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코의 소망

어느 날부터 냄새를 맡지 못하기 시작했다. 신김치, 낡은 책, 선물받은 허브티, 재래식 화장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사물, 사람, 장소의 냄새를 가려낼 수 없게 됐다. 후각을 어떻게 잃게 된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유학시절 코가 자주 막히고 재채기가 잦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냄새를 아예 맡지 못하게 됐다. 사실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언젠가는 후각이 돌아오리라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십여 년을 냄새 없이 살았다.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첫번째 반응은 “그럼 맛을 아예 못 느껴요?”였다. 사람들은 종종 후각이 맛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달고, 맵고, 짜고, 쓰고, 시고 등의 감각은 후각이 아니라 혀가 담당한다. 식감이란 것도 있다. 쫄깃쫄깃, 바삭바삭, 물컹물컹 등등. 후각을 상실하면서 나는 입안의 감각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맛을 분별해냈다.

친한 친구들과 후각에 관한 몇 번의 작은 실험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술자리에 우연찮게 안동소주와 보드카가 둘 다 있었다. 친구들은 유사한 알코올 도수와 투명도를 지닌 두 술을 분간해보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나는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나의 실패가 진짜인지 의심했다. 설명과 설득 끝에 내 실패의 진정성을 받아들인 그들은 혀를 내두르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와, 어떻게 보드카와 안동소주를 구별 못해? 대단하다.” 

가칭 ‘프렌치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일반 바닐라 아이스크림 구별하기 대회’를 벌이기도 했는데, 나는 당당히 일등을 차지했다. 두 아이스크림은 향이 유사했지만 질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코로 느끼는 감각에 관해서는 무능하지만 혀로 느끼는 감각에 관해서라면 꽤 탁월하다.   

후각 상실이 장애인지에 대해서도 따져보았다. 장애인복지법에 따르면 후각 상실은 장애등급을 부여받지 못한다. 하지만 외상에 의한 후각 상실을 보상하는 보험이 있다.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과 달리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후각은 부속적인 신체기능으로 취급된다. 물론 후각 상실이 야기하는 불편은 분명 존재한다. 남들이라면 뭔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냄새로 알아채겠지만 나는 연기를 눈으로 확인하거나 연기를 흡입해서 코가 맵고 목이 따끔할 때에야 비로소 ‘앗, 뭔가 탄다’라고 생각한다. 이는 매우 심각한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

한번은 꼬리곰탕을 끓이다 타는 냄새를 맡지 못해서 큰 소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솥에 불이 붙고 집안에 연기가 가득차고 연기감지기가 시끄럽게 경고음을 울렸다. 솥에 붙은 불을 끄고 창문을 열자 연기가 뭉게뭉게 집밖으로 쏟아져나갔다. 말 그대로 뼈가 타는 연기와 냄새가 진동했을 터이다. 나는 창밖으로 몸을 빼, “괜찮습니다! 불은 나지 않았습니다! 음식만 탔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멈춘 몇몇 행인들을 안심시켰다. 

후각 상실은 사회적 상호작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상호작용의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귀를 뀌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사태를 통해 점검할 수 있다. ‘아, 냄새 안 난다’라는 안도감도 ‘아, 냄새 좀 심하네’라는 수치심도 불가능한 사태, 내 방귀인데 그 악취의 정도를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사태, 그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혹시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지금 방귀를 뀌었거든요. 냄새가 얼마나 심한가요?”라고 물어봐야 하지만 그렇게 물어본다면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가 아니라 ‘방귀 뀐 놈이 미쳤다’가 되는 사태. 

