들어 신문이라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마이아사 신문’ 같은 이름으로 대충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 후기’(『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권일영 옮김, 비채, 2018)에서


이런 후기는 하라 료의 소설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도 필수적으로 붙는다. 필요한 설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읽으면서 세상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하라 료가 말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아무튼 하라 료는 책임은 등장인물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은 누군가는 등장인물 여러분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이야기로도 들렸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 때 등장인물 여러분에게도 나의 책임을 나눠 가지자고 말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면 나도 기꺼이 나의 몫을 받을 것이다. 물론 각오는 없고 준비는 안 되어 있지만, 그런 식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나눠 가져야 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런 이야기는 이번 소설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평소에 소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까 내가 말한 대로 생각해보면 세상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없겠지만) 이것은 그냥 어제 들었던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늘 그런 것으로 소설을 써왔다는 생각도 든다.


월요일에 연재가 진행되는 정지돈 작가의 산문 ‘연재를 시작하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들은 오염시키는 것에는 타고났다. 최근에는 미래라는 단어가 오염됐다. (……) 산책이나 도시와 같은 말도 그렇다.”


내 소설 제목은 ‘미래 산책 연습’인데 그럼 오염+오염인가 생각하다가 그런데 내가 쓰면 오염 아니고 괜찮다는 생각도 했다. 안 괜찮아도 연습은 대체로 많은 것을 이긴다. 늘 그런 식의 착각을 하며 쓰고 있는 것 같다. 착각을 계속하자.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면 산책이고 앞으로의 오늘의 내일의 산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산책이므로 느리고 반복되는 그런데 가끔 뛰어나가는 산책에 함께해주시기를.


2020년 9월

박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