나는 냄새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서 적지 않은 장애를 겪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상호작용은 대부분 미세하고 비공식적인 뉘앙스를 따르기에 장애 자체를 서로 인식하고 드러내기가 힘들다. 후각 장애를 언제 어떻게 밝혀야 하나? 과연 밝혀야 할 정도의 장애라 할 수 있는가? 사람들과 숲길을 거닐 때, “와, 이 짙은 피톤치드향”이라고 누군가 말하고 다른 이들이 공감할 때, “저는 사실 냄새를 못 맡습니다”라는 말을 그 자리에서 해야 하나? 나중에 뒤풀이 자리에서 해야 하나? 더 나중에 단체 문자나 메일로 공지해야 하나? 아예 하지 말고, “와, 향기 좋다”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띠며 기만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 그것이 기만이라면 어느 정도의 도덕적 결함을 지닌 기만인가? 이런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못 내리고 오랜 기간을 살아왔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상실이 있었다. 그것은 기억에 관한 문제였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을 맡고 과거를 회상하며 행복감에 빠져든다.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라는 글에서 향기가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무의지적 기억”이라 명명한 바 있다. 향기는 동일한 향기와 관련된 과거의 충만한 경험을 불현듯 환기시켜 위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시구절―“사랑받던 봄도 이미 그 향기를 잃었도다!”―을 인용하며 향기를 잃는다는 것은 경험을 상실한다는 것이며, 이는 시간의 연속성이 우리에게 선사했던 행복감의 박탈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에게 경험 상실이란 현대적 삶의 특징을 지칭하는 키워드이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마들렌 향과 보들레르의 봄의 향기는 내게 문화적 상징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였다. 벤야민의 말을 따르자면, 나는 이제 냄새들에 감싸여 가라앉은 과거의 수많은 경험들을 기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험들은 오로지 같은 냄새를 통해서만 환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 허기가 져 아카시아꽃을 따먹은 사실은 기억하지만 꽃의 향이 내 입속에서 번지던 그 순간 내 몸을 관통했던 감각과 생각을 떠올릴 수 없다. 아카시아꽃으로 바삭한 튀김을 해먹든, 쫄깃한 떡을 해먹든, 따뜻한 차를 해먹든 마찬가지다. 그때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분명 뭔가를 상실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애타게 그리운데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다. 나는 절망했다. 후각을 상실했으니 경험에 대한 기억 능력을 상실했고 그리하여 내 삶은 어떤 위안도 허락받지 못하는 지경으로 전락했구나! 

몇 년 전 비염이 점점 심해져 편히 숨쉬기조차 어려워진 나는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사에게 물었다. 후각이 돌아올까요? 의사는 후각세포의 퇴화 정도에 달려 있다면서, 십여 년을 그렇게 살았다면 아무래도 후각 회복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비염 수술을 받고 얼마 후 기적처럼 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후각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맛의 풍성함이 느껴졌다. 심지어 나쁜 냄새도 반가웠다. 만원인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지독한 방귀를 뀌었는데 어떤 사람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십 년 만에 후각을 되찾은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뿌리 깊은 의심병이 도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맡는 냄새가 과거에 맡았던 냄새와 동일한 것일까? 후각은 되찾았지만 과거의 냄새들은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닐까? 세상의 냄새가 바뀌었고 또 나의 후각세포 또한 바뀌지 않았는가? 여전히 자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거울을 보면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의 얼굴이 비치는 영화에서처럼, 냄새에 관한 한 나 또한 더이상 내가 아니지 않을까? 그 십여 년의 기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영구적 상실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더구나 그 십여 년 동안 일어났던 일은 어떠한가? 내가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시절의 경험을 내가 어떻게 냄새를 통해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피어오르던 향불 냄새를 내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일반적인 향불 냄새와 다르지 않더라도 어떤 향불 냄새가 나를 그날의 슬픔 속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시청각적으로 과거에 접근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내가 태어난 집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후각적으로 접근하려 할 때 과거는 내게 단단히 봉인되어 있다. 어떤 냄새가 그 봉인을 해제할 수 있을까? 그 봉인을 해제하면 과연 거기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내가 어떤 생각과 감각에 사로잡혀 불타오르는 존재였던 때, 바로 그 순간 내 몸에 스며든 냄새는 먼 훗날 우연히 내 콧속에 다시금 흘러들어와 과거의 충만한 경험을 되살리는 황금 열쇠가 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과연 있기나 했는지, 바로 그때 내 몸속에 스민 냄새가 무엇이었는지, 있었다 하더라도 그때의 냄새가 지금도 존재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후각을 상실했던 시절보다 후각을 되찾은 지금 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후각을 되찾았지만 냄새 또한 되찾은 건지 알 길이 없다. 지금 맡는 냄새가 도대체 무슨 냄새인지 알지 못한다. 사물을 이루는 재료의 변화, 환경과 공기의 변화가 냄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지 못한다. 그 입자들 중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비율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아니 바로 그러한 불확실성 탓에 구원에의 소망은 더욱 간절해졌다. 나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희미한 메시아적 힘”처럼 과거로부터 어떤 냄새가 잔존하여 내게 다시금 도래하기를, 내게 살아 있음의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줄 수 있는 냄새가 내 콧속을 방문하여 후각세포와 영혼을 동시에 어루만지기를 고대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후각을 다시 상실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매일 코 상태를 체크하고 코 세척을 할 것이다. 코에 관한 한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리라 다짐한다. 다른 건 다 엉망이어도 코는 이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후각세포를 잘 관리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람과 사람이, 사물과 사람이 코로 소통하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다시금 돌아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별빛과 파도 소리도 짙은 향을 풍길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하늘을 향해 코를 씰룩거리는 것만으로 우주가 우리에게 전하는 경이로운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